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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제 '신미이강 갑오문과 기미태각 경진치사' 인장 석제 '신미이강 갑오문과 기미태각 경진치사' 인장

조선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체: 한인전(漢印篆)
사용자: 유척기

인장은 사용자의 신분이나 신용을 나타낸다. 조선왕조의 인장은 국새나 관인 등 국가업무용 인장, 왕과 왕비의 존업성을 상징하던 어보(御寶)를 비롯하여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던 사인(私印)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사인은 인장의 예술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유척기(兪拓基, 1691~1767)는 조선 영조대의 명재상이자 유명한 금석학자로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714년 증광문과에 급제해 검열이 된 후 삼사를 거쳐 1721년에는 왕세제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淸)에 다녀왔다. 이듬해 신임사회 때 탄핵을 받고 홍원헌에 유배되었다. 1725년 노론이 집권한 후 대사간으로 등용되어 호조판서 · 우의정 · 영의정 등을 두루 지냈다. 당대의 명필가이자 금석학의 권위자답게 많은 비문에 글씨를 남겼다. 특히 전서를 잘 썼으며, 스스로 새긴 인장은 명나라의 인풍을 따랐다. 그의 묘 이장 때에 수백 방의 인장이 담긴 철함이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말 금석학의 일인자였던 추사 김정희의 외가이기도 한 기계 유씨 가문은 유척기를 비롯해, 전예(篆隸) 서풍의 대가인 기원 유한지(兪漢芝, 1760~?)와 저암 유한준(兪漢雋, 1732~1811) 등 많은 명서가를 배출했다. 저서로는 《지수재집(知守齋集)》이 있다.

유척기 자신의 주요 이력을 새긴 인장이다. 유척기는 숙종 17년(1691) 신미년에 태어났으며, 숙종 40년(1714) 갑오년에 증광문과에 합격해 관직에 나갔다. 영조 15년(1739) 기미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영조 36년(1760) 경진년 나이 70에 치사[(致仕), 관직에서 물러남]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다.

서체: 한인전(漢印篆)
사용자: 유척기

인장은 사용자의 신분이나 신용을 나타낸다. 조선왕조의 인장은 국새나 관인 등 국가업무용 인장, 왕과 왕비의 존업성을 상징하던 어보(御寶)를 비롯하여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던 사인(私印)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사인은 인장의 예술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유척기(兪拓基, 1691~1767)는 조선 영조대의 명재상이자 유명한 금석학자로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714년 증광문과에 급제해 검열이 된 후 삼사를 거쳐 1721년에는 왕세제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淸)에 다녀왔다. 이듬해 신임사회 때 탄핵을 받고 홍원헌에 유배되었다. 1725년 노론이 집권한 후 대사간으로 등용되어 호조판서 · 우의정 · 영의정 등을 두루 지냈다. 당대의 명필가이자 금석학의 권위자답게 많은 비문에 글씨를 남겼다. 특히 전서를 잘 썼으며, 스스로 새긴 인장은 명나라의 인풍을 따랐다. 그의 묘 이장 때에 수백 방의 인장이 담긴 철함이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말 금석학의 일인자였던 추사 김정희의 외가이기도 한 기계 유씨 가문은 유척기를 비롯해, 전예(篆隸) 서풍의 대가인 기원 유한지(兪漢芝, 1760~?)와 저암 유한준(兪漢雋, 1732~1811) 등 많은 명서가를 배출했다. 저서로는 《지수재집(知守齋集)》이 있다.

유척기 자신의 주요 이력을 새긴 인장이다. 유척기는 숙종 17년(1691) 신미년에 태어났으며, 숙종 40년(1714) 갑오년에 증광문과에 합격해 관직에 나갔다. 영조 15년(1739) 기미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영조 36년(1760) 경진년 나이 70에 치사[(致仕), 관직에서 물러남]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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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제목: 석제 '신미이강 갑오문과 기미태각 경진치사' 인장 석제 '신미이강 갑오문과 기미태각 경진치사' 인장
  • 제작연도: 조선, 조선
  • 권리: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 재료: 조각,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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