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으로 풀어보는 「국립국악원」의 역사적 순간

국립국악원

▶국립음악기관의 전통
우리나라의 국립음악기관은 651년(신라 진덕여왕 5)에 설치된 음성서부터 비롯된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여러 명칭으로 그 전통이 이어지다가 1951년 광복과 함께 국립국악원이 설립되었다. 역대의 음악기관은 음악과 춤과 노래가 한데 어우러지는 악․가․무 종합공연예술을 관장했는데, 1629년(조선 인조 7)의 기록에 의하면 음악기관인 장악원에 속한 연주자가 1,234명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의 장악원은 중앙관아의 예조[고려·조선시대 국가의 정무(政務)를 나누어 맡아보던 여섯 조(曹)가운데 예악·제사·연향·조빙·학교·과거 등을 관장하던 관서]에 소속된 기관으로, 국가의 각종 제사와 연회 그리고 조회와 과거시험, 활쏘기 등의 의례에 필요한 모든 음악과 무용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2015년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국립국악원은 신라 이후 1,400여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어져 내려온 기관으로서, 전통의 계승이라는 면에서도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으며 국가에서 음악기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보기 드문 예이다. 
▶ 왕실의 음악이 국민의 음악으로
고종황제가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선포하면서 조선의 장악원은 교방사로 개칭을 하고 국가의례도 황제의 격에 따르는 규모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본은 교방사를 국가 음악기관이 아닌 멸망한 이씨왕가를 의미하는 ‘이왕직’과 일본에서 궁중음악을 일컫는 용어인 ‘가가쿠[Gagaku, 雅樂]’를 붙여 이왕직아악부로 이름 짓고 그 인원을 57명으로 대폭 축소하였다. 이왕가를 위한 연주를 해오던 이왕직아악부가 일반에 최초로 공개된 것은 1921년 9월의 일이다. 이는 이왕직아악부에 입사한지 61년을 맞이한 아악사장 명완벽의 입사기념 연주회였다. 왕실의 음악이었던 이왕직아악부가 연주하는 음악은 이후 1928년 11월 3일 경성방송국[KBS의 전신]의 중계방송으로 전 국민에게 완전히 공개되었고, 음반으로도 취입되면서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되었다. 이왕직아악부의 활발한 공연과 방송활동을 통해 궁중의 의식에서만 사용되던 왕실의 음악은 오늘날과 같이 감상용 음악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 국립국악원 개원 40주년기념음반: 이왕직아악부의 음악‘영산회상 중 세령산’
○ 제작시기: 1926년
○ 제작사: 빅터레코오드

‣ SP음반으로 1942년 제작한 것을 1991년 국립국악원 개원40주년을 기념하여 신나라레코드사와 CD로 제작한 음반

중광지곡 중 세령산

○ 영친왕 환국환영회 '조선의 정재 공연' 중 ‘무고’
○ 촬영시기/1936.6.29.
○ 출연/이왕직아악부생, 촬영/조선총독부, 장소/창덕궁 인정전

‣ 조선총독부 조선궁중무용기능영화 '조선무악(朝鮮舞樂)' 동영상 필름의 사본으로 1931년 6월 20일 비원 희정당(대조전)에서 시연한 '봉래의, 보상무, 포구락, 무고' 등 정재)를 수록한 동영상자료.

▶ 국가 음악기관, 국립국악원의 탄생
광복이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몰락해버린 왕가에서 아악부를 유지, 관리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아악부의 어려움을 안타깝게 여긴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전신]은 1947년부터 ‘전속조선음악회’를 만들어 매달 정기공연에 아악부원들을 출연시키면서 금전적인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곤란을 떠나서 조선 장악원의 전통을 잇는 아악부의 운영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에, 아악부원들은 ‘아악부 국영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청원은 본회의에서 무사히 통과되었고 1950년 1월 19일 문화교육부 소속 기관으로서 국립국악원 직제가 공포되었다. 국립기관으로 재탄생하는 국립국악원의 개원을 준비하던 그 해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 아악부원들은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가게 되었다. 부산 동광동에 위치한 옛 시립도서관 자리에 있던 목조건물 2층에 자리를 잡았던 부원들은 1951년 4월 10일 전쟁 가운데서도 국립국악원을 개원하였다. 
▶국악을 국민속으로, 본격적인 활동 시작
부산에서 개원한 국립국악원은 1953년 휴전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전에 사용하던 종로구 운니동 98번지의 청사에는 영국부대가 주군하고 있었다. 거처를 정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전전하던 끝에 구왕궁재산관리국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955년 9월에서야 비로서 운니동 청사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청사를 되찾은 국립국악원이 본격적인 공연을 벌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주자가 필요했다. 따라서 1955년 4월에 6년 과정의 ‘국악사양성소’를 개소하여 음악에 소질이 있는 남학생 30명을 선발하였다. 이 학생들은 모두 국비로 교육을 받았으며 교과서와 학용품, 피복 뿐 아니라 매월 300원의 수당을 받는 특수교육 장학생이 되었다. 국악사양성소의 성장과 함께 국립국악원은 국악감상회 등 공연 뿐 아니라 무료 국악강습을 개설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악보급과 대중화에 매진하였다. 이로써 정부의 각종 행사와 기념공연, 그리고 지방공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연과 교육사업을 펼치는 국립국악원의 왕성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 1962.08.07. 11시
○ 지휘/김기수, 연주/국립국악원 회원 일동 및 무용단
○ 연주곡목/수제천, 춘앵전, 평시조 여창지름(김월하)

‣ 국악감상회 개최

○ 1953.03.28. 이화여자대학교 강당

‣ 공연레파토리 확대
(궁중음악, 민속음악 뿐 아니라 창작곡까지 연주됨)

▶ 일본에서 펼친 최초 해외공연
해외로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1964년 3월 국립국악원은 요미우리신문사의 초청으로 일본에서 최초의 해외공연을 개최했다. 당시 국립국악원의 연주단원은 이왕직아악부양성소 뿐 아니라 국악사양성소에서 과거 궁중악사 선발 원칙에 따라 선발·양성된 남자단원들 뿐이었으며, 이에 따라 1955년 무렵까지 공연 출연자는 모두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1964년 일본 공연사진을 살펴보면, 여자 무용수들이 춤을 추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뒷 이야기는 이렇다.1957년 서울중앙방송국이 남산에 준공되면서 국악연구회를 만들어 국악연구생을 모집하여 양성해오다, 1958년 연수생을 선별하여 ‘KBS방송 전속 국악연구생’이라 칭하고 특별 국악교육을 실시한 뒤 이수자를 국악사로 채용하였다. 이 국악사들은 1959년 6월부터 국립국악원이 주최하는 국악감상회에서 함께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국립국악원 악사들과 KBS의 국악사들은 일본 공연도 함께 가게 되었고, 궁중정재를 이들 여자국악사들이 추었던 것이다. 
▶ 완창 공연의 시작, 국악공연의 역사를 새로 쓰다
운니동에 있던 국립국악원이 장충동에 위치한 국립극장 소극장으로 청사를 이전한 다음해인 1968년 9월 30일에 국악계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국립국악원 국악사인 박동진 명창이 국립국악원과 유엔군 사령부방송 공동주최로 열린 제5회 방송의 날 기념 공개녹음방송으로 판소리 <흥보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한 것이다. 이 녹음방송은 이전까지 토막소리[판소리의 전 바탕이 아닌 일부분을 부르는 것]로 혹은 대목으로만 부르는 것으로 여겼던 판소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완전히 뒤집은 획기적인 시도였다. 또한 판소리 무대 사상 최장의 기록이며 세계적으로 처음 있는 일(서울신문 1969년 5월 21일자)로, 완창판소리 공연의 전통과 판소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 VUNC[유엔 군사령부 방송]&국립국악원 공동주최 제5회 방송의 날 기념, 최장시간 공개녹음방송: 제1회 박동진 연창회
○ 일시/1968.09.30.
○ 창/박동진, 고수/한일섭

▶ 완창공연의 시작

제1회 박동진 판소리 연창회: 흥보가 중 놀보 심술~
▶ 정기연주회, 전곡 연주의 전통
국립국악원은 개원 이후 꾸준히 계속되어온 ‘국악감상회’ 공연을 1976년 4월에 개원 25주년 기념연주회부터 ‘전통음악연주회’로 이름을 바꾸고 정기연주회의 성격으로 공연내용을 변화시켰다. 이 정기연주회는 1975년에 처음으로 시도되었던 <관악영산회상>과 <평조회상>의 전곡 연주가 대성공을 거두며 호평을 받은데 힘입어, ‘모음곡 혹은 연곡의 전곡 연주’라는 새로운 연주 전통으로 시작된 것이다. 사실 <영산회상>과 같은 긴 연곡의 기악곡 전곡을 연주하는 것은 그것을 연주하는 연주자에게나 감상하는 청중 모두에게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어, 그동안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공연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전곡 연주회는 이후 정악단과 민속악단 등 국립국악원 연주단과 무용단의 정기연주회 성격으로 자리 잡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 1975.03.28. 국립극장 소극장
○ 집박/이석재·김성진

‣ 표정만방지곡, 영산회상 전곡(모음곡) 연주의 시작

○ 1976.04.12.∼15.
○ 전통음악발표회 등

○ 1979.09.19.∼ 국립극장 소극장

‣ 상설공연의 시작

제1회 중요무형문화재 음악·무용 상설극장 중 김죽파류 가야금산조(가야금/김죽파)
▶ 궁중 공연예술의 복원과 재현
국립국악원은 왕실 의례와 음악을 복원하여 국가브랜드 작품으로 재창조하고 있다. 국립국악원 브랜드 공연 작품인 <세종, 하늘의 소리를 듣다>는 1433년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 악으로써 백성을 화합하는 유교적 이상 정치를 꿈꾸었던 세종 당시의 회례연을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왕조의 꿈, 태평서곡>은 1795년 화성 봉수당에서 진행된 정조의 어머님이자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재현한 궁중연례악이다. 2014년에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1908년 이후 폐지되었던 <사직대제>의 의례와 음악도 복원하였다. 사직은 땅의 신과 곡식의 신을 이르는 말이며, 역사적으로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빌기 위하여 사직단을 쌓아 놓고 제사를 지내왔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국가 제례의 하나인 사직대제의 복원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역대 왕들의 제사인 종묘제례와 함께 조선시대 장악원의 연주 전승을 잇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 2014.12.12 국립국악원 예악당

‣ 18세기 문헌 '사직서의궤'를 바탕으로 악현‧복식‧의식 등을 재현하고, 1928년 SP 음반 수록 아악곡의 속도로 사직제례악을 시연한 공연. 조선후기 종묘와 함께 국가 대사(大祀) 중 하나였던 사직대제를 국악원에서 연주함으로서 국가음악기관 계승의 이미지 부각하고자 함

▶ 오늘의 창작, 내일의 전통
국립국악원은 일찍이 미래의 전통음악이 될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일에도 주력하였다. 예를 들면 작곡가 김기수(제3대 원장; 1973~1977)는 <고향소>를 비롯한 수많은 곡들을 창작하여 발표하였고, 이 음악은 1951년 국립국악원 개원 축하 음악으로도 연주되었다. 이후 1962년부터는 ‘신국악작곡 공모’를 실시하여 새로운 전통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고 여러 악보집도 간행하였다. 또한 공모된 작품들은 ‘신국악창작발표회’를 통해 연주되었다. ‘신국악창작발표회’는 1974년부터 ‘한국음악창작발표회’로 이름을 바꾸어 계속 이루어졌으며, 이 연주회의 전통은 동시대와 호흡하며 창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004년의 창작악단의 창단에까지 이어졌다.1962년 이후 창작된 작품들은 대개 ‘국악이 서양음악을 만나 그 형식을 공유하게 되면서 기존의 음 영역을 벗어나 다른 체계의 구축을 요구’하는 음악들이었다. 새로운 음악의 발굴과 보급으로 자연스럽게 ‘국악기의 개량’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고, 1964년에는 국악기 개량연구회가 개최되었다. 개량국악기전시회를 비롯하여 많은 연구 결과를 남긴 이 연구회는 2006년에 ‘악기연구소’ 개소의 초석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국악기 기초 과학 및 악기 구조, 음향 특성 연구, 악기 개량, 음향 공간 연구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 2014.03.27∼28. 국립국악원 예악당

‣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1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공연으로 창작국악 역사에서 의미 있는 곡들을 선곡하여 창단 10주년을 기념하고자 하였음

○ 2012.11.06.∼07. 국립국악원 예악당

‣ 궁중무용의 현대적 해석
정재(궁중무용)를 새롭게 재구성하여, 각각의 작품이 가지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함

국립국악원[National Gugak Center]
제공: 스토리

○ 글/김경희(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 기획 및 편집/국립국악원 국악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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