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형성과 전개, 천문과 지리  

실학박물관

1. 실학의 형성 
16세기 중엽 이후 서양 문물이 동양으로 진출하면서 한․중․일의 삼국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은 조총의 수입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통일하고, 명나라는 새로운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결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양란으로 국토가 황폐하게 되었고, 국가를 재건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이런 시대 과제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이었다. 조선의 부세는 전세, 공물 및 요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백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된 것은 공물이었다. 이 공물을 전결田結의 부담으로 돌려 단일품목인 쌀로 징수한 것이 대동법大同法이다. 그리고 정부는 인신人身을 대상으로 부과하던 군역도 전결의 부담으로 돌렸는데, 이것이 균역법均役法이다. 대동법과 균역법은 복잡한 과세 대상과 과세 물종을 전결을 대상으로 쌀로 통일함으로써 수취제도의 획기적 개혁이 되었다. 그 결과 백성들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넉넉해지고 이 때문에 정기시인 장시場市를 중심으로 상품경제가 발전하였다. 하지만 당시 학문 세계는 아직도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이기론理氣論이나 사장학詞章學이 아니면 형식적인 예학禮學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러한 학풍에 대한 반성으로 17세기 중반부터 학문의 목적은 인간 생활의 필요에 이바지하는데 있다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실학의 선구이다. 실학 형성의 역사적 배경은 조선 내부에서 추진된 각종 개혁의 전개와 서양으로부터 자연과학의 전래였다. 개혁의 전개는 토지제도 및 군신관계와 같은 제도의 개혁과 상공업의 진흥 및 기술개발을 촉진했고, 자연과학의 전래는 천문학과 지리학의 발전을 자극하여 여기서 실학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실학이라는 학풍의 대두로 이제 학문의 대상은 제도개혁론, 상업진흥론 및 기술개발론, 천문학, 지리학 등으로 서서히 옮아가게 되었다.     

서양문물은 16세기 중엽부터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예수회[Jesuit] 선교사의 일원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중국명 利瑪竇 1652~1610)가 1601년 북경에 정착하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중국에 수입된 서양문물은 연행사 등을 통하여 곧 조선으로 도입되었다. 중국에 수입된 서양문물에 관해서는 1641년에 저술된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류설芝峯類設』에 의하여 조선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조선중기 문신인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명나라에 세 차례나 사행使行 하였는데, 북경에서 동남아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동남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경에서 활동하던 서양선교사들의 종교문화활동을 보면서 서양문화를 이해하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1600년에 지은 「산해여지전도 山海輿地全圖」를 보고 유럽 여러 나라의 사정도 알게 되었다.

『지봉류설芝峯類設』에서는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였고, 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이탈리아 등을 포함한 세계 50여개국의 지리, 기후, 물산, 역사 등을 소개하였는데, 전통적인 경직된 화이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소개하였으며, 불교와 이슬람교에 대하여서도 호의적으로 소개하였다. 중국 이외의 세계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인 인식은 실학의 세계인식에 선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연행사란 사대事大의 실현을 위한 일환으로 청의 수도인 연경燕京[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일컫는다. 연행사는 수백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연경에 도착하면 방물을 바치고 회사품을 받으며, 교역도 하였다. 사행기간은 수개월에 이르렀다. 사행은, 청의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청의 문물을 도입하고, 천주당을 찾아가 서양문물을 도입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조선문화의 발전, 특히 실학의 발생과 발전에 큰 자극이 되었다.

송하한유도는 조선시대 최대 개혁을 이끈 대동법 실시에 있어 중심적인 인물이었던 김육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명나라 화가인 호병胡炳이 그린 것이다.

김육은 네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1636년 명나라에 동지사로, 1643년 심양瀋陽에 원손보양관 元孫輔養官으로, 1645년에 사은부사 謝恩副使로 연경燕京에, 1650년에 진향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이를 통해 조청관계와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하게 되었다.

김육은 개혁적인 정치가로서 대동법과 시헌력에서 보는 바와 같은 개혁구상을 실행에 옮긴 실천가로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저작으로는『잠곡유고潛谷遺稿』를 포함하여 『잠곡별고潛谷別稿』, 『잠곡속고潜谷續稿』, 『유원총보類苑叢寶』 등이 있으며, 『잠곡유고潛谷遺稿』 중 '소차疏箚' 부분은 대동법의 시행과 화폐 유통에 대한 추진 등 경세가로서의 사상과 정책을 담고 있다.

2. 실학의 전개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실학은 학파로 발전했다. 18세기 전반기의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2)을 종장宗匠으로 하는 중농학파(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 18세기 후반기의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1737∼1805)을 중심으로 하는 중상학파(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 19세기 전반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주축으로 하는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가 바로 그것이다. 중농학파(경세치용파)는 국가체제의 개혁을 위한 제도개혁을, 중상학파(이용후생파)는 상업의 진흥 및 기술개발을, 그리고 실사구시파는 학문 방법에서 옛날 기록이나 비석 등의 유물을 증거로 내세우는 실증을 각각 중요시하였다. 실학의 주요 학파는 조선 사회의 개혁을 지향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목표는 현실 생활과 밀접한 학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서 종래 중국 중심의 학풍을 버리고 조선에 대한 연구의 학풍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조선의 언어·역사·지리·산업 등을 연구하는 조선학朝鮮學이다. 비슷한 때에 중국에서는 고증학考證學이, 일본에서는 고학古學이라는 학문이 발전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실학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학문으로, 동아시아가 서양 세력에게 개항된 이후 모두 서구 문화를 수용하는 주체가 되었다.  

성호 이익은 조선후기 실학의 비조鼻祖이면서 동시에 경세치용파의 종주宗主였다. 그는, 18세기 전반기 근기지방인 안산安山에서 활동하였는데, 서울을 통하여 들어오는 서양의 문물을 왕성하게 흡수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당시 집권층의 이념적 도구로 타락한 성리학 및 예학 중심의 주자학과 대립하면서 현실적으로 국가경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역사, 지리, 정치, 경제, 군사 및 학교 등의 현실생활에 쓸모 있는 학문에 관하여 널리 연구하였다.

성호집星湖集 은 부賦‧시‧악부樂府, 서書, 잡서雜著, 기記, 발跋, 논論‧명銘‧잠箴‧찬贊‧송頌, 축문 祝文‧제문祭文, 비碑‧묘표墓表‧묘갈‧묘지명, 행장‧행록‧유사遺事, 전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성호의 악부樂府 와 학문토론의 마당이 된 편지글인 서와 잡서雜著가 주목된다. 유가儒家 경전, 성리설, 예설, 역사, 폐정 개혁 등에 대한 논변들이 다양한 양식으로 실려있다.

그의 학문태도는 근면과 규율을 중시하였으며, 정치의 기본은 민생안정과 백성보호[保民]에 두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경세치용학의 종주인 이익의 생활, 문장, 학문, 사상의 전반적 내용이 담겨 있는 가장 종합적인 문헌이다.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集大成한 학자이다. 16세 때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저술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23세 때에는 이벽李蘗을 통해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28세 이후 관직에 나아가서는 국왕 정조正祖를 도와 실학의 이념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저술한 '정법삼집 政法三集'중의 하나이다. 다산이 강진 유배 18년 째인 1818년에 이 책을 완성하면서, '심서心書'라고 한 뜻은 "목민할 마음은 있었지만 실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목민에 대한 그의 구상과 계획은 15년 동안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가 견문을 넓히고, 스스로 암행어사‧찰방‧부사를 지낸 지방행정의 산체험을 바탕으로 평생동안 생각해온 문제였다. 그래서 이 책은 다산사상의 성격을 그대로 지녔으니, 관官의 입장이 아닌 민民의 편에 서서 관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고발‧탄핵‧경계하였다.

박지원은 조선후기의 이용후생파 실학자이자 한문단편 작가이다. 그는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이용후생파를 주도하면서 당시에 팽배해 있던 북벌론北伐論 및 양반의식 등의 사회적 허위의식을 극복하고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쓸모 있는 학문을 지향 하려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선진적인 문화를 수용하여 조선의 문화를 부흥시키자는 북학론北學論 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용후생학과 북학론이야 말로 당시의 개혁‧개방사상이었던 것이다.

1780년의 연행燕行 경험을 정리해 놓은『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같은 개혁‧개방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하일기』에는 청나라의 문물제도와 사회경제 체제 등이 사행로使行路를 따라서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 중국의 성제城制 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 관련 사항뿐만 아니라,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등도 소개되었다. 아울러 당시 세계정세를 거론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두기도 하였다.

박지원은 조선후기의 이용후생파 실학자이자 한문단편 작가이다. 그는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이용후생파를 주도하면서 당시에 팽배해 있던 북벌론北伐論 및 양반의식 등의 사회적 허위의식을 극복하고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쓸모 있는 학문을 지향 하려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선진적인 문화를 수용하여 조선의 문화를 부흥시키자는 북학론北學論 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용후생학과 북학론이야 말로 당시의 개혁‧개방사상이었던 것이다.

실학은 본래 관념적인 학문을 지양하고 인민들의 실實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지향하였기 때문에, 실학의 전개는 자연히 조선의 역사, 지리, 언어, 정치, 경제 및 문화 등에 관한 연구 즉 조선학으로 발전하였다. 조선학의 전개는 지금까지 중국중심의 학문에 매몰되어 있던 학문을 조선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으로 크게 전환시켰다.

조선학에 관한 연구는 농서연구에서 특히 활발하였다.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는 박세당의 『색경穡經]』, 우하영의 『천일록千一錄』 및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등과 함께 조선농서 시대를 활짝 열었다. 조선후기에 이르게 되면 곡물 경작법 뿐만 아니라 목면木棉 재배법을 포함하여 채소, 식목植木등의 재배법도 정리한 종합농서들이 등장하였다. 종합농서로서의 면모는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가 편찬되면서 확연히 나타난다. 『산림경제』의 등장이후 조선후기 농서들은 이 책을 저본으로 삼고 이를 증보하는 방식으로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말기의 실학자, 과학사상가인 최한기崔漢綺 의 호구와 관련된 기록이다. 최한기는 유교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은 기氣철학을 바탕으로 서양의 자연과학을 받아 들여 운화기運化氣라는 독자적인 이론을 정립하였으며, 서양의 학문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책을 저술하였다. 실학의 어느 계파에도 닿지 않으면서 저술로 과학적 문명사회를 지향한 최한기는 우리 역사 전환기에 '실학과 개화사상의 가교자'로 평가받는다.

최한기崔漢綺의 초기작인 '소모素謨'이다. '소모素謨'는 "일정한 직위가 없는 소인素人의 처지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세상을 경영하는 방안을 설명한다"는 의미이다. 경전經典과 사적史籍을 토대로 역대 치란治亂 을 살펴보고 시의時宜를 파악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방안을 정리하고 있다.

혜강잡고惠崗雜稿 는 최한기의 문집 초고에 해당하는 저술이다. 다산 정약용 등 실학자들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개화사상에 연결시키는 교량적 역할을 했던 그의 생활과 정황을 담아둔 것으로, 최한기 연구에 기초자료중 하나이다. 서序, 기記, 설說, 제문祭文 등이 잡박한 형태로 실려있다.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 박규수는 박지원朴趾源 의 손자로서, 북학北學사상을 계승하여 개화기開化期에 앞서 개국통상론開國通商論을 펼쳤던 인물이다. 그는 박지원이 세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풍을 계승하여 개항開港을 통해 우리나라를 근대국가로 전환시키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약용, 서유구 등 실학의 선배들을 사숙한 그의 학문은, 문인 김윤식이 지적한 바와 같이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 고고考古, 의기儀器, 잡복雜服 등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여 정확하고 실사구시하지 않은 바가 없고, 규모가 광대하고 논리가 미세 정밀한 실학파의 학풍"이었다. '실학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의 전환'이 그의 역사적 위상이다.

상고도회문의례는 박규수의 초기 사상과 학문을 집성한 저술이다. 평소 박규수가 숭모崇慕하여 벗삼고 싶어한 역대 중국의 뛰어난 인물들에 관한 글을 폭 넓게 발췌하고, 그에 의거하여 벗들과 함께 놀이 삼아 의고문擬古文 을 지어보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이 편지는 1872년(고종6년)에 박규수가 진하사進賀使의 정사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 과 함께 연행燕行을 준비하면서 연재淵齋 윤종의尹宗儀 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는 두 번째 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사행으로 박규수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과 개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박규수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듬해에 용강龍岡현령으로 재직하고 있던 1849년(헌종15)에 형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청나라 사신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에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는 시국에 대한 일과 서양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용강현의 위치를 서울과 비교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에 따르면, 용강龍岡은 한양과 비교하여 위도가 2도 높은 39도로 여름과 겨울의 길이가 차이가 있고, 또 연경燕京과 비교하여서는 경도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서양과학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실학과 과학-천문과 지리
서양의 자연과학 지식이 전래되면서 조선의 천문학과 지리학은 크게 발전했다. 변화의 계기는 시간과 공간 등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에 대한 관념의 변화였다. 종래에는 시간과 공간이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이제 이들은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천문학의 발달에서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1653년 시헌력時憲曆의 시행이었다. 시헌력은 태양력의 영향을 받아 새로이 제정된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으로, 24절기를 태양력에 맞추어 확정했다. 계절의 변화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순환에 따른 것이 아니라 태양과 지구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를 밝히기 위해 지구설, 지동설, 공전설 등이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지리학에서는 마테오리치Matteo Ricci(1552~1610)가 만든 〈곤여만국전도〉가 전해지면서 공간에 대한 관념이 크게 변했다. 이제 더 이상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각 나라 사람들이 생활하는 독자적인 공간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우리나라 지도는 정상기의 백리척百里尺과 방안식方眼式 지도 제작방법을 도입하여 실측을 기본으로 작성되었다. 그 결과 1861년 종래의 지도제작법을 집대성하여 제작된 김정호金正浩(?~1864)의 〈대동여지도〉는 근대 지도에 가까운 정확성을 가지게 되었다.

별의 위치와 시간, 경도와 위도를 관측하는 휴대용 천문기구이다. 주로 아라비아에서 제작되었다.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들과 교류한 실학자로 기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유금柳琴 (1741~1788)이 제작하였다.

앞면 위쪽 고리 부분에 ‘유씨금柳氏琴’이라는 인장印章과 함께 1787년에 약암約菴 윤선생尹先生(이름 미상)을 위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북극출지38도 건륭정미 위약암윤선생제 北極出地三十八度 乾隆丁未爲約菴尹先生製"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서 제작된 천문의기로는 각종 신법천문도와 더불어 간평의, 평혼의, 적도의 등의 관측기기가 있다. 그 중 평혼의는 박규수朴珪壽(1807~1877)가 평면의 원에 별자리를 표시한 것이다. 평혼의에는 남반구와 북반구의 별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별자리의 위치를 통해 시간과 계절을 측정해 볼 수 있는 도구이다.

박규수가 만든 평혼의는 겉에 "평혼의 헌당수제 간평의 소본부平渾儀獻堂手製簡平儀小本附"라 쓰여진 종이케이스 안에 들어 있다.

평혼의는 판지로 만들어진 지름 34cm의 원반이다. 북반구의 하늘을 표시한 북면과, 남반구의 하늘을 표시한 남면의 양면으로 되어 있다. 각 면은 양극이 원심이 되고 적도가 원주로 된다. 또한 남북 양면은 각각 상하 2개의 원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하반은 회전하도록 되어 있으며, 반면에 경도∙위도 및 황도가 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북면의 하반에는 북반구의 별들(6등급 이상 총성)이, 남면의 하반에는 남반구의 별들(6등급 이상 총성)이 표시되어 있다.

평혼의는 판지로 만들어진 지름 34cm의 원반이다. 북반구의 하늘을 표시한 북면과, 남반구의 하늘을 표시한 남면의 양면으로 되어 있다. 각 면은 양극이 원심이 되고 적도가 원주로 된다. 또한 남북 양면은 각각 상하 2개의 원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하반은 회전하도록 되어 있으며, 반면에 경도∙위도 및 황도가 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북면의 하반에는 북반구의 별들(6등급 이상 총성)이, 남면의 하반에는 남반구의 별들(6등급 이상 총성)이 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중국의 음력을 습용襲用해왔다. 중국의 음력은 달의 영휴盈虧 및 계절의 순환이 1개월과 1년을 주기로 매우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사실을 기초로 편성된 것인데, 이것이 고대로부터 동양에서 널리 사용되어온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 이다. 이 음력은 왕조의 교체나 외부로부터 영향으로 자주 개정되다가, 17세기 초 이래로 도입되기 시작한 양력의 영향을 받아 『시헌력時憲曆』으로 크게 수정되었다.

시헌력은 명나라 말기에 아담 샬Adam Shall(중국명湯若望 ,1591~1666) 등의 예수회 선교사들과 서광계徐光啓(1562~1633) 등의 중국 관리들에 의하여 편찬된 방대한 『숭정역서崇禎曆書』에 기초하여 제정된 것인데, 종래의 태음태양력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24절기와 일식 및 월식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도록 재편된 것이다. 이 『시헌력』은 명청明淸간의 왕조교체로 1645년에 중국에서 시행되었는데, 1653년부터 조선에서도 시행되게 되었다. 『시헌력』이 조선에서 시행되게 된 것은 1646년에 김육金堉이 사은부사로 북경으로 가면서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그것을 배워오게 함으로써 가능했다.

시헌력은 지구설地球說에 기초한 서양의 우주론,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 티코브라헤 등의 행성운동이론, 구면球面 삼각법을 비롯한 서양 기하학, 그리고 상한의, 기한의, 호시의, 망원경 등을 비롯한 새로운 관측기구와 관측기법들이 적용된 새로운 역법체계였다.

전통적으로 지리는 정치적‧군사적 및 생활상의 공간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지도가 작성되어 오기는 했으나, 지리에 대한 정치‧윤리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지도제작의 기법이 발달하지 못하여 지도들이 실상과는 크게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17세기 초 이후 서양식 지도와 자연과학이 전래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지리학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곤여만국전도>는 중국에서 제작되어 조선으로 도입된 세계지도 중 하나로, 1602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인 이지조와 함께 제작하였으며 1603년에 조선에 전래되었고, 이후 1708년 8월과 9월에 왕명으로 모사되었다. 실학박물관의 <신곤여만국전도>는 1708년 9월에 제작되어 남양주 봉선사에 소장되어 있다가 한국 전쟁 때 소실된 <곤여만국전도>를 2011년 원형 크기로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총 8폭의 병풍 중 제2∼제7폭은 세계지도이고, 제1폭에는 마테오 리치의 서문, 마지막 폭에는 영의정이자 관상감을 맡았던 최석정의 발문이 있다.

실학박물관
제공: 스토리

기획 총괄
1대 관장 안병직
2대 관장 김시업
3대 관장 장덕호

자문
김태영, 송재소, 정창렬

운영
김성환, 조준호, 김형섭, 정성희, 원재린, 황원기, 채치용, 김효기, 장문철, 곽창호, 정춘옥, 황연정

행정지원
박영휘, 서은경, 강병현, 이호선, 최원영, 정진호

프로젝트 지원
김태용, 최서연, 김영대, 이학성, 박소현, 성형모, 김호균, 김경민, 조수진

참여: 모든 표현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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