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7. - 2016. 9. 18.

G-Live : Fabien & Taeyoung

경기도미술관

G-Live : Fabien & Taeyoung
21세기 현대미술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마저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규정하고 있다. 적어도 20세기 미술은 완결된 작품을 관람객에게 던지듯 이루어졌으며, 우리들 역시 그 광경에 익숙해 있던 것도 사실이다. 1960-70년대 이러한 제한된 방식의 미술 전달방식에 반하여 이루어진 ‘탈(脫) 미술 공간’에 대한 논지가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지배적인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공포에서 비롯된 절대불변의 정의에 도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이러한 논지는 작가의 작품이 완결된 완성작품을 봐야만 하는 이상야릇한 괴리감보다는 ‘미술관’이라는 특정 공간에 국한된 성문법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결속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묘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벗어나서 ‘인간이 그 가장 고상한 모습을 과시하는 곳’으로서의 미술관이 미술의 신전 또는 성전으로 비유되어 온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작품으로부터 그 구체성과 현장성을 제거하여 일종의 메타-시간이 적용되는 추상적인 공간에 진열하는 미술관의 방식이야 말로 ‘한정된’예술성을 제시하기 적합한 공간으로 규정되어진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대미술은 이러한 규정된 시각으로 해석하기에는 그 한계성에 직면하였으며, 더 확장된 사고와 시선이 필요한 때이다. 현재의 미술은 공간, 적용, 대상, 범위, 장르, 개념 등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확장성을 통해 증식하고 있으며, 지금 현재에도 진화하고 있다.

경기도미술관의 ‘G-Live : Fabien & Taeyoung’전은 현대미술의 다양한 관점을 전시장 내부로 유도하였으며, 작가와 관람객이 함께 공유하는 전시공간으로 확장을 시도하려한다. 전시장의 작품은 완결되어야 한다. 선입견에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작가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 작품에서 드러나는 대중의 메시지가 어떠한 것인지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의 파비엥 베르쉐르(Fabien Verschaere)과 한국의 장태영의 라이브(live) 전시를 구성하였다. 다소 생소한 라이브(live)방식은 20세기 미술에서 종종 사용되었던 방식이다. 특히나 전시장에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빈번하게 행해졌고, 다양한 방식의 매체를 통해 전달되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파비엥의 작업은 마치 일기를 쓰듯 연속적으로 그림을 그려나가고, 이를 ‘자동페인팅(automatic painting)’이라 말한다. 장태영 작가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며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는 작업으로 ‘일상을 축척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두 작가 모두 반복적이고 연속적이며, 동시에 무의식을 화면에 담아내는 행위가 작품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지점이다. 작가가 말하는 예술은 보편적인 일상을 벗어나 거대한 억눌림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자연스러움인 동시에 한 사람으로써 스스로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우리는 언제인가부터 예술의 거대한 억눌림에 자연스러운 생각을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파비엥의 작품은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성(reality)을 전제로 자리 잡고 있다. 작가의 어릴 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현재 자신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한 이야기들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파비엥의 이미지는 어디선가 본 익숙한 이미지들로 나열되어 보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들이며, 현실에 존재한다고 해도 부정적인 상징들의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작가는 ‘죽음’이라는 큰 물음에 끊임없이 묻고, 그리고, 지우고, 채우고 있다. 파비엥의 현실(저신장 장애_short stature)에서는 일반인보다 ‘죽음’에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장태영 작품의 화면 안에는 익숙해 보이는 자연풍경이 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품에 한 걸음씩 다가설수록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패턴들과 작가만의 규칙으로 만들어진 ‘화점’들이 무수히 자리 잡고 있다. 현실성(reality)으로 출발하지만, 비현실적(unreality)인 가상공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무수하게 반복되는 패턴은 화면을 가득 채우며, 전체의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작가는 ‘화면을 지우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풍경, 혹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만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다. 즉, 익숙함을 지우고, 지운다면 더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한 것이다.

이번 “G-Live : Fabien & Taeyoung”전시는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관람객에게 노출하며, 또 다른 형태의 현대미술영역을 소개하는 전시가 될 것이다. 1960년대 간헐적인 시도들로 평가되는 ‘진행형 전시’와도 유사한 면을 갖지만, 온전하게 관람객과 작가가 한 공간에서 서로의 숨결을 느끼는 방식은 생소한 일일 것이다. 2014년 “거리의 미술_그래피티 아트”전시를 통해서 그려지는 행위와 제도권 밖의 미술, 거리에서 행해지는 자유로운 미술이라는 실험은 예술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전시였지만, 이 역시 완결된 형태로 작품을 소개하고 그래피티 특유의 스프레이 향기만으로 제작과정의 느낌을 전달해주었을 뿐이다. 이번 전시공간이 관람객의 입장에서 미완성된 작품을 마주하고, 동시에 작가가 작품을 그려나가는 그 행위를 적나라하게 봐야하는 것이 미술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당연한 전시의 패러다임이 변화되는 움직임을 담아 낼 수만 있다면 즐거운 시도가 될 것이다.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은 종종 전시된 작품의 숫자에 압도당해, 그들 중 겨우 몇몇 작품만 주의를 집중해서 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한계에 놀라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현대미술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적절한 현실성이나 대안보다는 작가주관적인 시선을 불친절하게 제시하는 경향이 많았다. 또한 제시된 작품의 다양성은 관람객의 수용한계를 무너뜨리는 요소이며, 작가 주의적 작품은 제작과정이나 작품의도를 모르고는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다.

작가가 작품을 그려나가는 행위 자체는 완성된 작품을 마주하는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품이라는 것, 완성되어진 것은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의 입장에서 단편적인 이야기만을 전달하는 불편함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작가가 관람객을 만나는 전시장 안에서 그려나가는 행위 자체가 작품을 더 완성되어지게 하는 양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그려나가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관람객이 보는 작품과 작품설명보다 관람객과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는 전시로 진행된다. 단순히 어떻게 그리는 것, 무엇으로 그리는 것을 넘어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감성과 태도에 주목할 수 있는 장치가 될 것이다. 라이브 페인팅(live-painting)은 작가가 보여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직접적인 경험의 공감인 동시에 전시장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또 다른 경험이 된다.

앙드레 말로(A. Malraux)의 ‘벽 없는 미술관(Museum without Walls)’은 20세기 현대미술의 단편적 미술관의 형태를 문제 삼았으며, 제한된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전시된 완성작품들 역시 일방적인 소통을 강요하는 형태의 예술이라고 지칭하였다. ‘예술’이라는 것이 규정된 것만으로 이해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특히나 예술을 가공하고 만들고, 제시하는 작가의 작품 안에 무엇을 잊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G-Live : Fabien & Taeyoung’ 전시의 구성에서도 작가들의 작품을 완성된 형태로 전시하는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되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제한된 공간과 제시된 명제에 의해서만 작품을 대면하는 것과는 다르게 유동적이고, 능동적인 전시장에 다다를 것이다. 이번 경기도미술관의 ‘G-Live’전시는 현대미술이 “살아있는”, “살아가는”,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전시가 될 것이며, 경기도미술관이 20년을 준비하는 새로운 확장과 실험이 될 것이다.

최기영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

베르쉐르적 신화의 탄생
아름다움과 추함, 경이로움과 기괴, 환상과 현실. 인류가 태고로부터 가지는 이원적 세계관은 파비앙 베르쉐르의 작업의 근원적인 주제이다. 파비앙 베르쉐르는 1975년 파리 동부외곽 뱅센느 숲에서 태어난다. 저 유명한 철가면과 사드 후작이 감금되었던 뱅센느 성이 있는 그 곳에서 그는 유년시절 이유를 알 수 없는 질환으로 오랜 시간을 집과 병원에서 보내게 된다. 만화책과 그림그리기는 힘들고 무료한 치료기간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오락이며 수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는 그의 병은 유전적인 질환, 즉 불치의 병이며, 그는 더 이상 다른 이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죽음이라는 절대절명 앞의 유한한 삶. 그리고 유년기과 청년기 사이 어딘가에서 멈추어 버린, 어른도 소년도 아닌 가혹한 천형. 베르쉐르적 신화는 이렇게 탄생한다. 삶과 죽음의 판결을 기다리는 ‘시간 때우기용’이었던 그림은 운명의 판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나는 병원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림은 병의 진단을 위해 검사하는 ‘시간 때우기용’ 이었다. 병원에서 우리는 언제나 판결을 기다린다. 그림은 우리 자신의 내면의 검사다. 그림은 또한 진단이다. 관람자는 (그것을 보며) 치료되었음을 확인한다."

어쩌면 인류 역사의 모든 예술 활동은 세상과 자아와의 이질감에서 오는 타자(他者)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정도의 차이일 뿐 세상과 격리되는 나를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임으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 가령 묘한 소외감이나 거절감, 거부감, 두려움, 서운함 등이 그것이다. 타자(他者)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은 간혹 극단적인 표현으로 치닫기도 한다.

"칼, 살인자는 내 작업의 오래된 요소들이다. 범죄적인 심리를 작품화 한다는 것... 중요한 것은 죽음을 통해서 생을 이해하는 것이다. The murder of Father Christmas (산타할아버지 죽이기 - 어린이 동화, Pierre Very, 2008)"

오토 뮈엘과의 만남
모든 신화가 그렇듯이 베르쉐르의 신화에서 삶과 죽음, 이승과 그 너머의 세계들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낭뜨의 미술학교에서 오토 뮈엘과의 만남은 파비앙 베르쉐르의 인생에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비엔나 행동주의 작가인 오토 뮈엘과의 콜라보레이션 퍼포먼스에서 파비앙은 자신의 신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해프닝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파비앙에게 비엔나 행동주의정신에 의한 일종의 세례와도 같았다.

...여기에는 오로지 두 가지 주제에 관한 토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편도 아니다. 나는 마치 하나의 사건처럼 그 사이에 존재한다. 그것이 내 작업의 원동력이다...

베르쉐르의 세계
베르쉐르 작품에 나오는 수많은 아이콘들은 죽음, 소녀, 인어, 새, 별, 천사, 성, 공주 등의 보편적인 상징과 함께 컴퓨터, 헬멧, 헤드폰, 비행기, 주사기, 카드 등 현대사회의 것들까지 매우 다양하다. 작가는 이것을 검정 마카 혹은 붓으로 마치 꿈 일기를 쓰듯이 단숨에 그려내는데 이것을 작가자신은 ‘무언가를 그리겠다는 플롯 없이 순간적으로 창조되는 이야기와 캐릭터를 캡처하기 위한 자동페인팅 automatic painting'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파비앙 베르쉐르의 캐릭터들은 정글속의 얼굴 없는 동물들처럼 그저 자신의 시간을 부유하며 떠돈다. 어떤 형식의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갖지도 않는다. 그저 작가가 작업하는 그 순간 그의 곁을 떠돌다가 사라진다. 또한 베르쉐르의 화면은 삶과 죽음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적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히에로니무스의 작품처럼 공포적인 화면이 아니다. 붓의 질감이나 텍스트를 생략하는 매우 평면적인 작업은 태국의 그림자 연극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의 환상을 찾도록 한다. 또한 전 생애에 걸친 다양한 문명의 경험, 신화와 전설들이 파비앙 베르쉐르의 자양분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심취한 한국의 불교예술과 꼭두인형(상여위에 놓이는 인형)은 최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중요한 캐릭터 중의 하나이다. 미술사적인 통시로 보자면 2차 대전이후 프랑스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미술 운동인 'Figurative painting'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회화 본연의 욕구로 가득찬 콩바스의 캔버스가 인류의 원초성에서 그 주제를 찾는다면 파비앙 베르쉐르는 팝 컬쳐, 어린이 동화, 아프리카의 신화와 한국의 불교까지 작가의 인생에서 만나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경기미술관의 <g-live : fabien & taeyoung> 전에서 파비앙 베르쉐르는 특히 지난 수년 간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만난 한국문화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특히 한국의 민속신앙과 절에서 보이는 호랑이와 노인, 그리고 상여에 쓰이는 꼭두 인형에서 영감을 받은 다양한 캐릭터들을 찾아보는 즐거움을 관람객과 함께 가지고 싶다. 우리 스스로도 잊어버린 우리들의 설화와 전설에서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파비앙 베르쉐르. 작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의 고뇌의 결과물을 보며 그가 치료되었음을 판결내릴 수 있을까? 몇 년 전 방한한 작가와 인연이 닿은 해인사 주지스님 향적 스님은 파비앙 베르쉐르를 ‘무당’같은 존재라고 하셨다. 모든 작가는 어떤 의미로는 관람자와 예술적 구원이라는 존재 사이에 있는 ‘무당’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예술에서 어떤 구원을 기다리며, 찾을 수가 있는가?

이지원
독립 큐레이터

‘결(Gyul)'이 ’운(韻, Picturesqueness)‘ 을 이끌어 내길 기대하며.
“인간의 망막(시선)에 맺힌 시각정보는 관찰대상의 본질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화가가 시각정보에 충실히 반응하여 얻은 결과물을 과연 재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 화가가 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작게는 표현대상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크게는 자연(우주)과 신의 섭리(理)에 대한 견해를 생각하고 풀어내는 행위라 하겠다. 이것이 화가가 눈에 의해 수집된 시각정보를 재구성 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으며, 화가는 사유체계 혹은 자연 철학과의 접점을 모색하려는 행위에 그 정당성을 부여 하게 한다. 그러나 시각정보를 떠나 그림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 화가의 역할은 시각을 통해 얻은 정보를 해석하여 어떤 규칙과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 작품이라는 완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태영 작가의 작품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장태영의 작품세계는 ‘운(韻, picturesqueness)’을 통해 표현대상을 해석하고 재구성해 내는 과정 속에서 탄생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운이 전통 산수화의 풍경을 재현하는 것하고는 다르다는 점이다.

산, 바위, 나무, 물, 구름 등 화면에 등장하는 각각의 소재간의 조화로운 구성을 통해 ‘운’을 이끌어 내는 전통 산수화와 달리 그는 화면전체를 아우르는 일종의 규칙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운’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산, 바위, 나무, 물, 구름 등 각기 다른 물성을 지닌 경물들이 작가가 화면에 부여한 ‘운’의 특성에 따라 새로이 조정되는 형식이라 하겠다. 이는 그의 눈길이 시각현상의 충실한 재현을 넘어선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수면에 비친 산봉우리를 표현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조금 더 명확해 진다.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그림자를 통해 실체에 접근 할 수 있을 뿐이며, 눈에 맺힌 시각 정보라는 것도 실체의 그림자 일뿐이란 암시이다. 다시 말해 그가 표현대상을 통해 무엇을 보았고, 작가의 경험을 통해 표현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 이해의 결과를 타인과 공유하는 방법을 어떻게 찾아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장태영은 이 부분에 대해 『악기(樂記)]. [악론(樂論)]의 ‘중화지미(中和之美)’를 인용하며, 자연과 작가의 뜻이 융화되는 균형점을 ‘결(gyul)' 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일이다.

화면을 지배하는 하나의 규칙을 ‘결’ 이라 하고 그것에 의해 화면 속 모든 경물이 해석된다는 것은 자연(우주_理)을 ‘결’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언급하고 있는 ‘결’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그는 ‘결’을 물결(洯), 병행(竝), 이어짐(聯)의 의미와 연결시켜 시각화 하고 있다. 이것이 그림이 짧은 필획의 연속성에서 표현되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의미 없는 필획의 흐름 속에서 어떤 형태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세계라면 작가가보는 대상은 일정한 규칙 속에서 재탄생된 ‘또 다른 자연’이 된다. 이는 동양의 음양사상을 통해 설명 할 수 있으니, 근원을 따지면 전통산수화와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는 역(逆)으로 그의 작업이 전통이라는 유산과 굴레 속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며, 또한 그의 독창성이 전통이란 큰 강물에 휩쓸릴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소위 ‘결’ 이라는 것이 아직은 조형적 표현 방식에 머물러 있을 뿐 자연(우주_理)에 대한 이해의 결과이다. 또 다른 의미로 작가가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염원의 흔적이 선명하지 않기에 그 결과 보는 이의 시선이 호기심에 머물러 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그가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그 만의 눈을 얻었으나, 아직 그 눈을 통해 본 자연(우주_理)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표현으로 이끌어 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시각으로 우주를 바라보면 이렇게 보인다.’ 는 점을 설득할 수 있다 하여도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보아야 하는 지 설득할 수 없다면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통해 감동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예술을 통해 어떠한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작가가 형성한 세계로 진입하는 초기 단계이다. 장태영 작가가 만들어 놓은 ‘결’과 ‘운’을 통해 자연의 이상적 세계도 좋고, 관람자의 개인적인 풍경, 상상, 쉽게 지나치는 이미지, 불완전한 세계, 텍스트에 강요된 세계라든지 그 어떤 것도 작가와 함께 공감하는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우리는 그 상상만으로 즐거운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성현
미술학 박사

경기도미술관
제공: 스토리

주최 :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주관 : 경기도미술관, 안산시
후원 : 한국메세나협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삼화페인트, NCOM
참여작가 : 파비앙 베르쉐르, 장태영

참여: 모든 표현 수단
일부 스토리는 독립적인 제3자가 작성한 것으로 아래의 콘텐츠 제공 기관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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