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3. - 2016. 11. 30.

[Project 1] an/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

부산비엔날레

Project 1은 한·중·일 3개국, 5명의 큐레이터들에 의해 ‘an/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라는 주제로 부산시립미술관에서 60~80년대의 한국, 중국, 일본의 자생적 실험미술인 아방가르드를 조망하는 전시입니다.
‘an/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에서 ‘an’은 아방가르드의 전위 정신은 하나일 수 있다는 의미이며, ‘other’는 전위정신은 하나일 수 있으나, 한·중·일 3개국의 예술이 당시에 처한 상황과 형식은 저마다 다름을 의미합니다. 또한 한·중·일 3개국이 아시아를 대표할 수는 있지만 아시아 전체를 포함한다고 할 수 없기에 알파벳 순에 따라 ‘china-japan-korea’로 표기한 것입니다.

중국
본 전시는 중국현대미술의 태동이라 불리는 1976년부터 1989년 천안문사태를 기점으로 그 전후에 활동한 1세대 작가들, 그 후부터 1996년의 원명원 사태까지 활동한 60년대 전후 출생한 2세대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예술적 실천이 잘 드러나있는 작품들을 통해 중국 현대미술의 태동과 변화를 돌아보고자 한다.

차이구어치앙은 1994년부터 화약을 사용해서 작품을 해오고 있다. 그는 일본에 거주했던 1986년부터 1995년 사이 화약사용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였으며 폭발의 규모를 확대하고 야외에서의 화약 폭발을 계획하였다. 「외계인 프로젝트 10: 만리장성 일 만 미터 늘리기」는 성벽을 쌓기 위해 필요한 물리적 인력와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시리즈 연구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백여명의 관광객과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만리장성 최서단 쟈위관에서 출발하여 고비사막까지 만 미터 길이의 도화선과 화약을 봉화대마다 설치하였다. 황혼무렵 그가 불을 지피자 불꽃을 하늘을 나르는 용처럼 지평선을 뚫고 구불구불 올라 눈 덮인 산속으로 사라졌다. 자원봉사자들의 협력으로 완성된 이 폭발 프로젝트는 15분간 계속되었으며 그 길이가 만미터에 달했다. 차이구어치앙은 화약폭발 프로젝트, 회화, 설치, 영상, 공연예술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의 작품은 동양철학과 현대사회의 문제를 모티브로 삼고 있으며 각각의 지역에 맞게 작품제작의 방안을 마련하고 현지 문화, 역사, 사회, 자연 그리고 우주와의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차이구어치앙

딩팡의 비극적 이미지는 85미술운동 중 <이성회화>파의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 사생과 다르게 그의 풍경화는 황토고원과 서북의 황야를 모티브로 삼아 일종의 종교적 고뇌와 비극적 정신을 표현한다. 「도시: 외로운 넋이 만나는 곳」은 작가가 황하 양안과 고비사막에 펼쳐져 있는 무수한 오래된 성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작가의 눈에 이들 고성은 역사적 기억을 잇고 소통하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페인팅의 전체적인 구조와 그려진 사물들은 엄숙하고 견고하며 격동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고성 주변에는 마치 역사의 안개 속 깊이 숨겨진 고난이 응집되어 있고 작품 한켠에 그려진 아득히 먼 곳에서 반짝이는 듯한 신비로운 빛은 새로운 변화가 반드시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딩팡은 영웅주의적 감정과 비극적 의식을 그림에 담아 이를 통해 21세기 전세계적으로 팽배한 공업화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딩팡

중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딩이는 80년대 중반부터 서술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추상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의 대표적인 <십시>시리즈는 1988년부터 시작되는데, 당시 딩이는 모든 사실을 여과시켜 회화의 본질적 형식과 정신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했다. 그는 한자의 열십자(十) 와 여기서 변형된 ‘X’라는 무의미한 형식부호를 기본구조로 삼는다. 이성의 상징과 사물의 본질적 이미지의 대명사로서의 <십시>는 우리가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헝겊이나 나무판위에 빼곡히 그려지고 이를 통해 우리는 평면 위 얕은 공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질서정연하게 나열된 화면위의 터치는 경험의 관성적 의미를 억제하고, 반복되는 선들이 이루는 형상은 제한된 화면위 공간에서 더욱 풍부한 임의성을 만들어낸다. 연도별로 작품제목을 붙이는 <십시>는 간접적으로 사회주의의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공업의 발전이 변화시킨 도시환경의 상태를 보여준다.

딩이

1980년대 중반이후의 중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개척적인 예술가로 손꼽히는 겅지엔이는 중국 전위예술의 주요 시류인 <85신공간>의 전시기획자이자 <못>의 구성원이다. 겅지엔이는 ‘뉴 캐릭터’라 불리는 실험적 이젤 페인팅을 시도하였다. 간략하면서도 신중한 색채를 사용하여 화면을 가득 채운 초상은 반복효과를 통해 일상의 이미지를 담아낸다. 겅지엔이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세심하게 화면에 그려내고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찾도록 유도한다.
‘너 안의 나, 내 안의 너”라는 중국속담에서 착안한 <빛의 교환>은 주변 사람들의 신분증 사진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그는 주변인의 사진을 갈기갈기 찢은 뒤 섞어모아 하나의 화면에 붙여 하나의 인물을 만들어내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더 이상 구체적인 어느 특정인이 아닌 개성을 상실한 하나의 전체가 된다. 또 다른 작품「팬더」는 마오쩌둥시대의 대표적 색상과 문양을 배경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팬더’를 중앙에 위치시켜 혁명시대의 인식 속 ‘붉은 빛’이 상징하는 우상숭배와 장엄함을 뒤엎는다.

겅지엔이

1980년대 시작된 중국전위미술의 개척자 가운데 하나인 구더신은 예술가로서의 신분에 의구심을 가지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탐구하는 ‘관계의 미학’을 작업으로 표현한다. 그는 관람객의 참여로 예술적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구더신이 초기에 내놓은 작품은 회화, 수채화, 자수 등으로 ‘인류’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생태계 속의 꿈과 디스토피아적인 측면을 동시에 표현했다. 시리즈는 화려한 컬러로 표현한 초현실적인 작품이다. 작은 사람과 같은 개구리, 구름 속인지 숲 속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내민 사람의 머리, 그리고 서툰 선들로 그려낸 자수 속 기괴한 동물 등 환상 속 세상은 이후 구더신의 조각과 설치, 애니매이션으로 이어지게 되는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1989년 구더신은 프랑스 퐁피두센터에서 개최된 ‘대지마술사’전시에 참여하며 중국현대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첫 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처한 미술계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2009년 창작을 그만두었다

구더신

자국 문화와 서양 문화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과 예술실험을 지속해오고 있는 구원다는 실험 수묵의 초석을 다진 작가로 대표된다. 1980년대 초부터 중국수묵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탐구하며 고전문화의 정신과 상징들을 초현실주의적 표현과 같은 서양의 기법과 결합한다. 이를 통해 구원다는 문화를 뒤짚어보고 한자와 그가 상징처럼 보여주는 전통적 구도에 대해 비판을 한다.
「두 문화 교배의 희극성」은 파괴에 대한 욕망과 회의주의적 느낌이 가득하다. 수묵화의 선 그리기, 얼룩지기, 발묵과 파묵 등 기법으로 인간의 얼굴이나 장기를 토템부호처럼 각종 도식으로 그린다. 그가 말하는 ‘두 문화’는 ‘전통 인문 문화와 문화혁명시기의 ‘정치문화’를 뜻하며 화면에 그려진 빨간 동그라미와 엑스 표시, 화살표로 인해 그림은 더욱 강렬한 시각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1987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 그의 작품은 사람의 본질로부터 출발하여 전세계적인 문제를 향해 도전하는 설치와 퍼포먼스로 확대되었다.

구원다

황루이는 <성성미전>과 <성성화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창립멤버로 초기 그의 작품은 유럽스타일의 회화가 주를 이루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간결함을 담고 있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담겨있는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작품은 황루이의 신념을 알리는 목소리로 자유표현의 의지와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아름다우면서도 황량한 풍경으로부터 중국문화의 정신적 폐허를 표현한 <원명원>연작과 직접 경험한 ‘베이징 시단 민주의 벽 사건’을 토대로 그린 <벽>은 시대적 배경을 작품의 주제로 삼고 저항의 목소리를 화면위에 드러낸 성공적인 작품이다. <기타소리 이야기>, <산소-1> 그리고 제2회 성성미전(1980)에 참여했던 <책 읽는 사람>은 유럽 야수파와 입체파의 영향을 새롭게 해석한 실험적 작품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보여준다. 10년간의 일본생활 후 베이징으로 돌아온 황루이는 작가로 활동하며 칠구팔 예술특구의 설립과 발전을 이끌었다.

황루이

황용핑은 <샤먼다다>’의 설립자이자 주창자로 중국 현대미술 조류 중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다. 황용핑은 각종 전통과 매체를 융합하고 기존 역사와 미학 관념을 끊임없이 뒤집는 설치미술을 통해 중국문화와 서양문화간의 관계, 사람과 동물간의 관계를 탐색하고, 국경이나 사상의 충돌을 초월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그의 작품은 요셉보이스, 아르떼포베라, 존케이지 등과 맥을 같이 하는 동시에 중국의 전통예술과 철학도 함께 담겨져 있다. 「수염은 가장 태우기 쉽다」는 다다이즘식의 은유화법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황용핑은 다빈치의 자화상을 불태우는 영상과 사진을 촬영했다. 탄 것은 물질이고 남은 것은 관념이다. 작가는 물질이 사라진다고 해서 회화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 작업을 하는 태도와 작품에의 접근을 드러낸다. 「장서계획-의자」는 책을 찢어서 만든 펄프로 평범한 등나무 의자를 감싼 것으로 익숙한 사물과 전통적 사상 그리고 현대적 관념은 그의 작품에서 재구성되고 우리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황용핑

<성성화회>의 핵심 멤버인 마더셩은 베이징에서 태어나 문화혁명의 혼란과 격동기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이 경험은 마더셩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초기 작품은 주로 목각판화로 자유를 향한 갈망, 투쟁과 저항의 목소리를 담았다. 흑백의 단조로운 색은 일상생활의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정치적 선동을 표현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1982년 마더셩은 추상적인 여성의 신체와 산수를 소재로 수묵화를 창작하였다. 동그랗고 힘이 넘치는 그림은 목각판화에 그 뿌리를 둔다. 필묵의 선은 유려하고 매끄러우며 깔끔하고, 화면의 흑백대비가 선명하다. 또한 마더셩은 수묵의 번짐을 통해 동일한 묵으로 흑에서 백으로 짙고 옅은 변화를 주며 인체의 음영과 중량감 그리고 입체감을 보여줬다. 중국전통수묵화의 여백을 살리는 기법으로 추상적으로 표현된 화면은 가장 순수한 인간존재의 본질을 암시한다. 작가는 정치적인 압박에 못이겨 1985년 스위스로 이주하였으며 현재는 파리에서 거주하고 있다.

마더성

<무명화회>의 창단멤버인 마커루는 작업초기부터 사회주의 선전용 작품과 거리를 두고 추상회화 실험에 앞장서왔다. 그는 현실의 풍경을 그리기보다는 물 흐르는듯한 색조를 캔버스 위에 흐트러뜨리고 단순한 색으로 명암이 풍부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강변」은 <무명화회>의 멤버로 활동하던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회색 바탕에 올리브색의 버드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10분 남짓 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마커루는 처음으로 이 작품을 통해 무의식 중에 전통중국화와 같은 유화를 그리게 되었으며 그의 예술적 경지와 필묵, 리듬과 작업의 프로세스가 모두 화폭에 담겨져 있다. 이후 그의 작품은 더욱 추상적인 스타일로 발전하였으며 작품이 담고있는 내용은 더욱 풍부하고 순수해졌다. 「일구팔구 넘버원」의 색채와 빛의 시각적 묵직함과 힘있는 붓터치는 표현주의적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마커루는 독립적이고 개방적이며 탐구적인 작품활동을 이어가며 그가 동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각하고 실천했던 모든 것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마커루

마리우밍은 1990년대 베이징 이스트빌리지의 대표작가로 그가 창조한 또 다른 자아 ‘펀-마리우밍’은 남성의 신체에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표면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내재된 욕망의 사이, 성별의 경계 나아가 개인과 사회적 자아의 경계를 흐트리고 이를 통해 옳고 그름, 무기력과 씁쓸함을 전달한다. 작품 <길버트 앤 조지와의 대화>는 1993년 영국의 듀오작가 길버트 앤 조지가 베이징에 전시를 위해 방문했을 때 제작된 작품이다. 길버트 앤 조지는 오프닝 다음 날 이스트빌리지를 방문했다. 마리우밍의 작업실에는 핑크플로이드의 음악 “월”이 흐르고, 그은 윗도리를 벗고 방을 둘러보다 천장의 갈라진 틈을 발견한다. 그가 벽틈에 손을 집어 넣자 갑자기 천장에서 피가 흘러내려 팔을 타고 흐른다. 마리우밍은 이 퍼포먼스로 두 작가를 맞이했다. 이 퍼포먼스를 계기로 계속해서 다양한 퍼포먼스 아트를 선보인 마리우밍은 1998년 <펀-마리우밍 만리장성을 걷다>를 선보인다. 이 퍼포먼스영상에서 작가는 인적이 드문 만리장성을 나체의 펀-마리우밍 상태로 걸으며 문명과 사회의 안과 밖을 가르는 메타포로서의 성벽을 통해 자신의 작업세계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강인한 메세지를 준다.

마리우밍

<신구상운동>의 대표작가이자 <서남예술연구그룹> 발기인 가운데 한 명인 마오쉬후이는 주로 일상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사건을 소재로 삼았고 더 나아가 사회현상에도 주목하였다. 그는 작품속에 복잡한 감정을 담고 상징적인 부호를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음주 후 해자변 산책> 속에 서로를 부축하는 사람들은 이전 세대의 작가들이 언급하지 못하였던 전위적이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서남예술연구그룹의 작가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쿤밍에서의 남루하고 처참한 삶과 술에 찌들고 억압된 나날을 보내야했다. 마오쉬후이는 이토록 적나라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개인 생존의 상황에 대해 객관적 시각에서 분석을 하였다.
또 다른 작품 「자크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모방」은 고전에 빗대어 마음속 깊은 곳에 흐르는 진실과 진정한 존재를 암암리에 드러내고자했던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사각의 검은색으로 가려진 마라의 죽음은 가려진 현실의 거짓됨에 대한 반기이다. 마오쉬후이는 작품을 통해 시종일관 육체와 정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고독과 억압된 영혼을 위한 출구를 찾고자 노력해오고 있다.

마오쉬후이

어린 시절부터 문학, 역사, 철학관련 서적을 광범위하게 탐독하고 전통적인 서예기법을 꾸준히 연습한 치우즈지에는 플럭서스의 영향을 받아 중국현대미술 최초로 관념미술과 사진에 발을 디딘 작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난정서 천번 반복 쓰기」는 선지위에 ‘난정서’를 천 회 반복하여 써내려가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으로 전시에는 앞부분의 50번의 기록을 상영한다. 첫 회의 글씨만이 서예의 특성을 보여줄 뿐 이후 행해지는 반복적 행위는 오로지 시각적인 먹의 흔적만 쫓을 뿐이다. 50번부터는 먹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워 서예는 일종의 선이 된다.
「문신」은 초기 중국 관념사진의 대표작으로 기호와 클리셰 속에 사라지는 주체의 부피감을 통해 기존의 관념에 반기를 들고 현대적 시선에서 질문을 던진다. 치우즈지에는 그림, 사진, 설치와 영상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작가적 상상력이 충만하면서도 철학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지속해오고 있다.

치우즈지에

85미술운동 중 <샤먼다다>의 멤버인 선위옌은 언어의 표현범위를 확대하고 순수미술 또는 조형적 언어 자체를 초월하여 예술과 생활을 잇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션위옌은 중국현대미술 시발의 가장 대표적 전시로 인정받는 1989년 중국현대예술대전에서 처음으로 <물침대>를 대중에게 선보이고 당시의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처한 정치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비판을 드러내었다. 선위옌은 살아있는 물고기들을 물을 가득 채운 플라스틱튜브에 넣고 군부대용 이동식 침대에 올려놓아 ‘물침대’를 만들었다. 물고기를 뜻하는 한자 ‘어’는 중국에서 재물과 한가로움을 뜻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션위옌의 물침대 안에 담긴 물고기들은 좁은 인공의 튜브안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이를 통해 작가는 당시 자신이 느낀 사회로부터의 억압과 산업사회의 산물에 둘러쌓인 인공적 환경을 표출하고자 했다. 1990년 파리로 이주하게 된 선위옌은 이주로 인한 문화적 단절을 계기로 새로운 창작의 길을 열었다. 그녀는 이민과 문화적 충돌 속에서 겪었던 일상생활과 경험 등을 토대로 세밀한 감정과 민감한 감각으로 다중 문화와 문화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선위옌

85신조 중 <북방예술그룹>의 멤버인 수췬은 최초로 <이성회화>를 주장하고 실천을 한 작가이다. 수췬은 “모든 예술은 지고지상의 문제로, 궁극적으로 논리의 문제이다. 작품의 의의는 문제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에 있는 것이지,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는데 있지 않다. 헤겔의 절대정신과 니체의 초인사상 그리고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는 ‘북방의 한대지방 문명’을 탄생하게 하였으며, 중세 교회의 조형이념과 제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 그리고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는 <이성회화>의 추상적이고 차가운 시각적 조화를 만들어냈다.”고 그의 작업에 대해 표명했다. 「끝없는 길」시리즈는 수췬의 작품 가운데 보기 드문 에스키스들로 돌이 되어 버린 인체와 우주환경을 그린 작품이다. 별과 우주, 폐허와 유적지 그리고 얼어붙은 채 생명을 잃은 몸 등의 무의식적 세계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절대원칙>시리즈에서 보여주는 검은 우주공간은 무한한 영원,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십자가가 상징하는 시간성, 건축물의 그물망 구조 등을 통해 장엄하고 숭고하며 이성적 형상을 보여준다. 숭고미에서 벗어나고 상징적 질서와 거리를 두려는 수췬의 작품은 새로운 유토피아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음이 틀림없다.

수췬

85신조 중 북방예술그룹의 멤버로 90년대 정치 팝을 대표하는 작가인 왕광이는 저장미술대학 재학당시 서양의 고전미술과 철학에 심취했다. 이는 그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가려진 고전의 정신을 차갑고 엄숙한 방식을 통해 화폭에 담았다. 1980년대 말 냉전시대의 종료와 중국 사회의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정치와 문화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퀵드라이 공업페인트로 덮은 명화」와 「퀵드라이 공업페인트로 덮은 명곡」은 이러한 의구심을 바탕으로 작업한 것으로 인문과 이상에 대한 열정이 산업과 자본에 덮여 보이지 않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함을 들어낸다. 왕광이 정치 팝의 대표시리즈인 <대비판>은 문화혁명시기 군중들의 대비판관련 홍보포스터와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브랜드를 함께 배치하여 자본주의적 풍조에 물든 중국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이는 민감한 정치경제적 부분을 위트있게 건드리고 발상을 전환하는 뒤샹식 표현이기도 하다.

왕광이

“성성화회”의 멤버인 왕커핑은 비록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경험은 없지만, 그의 ‘말도안되는 조각’, <침묵>이 보여주는 고통에 찬 형상은 “성성미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부조리연극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나무결을 따라 작품의 외형을 만들고 가지와 옹이를 독특하게 처리함으로써 돋보이는 작품으로 완성시킨다. 인공적으로 조각된 가려진 눈과 크게벌린 입으로 인해 왜곡된 얼굴조각은 작품에 대한 사전검열과 부패한 정부의 행위에 대한 용감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상숭배에 대한 강한 규탄이며 부조리한 시대에서 고난을 겪은 사람들의 분노와 문화 자유 억압에 대한 고통을 전달한다. 가식없고 날카로운 조형언어는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이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왕커핑

현재 가장 중요한 개념미술작가로 소개되는 왕루옌은 중국 전위예술의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전위예술활동을 펼치었다. <성성화회>의 멤버이기도 한 그는 85신조시기 <신각도팀>을 설립한 사람 중 하나로 1988년에서 1995년까지 예술의 정체성과 예술가의 주체적 역할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였다. 특히 그는 작품에서 작가개인의 행동과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를 해왔으며 도형, 그림, 문자에 대한 독특한 해체작업을 하였다. 「촉각 예술」은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물질을 정신적 대상으로 바꾸고 촉각이 육체로부터 어떻게 독립하는지, 신체의 감각을 두뇌의 지식으로 어떻게 변환하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촉각으로 하여금 목적에서 벗어나 그 자체가 주가 되게 하고 이로 인해 비로소 문화적 의의를 갖게 된다.

왕루옌

1990년대 초 시작된 정치 팝의 대표적 예술가 가운데 하나인 왕즈웨이는 위요우한을 스승으로 80년대 초부터 세밀한 회화의 기교를 그렸다. 1987년 그는 수평적 방식으로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에 배치하기도 했으며 그 이후 서양의 유행요소를 작품에 더하여 이를 통해서 중국 현대사회를 은유적으로 비판했다. 「포커」는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여 중국에서 매우 유행한 놀이인 포커를 빌어온 작품이다. 캐릭터 상 옷차림의 색조와 표정은 그림에서 기이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포커에 나타난 퀸의 무표정한 얼굴은 최고의 권력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런 이미지는 이중적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빗대어 보여주고 사회에서 유통되는 정보와 사실의 진상과 차이를 보이는 현상을 회화적 언어로 표현하였다. 킹과 퀸의 모습, 그리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모호한 모습은 중국의 정치 생태계 사람들의 성격과 관계를 상징한다.

왕즈웨이

85신조 시기에 최초로 본질주의의 위기를 느꼈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우산주안은 수많은 팝아트적 언어, 위조 한자 게임, 풍자적인 언어와 기호를 가지고 실험적 예술작품을 창작하였으며 제도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에 관심을 가졌다. 1986년에 시작된 「붉은 유머」시리즈는 과거의 황당한 기억과 현실이 함께 얽혀있는 작품이다. <레드유머>는 문화혁명시절의 대자보를 가득 붙인 보드판을 모아 만든 것으로 대자보의 기본 포스터컬러를 종이에 칠하여 그 효과가 강렬하며 보는이로 하여금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명확한 지향성이 없는 단어와 유머스럽고 풍자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이슈를 던지는 우산주안의 작품은 중국 관념미술을 위해 새로운 국면을 마련하였다. 1990년대 초 유럽으로 이주한 우산주안은 2005년부터 유럽과 중국을 오가며 작업을 해오고 있다. 풍자적인 의미를 담은 언어와 기호로 가득한 그의 작품은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표현 속에 진지하고 심도 있는 의미를 담는다.

우산주안

1990년대 초 미국으로 간 이후 쉬빙은 동서양 문화가 말과 문자의 번역을 통해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한다. 그는 동양 철학과 문화창작에 인용되는 문자와 언어 등의 소통 도구, 예술과 문명의 본질, 각기 다른 종과 문화간의 유사성과 충돌성 등에 대해 깊이 있는 비판적 사고를 하고 동서양의 새로운 대화방식과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례의 전환연구>는 전시장에 설치된 돼지우리에서 시작된다. 돼지우리 바닥에는 각종 역사 및 문화관련 책들이 깔려있고 그 위를 발정기의 수퇘지와 암퇘지가 돌아다닌다. 몸에 영문으로 ‘천서’라는 글귀가 새겨진 수퇘지와 ‘지서’라는 글귀가 새겨진 암퇘지는 교배하게 되고, 동물적 본능과 정신적 생산활동이 전시를 통해 보여질때 관람객들은 이런 난처한 예술적 담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난감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작품은 예술창작의 관념과 철학을 희화화하고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이고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에서 예술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쉬빙

중국현대예술이 주로 서양의 전위적 기법을 가져와 사회현상을 비판한 것과 달리 양지에창은 전통적 필묵과 도가의 사상을 통해 전세계 현황과 그 배후 깊이 숨겨진 사회와 문화의 힘을 폭로하였다. 1989년 양지에창은 작품 「일백겹의 먹」으로 파리에서 열린 ‘대지의 마술사’전에 참여했다. 이 작품은 선지에 먹을 계속해서 덧바르는 작업으로 먹이 마른 후 다시 바르기를 한 달여에 걸쳐 반복하였다. 건조한 선지는 먹물을 먹고 늘어나 산과 강처럼 구불구불해졌다. 이 시리즈는 10년 간 이어졌으며 이 작품을 통해 양지에창은 줄곧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지속적으로 행위를 해나가고’ 있는 무의미의 상태를 의미있게 하는 표현방식이 되었다. 이 과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물질과 정신을 초월하고 황홀경의 경지로 이끈다. 이는 칸트의 숭고미 개념에서 보여준 공포와 흥분이 교차되는 모습과 흡사하다.

양지에창

1980년대 중반부터 추상화를 그린 위요우한은 그림의 원형이 가지고 있는 형태와 자율성, 조화로움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위요우한은 수묵화가 가지고 있는 기본 요소인 선, 색, 점은 각기 다른 배열과 조합으로 단순한 심미적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무제>에서 보이는 마오저뚱은 여러 겹으로 쌓인 액자의 가장 안쪽에 놓여져 있다. 그림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미학적 방법론으로 저항의 목소리를 표출하고 사회주의의 현실을 그렸다. 작가에게 있어 이것은 일종의 ‘일탈’같은 작품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요우한은 다시 풍경화와 추상화의 창작의 길로 돌아왔다.

위요우한

중국에서는 최초로 국민의 생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소재로 작업을 한 장다리는 거리에서 그래피티 행위예술을 진행한 작가이다. 그는 90년대에 「대화」시리즈로 명성을 얻었다. 그가 속한 사회현실은 작가로서 창작을 할 수 있는 정신적 원동력과 원천이다. 작품 <대화>에서 나타나는 두상의 이미지는 예술가 자신의 두상에서 따온 것으로 선택적으로 베이징의 재개발 지역에 그려졌다. 장다리는 벽에 붙은 사람 머리모양의 그래피티에 구멍을 뚫고 그 윤곽과 함께 이를 통해 보여지는 풍경을 모두 기록해두었다. 파괴와 참여가 공존하는 상태에서 도시 전체는 다양하지만 선택여지가 없는 것처럼 그의 작품은 비슷한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우원광 감독의 작품 <방랑 베이징>은 80년대 말 장다리를 포함한 ‘떠돌이‘ 청년들이 순수한 예술적 꿈을 추구하기 위해 겪었던, 보기에는 낙관적이지만 사실 난처하고 무거웠던 삶을 그렸다. 장다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대상과 시공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어떻게 하면 예술이 현실과 접목되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장다리

관념적 행위예술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장후안은 베이징이스트빌리지 예술가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의 작품 「12평방미터」는 동촌 생활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12평방미터는 동촌 공중화장실의 면적이다. 장후안이 물고리기름과 벌꿀을 온몸에 바른채 화장실 한 가운데 앉아있으면 파리들이 곧 그의 몸에 달라붙는다. 이 과정에서 장후안은 되도록 자신으로 하여금 현실을 잊고 정신과 육체가 서로 분리하게 하려고 노력을 했다. 한 시간 뒤 장후안은 또 다시 옆에 있는 쓰레기와 분뇨로 가득 찬 웅덩이에 들어가 몸을 씻어내렸고 수많은 파리들은 그를 따라와 수면위에서 날아 다녔다. 협소한 공중화장실과 상대적으로 넓은 물웅덩이는 마찬가지로 열악한 조건의 예술환경과 사회생활 공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장후안

85신조의 핵심 인물로 <85신공간>과 <못>의 창립멤버 중 한명인 장페이리는 생명의 소실 또는 응축을 작품에서 표현해오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의 화면은 매우 냉담하다. 이는 현대사회에 대한 작가로서 살아가는 인식이자 그의 고독한 마음을 투영한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질문에서 벗어나 1988년 중국 최초의 관념적 영상작품인 「30x30」을 창작하여 85신조 작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기애적인 정서에 종지부를 찍었다. 묵직한 화면은 그 어떠한 기술적 가공 없이 실질적인 경험을 토대로 만든 작품으로 최대한 그 본질에 근접하려 노력한다. 언론매체의 대표적 아나운서가 표준 중국어로 「사해 : 중국어대사전」의 물수(水)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빠른 속도로 낭독하는 「물-사전의 스탠다드 버전」은 중국 뉴스의 기준에 맞추어 촬영 및 제작되어 매우 진지한 분위기속에 황당한 내용을 담아 통제된 언론으로 진실이 결여된 현실을 비꼬았다.

장페이리

85신조 가운데 <신구상>과 <서남예술연구그룹>의 대표 작가인 장샤오강은 사천미술대학을 졸업한 이후 고독과 죽음이 드리운 고통시절을 보낸 후1985년 피안의 세계에 접어들게 되고 이 시기의 작품들은 종교성이 짙은 도식과 상징적 매체가 등장한다. <황야> 시리즈는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장샤오강 작가 생애 초기의 초현실적 미술 언어의 특징과 더불어 작가의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관심 및 개인의 철학적 고민을 드러낸다. 1989년 중국에서의 중대한 정치적 변화로 인해 그는 인간세상으로 귀환하였으며 이때부터 그의 작품세계에 다양한 요소들이 점차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94년 장샤오강은 혈연을 작품의 기조로 <대가족>시리즈를 선보였다. 회색빛의 어두운 화면은 억압된 개인과 역사를, 혁명시기의 도식화된 초상화같은 가족이미지는 시대의 단체적 기억을 표현한다. 장샤오강의 특별한 작품세계는 중국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코드이자 고전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장샤오강

저우티에하이는 중국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순수한 관념미술가로 평가된다. 그는 1989년부터 반항적인 태도로 미술의 발생과 연관하여 현대미술을 광범위하고 과감한 탐색을 해나갔다. 그는 넘치는 열정으로 독특하고 홀로 앞서 나아가는 예술가로서의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끈질기게 보여줬다. 저우티에하이의 1980년대 대표작 <십년전>은 종이와 낡은 신문지 위에 여러가지 드로잉을 퍼즐처럼 그린 유머러스하면서도 냉소적인 작품으로 당시의 체제와 사회문제에 대한 젊은 작가의 저항이 잘 드러나있다. 그는 중국현대미술의 발전에 대해 많은 반론을 제기하고 현대미술의 발전과 가상의 평행선을 유지하는 역사적 맥락을 그려오고 있다.

저우티에하이
일본
「일본의 전위미술」을 일본이 불합리한 전쟁에 무조건적으로 항복하고, 새롭게 미국의 통치를 받게 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범위를 좁혔다. 그리고 패전과 부흥, 그리고 고도 경제성장으로 불리는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포장된 진보나 발전으로의 근원적인 위화감의 표명과, 미술의 표현을 통해 저항하려고 하는 측면에서 이 주제를 조명해 보려고 한다. 이렇듯 무늬만 진보와 발전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것들은, 1964년에 열린 「동경올림픽」, 1970년대에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만국박람회」, 그리고 1980년대에 절정에 달한 「버블 경제」 와 같은 세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아이다는 미술가라면 누구나가 자신이 갖는 권력을 상징화시키는 복잡한 정경을 담고있는「모뉴먼트」를 가장 값싼 소재인 골판지 상자를 이용해 작업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작 방식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는데, 미술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는 타자들과 방법을 공유하여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과의 계급을 해체시킴으로써 권력이 장악하기 쉬운 미술의 교육제도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장소를 바꿔 간헐적으로 만들어 온 이번 작품이 일본 국외에서 선보이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며, 여태까지 만들어 보관해 온 폐기물과 같은「모뉴먼트」와 함께 뒤섞여 앞으로도 아이다의 작품을 보관하는 창고 속에서 미술작품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습기와 곰팡이, 바퀴벌레, 쥐의 피해를 받으며 오랫동안 보관될 것이다.

아이다 마코토

1937년에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규슈의 오이타에서 자란 아카세가와는 1960년에 결성된「Neo Dadaism Organizers」 에 참가하였고,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에서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폐품을 뒤져 아상블라주풍의 거대한 오브제를 만들거나, 주변의 물건들을 포장지로 포장하고, 혹은 천엔 짜리 지폐를 그럴듯하게 모사한 뒤 거대화시켜 발표함으로써, 반예술의 동향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급진적인 표현을 향해 매진해 나아갔다. 그러던 중에 천 엔 지폐를 모조한 작품이 통화 위조의 혐의로 고발되어 결국에는 대법원까지 가는 긴 법정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천 엔 지폐 재판」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아카세가와는 전위미술가에서 문필이나 일러스트와 같은 출판의 세계로 활동의 중심을 옮겼고, 나중에는 스스로가「초예술」로 부른 전대미문의 영역에서 그만의 표현을 개시하였다.

아카세가와 겐페이

여섯 명의 멤버로 결성된 Chim↑Pom (침폼) 은 일본 전위미술을 다루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젊은 세대에 속한다. Chim↑Pom (침폼) 은 히로시마를 둘러싼 문맥이 패전으로부터 시간이 경과한 것에 정주하려 하고 유연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일부러 이 문제에 다양한 행위를 개입시키며 히로시마가 갖는 새로운 의미를 되묻고 있다. 히로시마 희생자들의 혼을 기리기 위해 매년 전 세계에서 보내지는 대량의 종이학을 히로시마시는 폐기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보관해 오고 있었는데, 침폼이 자신들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침↑폼

에노키 츄는 16세에 고베로 이주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고베를 창작의 거점으로 삼고 활동하는 전위미술가이다. 원자폭탄이나 다이옥신과 같은 유독 물질을 모티브로 한 자기방어를 위한 대규모 설치미술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인해 자신이 사는 도시의 파괴를 눈앞에서 목격한 에노키는 선반공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시절 가까운 존재였던 철을 사용하여 총중량이 수 톤에 달하는 도시도 병기도 아닌 설치미술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사용된 부자재는 아직도 정해진 형태에 구속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와 증식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에노키 츄

호리 코사이가 행하는 예술 활동의 원점은 1967년 타마미술대학에 입학 후 동경의 긴자 길거리에서 감행한 「자기 매장 의식」이라 불리는 퍼포먼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69년 7월에 뜻이 맞는 재학생들과 「미술가 공투 회의」(미공투)를 결성하고, 「문화적 폐허를 창출하라!」라는 슬로건 아래 미대생들이 주축이 된 정치투쟁 그룹의 의장으로서 활동했다. 이번 비엔날레에 출품된 무한히 솟아 올라가는 벽과 직면함으로써, 세대를 넘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장소와 시간을 계승하는 끝없는 「Revolution」 으로 존속되고 있음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그가 선동적인 전단에 썼던 말「지금, 미술가로 불리고 있다면, 그곳이 전쟁터이다」는 끝나지 않고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호리 코사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기댈 곳이 없는 채 여러 곳을 전전하며 자란 키쿠하타 모쿠마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는 재주가 빼어나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고, 그 뒤 1957년에 후쿠오카시에서 결성된 전위미술 집단「규슈파」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키쿠하타는 동경에서 이전의 미술이 갖고 있던 틀을 벗어난 문제작을 계속해서 발표하고, 반예술의 기수로서 큰 주목을 모았다. 그러나 그 즈음에 발표된 연작「노예계도」에서 드러나듯이, 전위라기보다는 오히려 토속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거기서 반근대적 요소를 강조하는 키쿠하타의 표현은 어찌보면 앙포르멜 회화의 성격을 갖는 규슈파에도, 또한 반예술에서 보이는 고유의 급진주의의 성향 그 어느 쪽에도 들어맞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다.

키쿠하타 모쿠마

나카하라는 일본의 전후 미술에 있어서 전위의 의식을 둘러싼 구세대와 신세대의 차이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그 둘을 연결하는 존재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나카하라는 일단「모노 (물건)」에 대담한 색채를 회복하는 것부터 착수하고, 형태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미묘한 경계선에 있는 표현들은 조각과 회화를 불문하고 다양한 소재를 통해 능숙하게 다뤄왔다. 13만 개의 레고 블럭을 이용하여 조립한 이 작품은 조형적으로는 이전까지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으나, 처음 본 이미지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포스트 모노하와 분열된 듯한 요소를 갖고 있고, 그 이후에 등장하는 무라카미 타카시와 아이다 마코토로 대표되는 시뮬레이셔니즘과 연결된 듯한 인상을 준다.

나카하라 코다이

일본이 패전을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화단의 대가들은 전쟁 전의 화풍에 아무런 반성 없이 회귀하였다. 그런 시기에 오카모토는 마치 다른 세상에서 타임슬립 한 듯이 등장하여, 원색을 대담하게 쓰고 흉측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유머러스한 동물들을 오늘날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배치한 그림을 선보였다. 이「숲의 규칙」은 그의 아버지였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가 오카모토 잇페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당시 만화는 회화보다도 하위에 속하는 표현으로 낮게 평가되었지만, 잇페이는 타로에게 직접 어린이용 만화를 그려주고, 어린 타로의 마음속에서 만화와 회화의 우열을 가리는 편견 없이 표현의 원천으로서 두 분야를 병행해 가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감성을 키울 수 있었다.

오카모토 타로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행위예술가 오리모토 타츠미는 1971부터 장기 체류한 뉴욕에서 플럭서스의 여운이나 해프닝 아트를 접하고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작품 처형은1597년에 일본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나가사키에서 책형 당한 26명의 기독교 순교자들을 처형한 참수대와 같은 수를 놓고 세계 각지에서 행해진 퍼포먼스의 모습을 영상으로 투영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당연히 생활의 일부가 된 프랑스빵 바게트가 원래는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종교적인 상징이며, 동아시아에게 있어서는 외부에서 전해진 낯선 물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항해시대 이후 식민지주의적인 전도와 잔혹한 탄압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음을 보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질문하고 있다.

오리모토 타츠미

1932년에 동경에서 태어난 시노하라는 1960년대에 「Neo Dadaism Organizers」 의 결성에 참가하여 신주쿠의 화이트 하우스 (설계:이소자키 신) 을 거점으로 미술계에서 멈출 줄 모르는 활동을 정력적으로 펼치며 일약 시대의 총아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시노하라에게 있어서의 전위미술이란 신흥 미디어가 대두하는 시점에서 구태의연하게 효력을 잃어가고 있던 기존의 전위미술을 복제 미디어 속에서 어떻게 하면 다시 재생시켜 응용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시노하라는 이 연장선상에 도작으로 몰릴 위험이 있는 복제의 수법과 싼 느낌을 주는 형광도료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사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시노하라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팝아트를 실천한 아티스트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노하라 우시오

1936년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태어난 스즈키는 미술비평가 이시코 준조로부터 영향을 받아 1966년에 시즈오카에서 결성된 그룹 「겐쇼쿠 (환촉) 」의 일원이었다. 스즈키는 미술사를 대표하는「명화」의 이미지를 자신의 작업을 위해 자유자재로 편집하고 소비 할수있는 데이터 베이스로써 사용하였다. 또한 회화라고 해도 물체로서는 3차원적인 성질을 갖기 때문에 겉과 뒤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실제의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겐쇼쿠의 역사적 의미가「Pre-모노하」의 역할에 그치지 않는 것은 스즈키의 이러한 활동들이 제시한 가능성을 통해 증명될 것이며, 오늘날 다시 한번 빛을 비춰볼 필요가 있다.

스즈키 요시노리

다나카 아츠코는 1950년대 일본 전위미술의 동향으로서 잘 알려진 「구타이(구체)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이 그룹에서의 활동이 아니더라도 생애를 통해 매우 특이한 표현을 일관되게 발표해 온 미술가였다. 다나카의 관심은 전기와 그것을 제어하는 회로,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인간의 힘을 넘어서 작동하는 전류의 순환에 있었다. 소용돌이 모양의 움직임을 한 물감이 여기저기서 서로 매개가 되어 다른 소용돌이와 연계되는 다나카의 회화는 전기가 발하는 빛이나 전류의 온•오프에 의해 형태가 만들어지는 회로가 평면의 형태로 캔버스 위에 장착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나카 아츠코

야나기 유키노리는 1980년대 중반부터 종래의 조각 개념의 틀을 크게 벗어난 작품을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1990년대 초에 발표된 네온관과 전기를 사용한 작품은 오늘날에 와서도 매우 선구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번에 전시되는 이 작품은 일본의 점령하에 제정되어 영구히 전쟁을 포기하는 것을 선언한 일본 헌법 제9조의 조문이 오늘날에 와서는 조각조각으로 해체되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역시 전력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해인 1994년에 발표되었지만, 2011년에 일어난 진도 7이라는 가장 큰 규모의 지진 피해를 기록한 동일본 대지진을 때문에 일어난 원자력발전소의 사고 때문에 다시 한번 방사능에 의한 피폭국가가 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야나기 유키노리
한국
Project 1에서 한국은 6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반에 걸친 한국 전위예술의 전모를 다룸으로써 당대 미술의 역사적 의미를 탐구한다. 기존의 제도나 관습에 대한 이단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끊임없이 기성의 권위나 제도에 대해 불온한 방식으로 새로운 영토를 향해 탈주해온 전위미술을 반추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당시 전위예술활동이 가지는 의미를 한국 현대미술의 잠재태로서 간주하고 나아가 오늘날 당대 미술까지 관통하는 의미와 가치로서 새로이 조명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위예술의 개념을 형식주의 모더니즘이나 사회적 리얼리즘이 아닌, 사회비판적인 담론을 제시했던 작품들이 대거 공개될 예정이다. 특히 기존 제도권에서 미술사적으로 활발하게 조명해왔던 앙포르멜(Informel), 단색화 민중미술 등과 같은 주류 미술에 편승하기 거부하며 주변부에서 활동해온 입체, 개념미술, 해프닝, 미디어 등의 실험적 작가들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최병소는 《대구현대미술제》(74~87)의 중심멤버로 활동했다. 그의 작업은 1970년대 이래 줄곧 연필, 검은색 볼펜 등으로 신문지를 지워가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지우기는 단순히 매체를 지우고 덮는 행위를 넘어 매체를 새로운 오브제로 변모시킨다. 신문지는 행위의 담지체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물성을 가진 매체로 변신한다. 그의 화면은 일견 단색화의 반복적 행위가 집적된 화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최병소의 화면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정신이 담겨 있다. 언론의 기사를 지워가는 이 비판은 피상적인 현실 비판을 넘어 초감각적으로 지각해야 하는 비가시적 세계의 구현이다.

최병소

하종현은 1965년과 1971년 <파리비엔날레>에 두 차례 참가하였고, 1967년 <제 9회 상파울로 비엔날레>도 참여하였다.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으로 화단에 등장한 그는 1960년대 후반 앙포르멜 경향의 화풍을 과감하게 던지고 구성적 추상으로 작품경향을 전환하였다. 나무상자의 로프를 이용한 작품이라든가 철조망으로 소프트 한 캔버스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칭칭 동여 묶는 작업 등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이나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한동안 구성적 추상에서 나타나는 물질성과 손작업에 대한 집착의 일환으로 오브제 작업에 몰두한 경험은 오늘날의 ‘평면화 된 오브제로서의 회화’로 이어졌다. 즉 성긴 마대천 이면에서 물감을 칠하고 밖으로 밀어 낸 물질과 질료의 표정은 포화상태, 폐쇄, 침묵, 억압 등의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하종현

삶 자체가 미술이기를 바라는 하용석의 작업은 기존의 미술의 존재방식과 미학 및 인식론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자 비판으로 점철된다. 그가 설정하는 삶/예술의 목표인 끊임없는 변화와 실험의 대상은 그가 즐겨 기용하는 표현매체인 삶의 폐기물, 고물 쓰레기, 혐오감을 주는 동물, 혹은 그의 배설물들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이다. 이 때에 전시장에 설치된 폐기물들 내지 온갖 잡동사니는 일상과 현실의 대체물일 뿐이며 관객을 의식한 시각적 카타르시스이기도 하다.

하용석

홍명섭은 《면벽전》(문화원화랑, 1978)등 28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초기부터 매스와 규정된 공간을 전제로 한 기존의 조각개념을 넘어서는 이질적 맥락의 조형작업에 몰두하며, 규정된 작업보다는 진행되어가는,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의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관통하는‘shadowless’,’artless’,’mindless’등의 개념을 설정하고 기존의 예술관념을 넘어서는 어법을 극단적으로 실험한다. 출품된 <de-veloping /en-veloping ; level casting>,<will & unwill gesture ; water•fall> 역시 이러한 맥락의 작업들로 80년대 중반 이후 기존의 형식주의 모더니즘으로부터 전혀 이질적인 어법으로 지속적인 탈주를 감행하고 있다.

홍명섭

정복수는 1979년 바닥화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총 24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80년대 중반 소위 ‘민중미술’ 진영에서 활동하였지만, 현실의 문제를 직설적으로 고발하는 방식보다는 인간의 내면적 욕망의 표출과 회화의 권위적 아우라를 탈각시키기 위한 ‘바닥화’라는 독특한 표현방식을 통해 구현해왔다. 정복수는 살아있는 인간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바닥화’를 시도했다. 바닥화는 신의 세계나 사자의 세계를 그린 천정화나 벽화의 절대적 숭고를 거스르며 살아있는 인간의 욕망과 토로가 생생하게 뱉어지는 장이다. 또한 전통적인 회화적 아우라를 거세함으로 사람들 사이에 교통하는 현장으로 바닥화를 제시한 것이다.

정복수

정강자는 1967년 《신전》동인의 일원으로 《청년작가연립 전》, 《제4집단》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투명풍선과 누드>(1968.5.20)는 한국최초의 누드 퍼포먼스로, 당시 청년문화의 중심지였던 무교동 음악다방 ‘세시봉 C'est Si Bon’에서 행해진다. 존 케이지의 전위음악이 흐르는 실내공간에서 관객들은 그녀의 누드에 투명풍선을 불어 부착시키고 이를 눌러 터트리도록 하는 단순한 내용인데 여성의 육체를 판타지적으로 해석하는 남성들의 시각을 와해시킨 참여형 퍼포먼스이다. 이 프로젝트는 기성의 남성중심적 세계와 가치관에 도전하는 강렬한 페미니즘적 주장을 드러내고 있어 미술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 사진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은 해프닝 전모를 작가 정강자의 고증을 통해 재연한 동영상을 보여주게 된다.

정강자

강국진은《논꼴》과《신전》동인의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며, 1967년《청년작가연립전》 개막 당일 <색물을 뿜는 비닐주머니>를 퍼포먼스 형식으로 시연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집단 해프닝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보다 사흘 앞서 실시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당시로서는 매우 서구적인 작품이었으며, 폐품을 활용한 <시각의 즐거움>등은 일상용품을 재료로 ‘일상의 작품화’를 시도했다. 또한 네온 등을 이용하여 당시의 도시적 감성을 담아내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1968년의 <한강변의 타살>등을 비롯한 <투명풍선과 누드>, <색 비닐의 향연>등 초기의 행위 예술을 통해 캔버스에 담을 수 없었던 문명과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위적 작업을 추구하였다.

강국진

김동규는 1963년부터 1975년까지 부산의 《혁동인》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부산의 현대미술을 견인해온 작가의 <빛 기둥>은 천을 기둥모양으로 만들어 천정에 매달아 두고 그 아래 부분을 수성안료가 담긴 그릇에 담가두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형색색의 색들이 각각의 천 기둥에 배어 올라가도록 한 작품이다. 전통 염색의 기법과 매체 자체의 속성에 프로세스를 맡긴 작업방식은 모더니즘의 방식과는 차별화된 시도였다. 시간의 흐름과 그 변화에 따른 물질의 변화, 그리고 원색의 원시적 아름다움을 통해 사변적인 현대미술에 나름의 아름다움, 즐거움을 함께 추구하면서 자연발생적인 현상을 작품화 하고자 하였다.

김동규

김장섭은 《앙데빵당》전과 《대구현대미술제》,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그리고 《ST》그룹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작품 어휘로서 사용되어 왔던 대부분의 자연물이나 일차적인 공산품으로 된 재료들은 일정한 공간 점유의 구조를 가지고 구축 또는 배열되어 거친 터치의 안료 덩어리에 뒤덮여 있다. 이러한 방법은 명백하게 사용된 사물의 모습을 촉각적 경험의 시각화하는 차원 속에서 다루어졌고, 동시에 사물의 구축 질서는 한 덩어리의 시각적 질서로 컨트롤 됐다. 나의 체질과 감성적 성격은 그 동안의 작가적 학습을 통해서 최근까지 이런 투의 작품을 견지하게 했던 것인데. 그것은 재료(사물)라든가 물질을 거친 행위를 통해 안료로 덮어씌움으로써 사물에 대한 의식경험을 시각조건 속에서 극대화하겠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김장섭 <사물구조의 촉각적 경험>,『공간』 1980년 6월호.)

김장섭

김종근은 1962년부터 《혁》동인의 회원으로 부산의 현대미술운동을 견인하였다. 김종근의 초기작업은 사물의 형태를 극도로 단순화시킨 단색조의 절대적 형상을 추구하였으나, 60년대 말부터 화면에 형과 색을 배제하고 직접 화면에 불을 지르는 작업으로 전환하였다. ‘불꽃 화가’로 알려진 바처럼, 촛불과 성냥 등을 화면에 대고 불꽃의 그을음을 화면에 포착하는 작업을 추구하였는데, 우주의 기본 원소인 불과 공기를 통해 비가시적인 본질과 원형을 구현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불꽃 작업은 일견 단색조 회화의 화면처럼 보이지만, 물질이나 평면으로서의 회화의 본질을 규명하는 물질미학보다는 불가시의 우주적 원형의 탐구이며, 비작위적, 자연적 세계관의 표출이다.

김종근

김구림은 기존의 대학교육을 거부한 채, 60년대 후반 서정적 추상 작품을 선보이며 화단에 등장하였다. <1/24초의 의미>(‘69)라는 한국최초의 실험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고, 최초의 대지예술인 <현상에서 흔적으로>(’70)를 발표하였다.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는 60년대 말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상의 편린들을 불연속적 화면을 통해 담아내고 있으며, 최초의 대지예술로 기록된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뚝방에 불을 기하학적 형태로 놓아 그 흔적을 남긴 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으로 회귀하게 하는 작업이다. 대지를 정복하며 대상화하는 서구의 그것과는 달리 전통 쥐불놀이를 현대미술로 승화시킨 대표작이다. 70년 《제4집단》의 전방위적 작업과, 일본체류기간을 거치면서 70년대 중반 일상적 오브제에 행위의 흔적을 그려 넣어 실제와 가상의 관념을 깨는 개념작업을 펼쳤다.

김구림

김성배는 1986년 그룹 《메타 복스》에 의해 기획된 <한국현대미술 최전선전 the spearhead of the korean contemporary art>, <엑소더스exodus>전을 통해 중앙화단에 소개되어 1987 국립현대미술관<청년작가비엔날레>를 통해 미술계에 등단하였다. <하하 소나무>는 1987 국립현대미술관 <청년작가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작품으로 수원 팔달산에서 베어온 소나무들을 연결시켜 우주적 의미를 상징하는 타원형 구조를 만들어 설치하였다. 기하학적으로 완결된 깔끔한 타원은 아니지만 소나무가 만들어 낸 형태는 천지인(天地人)을 연결하는 언어로 예술의 본질적 의미를 지닌다.

김성배

김영진은 1974년부터 《대구현대미술제》와 《앙데빵당》전을 중심으로 활동해왔으며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에꼴 드 서울》전에 참여하였다. 2002년부터 《스페이스 129》에서 개인전을 비롯하여 5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대구현대미술계의 주역으로서 활동하였으며, 1978년 대구 《스튜디오 K》에서 박현기, 이강소, 최병소와 함께 비디오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는 석고로 자신의 신체부위를 캐스팅하거나 유리에 신체를 접촉시켜 그 흔적을 담아내는 등 자신의 정체성 및 실존과 죽음에 관련한 일관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김영진

이강소는 1970년대에 회화, 판화, 사진, 드로잉, 설치, 오브제, 조각, 퍼포먼스, 비디오 등 모든 장르의 실험을 통해 동시대적 흐름을 소통으로서의 예술로 표현한다. 1973년 그의 첫 개인전에서 갤러리를 주막으로 바꾸어놓고 실제로 관람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설치했다. 또한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는 전시실 중앙에 원형으로 횟가루를 뿌려놓고 살아있는 닭을 묶어놓은 뒤 만들어진 발자국의 흔적을 전시했다. 예측불가능 해 보이는 이러한 이벤트는 이강소의 회화로 그 주제를 확장했다. 이후 그의 작품에는 자유분방하고 프로세스적인 제스처가 두드러졌으며, 보이는 것과 인식하는 것, 물질과 상상에 대한 사색을 유도한다.

이강소

이건용은 자연의 생목과 흙, 로프, 천 그리고 자신의 신체를 주로 사용하여 작품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사진, 드로잉, 언어 행위 등을 통한 타자와 세계와의 소통에 관심과 언어의 이중적 의미를 가져왔다. 이벤트와 퍼포먼스, 설치와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실험적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신체성과 장소성 이라는 실험의 대상이 그의 작품세계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왔다. 돌발적인 해프닝을 거부하고 논리적인 행위를 통해 구현되는 ‘이벤트’를 통해 자신의 분석철학과 노장사상에 대한 탐구의 결과를 작품으로 실현해 왔다.

이건용

이승택의 선구적인 실험작업들은 1960~7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전위적 위상을 점하고 있다. ‘반개념’과 ‘비조각’을 주요한 창작이념으로 하고 있는 이승택의 초기작업은 바람, 물, 불 등의 비정형적 재료들을 활용하거나 돌과 같은 정형적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물성을 탈각시켜내고 있다. 또한 그의 독특한 작업방식은 샤머니즘과 같은 전통적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내거나 일상을 차용해내는 방식을 구사하며 ‘형태보다는 상태’를 창조해 내고 있다. <바람-민속놀이>,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붙은 화판>, <종이나무>, <묶은 돌>등은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목구(木口)놀이>등과 같이 자연이나 일상의 상황을 자신의 작업 속에 차용하는 ‘개입’의 개념 역시 전통 조형개념인 ‘차경 借景, appropriative landscape’의 현대적 변용으로 이해된다.

이승택

박현기는 《대구현대미술제》의 주축 멤버이며, 국내 비디오아트의 1세대 작가이자 미디어 아트의 개척자로 평가된다. 1979년 제작된 <무제 tv돌탑>, <무제 tv어항>등은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쌓여진 돌탑의 일부가 된 TV모니터에는 돌탑의 연장선상에 놓일법한 돌의 이미지가 담겨 있고, 어항 내부의 유영하는 물고기들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TV모니터는 오브제이면서 또한 외부 환경과 연결된 이미지로서 절묘한 이중성을 가진다. 그는 지속적으로 물, 돌, 불 등 근원적 요소들을 소재로 하여 오브제와 영상이미지를 접목시켜 실제와 가상의 현존성을 탐구하는 다양한 작업을 펼쳤다. 돌탑, 만다라 등의 전통소재를 통해 전통철학을 현대작품으로 구현하였다.

박현기

박석원은 20대 초반 국전에서 6회 연속 특선 및 국회의장상을 수상함으로써 보수적 국전에서 추상조각의 입지를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 실험적인 추상조각가로서 전위그룹인 《AG》에 참여하였고 《파리비엔날레》나 《상파울로비엔날레》에 국제적 경향의 입체작업들을 출품하였다. <핸들>은 출입문을 여닫는 일상적 오브제를 확대하여 일상성을 탈각시키고 있다. 초기의 입체작업들을 통해 공간과 사물, 공간과 환경적 요소에 대한 관심을 조형화하였다. 천과 목재를 사용한 초기 설치작업 <4개의 그림자>는 천 위에 실재 목재를 세우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형성되는 목재의 그림자를 화면에 그려 넣음으로써 공간이나 사물의 절대적 위치와 위상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박석원

신영성은 1985년 <난지도> 그룹의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오브제뿐만 아니라 행위예술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며 인간성의 회복을 꿈꾸는 작업에 관심을 가졌다. 신영성은 인간을 기계로 전락시키며 규격화 할 수 있다는 서구자본주의의 과학기술문명에 환멸을 느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가치는 서열화되며 선과 악으로 분류되었다는 인본주의 문명의 모순과 부조리에 절망했다. 1985년, 신영성은 망치와 전기톱으로, 불과 인두로, 시계•선풍기 등 기존의 폐품들을 처참하게 망가뜨렸다. 시계는 기능이 망실되고 해체되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져 버린 선풍기는 생명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폐품은 존엄과 고귀가 빠진 소외되고 폐기된 인간의 모습으로 은유 되며 상징화 되었다.

신영성

성능경은 1968년 《한국현대작가초대전》 및 제 2회 《ST》전 등을 출발로 작가활동을 시작하였다. 성능경의 초기 작업들은 비판정신과 개념성이 매우 강한 것이었다. 그는 주로 신문의 기사를 면도칼로 오려낸다. 언어학과 기호학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일상과 사건을 매개하는 신문의 언어를 부정함으로써 언론매체가 가지는 지배적 정보나 담론을 형성하는 권위적 시스템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신문; 1974.6.1이후 (newspapers; from june 1, 1974, on,)>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기사들을 오려내어 플라스틱 함에 넣고 오려진 신문을 벽에 붙이는 작업을 매일 반복함으로써 사실과 진실 사이에 언론이 빚어내는 허구성을 고발하며, 이에 대해 몸으로 항거한다.

성능경

육근병은 1981년에 창립된 《TARA》그룹에서 활동하였으며, 조각과 오브제를 비롯한 영상 실험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흙으로 뒤덮인 무덤 속에 눈 영상이 작은 모니터에 담겨 상영되는 형상은 육근병의 대표작업이다. 그가 어릴 때 간솔 구멍으로 옆집을 바라보았던 경험으로서의 눈, 미술의 시각적인 눈, 감성에 대비되는 이성의 눈, 역사를 직시하는 눈 등의 다양한 해석이 뒤따른다. 비디오아트를 통해 진척시켰던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화두는 한국에서 보다 세계에서 먼저 바라보았다. 육근병의 무덤의 눈은 땅 위에서 벌어진 그러한 여러 가지의 일들, 그의 기억 속에 찍힌 일이나 그 자신이 직접 경험치 않았더라도 먼 과거로부터 의식 속에 전해진 것을 틀림없이 보고 있을 것이다.

육근병

<기성문화에 대한 장례식>
이 필름은 1970년 8월 15일 <제4집단>에 의해 시도된 거리 퍼포먼스를 44년만에 제4집단의 통령이었던 작가 김구림의 고증을 거쳐 재연한 것이다. 전방위 전위문화집단이었던 <제4집단>은 기성문화를 모순과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4개 조항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기성문화에 대한 장례행렬을 앞세운 가두시위 도중 도로교통방해죄로 이 이벤트는 중단되었다. 이 행사로 인해 김구림이 불온분자로 몰리면서 조직이 해산된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1970년 6월 출범했던 제4집단은 2개월여의 짧은 활동을 마감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제 4집단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무》동인, 《신전》동인, 《오리진》동인의 3개 동인들의 연합전인 《청년작가연립전》이 1967. 12. 11~16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오리진》의 기하학적 추상 작업 이외에 주로 오브제와 입체작업 등 ‘탈추상 회화’가 주종을 이루었다. 전시기간 중 《무》동인, 《신전》동인 멤버들에 의해 진행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은 평론가 오광수씨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핵우산을 상징하는 비닐우산 주위를 동학혁명을 상징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부르며 돌다가 촛불을 비닐우산에 꽂고 종국에는 우산을 찢는 행위가 주된 내용이다. 이 해프닝은 순수한 인간정신을 상징하는 촛불과 동학가요를 연계시켜 사회개혁정신을 암묵적으로 드러낸 최초의 집단 해프닝으로 평가된다.

청년작가연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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