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전시형] 600년 경기도 인물 - Part 3

경기문화재단

독립과 건국, 근대 여성

여운형 呂運亨 1886~1947

독립운동가, 정치인. 호는 몽양. 출생지인 양평에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이념이나 정파의 이익보다는 민족의 자주적 독립에 헌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독립운동 시기 여운형은 어떤 자리에서도 세계적 관점에서 한국의 문제를 논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식견과 언변이 뛰어났다. 1918년 신한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29년 일제에 체포된 후 국내에 압송되어 3년간 복역했다. 그 후 13년 동안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1944년에는 건국동맹建國同盟을 결성하여 한국의 독립을 준비했다. 해방 이후 여운형은 김규식 金奎植과 함께 미국과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를 일단 받아들인 위에서 좌우합작에 의한 남북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1946년에 『뉴욕타임스』, 『AP통신』 등이 여운형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여운형을 ‘한국의 위대한 민주주의자’, ‘한국의 진보적 실력자’ 등으로 평가했다. 여운형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보여서가 아니라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언제나 세계평화의 관점에서 한국의 문제를 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남북한의 정치가 그 대부분이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를 얻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을 뿐, 민족의 자주적 독립에 대해서는 오히려 관심이 적었다. 여운형은 그를 시기하는 다른 정파에 의해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되었다.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관이며 주한미국총영사인 윌리엄 랭던 W. Langdon 은 여운형이 죽은 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몽양이 비명에 숨졌을 때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종합하고 분석함으로써 내가 도달한 결론은, 몽양이 개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소련보다는 미국에 더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들 양국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소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
(이정식,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여운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조소앙 趙素昻 1887~1958

독립운동가, 정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 본명은 조용은 趙鏞殷. 출생지인 파주에서 생가복원과 기념공원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뛰어난 이론가이자 합리주의자 , 현실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방 후 임시정부의 법통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김규식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협상에 실패하자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1950년 5월 제 2 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지만,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58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민족은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과거 30여 년 피의 역사를 재현하여 한국을 대신 통치하는 어떤 세력에 대해서도 반드시 반항을 계속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을 국제공관 하에 두는 것은 원동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중략) 위임통치와 같은 구식의 제도로 전후 약소민족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은 결코 미국의 대표적인 여론이라 할 수 없으며, 또한 중국, 소련,영국 등 다른 나라가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들 나라들은 태평양전쟁이 마무리 된 뒤 최대문제는 원동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문제이며, 이를 위한 유일한 방안은 바로 한국과 중국의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고 영토의 완정(完整)을 보장하여 자유롭게 발전할 기회를 제공하는 길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후[戰後] 한국의 국제공관[國際共管]에 대한 조소앙의 반대담화 중에서, 1943년 2월 1일)

안재홍 安在鴻 1891~1965

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역사가. 호는 민세. 평택에 고택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에서 활동한 몇 안 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신간회 新幹會; 민족통일을 목적으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1927년 함께 결성한 민족운동 단체 창립에 간여했고,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으며,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65년 북한에서 사망했다.

“민세 안재홍 선생은 민족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역사가로, 정치인으로 그 분야마다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는 고절의 국사였다. 우리의 풍토와 역사적 조건 속에서 민족의 살길을 찾으려 고심한 그 독자적인 사상, 외세 강점 전후 9차례에 걸쳐 7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른 그 도저한 행동, 이 모든 것이 선생의 상을 우리 현대사에 흔치 않은 민중지도자의 한 분으로 부각 시킨다.” (사학자 천관우)

“그는 천성이 학자이다. 언론인이어서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야심이 없던 그는 민정장관이 되고서도 다른 정치인들처럼 자리를 이용해 정치자금을 마련하거나 자파 세력을 부식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거짓이 없고 순정한 인간으로, 또 온갖 고초를 겪은 민족지도자로 존경받기는 했으나, 한국적 정치 풍토에서 정치인이면 으레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할 권모와 술수, 당략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고 일제 수난기와 해방 후의 거센 파도 속에서 시대적 희생자로 인생을 마친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언론인 송건호)

신익희 申翼熙 1894~1956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해공. 출생지인 광주廣州에 생가가 있다.
신익희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지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에 앞장서고 남한 단독정부를 주장하며 이승만과 행보를 같이했다. 초대 국회의원으로 1948 년 7 월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후 대한국민당을 창당할 때 이승만과 부딪치면서 1949년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김성수,조병옥 등과 함께 야권을 이끌었다. 1956년 민주당 구파의 수장으로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한강 백사장 연설에 30만 명을 운집시키는 등 선전했으나, 선거를 열흘 앞둔 날 기차 안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185만여의 ‘추모표’를 얻었다. 1962년 대한민국 수립 과정에서의 그의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나라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야 하고(國家須完全獨立 ; 국가수완전독립). 민족은 철저히 해방되어야 하며(民族須澈底解放 ; 민족수철저해방). 사회는 필히 평등하여야 한다(社會必須平等 ; 사회필수평등).” (해방을 앞둔 1945년 중국에서 쓴 글 중에서)

명성황후 明成皇后 1851~1895

조선 고종의 정비. 순종의 어머니. 여주에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일본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그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대체로 명성황후가 영리한 판단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있는 여성이었다고 전한다.

“왕비는 어떠한 종류의 접견이든, 결코 접견실에 왕과 함께 나란히 나타나는 일이 없었다. 부분적으로 국사(國事)를 뒤에서 조종하기는 하지만, 이 학식이 있고 사려 깊은 권력자 여군주(女君主)는 자신이 불가피하게 꼭 등장해야 하는 자리에서도 결코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 (프랑뎅,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태학사, 2002)

“왕비 전하는 장식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 것 같았으며, 또 거의 달지도 않았다. 북부지역의 젊은 여성들이 커다란 은 귀걸이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의 어떠한 여성들도 귀걸이를 하지 않았다. 왕비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제까지 그가 목걸이, 브로치, 또는 팔찌를 한 것을 본 일이 없다.(중략) 그를 반쯤 문명화된 국가의 왕비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옷 입는 취향은 아주 단순하고 지극히 세련된 것이었다. ”
(릴리아스 언더우드, 『상투의 나라』, 집문당, 1904)

나혜석 羅蕙錫 1896~1948

화가,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 언론인 . 아호는 정월. 수원 출생이다.
나혜석은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당대의 인습에 도전한 신여성으로 불린다 . 그는 19 세 때 이미 “현모양처는 있는데 왜 현부양부는 없느냐?”라며 여성 억압적인 사회에 불만을 표출한 바 있으며 평생 그에 맞섰다. 시대를 앞선 선각자,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봉건윤리의 희생자, 또는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찼던 한국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평가 등이 있다. 또한 인물화·정물화·풍경화·누드화·판화 등 서양화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도 있으며,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직접 전국을 여행, 답사하고 사물을 관찰한 노력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나 이제 깨도다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많은 암흑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인형의 노래』 중에서)

최용신 崔容信 1909~1935

농촌운동가, 교육자. 안산에 기념관이 있다. 샘골현재 안산시 본오동에서 최용신의 활용은 ‘지칠 줄 모르는 전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었다. 샘골은 교촌 敎村이긴 했으나 20가구 남짓의 작고 가난한 마을이었고, 마을 주민 대부분은 무학無學에 문맹이었다. 최용신이 도착해 처음 시작한 일은 샘골예배당에서 각종 강습반을 연 것이었다. 한글, 역사 , 산수와 재봉, 수예, 창가, 성경 등을 오전·오후·야간 세 반으로 나누어 종일 가르쳤다. 개량 농사법도 가르치려 했고, 위생 담화도 했다.

총독부에 의한 ‘문명화’와 농촌운동가 최용신에 의한 ‘문명화’ 사이에는 얼마나 큰 거리가 있었을까? 종자 개량이나 파리 박멸, 금주·금연과 미신 타파 등 몇몇 비슷해 보이는 주장이 있었지만, 최용신의 민족적이고 헌신적인 정신을 통해 전달될 때는 그마저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으리라. 더욱이 최용신은 고집스레 한글을 ‘ 국어 ’ 라고 부르고 한글 교육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일제 관헌과 충돌하였다. ('농촌계몽운동 주요인물’, 『문화원형백과 신여성문화』, 한국콘텐츠진흥원, 2004)

Gyeonggi Cultural Foundation
제공: 스토리

600년 경기도

기획 |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진행 |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팀
집필진 | 강진갑(경기대학교 교수)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이상대(경기개발연구원 미래비전실장)
이지훈(경기문화재연구원 책임연구원)
정형호(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지원 | 김태용, 최서연, 김영대, 이학성, 박소현, 성형모, 김호균, 김경민, 조수진(경기문화재단 홍보마케팅팀)

이 전시는 경기도 600년(1414-2014)을 맞아 우리 역사에서 핵심역할을 담당한 경기도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통일한국의 중심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약의 계기로 삼고자 제작한 『육백년 경기도』를 바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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