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역사, 그들의 기록

국립해양박물관

조선시대 고지도와 고문서에 남겨진 기록들을 통해 영토에 대한 인식, 해안지역의 지형과 지명, 선박의 이용 현황 등 당시 바다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고지도에 나타나는 우리 영토
지도는 단순히 지리 정보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그 시대의 인식체계 등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 있다. 서양이 조선을 기록한 해도와 항해기 등을 살펴보면 우리 해안선을 표시하기도 하고, 울릉도와 독도에 그들만의 명칭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에 비해 조선시대 해금 정책은 우리 바다에 대한 역사 기록들이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 고지도의 경우, 대부분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혼일강리역대국지도(1402)를 시작으로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다양한 종류의 지도가 만들어졌다.

죽도제찰 竹島制札
일본, 1837

일본 에도 막부가 1837년 니가타新潟県 해안에 세운 일종의 게시형 경고판으로 “울릉도와 독도 일대는 조선의 땅이므로 항해 및 어로를 금지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 이전부터 에도 막부는 죽도竹島, 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으나, 일본인 하치에몬의 죽도 도해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번 항해를 금지하는 두 번째 죽도 도해 금지령(1837.2.)을 내리면서 제작한 고찰高札이다.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은 여러 사료에서 독도松島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보았다.

삼국통람도설 三國通覽圖說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 일본, 1786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786년에 쓴 지리서이다. 이 지리서에 포함된 지도 중 「삼국통람여지로정전도三國通覽輿地路程全圖」에는 조선과 일본이 각각 황색과 청색으로 칠해져 구분되어 있다.

이 지도의 선 구분은 영토를 의미하는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을 표시한 것과 같은 황색으로 표시한 후 “조선 소유朝鮮ノ持之”라 표기하였는데, 이를 통해 그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국전도朝鮮國全圖」라는 지도에는 큰 섬울릉도에 죽도竹島라 표기하였고, 그 안에 독도를 그려 독도가 울릉도에 속한 섬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래쪽에는 ‘此島ヨリ隱州ヲ望又朝鮮ヲモ見ル (이 섬에서 은주오키섬가 보이고 또 조선도 보인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 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
일본, 1791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 1717~1801)가 1773년에 제작한 「일본여지로정전도日本輿地路程全圖」는 일본 지도에서 최초로 경위선이 기입된 채색지도이지만 일본을 제외한 지역조선, 독도, 울릉도은 채색되어있지 않다.

또한, 1791년 재간행된「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에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독도와 울릉도가 채색되어 있지 않고 또한 경위선 표시 위에도 있지 않아, 일본인들이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로청한명세신도 日露淸韓明細新圖
일본, 1903

1903년 일본제국 육·해측량부가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정확한 척도로 세밀하게 제작한 지도이다.

이 지도의 동해 부분에 조선과 일본의 영토 경계가 표시되어 있는데, 일본 측에서 일컫는 죽도竹島, 울릉도와 송도松島, 독도가 조선의 영토에 속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독도와 오키섬隱岐의 중간 해역에 한일 양국의 국경선이 그어져 있어 당시 일본 정부가 독도를 대한제국의 동쪽 끝으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붉은 선은 당시 이 지도를 소유했던 일본인이 대륙을 횡단했던 자신의 노정을 붉은색으로 표시한 것이다.

한글조선전도 朝鮮全圖
18세기 이전

현재까지 알려진 한글 지도 중에 가장 이른 시기의 지도로 추정된다. 미국의 유명한 한국학 학자인 게리 레드야드(Gari Keith Ledyard)가 논문으로 소개하면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해안지역의 지명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지도를 살펴보면 산은 삼각형 형태의 크고 작음에 따라 높이와 산맥을 짐작케 하고 있으며, 물길을 따라 지명과 서·남·동해의 주요 섬 및 포구가 기록되어 있다. 육로는 확인되지 않으며, 모든 물길을 내륙 깊숙하게 그려 물길에 따른 이동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울릉도·우산도독도·제주도 등 우리나라 섬 지역과 함께 대마도가 표기되어 있다.

동국지도첩 東國地圖帖
조선 후기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인 정상기(1678~1752)의 동국지도 수정본 계열 가운데 하나로 총 전도 및 각 지역지도 등 총 10매로 구성되어 있다.

정상기는 조선전도인 대전도大全圖와 도별지도道別地圖인 팔도분도를 만들었으며 일정한 축척을 사용하여 각 도별 지도를 합하면 전도가 되도록 고안하였다.

전도 및 지역도의 작성을 통해 조선 전기까지 한반도 북부지역 평안도, 함경도 지방의 부정확성을 극복하였다.

또한, 지도에 축척인 백리척을 표시하여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한 점, 축척이 약 1: 420,000으로 지도가 커짐에 따라 도로·봉수·지명 등을 상세하게 나타낸 점, 조선의 윤곽이 정확해진 점 등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영조(1757년)는 동국지도를 보고 감탄하면서 지도를 모사하여 관청에 비치하도록 명하였다.

여지도첩 輿地圖帖
18세기 후반

조선 시대 종합 지도책인 여지도는 모두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구식 세계지도부터 동부 아시아 지도, 조선팔도전도까지 다양한 지역의 지도가 실려 있다. 도별 지도의 함경도 부분에 1787년(정조1)에 신설된 장진도호부가 표시되어 있어 최소 정조대 이후에 지도가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물관 소장 여지도는 우리나라 팔도가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평안-함경 순으로 그려진 제 2책이다. 팔도지도는 당시 가장 정확한 지도 중 하나였던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축소하거나 거의 그대로 옮겼다.

함경도 해안지도 咸鏡道 海岸地圖
조선 후기

이 자료는 1870년대 이후의 함경도 지역을 나타낸 지도첩이다. 총 35면에 걸쳐 절첩식 형태로 제작하였으며, 함경도 덕원德源부터 단천端川까지 해안의 지형과 바다, 산, 마을, 섬 등을 표시하고 있다.

위 아래 방향에 모두 기록이 있는데 육지 쪽에서 바다 쪽으로, 바다 쪽에서 육지 쪽으로 서로 마주 보는 방향으로 필사되어 있다. 바다는 푸른색, 육지의 산맥은 초록색, 마을은 노란색으로 채색하고 붉은색 동그라미로 군郡·현縣·관아官衙·감영監營 등을 표기하였다. 지도 여백의 주기 사항은 거리, 육로와 수로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루며 수심에 대해서도 전수심前水心, 중양中洋, 2리 밖 수심 등 거리에 따른 바닷물의 깊이를 알리고 있다.

해좌전도 海座全圖
조선 후기

조선시대에 제작된 초기 판본으로 지도의 윤곽과 내용은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비슷하며 산줄기와 하천·호수·자세한 교통로 등이 동일한 방법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각 읍과 산천·도로·역·주요 사찰·진鎭·포浦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국토의 형태가 정확한 지도로 각 군현을 원형圓形으로 그리고 도별로 채색을 달리하였다. 지도의 여백에는 백두산·금강산·설악산 등 10여 개에 이르는 유명한 산의 위치와 산수에 대한 간략한 설명, 섬 정계비, 초량왜관 등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다. 이 지도는 울릉도 바로 옆에 우산도于山島가 그려져 있어 우리 해양영토 주권에 관한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밖에도 국토의 윤곽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고, 산세와 수세의 표현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압록강·두만강 연안과 서남해안 및 도서지방의 군사적 요지인 진·포 등이 상세하게 표시된 점도 주목된다.

팔도재안 八道在眼
조선 후기

조선시대에 사용된 휴대용 지도로서 한 면당 32면, 총 64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에는 ‘팔도재안八道在眼’이라 되어 있다. 양면 절첩식 형태로 제작된 목판 인쇄본이며, 앞면과 뒷면에 각각 4도씩, 경기·충청·전라·강원·경상·황해·평안·함경 8도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구성은 한 면 당 하나의 도에 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지명과 산천의 정보를 담은 지도 두 면, 역驛·진鎭·보堡·속오束伍·관管·산성山城에 대한 정보가 두 면이 있다. 나머지 네 면에는 인구와 관련하여 호戶의 수와 거민居民의 수, 농지 면적 그리고 병졸의 수를 비롯해 수군 현황과 거북선·맹선·병선 등의 숫자, 마지막으로 각 지역과 한양과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탁본 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拓本
조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태조(1395~1396) 4년 12월에 제작된 돌에 새긴 천문도석각 천문도이다. 이 자료는 국보 제228호 뒷면을 탁본한 매우 희귀한 자료이며, 글자·선·점의 형태가 각석보다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하늘, 별자리, 우주론, 제작 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고 가운데는 305개의 별자리와 1,467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조운의 기록
조운이란 현물로 거둔 각 지방이 조세를 선박으로 수도까지 운반하는 제도이다. 국가에서는 지방의 세곡을 수송하기 위해 강변에는 수운창, 해변에는 해운창을 설치하여 세곡을 모으고 선박을 준비시켜 매년 일정 기간을 정하여 중앙의 경창에 수송하였다. 또한 조운에는 출발지점, 기항, 도착지점이 있어 이 세 지점을 연결하는 선을 조운 항로로 규정했다. 조운은 나라 운영에 필요한 물자를 대량으로 수송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경국대전(1485)을 비롯하여, 속대전(1746)과 대전통편(1785) 등에 운행 규정이 빠짐없이 수록될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다.

천하지도첩 天下地圖帖
19세기

조선전도와 8도를 포함 총 11첩이며, 채색필사본이다.

지도에는 각 읍과 산천∙도로∙역∙주요 사찰∙진∙포 등의 내용과 우리나라 수군水軍 숫자와 각 도별 첨사, 만호의 방병선防兵船, 전선戰船 숫자가 각각 수록되었다. 지도의 붉은 선은 조운로로 추정된다.

지도 뒷면의 가구 수 등 통계자료는 초기의 자료로 보이지만, 필체나 먹의 농담으로 볼 때 지도의 제작 시기와 동일한 시기에 표시된 것으로 보이며 안료나 지명으로 볼 때 19세기 후반의 지도로 추정된다.

조행일록 漕行日錄
임교진 林喬鎭 | 1863

조행일록漕行日錄은 1863년에 전라도의 세곡을 운반하였던 과정을 기록한 일기다. 책임자는 함열현감 겸 성당창 조세 영운관으로 임명받은 임교진(林喬鎭)이었다.

이 일기에는 이 일정을 중심으로 임교진이 부임한 뒤 세곡을 모으는 과정과 서울에 도착한 뒤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등 여러 관청에 세금을 납부하는 일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에서 거두어들인 곡물은 관리의 녹봉祿俸과 군인들의 급료를 비롯한 재정의 바탕이 되었기에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은 국가의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임교진의『조행일록』은 조선시대의 조운 행정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높다.

선혜청 관문 宣惠廳 關文
1867

선혜청에서 충청도 관찰사에게 보낸 감결 문서이다.

조선시대 대동법에 의해 세미를 싣고 서울로 오다가 세선이 침몰하자 옥구현감이 전라감사에게 보고, 전라감사는 호조에 장계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전라, 충청, 선혜청 등에서 해결이 안되어 내린 문서이다.

해도지 海道誌
조선 후기

장흥 출신 위백규(魏伯珪, 1727∼1798)의 저서로 알려진 『해도지』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첫 부분에 장흥 주변의 섬 크기, 호수, 전세, 진상품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수로水路도 표기되어 있다. 뒤이어 장흥에서부터 평안도까지 서해안 수로를 따라 당진, 영암, 나주, 칠산해, 수원, 황해도, 평안도의 역참이 기록되어 있다. 동해안 수로에는 장흥부터 시작하여 흥양, 순천, 고성, 남해까지의 역참을 연이어 나열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선박의 종류와 조류나 물 때에 대한 정보도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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