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Centre des monuments nationaux (CMN)

이 전시회는 《레 미제라블》의 완결편이 출판되었던 연도를 기념하여, 프랑스국립기념비센터가 주관합니다

기념비적인 프랑스 작가
1802년 2월 26일에 태어나 1885년 5월 22일에 세상을 떠난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이면서, 동시에 뚜렷한 사회의식을 지닌 지성인이자 거침없는 언변으로 유명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과 작품에 영향을 준 프랑스의 여섯 가지 기념물을 통해, 이 위대한 인물을 함께 탐구하여 봅시다!

뛰어난 작가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가 낳은 가장 걸출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그의 걸작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1831)와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1862)은 위고가 서정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시집들을 발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희곡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위고는 낭만주의 연극이론을 발전시킨 극작가이기도 했습니다. 《크롬웰 (Cromwell)》(1827), 《에르나니(Hernani)》(1830), 《뤼 블라스(Ruy Blas)》(1838)와 같은 작품들은 당대에도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위고는 이와 같이 당대 파리 문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184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emie française)에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은 브장송에서 시작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1802년 2월 26일, 빅토르 위고가 브장송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레오폴드 브장송에서 주둔 중인 프랑스 장군이었던 레오폴드 위고(Leopold Hugo)와 소피 트레부셰(Sophie Trébuchet)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 빅토르 위고와 동시대 사람인 시계공 오귀스트-뤼시엥 베리떼(Auguste-Lucien Vérité)는, 브장송의 생 장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웅장한 천문 시계를 설계하였습니다.

조숙한 천재

어린 시절, 빅토르 위고는 아버지의 파견지를 따라 유럽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1812년 그의 부모가 갈라서게 되자, 위고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글쓰기에 헌신했습니다.

>> 빅토르 위고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문학 작품과 정치에 대한 헌신의 바탕이 된 6개의 주목할 만한 프랑스 기념물에 대하여 알아보십시오: 7월 기념비(colonne de Juillet), 그랑드 아르메 기둥(la colonne de la Grande Armée)과 판테온(Panthéon).

몽생미셸(Mont-Saint-Michel): 경이로움의 원천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의 여러 지방을 탐사할 목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1836년, 노르망디에 도착한 그는 중세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순례지로 유명한 몽생미셸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의 서신과 작품에서 보이는 몽생미셸에 대한 수많은 묘사는, 그가 이 기념물에 얼마나 깊게 매료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곳에 머물면서 그는 아내인 아델(Adele)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어제 나는 몽생미셸에 다녀왔소. 인간이 바위 위에 건물을 쌓고, 또 자연이 건물 위에 바위를 쌓는 것처럼, 이곳은 최고의 찬사가 쌓여야 마땅한 곳이오. "

"이 몽생미셸이란 곳은 정말이지 기묘하오! "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바다의 푸른 수평선, 지구의 초록 지평선, 구름, 공기, 자유, 온갖 날개를 한 새들, 온갖 돛을 단 보트들 같은 것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소.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낡은 벽의 철창 사이로 창백한 죄수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거요. 나는 여기에서처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잔혹한 대조를 이토록 강렬하게 느낀 적이 생전 없었소." ».
1836년 6월 27일, 빅토르 위고가 루이스 베르탱(Louise Bertin)에게 보낸 서신

>> 몽생미셸은 708년 대천사 미카엘을 기리는 예배당이 건립된 이래로 세계의 주요 순례지 중 한 곳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몽생미셸대수도원의 회랑 안에 있습니다. 지상 80미터 높이에 위치한 이 수도원은 10세기경 산 정상에 지어졌으며, 1790년까지도 베네딕트 수도사들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언급

빅토르 위고는 1874년에 출판된 그의 마지막 소설 《93년(Quatrevingt-treize)》에서 몽생미셸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의 뒤에는 마치 교황관같이 솟은 성당과 흉갑과도 같은 그것의 요새가, 바위산을 도와 성당과 마을의 무게를 지탱하기라도 하듯 동쪽 편에 우뚝 솟은, 하나는 둥글고 하나는 각진 두 기의 탑과 함께 거대한 검은색 삼각형을 이루며 서 있었다. 사막에 쿠푸(대피라미드 건설자로 추정되는 파라오)가 있는 것처럼, 바다에는 몽생미셸이 있다. »

빅토르 위고의 1874년 작 《93년》에서 발췌

>> 여러분에게도 몽생미셸을 거닐면서 빅토르 위고가 소중히 여겼던 이곳의 골목들과 만을 둘러보고 감탄할 기회가 있습니다!

노트르담 드 파리: 소설이 기념물을 살리다
1831년에 처음 출판되고 1832년에 결정판된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는 노트르담의 꼽추 종지기인 콰지모도, 부주교 프롤로, 집시 에스메랄다와 시인 그랭그와르 등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삶이 교묘하게 서로 뒤얽혀 있는 작품입니다. 한편, 이 소설의 배경인 15세기 파리의 성당 역시 주요한 등장 배경 중 하나로써, 위고는 시적 감성을 담아 때로는 품위 있게 때로는 신랄하게 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Quasimodo)는 노트르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이 불구의 존재는, 성당의 부주교인 프롤로(Frollo)에게 입양됩니다. 그는 자신의 기형적인 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노트르담에서 자라, 종지기가 됩니다. 어느 날 그는 부당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집시 에스메랄다(Esmeralda)를 성당에 숨겨줍니다.

"누군가는 그를 보고 산산조각이 난 거인의 몸뚱이를 형편없이 맞춰놓은 것 같다고 할 것이다 [...] 그것은 종지기인 콰지모도였다!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였다."

빅토르 위고의 1832년 작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발췌.

문학 유산의 대표작

소설의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성공은 여전히 ​​이것이 프랑스 문학이 낳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된 바 있으며, 수차례 각색되어 극본으로 만들어지거나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 이 판화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1844년 판에 수록된 삽화입니다. 그림에서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위협하고 있는 성당의 부주교 프롤로에게 달려들고 있는 중입니다.

"이 고색창연한 건축물을 뒤덮은 그 모든 표면과 돌에는 한 나라의 역사와 또 과학과 예술의 역사가 한 장씩 새겨져 있다... 노트르담에는 그 모두가 뒤섞이고, 합쳐지고, 혼합되어 있다. 파리의 오래된 성당 중에서도 중앙에 자리 잡은 이 대성당은, 각각 다른 짐승의 머리와 사지, 궁둥이를 가져다 한데 뭉쳐놓은 키메라와도 같다. »
빅토르 위고의 1832년 작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발췌.

"건축 양식이라는 책에서 대성당의 정면과 같이 훌륭한 페이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눈앞의 광경에는 연속적으로 펼쳐진 세 개의 깊은 고딕 양식의 출입구와, 풍부한 필치로 조각된 스물여덟 개의 위풍당당한 조각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중앙의 장미 문양 창 측면에는 신부 옆에 선 부제와 차부제처럼 두 개의 창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그 가느다란 기둥들 위에 올려진, 무거운 지지대를 받치는 세 잎 모양을 한 아치 형식의 우뚝 솟은 연약한 화랑을 지나면, 마침내 뾰족한 석탑 지붕을 한 두 개의 거대한 탑이 웅장한 건물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5층 높이로 묵직하게 쌓아 올려져 있다. 그것들은 덩어리째 뭉쳐있는 듯 보이지만, 무지막지할 정도로 웅장한 건물 전체와 대담하게 맞닿아 있는 그것들의 조각상들, 조각술과 새김무늬는 다른 것들과 분명히 구별될 만큼 개성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그 모습 그대로, 돌이 만들어내는 광대한 교향곡 그 자체이다. 이것은 하나의 인간과 국가가 이룬 훌륭한 업적임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구석도 있다...마치 《일리아드》와 이것의 누이 격인 낭만 소설들처럼... »
빅토르 위고의 1832년 작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발췌.

>> 이 굉장한 성당의 발치에서 여전히 울려 퍼지는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가 들리시나요?

빅토르 위고, 문화 유산의 수호자

프랑스의 문화유산에 매료된 빅토르 위고는 그의 작품에 이러한 유산들을 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초반에 프랑스에서는 점점 더 많은 혁명 세력이 공공 기물을 파손하는 "반달리즘" 행위를 일삼게 되면서,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도 그 희생양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샤토브리앙(Châteaubriant)과 같은 일부 작가들은 자신들을 역사의 산증인으로 여겼습니다. 이윽고 7월 왕정(1830-1848) 초기에 최초의 유산 보호 기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중세 시대의 예술은, 프랑스 예술의 정수 및 위엄과 함께 국가적 통합을 이룬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빅토르 위고의 위대한 작품인 《노트르담 드 파리》의 막대한 성공은 여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에 따라 유산을 보호하는 최초의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위고는 "돌로 만든 책"이라는 말로 노트르담을 묘사합니다.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는 "그 아름다움의 나이를 일깨우듯 수백 년의 고색이 짙은", "강렬하며 위엄이 넘치는 성당"의 건축 양식을 옹호하고 있으며, 막 지어진 유산 보호 기관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 그 뜻을 함께했습니다.
1830년 초에는 역사 유적의 조사관인 루도빅 비테(Ludovic Vitet)가 고대 및 중세의 유적을 조사하는 일에 임명되었습니다. 4년이 지난 후에는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érimée)가 그의 뒤를 잇습니다. 두 사람은 1837년에 국가에 의해서 지정되는 "역사유적위원회(Commission des Monuments Historiques)"의 위원이 됩니다.
3년 후, 고대 기념물의 "분류"가 시작되었으며, 최초로 "1840년 목록(liste de 1840)"이라는 결실을 맺게 됩니다.
1844년에는 건축가 장 밥티스트 라쉬(Jean-Baptiste Lassus)와 유진 비올레르뒤크(Eugène Viollet-le-Duc)가 도입한 노트르담 복구 프로젝트가 채택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재무 법안이 의회에서 가결되었습니다.
노트르담 드 파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확실히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오늘날까지도 그 장엄함과 고귀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건축물로서... 시간의 영향과 인간의 손으로 이 위대한 기념물에 가해진 갖은 수모와 훼손을 목도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애석함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빅토르 위고의 1832년 작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발췌.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 최후의 날을 앞둔 사형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다
콩시에르주리는 시테 섬의 팔레에 위치한 옛 교도소로, 1829년에 출판된 《사형수 최후의 날(Le Dernier Jour d'un Condamné)》의 젊고 호전적인 느낌의 배경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책은 왕정복고가 끝나갈 때쯤, 다음 해의 7월 혁명에 의해 폐위될 샤를 10세가 통치했던 시기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위고는 겨우 27세의 나이였지만, 이미 10년 동안 책을 발표해온 작가였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문학 작품을 넘어, 사형 제도에 대항하는 위고의 정치적 공약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의원이었던 빅토르 위고는 콩시에르주리의 지하 감옥을 재방문하게 됩니다.

뼈아픈 증언

한때 중세 시대 프랑스 왕들의 거처이기도 했던 콩시에르주리는 공포 시대 때 그 유명한 "혁명재판소"(1792-1795)의 감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콩시에르주리라는 이름은 사형과 밀접하게 관련지어져 왔습니다.

위고의 《사형수 최후의 날》(1829)에는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그의 재판 판결부터 콩시에르주리의 감옥에서 보낸 시간, 공공 장소에서 행해질 사형 집행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준비하는 것까지, 소설 내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위고는 익명으로 등장하는 이 남자가 교수대에 오르기까지 겪는 노여움, 두려움, 희망, 절망, 분노의 감정들을 독자들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착실히 안내합니다.
절제된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사형이 주는 폭력에 맞서는 이 훌륭한 탄원서는, 독자를 그의 절친한 친구로 만드는 시인이자 인류의 형제인 위고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콩시에르주리 감옥의 중심축이 되는 죄수들의 복도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교도관의 고함, 열쇠가 덜걱거리는 소리, 사슬과 쇠창살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 옛 "혁명재판소"의 지하 감옥을 거닐어 볼 수 있는 증강 현실 체험에 끌리시나요? 그렇다면 '히스토패드'를 들고 콩시에르주리를 방문해 보세요!

"축축하고 악취가 나는 지하 감옥의 벽과, 내 야간등이 뿜어내는 창백한 빛, 거칠거칠한 내 죄수복, 쇠창살 사이로 빛이 비치는 모자 밑으로 보이는 보초의 거무칙칙한 얼굴 - 이미 내 귓속에서는 이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형에 처한다!"

빅토르 위고의 1829년 작, 《사형수 최후의 날》에서 발췌

콩시에르주리와 빅토르 위고, 사형 제도에 맞서 싸우다

"이제 나는 포로의 신세이다... 나에게는 단 하나의 생각, 단 하나의 판결, 단 하나의 확신만이 있을 뿐이다. '사형'이 바로 그것이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끔찍한 생각이 유령처럼 항상 내게 따라붙는다. "
빅토르 위고의 1829년 작, 《사형수 최후의 날》에서 발췌

>> "이름의 방(La salle des noms)" : 콩시에르주리에 있는 이 방은 혁명재판소 이전에 있었던 죄수 4200명의 이름 목록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사형 제도에 대항하여 자신의 글을 넘어선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소설을 넘어서서 그는 많은 정치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1848년에 의원으로 선출된 위고는 사형수의 감옥을 방문하기 위해 다시 한번 콩시에르주리를 찾아갑니다. 이 이야기는 사후에 출판된, 그의 인생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들을 담은 《목격담(Choses vues)》이라는 모음집에 실리게 됩니다. 1851년 11월, 위고는 이후에 나폴레옹 3세라 불리게 될 루이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반기를 든 죄로, 벨기에로 추방되기 전 콩시에르주리에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제2제국이 몰락하기 전까지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 콩시에르주리를 방문하여 빅토르 위고의 책을 더욱 실감나게 읽고 싶지 않으십니까?

7월 기념비(The colonne de Juillet): 파리의 비참한 사람들과 바리케이드
오늘날, 바스티유 광장은 꼭대기에 자유의 수호신(Génie de la Liberté) 조각상이 올라가 있는 기념비적인 이 기둥이 없다면, 그 진가를 온전히 인정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을 쓸 때만 해도 상황은 좀 달랐습니다...

기둥 전에는 '바스타유의 코끼리'(L' ÉLÉPHANT DE LA BASTILLE)가 있었다

1808년에 나폴레옹은 바스티유 광장을 장식할 심산으로, 거대한 코끼리 조각상이 올려진 분수대를 건설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금 부족과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작업이 지연되면서, 코끼리 조각상은 나무와 회반죽으로 만든 모형 단계로 남아있어야 했습니다.
그 동물에 매료된 빅토르 위고는 그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넌지시 이 코끼리를 언급합니다. 거리의 아이인 가브로슈는 코끼리 모형의 폐허를 자신의 은신처를 삼습니다.
"이 황폐하고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길모퉁이에서 소년은 거상의 광대한 이마와 코, 몸통에 붙은 방어 시설과 탑, 그것의 거대한 엉덩이와 기둥처럼 우뚝 선 네 개의 발이,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놀라우리만큼 흉측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대중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거무튀튀하고, 기이하면서도 거대한 존재였다. 그 짐승은 바스티유의 보이지 않는 유령 옆에 똑바로 서 있는, 눈에 보이는 거대한 허깨비였다."

오늘날 바스티유 광장에는 7월 기념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7월 혁명의 결과로 권력을 잡게 된 루이 필립(Louis Philippe)은 혁명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의 설립을 추진하였습니다. 이것은 1840년에 준공을 마쳤습니다.
이전의 기념비와 비슷한 점을 눈치채셨나요? 기둥의 토대는 바로 코끼리를 담았던 분수대의 토대와 일치한답니다!

>> 사진을 둘러보면서 여러 각도에서 기둥을 관찰해 보세요!

그랑드 아르메 기둥(The column of the Grande Armée): 정복 시대의 시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8년에 영국 적과 마주 보고 있는 이 항구에서, 불로뉴 (Boulogne) 군사 기지를 설립하였습니다. 그의 대육군은 1804년에 바로 이 항구에서 아우스터리츠를 향해 전진했습니다. 군대가 떠나기 전, 나폴레옹은 2,000개가 넘는 레지옹도뇌르 훈장(Leonion d' honneur)을 배부하였습니다. 이 기둥은 그 엄청난 보상을 기리며 세워진 것입니다. 한편 이 기둥은 루이 필립의 통치 기간인 1841년까지는 완공되지 못했습니다.

비밀의 시

방위군은 위밀르(Wimille)에 있는 기둥의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빅토르 위고에게 찬송가를 써 줄 것을 의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영국에 도발하는 행위로 판단했던 행정부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1959년에 나폴레옹 동상이 제거되는 과정에서, 인부들은 기둥 안에 숨겨져 있던 납 상자 한 짝을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분실된 줄만 알았던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시편이 들어있었습니다!

>> 여기에 나폴레옹이 영국에게서 등을 돌렸던 그랑드 아르메 기둥의 정면 모습이 있습니다.

판테온의 빅토르 위고: 수 세기의 전설
1885년 5월 22일, 빅토르 위고는 83살의 나이에 자신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빅토르 위고. 이 작가의 명성은 그 당시에도 이미 따라올 자가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드물게도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습니다.

개선문도 조의를 표하다

판테온에 매장되기 전, 빅토르 위고의 송장을 담은 관이 개선문 아래에서 하룻밤 동안 전시되었습니다.

판테온: 최후의 안식처

빅토르 위고의 판테온 입성은 19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서 중대한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그로부터 4년 전, 살아있는 전설이 된 이 위대한 인물의 80주년 생일에 위고의 창가 아래에는 600,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아브뉴 델로(l'avenue d'Eylau)에 모였습니다. 1885년 5월 22일에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대중들은 감정적으로 상당히 동요하였고, 이는 제3공화국이 프랑스 혁명 중 시작되었으나 그 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위인 숭배를 다시금 장려하도록 이끌었습니다.

6월 1일, 수백만 명의 프랑스 시민들은 빅토르 위고의 최후의 안식처가 될 판테온인 생-제네비에브(Sainte-Genevieve) 성당으로 가는 길을 그와 함께하였습니다. 이름 석 자로 한 세기를 요약할 수 있는 이 위대한 인간의 영향력이라면, 앞으로도 이 기념물은 그 용도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역할을 도맡았던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무덤을 보러 매년 판테온을 찾는 70만 명의 방문객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작가였던 그의 모습에 주목하곤 합니다. 하지만 1885년에 공화국이 그에게 성대한 경의를 보냄으로써 마침내 인정 받았던 위고의 정치적 신념 역시 주목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한편 빅토르 위고는 항상 공화단원은 아니었습니다. 왕정복고 때는 정통주의자, 루이스 필립 통치 시절에는 오를레앙 왕가 지지자였던 위고는, 1851년 12월 2일 쿠데타 이후에는 나폴레옹 3세를 비난하는 세력에 가담하였으며, 공화국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공화국 지지와 제2제국을 향한 위고의 적대심 때문에, 그는 저지 섬의 채널 제도에서 1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해야 했으며, 이 때 전설적인 작품들을 여러 권 집필하였습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진정한 힘은 사형 제도와 싸우면서 널리 자신의 의견을 알렸던 그 열정에 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 빅토르 위고의 발자취를 따라 프랑스의 건축물들을 탐사해 본 우리의 여정은, 이곳 판테온 앞에서 끝납니다.
이 저명한 건축물에서 그의 무덤을 찾을 수 있으신가요?

제공: 스토리

여러분은 지금까지 빅토르 위고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준 프랑스의 여섯 가지 기념물을 둘러보셨습니다! 프랑스국립기념비센터 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거나, 기념물 방문에 관한 정보를 얻어 보세요. 또 저희 사이트 monuments-nationaux.fr를 방문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이 가상 전시는 프랑스국립기념비센터에서 주관하며, 콩시에르주리 및 판테온의 기여와 이미지 센터 팀 및 디지털 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미지는 Banque d' images des Monuments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Centre des monuments nation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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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스토리는 독립적인 제3자가 작성한 것으로 아래의 콘텐츠 제공 기관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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