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경기도 인물 - Part 2

경기문화재단

개혁사상, 문화예술

김육 金堉 1580~1658

조선후기의 문신, 유학자, 실학자, 사상가. 호는 잠곡. 남양주에 묘소가 있으며 평택에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있다. 가평 잠곡서원潛谷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육은 효종·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 추진하였으며 화폐의 보급에 힘썼다. 조선 최고의 경세가로 꼽힌다. 김육은 농민층 파탄이 원인은 과중한 과세라고 보아 이를 지양하고 과세 과정에서의 부정을 없앨 수 있는 근본 대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였다. 김육은 가평에서 직접 농사를 짓거나 여러 지방관으로 일할 때 직접 본 백성의 곤궁한 처지를 잘 이해하였고 국가 위기의 본질을 민생의 어려움에서 찾았다.

“대동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 ; 충청도)에 시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중략) 지금 시행한다면 한 명의 백성도 괴롭히지 않고 번거롭게 호령도 하지 않으며 면포 1필과 쌀 2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 『인조실록[仁祖實錄]』 중에서)

이익 李瀷 1681~1763

조선후기의 실학자. 호는 성호. 안산에 묘소와 사당, 기념관이 있다.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을 대성했다. 독창성이 뛰어났고, 항상 세무실용 世務實用의 학學에 주력했으며, 시폐 時弊를 개혁하기 위하여 사색과 연구를 거듭했다. 그는 획기적인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개혁방안들을 제시했으며, 현실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마련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농촌에 은거하면서 직접 양봉도 하고 닭을 기르면서 무실 務實의 중요성을 체험했다. 그의 실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경서 읽기는 실로 어렵다. 주자 이후에 나온 주해들은 중용과 대학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그 중에 틀린 주해가 있어도 고금이 모든 유학자가 이를 찾아내지 못하면서, 옛날 주해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의심하면 망해(妄解)로 하고 다른 서적과 비교하여 고증을 하면 죄과로 돌린다. 이런 버릇이 있으니 우리나라 학문이 뒤떨어짐을 면할 수 없다.” (『성호사설[星湖僿說]』중에서)

정조 正祖 1752~1800

조선 22대 국왕. 이름은 산 .. 화성에 묘소가 있으며 수원 화성을 건립하였다. 『일득록日得錄』 정조의 언행을 기록한 책을 보면 정조가 매우 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냥 읽은 것이 아니라 많은 깨우침을 얻기도 했다.

“우주 사이에 세 가지 통쾌한 일이 있다. 첫째는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진리를 배워서 성인이 펼쳐 놓은 깊고도 미묘한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둘째는 널리 인용하고 밝게 분별하여 천 년의 긴 세월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시원스럽게 해결하는 것이다. 셋째는 호방하고 힘찬 문장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난 글을 써내어 작가들의 동산에서 거닐고 조화의 오묘한 비밀을 캐내는 것이다.”

“정황이나 법조문에서 털끝만큼도 의심을 일으킬 만한 거리가 없다고 해도 의심할 것이 더 이상 없는 곳에서 또 의심을 일으켜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조선후기의 실학자. 호는 사암. 자호는 다산·탁옹·태수·자하도인·철마산인. 당호는 여유. 남양주에 묘소, 생가, 기념관 등 유적지가 있다.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경제·역리·지리·문학·철학·의학·교육학·군사학·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500여 권에 달하는 이 저술들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우리의 고전이 되고 있다.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이다. 그러므로 크게 탐하는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까닭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중에서)

“참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며, 문(文)에 능하고 무(武)에 능한 것, 이 모두 해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찌 옛 사람의 글귀나 따서 글을 짓고, 벌레나 물고기 등류의 해설을 하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禮貌)를 익히는 것만이 선비의 학문이겠는가.” (『속유론[俗儒論]』 중에서 )

허균 許筠 1569~1618

조선중기의 학자, 문인, 정치가. 호는 교산·성수. 용인에 묘소가 있다.
타고난 문장력을 지닌 문필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홍길동전』의 저자이며, 여성시인인 허난설헌 許蘭雪軒이 그의 누나이다. 당대 명가의 후예로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행했다. 또한 굴곡 있는 삶을 산 정치인이자, 자기 꿈의 실현을 바라던 사상가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 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 없었음일레라... 내 분수가 벼슬과는 벌써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하랴.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이나 써라. 나는 내 인생을 나대로 살리라.” (『문파관작[聞罷官作]』 중에서)

김정희 金正喜 1786~1856

조선후기의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실학자. 호는 추사·완당·예당·시암 등. 과천에 추사박물관과 과지초당이 있다.
한국사에서 아호 雅號가 가장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확인된 것만 총 72개이다. 이름이 많은 이유는 그림마다 다른 별명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유명하다. 그림에도 능했는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어릴 때부터 붓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여 주변 사람들이 훗날 명필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고 전해진다. 말년에는 과천에 과지초당 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71세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했다고 한다.

강세황 姜世晃 1713~1791

조선후기의 문인, 화가, 평론가. 호는 표암·첨재·표옹·노죽·산향재. 안산에 거주하였다. 강세황은 그림 제작과 화평 畵評활동을 주로 했다.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풍속화·인물화 등에도 관심을 보임으로써 다양한 회화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강세황은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출세를 포기하고 32세에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사한 뒤 30년 동안 살았다. 김홍도의 스승으로도 알려졌다. 61세 이후 뒤늦은 관직생활을 했으며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 지금의 서울시장까지 역임했다.

Gyeonggi Cultural Foundation
제공: 스토리

600년 경기도

기획 |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진행 |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팀
집필진 | 강진갑(경기대학교 교수)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이상대(경기개발연구원 미래비전실장)
이지훈(경기문화재연구원 책임연구원)
정형호(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지원 | 김태용, 최서연, 김영대, 이학성, 박소현, 성형모, 김호균, 김경민, 조수진(경기문화재단 홍보마케팅팀)

이 전시는 경기도 600년(1414-2014)을 맞아 우리 역사에서 핵심역할을 담당한 경기도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통일한국의 중심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약의 계기로 삼고자 제작한 『육백년 경기도』를 바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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