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4월 - 1943년 7월

희생자의 평범했던 일상...

Auschwitz-Birkenau State Museum

자그엥비에 동브로스키에(Zagłębie Dąbrowskie)에서 아우슈비츠(Auschwitz)로의 유대인 강제 이송

해방 이후 비르케나우(Birkenau)의 폐허 속에서 독특한 사진을 모아 놓은 상자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곳은 가스실에서 살육당한 유대인의 짐을 풀어 분류했던 '캐나다'라는 별명이 붙여진 지역이었습니다. 웃고, 행복해하며, 생각에 잠겨 있고, 장난기 어려있는, 감성적인 수백 명의 얼굴. 결혼식, 출생, 가족 그리고 친구와의 휴가.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버린 세상, 홀로코스트 전의 폴란드 유대인의 일상이 필름에 포착되어 불멸성을 얻은 것입니다. 영원의 기록으로 남은 약 2,400장의 사진 대부분은 자그엥비에, 즉 벵진(Będzin), 소스노비에츠(Sosnowiec) 및 주변 지역에서 온 유대인 가족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이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상황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찍은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이 많았습니다. 아마추어가 찍은 사진이 있는가 하면, 전문 사진사가 찍은 사진도 있었고, 스냅 샷 사진과 엽서도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신혼여행, 가족 모임 등 특별한 행사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 생활의 모습 즉 거리를 걷는 모습, 뛰노는 아이와 여유로운 순간의 즐거움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진들은 분명히 같은 차량에 실려 함께 강제 이송된 사람들이 수용소로 가져온 것으로서 한 가족이었거나 어쩌면 한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져온 것일 수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노역을 했던 수감자가 상자 또는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깜빡 잊어버린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브로데르(Broder) 가족과 코흔(Kohn) 가족

브로데르 부부와 여섯 자녀, 즉 브르노카(Bronka), 레입(Lejb), 엘리 아론(Eli Aron), 하다사(Hadasa), 헤노흐(Chenoch) 그리고 이드카(Idka)는 벵진의 마와호스키에고(Małachowskiego) 거리 52번지에서 살았습니다. 거기는 또한 그 부부의 문구점 겸 약국/담배 가게가 자리 잡고 있었던 곳입니다.

20년대 브로데르 가족은 팔레스타인을 여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파(Jaffa)에 증류주 공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행 준비를 모두 마친 상황이었는데 출발하기 얼마 전 아버지한테서 전보 한 통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일하던 중에 철제 통이 넘어지면서 다리를 덮쳐 심하게 부상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텔 아비브(Tel Aviv)에 있는 병원에 6주간 입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족 중 홀로코스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엘리 브로데르(Eli Broder)가 회상합니다.

아내인 파이글라 브로데르(Fajgla Broder)는 자녀들과 함께 벵진에 머물렀습니다. 아버지는 자파의 사업체를 매각하고 폴란드로 돌아왔습니다.

30년대 초 맏딸인 브르노카는 마예르 코흔(Majer Kohn)과 결혼했는데 그의 부모인 나훔(Nahum)과 디나 코흔(Dina Khon)은 소스노비에츠의 모제요브스카(Modrzejowska) 거리에서 여성 의류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크리니차(Krynica)에서 휴일을 보냈습니다.

브르노카 코흔과 마예르 코흔은 두 자녀, 데이비드(David)와 레냐(Renia)를 두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모습은 가족의 도시 나들이와 휴가 중에 찍은 일련의 사진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가족에 관해 이야기한 엘리 브로데르는 사진 애호가였습니다. 2,400장의 사진 모음 전체 중에 그는 자신이 직접 찍은 사람들을 찾아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폴클뢴더(Volkländer) 카메라를 갖고 있었고 나중에는 라이카(Leica)를 갖게 되었죠. 일을 마치고 자녀와 함께 귀가하는 하다사와 브르노카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들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집에서 그 사진을 현상하여 그들에게 주었죠." 브로데르의 가족과 코흔의 가족은 종교적인 집안이었으며 아이들은 모두 벵진에 있는 유대인 학교에 다녔습니다. 엘리 브로데르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적어도 가족과 사는 동안 저는 종교적이었고 예시바(yeshiva, 정통파 유대교 학교)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과의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매우 엄격하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아이스 스케이트를 욕조 밑에 숨겼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발견하자 다른 아이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종교적 가정의 자녀 양육은 경건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아들은 선조의 전통을 지켜야 하며, 탈무드를 가르치는 학교에 다녀야 하고, 종교적 규율에 따라 살아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엘리 브로데르는 사이클 타는 것을 매우 좋아했지만 스포츠와 운동 연습은 엄격한 종교적 양육 사상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엘리는 아버지와 자주 충돌하였다고 회상합니다.

1937년 엘리 브로데르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 아니었으며 형제들은 공산주의자였습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엘리 브로데르와 아내는 소련으로 도망쳤습니다. 그의 부모와 다른 형제들은 벵진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엘리의 또다른 형제인 레입 브로데르(Lejb Broder)는 전쟁 시작 무렵에 파이글라 립스타이느(Fajgla Rypsztajn)와 결혼했습니다. 1941년에는 하다사 브로데르가 데이비드 슬레징기에르(David Szlezyngier)와 결혼했습니다.

1941년 나훔과 마예르 코흔은 소스노비에츠의 시장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레입 브로데르는 1943년 6월 22일과 26일 사이에 게토(유대인 거주 지역)를 폐쇄하는 중에 나치 친위대(SS) 대원에 의해 총살되었습니다. 데이비드 슬레징기에르는 강제 노동 수용소로 이송되어 학살되었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었으며, 누구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현재 엘리 브로데르와 그의 아내는 이스라엘에 살고 있습니다.

파이글라 브로데르와 자녀: 하다사, 파이글라, 이드카, 레입, 헤노흐 그리고 엘리. 이 사진은 팔레스타인 여행을 위해 여권용으로 찍었습니다. 이미 결혼한 맏딸 브르노카는 사진에 없습니다. 벵진, 1926년
디나와 나훔 코흔. 크리니차, 1920년대
디나와 나훔 코흔. 크리니차, 1920년대
나훔 코흔과 딸들. 폴란드, 1930년대
마예르 코흔, 소스노비에츠의 모제요브스카 거리에 있는 부모님의 가게 앞에서. 소스노비에츠, 1930년대
레냐와 데이비드 코흔. 라이차(Rajcza), 1939년
데이비드 코흔. 폴란드, 1936년

"저는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폴클뢴더 카메라 나중에는 라이카(Leica)를 가지고 있었죠. 일을 마치고 자녀와 함께 귀가하는 하다사와 브르노카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들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집에서 그 사진을 현상하여 그들에게 주었죠."

가족 중 유일하게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엘리 브로데르

엘리 브로데르가 찍은 마지막 가족 사진. 첫 번째 줄 왼쪽부터: 데이비드 코흔, 하데사 브로데르, 레냐 코흔. 두 번째 줄: 브르노카 코흔과 아이들의 유모. 벵진, 1939년
파이글라 립스타이느와 레입 브로데르의 결혼식. 첫 번째 줄 왼쪽부터: 하다사 브로데르, 데이비드 코흔, 레냐 코흔, 파이글라 브로데르, 이드카 브로데르. 두 번째 줄: 브르노카 코흔과 파이글라 브로데르. 벵진, 1941년. 사진 촬영: 사진사 J. 골트츠바이크(J. Goldcwajg)
하다사 브로데르와 데이비드 슬레징기에르의 약혼 사진. 벵진, 1939년 이후

마와흐(Małach) 가족

하나 페시아(Chana Pesia)와 아론 요세프 마와흐(Aron Josef Małach)는 바르샤바 근처의 작은 마을인 마코브 마조비에츠키(Maków Mazowiecki) 출신이었습니다. 1905년 그들은 그곳을 떠나 여덟 아들과 함께 벵진으로 이사했습니다. 거기에서 아들 셋이 소 내장을 재료로 소시지 껍질을 만들어 폴란드 가공 육류 생산업자에게 납품하는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넷째 아들인 벨벨(Welwel)은 접착제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거래했습니다. 그는 접착제 원료 중 하나인 소의 피를 도축장에서 구매하여 다른 생산업자들에게 판매했습니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아들 둘이 팔레스타인으로 떠났고, 그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에서 하던 일이 신통치 않자 1939년 폴란드로 돌아왔습니다.

하나 페시아와 아론 요세프 마와흐의 여덟 아들 중 다섯 번째인 라파엘 마와흐(Rafael Małach)는 사촌인 말카 루헬 블루므(Malka Ruchel Blum)와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벵진의 인근에 위치하고 있고 채굴 산업이 주를 이루는 산업 도시인 동브로바 고르니차(Dąbrowa Górnicza)로 이사했습니다. 거기에서 라파엘 마와흐는 형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친구와 함께 소시지(kischke) 공장을 차리지만, 회사는 도산했고 라파엘은 다시 가족의 일을 도왔습니다. 라파엘과 말카 루헬 마와흐(Malka Ruchel Małach)에게는 일곱 자녀가 있었습니다. 이츠학(Icchak), 지세(Zysze), 프리메트(Frymet), 시마(Syma), 에스테라(Estera), 볼프(Wolf(현재는 제에프(Ze'ev))) 그리고 아브라함(Abraham)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제에프 마와흐는 가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우리는 자녀가 많은 집안이었습니다. 부림절 기간에 할머니인 하나 페시아의 집에서 온 가족이 모일 때면 늘 집안이 북적거렸습니다. 할머니는 독재자처럼 가족을 지배했습니다. 할머니는 더 잘 사는 형제들이 아버지처럼 가난하거나 빈곤한 형제들을 돕게 하셨습니다. 매일 저녁 온 가족이 벵진에 있는 제 어머니 집에 함께 모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걸어서 어머니를 방문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건강이 매우 좋으셨는데 돋보기 없이도 글자를 읽으실 수 있었고, 빠진 이 하나 없이 모든 치아가 남아 있으셨으며, 일일 목욕 의식에도 참석하셨습니다. 흰머리도 거의 없었죠. 정결 의식(Mikveh)이 끝나면 할아버지는 청어를 드시며 반주로 보드카도 함께 드셨는데, 이를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라파엘과 말카의 장남과 차남인 지세와 이츠학은 집 안팎을 잘 손보는 타고난 재주꾼이었습니다. 전쟁 전에 이츠학이 가지고 있던 여러 부품으로 사진기를 직접 만들었다고 제에프는 회상합니다. 가족사진의 다수도 이츠학이 찍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든 형제들은 다양한 정치 단체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츠학과 지세는 공산주의자였고, 에스테라는 하스호메르 하사이르(Haschomer Hacair) 소속이었습니다. 프리메트는 고르도냐(Gordonia)에서, 시마는 분트(Bund)에서, 그리고 제에프는 하스호메르 하다티(Haschomer Hadati)에서 활동했습니다. 제에프는 말합니다. "형제들이 서로 다른 다섯 개 정당에 속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부적으로 어떠한 이념 전쟁도 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뤘습니다." 형제 중 일부는 정치 참여로 폴란드 당국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츠학 마와흐가 공산당을 상징하는 적기를 휘날렸다가 체포된 적도 있었습니다. 1937년 시마는 동브로바 고르니차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던 남편 데이비드 크라우제(David Krauze)가 체포될 위험에 처하자 그와 함께 폴란드에서 도피하여 2년간 프랑스에 불법 체류하였습니다. 1934년에 이츠학 마와흐는 사라 루다(Sara Ruda)와 결혼하였고 부부는 벵진으로 이사했습니다.

1937년 아들 아브라함이 태어났습니다.

사라의 가족은 바르샤바 출신인데 그곳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유대인 지구에서 수산물 거래를 하였습니다.

조산사였던 사라 마와흐는 벵진에 있는 '비쿠르 홀림(Bikur Cholim)' 유대인 병원에서 일했습니다.

처음에 이츠학 마와흐는 삼촌인 아바(Aba)의 인쇄소에서 일하였고, 그 후 처남과 함께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제에프는 말합니다. "아버지는 제가 장사꾼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14살부터 직물 가게에서 일했지만 일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상점의 모든 지퍼를 정리하곤 했습니다. 저는 또한 색에 대한 감각이 좋았습니다. 가게에 여자 손님이 오면 저에게 조언을 구하곤 했죠. 나중에는 삼촌의 인쇄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제에프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 이트카와 결혼했고 그들은 소련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츠학, 사라와 아브라함 마와흐는 벵진에 머물렀으며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할머니 하나 페시아는 전쟁 전에 사망했으며, 아론 요세프는 1939년 이후 살해되었습니다.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직전에 시마 마와흐와 데이비드 크라우제는 프랑스에서 폴란드로 강제 이송되었고 소련으로 도망쳤습니다. 제에프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시마는 자궁 외 임신으로 인해 사마르칸드(Samarkand)에서 제 품에서 죽었습니다. 독일군을 피해 도망하던 중, 이트카와 저는 시베리아의 타쉬쿠미르(Taschkumir)에 도착했고, 그 곳에서 저는 광산에서 일했습니다. 시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휴가를 내고 큰 위험을 무릅쓰고 누이를 보러 갔습니다. 시마는 사마르칸드에서 죽었고 그 곳에 묻혔습니다."

1939년 지세 마와흐는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1945년에 폴란드로 돌아왔습니다. 제에프, 이트카 그리고 자녀들은 1946년에 폴란드로 돌아왔습니다. 그 곳에 살던 178명의 가족 중에서 그들이 찾아낸 사람은 오직 지세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폴란드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습니다. 지세는 1985년에 이스라엘에서 죽었습니다.

제에프와 이트카는 헤르즐리아(Herzlia)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와 아론 마와흐 그리고 아들들. 첫 번째 줄 왼쪽 부터: 얀키엘 데이비드(Jankiel David), 아론 요세프(Aron Józef), 하나 페시아, 라파엘 히르츠(Rafael Hirsz). 두 번째 줄: 아바, 이츠학 모드레하이(Mordechai), 벨벨 벤자민(Welwel Benjamin), 모체 핀카스(Mosze Pinkas), 라입, 예히엘(Jechi’el). 벵진, 1928년 10월 31일

"우리는 자녀가 많은 집안이었습니다. 부림절 기간에 할머니인 하나 페시아의 집에서 온 가족이 모일 때면 늘 집안이 북적거렸습니다. 할머니는 독재자처럼 가족을 지배했습니다. 할머니는 더 잘 사는 형제들이 아버지처럼 가난하거나 빈곤한 형제들을 돕게 하셨습니다.

매일 저녁 온 가족이 벵진에 있는 제 어머니 집에 함께 모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걸어서 어머니를 방문했습니다.

볼프(지금은 제에프) 마와흐

자녀와 함께한 말카 루헬와 라파엘 마와흐. 첫 번째 줄 왼쪽부터: 볼프, 아브라함을 안고 있는 말카 루헬, 라파엘 히르츠, 시마, 프리메트. 두 번째 줄: 에스테라, 이츠학, 지세. 폴란드, 1920년대.

"형제들이 서로 다른 다섯 개 정당에 속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부적으로 어떠한 이념 전쟁도 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뤘습니다." 볼프(지금은 제에프) 마와흐

친구들과 함께한 이츠학, 사라 그리고 지세 마와흐.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이트헤 구트만(Itche Gutman), 두 번째가 사라.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아델라 스네이베르크(Adela Schneiberg)와 보바 레이흐긴트(Wowa Reichkind), 그 오른쪽은 이츠학. 폴란드, 1930년대.
병원에서 근무하던 때의 사라 마와흐
출산 병동에서 사라와 아브라함 마와흐.
마와흐 가족: 무릎에 아브라함을 안고 있는 사라. 그 옆에 부모인 라파엘 히르츠와 이츠학
사라, 이츠학 그리고 아브라함 마와흐. 벵진, 1942년 12월 29일
아브라함 마와흐. 벵진, 1943년

코플로비츠(Koplowicz) 가족

아론 코플로비츠(Aron Koplowicz)와 그의 아내 리브카(Rywka)는 일곱 명의 자녀, 유들르(Judl), 미렐레(Mirele), 헬챠(Helcia), 슬로모(Szlomo), 로자(Roza), 세샤(Cesia) 그리고 사라(Sara)를 두었습니다. 아론 코플로비츠는 부유한 상인으로서 벵진의 구 시장 광장(Old Market Square)에서 직물 가게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코플로비츠 가족은 신앙심이 독실한 집안이었는데, 아론은 살바리 산(Mount Calvary)의 한 짜딕(tzaddik, 하시딤의 지도자)을 추종하는 하시딤(chassidim) 그룹인 게레르-라비 하시딤(Gerer-Rabbi Chassidim)에 속해 있었으며 유대인 사회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론과 리브카는 자녀들을 엄격한 종교적 방식에 따라 길렀습니다.

구 시장 광장에 있는 가족 소유 상점은 맏딸인 미렐레가 운영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상점은 슬로모가 인수하였습니다. 코플로비츠 가족은 즐겨 찾던 휴가지인 카민스크(Kamińsk), 크리니차(Krynica)와 라프카(Rabka) 또는 둘째 딸인 헬챠 자이드만과 그녀의 가족이 함께 사는 우치(Łódź)를 정기적으로 여행했습니다. 친척인 하나 코플로비츠(Chana Koplowicz)는 벵진에서 거행되었던 헬챠의 결혼식을 기억합니다. "그 당시 우치에서 자이드만의 누이들이 황금 구두와 긴 드레스에 우아한 금발 가발을 쓰고 결혼식에 온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해요." 아론 코플로비츠의 딸들 역시 언제나 최신 유행을 따랐고 아버지의 엄격한 행동과 옷차림과는 현격하게 대조되는 우아한 옷을 입었습니다. 여러 사진 속에서 로자 코플로비츠는 생기에 가득 찬 신세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후 맏딸인 헬챠 자이드만(Zajdman)은 남편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벵진으로 돌아왔고, 온 가족이 비좁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30여 명에 이르는 이 대가족이 게토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방에 기거했습니다. 헬챠와 그녀의 자녀, 오빠 유들르와 그의 일곱 아이,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모두 자그마한 단층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코플로비츠의 직물가게는 징발되어 독일 감독관에게 할당되었습니다.

유대인 기업과 상점이 강제 징발되어 아리아인 소유로 넘어감에 따라 소유주들은 재산뿐만 아니라 직업과 소득원을 잃었습니다. 로자와 세샤 코플로비츠는 아리아인이 인수한 상점에서 일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한동안 강제 이송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 코플로비츠는 게토에서 생존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에 대해 이렇게 회상합니다. "마와호스키에고 거리의 감독관은 회계사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이웃에 사는 유대인 중에 이전에 철물점을 소유했던 사람의 감독관을 만났는데, SA(나치 돌격대) 대원이었던 그 감독관의 이름은 푈켈(Völkel)이었고, 유대인 상점 다섯 개를 책임지고 있었죠. 저는 다섯 개의 상점에 저희 가족을 한 사람씩 배치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가족들은 외국인 관련 업무를 맡은 특수 SA 장교로부터 특별 허가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허가서가 없는 사람은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게토의 많은 남녀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자들은 잠시나마 강제 이송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결혼은 그처럼 비인간적 상황에서도 정상적인 생활의 모습을 꾸려가려는 노력을 잘 보여줍니다. 로자 코플로비츠는 1943년 초에 결혼했습니다. 하나 역시 게토에서 결혼했습니다. 둘은 자녀가 있었지만,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게토가 폐쇄되던 중에 하나와 그녀의 남편은 한 벙커에 몸을 숨겼습니다. 몇 주 후에 식량이 바닥났습니다. "우리는 그 은신처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게토에 있을 때 제가 일을 도와줬던 감독관의 호의로 몸을 씻고 얼마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감독관이 알려주기를, 매일 아침 독일 경비병 하나가 고아원에서 유대인 50~60명을 데리고 나와 그 감독관의 집을 지나 게토로 갔다가, 저녁이면 그들을 다시 고아원으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위 '청소 작업 부대(Aufräumungskommando)'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이었으며 버려진 게토의 청소 작업을 맡았습니다. 저는 저를 그 부대원으로 받아달라는 요청을 쪽지에 써서 그 감독관을 통해 작업 부대 사람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청소' 이후에 유대인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아리아인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우호적인 비유대인의 도움을 받아 도피처를 찾거나, '청소 작업 부대'에 편입 승인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부대가 게토로 이동할 때 몰래 대열에 합류하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합류는 치밀한 사전 게획이 필요했습니다. 부대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의 자리에 우리가 대신 들어가야 했으며, 독일 감독관의 명단은 빠지거나 추가되는 이름 없이 정확히 맞아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그 부대는 감축되었고 오로지 연줄이 있는 사람만 남았습니다. 저는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대부분의 코플로비츠 가족은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어 학살당했습니다. 하나 코플로비츠가 회고합니다. "아론 코플로비츠 삼촌의 가족은 게토 '청소' 기간 중에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본 유일한 사람은 겔챠와 그의 남편 그리고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벙커에 숨어 있었는데 제가 '청소 작업 부대'에서 일하는 중에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 후에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겠죠." 세샤는 아론과 리브카 코플로비츠의 자녀 중에서 유일하게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이스라엘로 이주하였고 80대에 예루살렘에서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 코플로비츠도 폴란드를 떠나 1997년에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에서 살았습니다.

리프카 코플로비츠와 자녀들. 왼쪽으로부터: 세샤, 사라 그리고 로자. 두 번째 줄: 슬로모, 리브카, 미렐레 그리고 겔챠. 카민스크, 1928년
벵진의 구 시장 광장에 있던 코플로비츠 직물 가게 앞. 입구에 있는 로자 코플로비츠. 벵진, 1930년대
로자 코플로비츠(왼쪽에서 첫 번째) 그리고 세샤(왼쪽에서 세 번째). 아이는 겔챠 자이드만의 아들로 추정됨. 폴란드, 1930년대
리브카와 아론 코플로비츠. 크리니차, 30년대
로자 코플로비츠와 그의 어머니. 크리니차, 1937년
로자 코플로비츠(오른쪽). 폴란드, 1930년대
로자 코플로비츠. 폴란드, 1930년대
로자 코플로비츠. 크리니차, 1937년
로자 코플로비츠의 결혼식. 벵진, 1943년

"아론 코플로비츠 삼촌의 가족은 게토 '청소' 기간 중에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본 유일한 사람은 겔챠와 그의 남편 그리고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벙커에 숨어 있었는데 제가 '청소 작업 부대'에서 일하는 중에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 후에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겠죠." 친척인 하나 코플로비츠(주베르만(Zuberman)과 결혼).

후프페르트(Huppert) 가족

후프페르트 가족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은 사진 그리고 사진의 소유자가 사진 위에 쓴 인사말과 메모에 근거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가족을 기억하는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후프페르트 가족은 폴란드와 체코 국경에 있는 도시인 치에신(Cieszyn) 출신이었습니다. 로자와 요세프는 자녀가 여섯이었습니다. 아르뚜르(Arthur), 아돌프(Adolf), 페르디난트(Ferdynand), 미즈지(Mizzi)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입니다. 후프페르트 가족은 부유했고 화려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20년대 사진은 이 가족의 일상의 각 장면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특별한 분위기도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르뚜르 후프페르트와 그의 아내 그레테(Grete)는 1938년 1월 8일 오파바(Opava)에서 결혼했습니다. 1939년 아들 피테르(Peter)가 태어난 후 그들은 올로모츠(Olomouc)에서 살았습니다, 아르뚜르는 정기적으로 자기 아이의 사진을 찍었고 상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을 자신의 부모에게 보냈습니다.

아르뚜르, 그레테 그리고 피테르 후프페르트는 1944년 여름에 학살당했습니다.

4월 29일 가족 전체가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에서 바라노비체(Baranowicze)로 강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로사(Rosa)와 요세프 후프페르트 그리고 자녀들(앞에 있는 아이의 이름은 미상). 뒷 줄 가운데가 미즈지, 양 옆으로는 아돌프, 아르뚜르 그리고 페르디난트, 네 번째 형제의 이름은 미상. 치에신, 1930년대
아돌프 후프페르트. 체코슬로바키아, 1930년대
아르뚜르 후프페르트. 체코슬로바키아, 1930년대
미즈지 후프페르트. 치에신, 1933년
미즈지 후프페르트의 결혼식. 체코슬로바키아, 1930년대
페르디난트와 힐다(Hilda) 후프페르트의 결혼. 체코슬로바키아, 1930년대
아르뚜르와 그레테 후프페르트의 결혼식. 오파바, 1938년. 사진 촬영: 사진사 로베르트 스푸르니(Robert Spurny), 오파바
아르뚜르와 그레테 후프페르트의 아들인 피테르. 치에신, 1939년. 사진 촬영: 사진사 엘스네르(Elsner), 치에신
아르뚜르 후프페르트와 피테르 후프페르트. 올로모크(체코슬로바키아), 1940년 경
아르뚜르, 피테르 그리고 그레테 후프페르트. 올로모크(체코슬로바키아), 1940년
피테르 후프페르트. 올로모크(체코슬로바키아), 1940년
제공: 스토리

Teksty zaczerpnięto z książki "Zanim odeszli... Fotografie odnalezione w Auschwitz" pod red. Kersten Brandt, Hanno Loewy, Krystyna Oleksy.
Curator — Dr Maria Martyniak
Curator — Agnieszka Juskowiak-Sawicka
Excerpts taken from the book "Zanim odeszli... Fotografie odnalezione w Auschwitz" ("Before they perished... Photographs found in Auschwitz") by Kersten Brandt, Hanno Loewy, Krystyna Oleksy.
Curator — Dr Maria Martyniak
Curator — Agnieszka Juskowiak-Sawic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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