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불교미술

국립경주박물관

법흥왕 14년(527) 불교가 공인된 뒤, 신라 사회에서 불교신앙은 왕으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경주에는 수많은 사찰이 조성되었다.

불교가 들어오다
신라에서 불교의 공인은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이전에는 귀족들이 각 자의 조상신이나 산천신을 숭배했을 뿐 나라를 대표하는 종교는 없었다. 반면, 불교는 종교로서 신앙체계가 논리적이고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하는 신들의 존재감이 뚜렷하였다. 왕실은 불교 신앙을 기반으로 사상적 통일을 이룩하고 왕과 왕족을 신격화하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보수적인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 528년 법흥왕은 이차돈(502 또는 506~527)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그리고 534년 서라벌 사람들이 신성 하게 여기던 천경림의 숲을 걷어내고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얼굴무늬 수막새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이 기와는 도톰한 입술과 위로 들린 입꼬리, 얕은 볼, 살짝 내민 눈동자가 서로 어우러져 친근한 모습이다. 이처럼 사람의 얼굴형상을 한 기와는 익산 미륵사지, 경주 황룡사지 등에서 출토되었지만, 막새기와에 완벽한 얼굴형상을 나타낸 것으로는 이 기와가 유일하다. 이러한 막새기와를 지붕 위에 올렸던 이유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려는 벽사의 기능으로 볼 수 있다. 이 기와는 일제강점기에 영묘사 터[靈廟寺址: 현재의 흥륜사 자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며, 당시 일본인 다나카 토시노부[田中敏信]가 구하여 보관해 오다가 1972년 10월에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와의 제작연대는 가장자리에 넓은 테두리가 있고 높은 온도에서 구운 점, 얼굴의 양감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흙을 빚어 만든 모든 제품은 가마의 높은 온도에서 10퍼센트 정도의 축소현상이 일어나 원래 장인의 의도와는 다른 형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와는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어 당시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에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차돈 순교비’또는‘이차돈 공양당供養幢’으로 불리는 육면의 이 석당石幢은 경주 백률사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제작시기는 이차돈이 순교한 지 290년이 지난 818년(헌덕왕10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석당 위에 둥근 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6면 중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흰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좁은 석면石面에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차돈은 머리에 고깔모양의 모자를 썼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아래쪽이 좁은 통 큰 바지를 입고 있다. 나머지 다섯 면에는 바둑판의 구획처럼 정간井間을 치고 3cm 크기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마멸이 심하여 전체를 판독하지 못하였으나, 명문의 내용은『삼국유사』나『삼국사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불교의 공인
528년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뒤, 진흥왕과 선덕여왕은 왕경 안에 큰 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 모으고자 하였다. 544년 진흥왕은 최초의 절인 흥륜사를 10년 만에 완공하였다. 553년에는 황룡사를 세우기 시작하여 566년 완공하였다. 574년에는 황룡사에 장육존상이라는 큰 불상을 봉안했다. 선덕여왕은 즉위하여 황룡사 옆에 ‘향기로운 왕의 절’이라는 뜻의 분황사를 지었다. 643년에는 왕의 위엄을 세우고 부처님의 도움으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황룡사에 구층목탑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도굴 후 수습한 것으로 봉안 상태 및 원형을 알 수 없다. 금합과 은합은 금속판을 얇게 두들겨 펴서 만들었는데, 사리장엄구 납입 방식에 따라 은합 안에 금합을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습된 물건들은 다른 탑의 출토품과 뒤섞여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단, 찰주본기에 목탑 건립 당시 ‘금은고좌’ 위의 ‘사리유리병’에 사리를 안치했다는 내용이 있어 참고가 된다.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에 올리는 기와인 망새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 와 안전을 갈구하는 염원에서 제작되지만, 장식성을 더하여 권위나 위엄을 상징하기도 한다. 고대 궁궐과 사원 건축에 망새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중국의 한대漢代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제작되었다. 이 망새는 황룡사 터 강당 부근에서 발견된 조각들을 복원한 것이다. 높이가 182cm로, 워낙 커서 위아래 두 부분으로 나누어 구웠다. 몸통의 양 측면과 뒷면에는 연꽃무늬와 얼굴무늬를 별도로 만들어 번갈아 끼워 넣었다. 특히 얼굴무늬 중에는 수염을 묘사한 것도 있어 남녀를 구분하여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망새는 통일신라시대의 것과 형태가 다르고, 또한 연꽃무늬의 표현으로 보아 삼국시대 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거대하면서도 적절한 비례를 갖추었고, 전면에 새겨진 문양이 정교하여 삼국시대 망새 가운데 걸작에 속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6년) 때 창건된 황룡사에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년)이 9층목탑을 세운 것은 646년이었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 동안 황룡사 터를 발굴하였는데, 목탑터 심초석心礎石 하부에서 지진구地鎭具로 보이는 수정, 유리구슬, 곱은 옥, 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심초석에는 정사각형의 사리공舍利孔이 있었으나, 그 안에 있던 사리갖춤은 도난되었다가 1966년 회수되었다. 찰주본기刹柱本記는 사리갖춤의 내함內函이며, 외함으로 생각되는 부식된 금동방형함도 함께 발견되었다. 내함은 경첩으로 결합된 금동판들이 네모난 상자의 각 면을 이루는데 한 면은 문처럼 열 수 있도록 문고리가 달렸다. 문의 앞·뒷면(오른쪽 사진)에는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상과 신장상이 각각 2구씩 선새김 기법으로 장식하였다. 앞면의 금강역사상은 하의만 걸친 채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뒷면의 신장상은 갑옷을 입고 각각 무기를 들었다. 문을 제외한 3장의 금동판 앞·뒷면에는 맨 처음 황룡사 9층목탑을 만든 경위와 탑이 기울어 경문왕景文王(재위 861~875년)때인 871년에 다시 탑을 만들게 된 내용을 새겼다. 또한 탑 중창重創에 참여한 관리와 승려들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어 있어, 사리갖춤인 동시에 황룡사탑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이기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872년 찰주를 들어올리니 그 안에 사리유리병이 안치된 금은고좌金銀高座가 있었다고 하여, 당시 사리갖춤의 납입 방식을 짐작케 한다.

바닥에 사용했던 전으로 윗면에는 화려한 보상화무늬를, 좁은 옆면에 역동적인 용을 배치하였다. 윗면의 문양은 중앙에 연판, 그 바깥쪽에는 큼직한 보상화무늬를 두고 다시 그 바깥에는 돋을선으로 경계를 지워 당초무늬를 시문하였다. 옆면의 용무늬는 몸통이 심하게 틀어져 역동감을 주며, 그 주위에는 구름무늬를 적절히 배치하여 완벽한 균제감을 느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 건물 주위의 바닥에는 무늬가 없는 전을 깔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황룡사를 비롯한 성전사원成典寺院의 법당 주변에는 용무늬 전으로 장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발굴조사 결과, 황룡사 터에서는 보상화·용무늬 전이 출토된 반면, 안압지에서는 두 마리의 사슴이 있는 쌍록보상화무늬전[雙鹿寶相華文塼]이 출토되어 무늬에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전은 7세기 후반경이 되면 구도가 완벽하고 정제감을 이루는 전성기가 되는데, 이 전塼의 제작연대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호국사찰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15년528 이후, 불교는 신라의 주된 이념이 되었다. 특히 주변 나라와 전쟁이 계속되자 불법으로 나라를 수호한다는 호국불교를 내세워 새로이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사천왕사를 들 수 있다.

사천왕은 원래 고대 인도에서 재래在來의 방위신方位神이었다. 불교가 성립되면서 불교에 귀의歸依하여 부처의 세계를 지키고 중생을 안정시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그 모습은 인도에서는 주로 귀족이나 보살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래傳來되면서 분노한 얼굴에 갑옷을 입고, 손에 무기를 쥔 무장형武將形으로 변모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계기로 사천왕신앙四天王信仰이 유행하면서 호법신護法神·호국신護國神으로서 크게 유행한다. 사천왕사四天王寺는 이러한 사천왕신앙을 배경으로 통일 직후인 문무왕 19년(679)에 세운 신라의 호국 사찰이다. 사천왕을 돋을새김한 사천왕상전은 일제강점기 때 이 절의 두 탑지塔址에서 파손된 채 수습된 것을 현재의 상태로 복원한 것이다. 여러 벌의 틀로 찍어낸 뒤 초벌구이를 한 다음, 다시 유약釉藥을 발라 구웠다. 이 작품은 균형 잡힌 몸매와 적절한 신체비례, 치밀하게 묘사된 갑옷, 사천왕이 밟고 있는 악귀惡鬼의 고통스런 얼굴 표정과 다리 근육의 사실적 조각, 탄력성 있는 신체 변화 등에서 통일신라 초기의 사실적인 조각양식을 잘 보여준다. 얼굴 생김새나 몸의 표현 등 상 전체에서 서역적인 요소가 강하며, 감은사感恩寺 석탑 출토 사리기의 사천왕상과 함께 승려 양지良志의 작품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최근에는 사천왕사 터의 발굴이 이루어져 새로운 종류의 사천왕상 전 편들이 수습되기도 하였다.

1959년 감은사터 서탑을 복원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3층 탑신석 윗면에서 발견된 사리갖춤이다. 1996년 동탑을 해체했을 때도 이와 유사한 사리갖춤이 3층 탑신석 윗면에서 발견되었다. 감은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82년경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해 세운 절이다. 왕실 발원의 감은사에서 발견된 이 사리갖춤은 통일신라의 가장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상자 형태의 장방형 외함(오른쪽 사진) 안에 집모양의 사리기(위쪽 사진)가 있고, 사리를 담는 용기인 수정병(아래쪽 사진)은 사리기 가운데에 있는 화염보주火焰寶珠 안에 안치되었다. 사리외함의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장식하였다. 사천왕상과 짐승얼굴무늬 문고리 등은 따로 만들어 붙였는데,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고 있는 사천왕의 섬세한 표현과 자세 등 조각 수법이 우수하다. 집 모양의 사리내함 기단에는 둥근 눈모양의 창인 안상眼象을 만들어 공양상과 신장상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배치하였고, 기단 윗면의 네 모서리에는 요고腰鼓, 비파琵琶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배치하였다. 주악상 사이에는 본래 춤추는 동자상[舞童像]이 놓여 있었다.

녹유綠釉는 토기 표면에 바르는 유약의 하나로, 잿물이나 규산硅酸에 연단鉛丹을 넣고 발색제로 철을 섞어 만든다. 녹유기와가 출토된 곳은 월성, 월지 등 궁궐이나 사천왕사 터四天王寺址, 감은사 터感恩寺址 등 나라에서 건립한 대형 사찰인 성전사원成典寺院과 같이 중요 건축물에 한정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겹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는 통일신라 수막새를 대표하는 무늬이다.

감은사터 발굴 당시 고려시대 1351년의 기록이 새겨진 청동 반자 위에 눞혀 놓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신라 범종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윗면에는 고리를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고 가운데에 작은 구명이 뚫려 있다.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청동풍탁에 버금갈 정도로 크다.

문고리장식이다. 험상궂은 사자의 입 양쪽으로 뚫린 구멍에는 고리 손잡이가 물려있다. 뒤쪽으로는 문짝에 고정하는 촉이 길게 돌출되어 있다.

불국토, 신라
불교 공인 이후 신라는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후원하였다. 신라가 옛날부터 과거의 부처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불연국토설이 등장했고, 이에 따라 수도 경주에는 칠처가람이 조성되었다. 불교의 토착화에 기여한 이 사상은 신라가 바로 부처의 땅이라는 불국토설로 발전하여 불교문화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전성기 신라의 왕경에는 “절이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듯하다.”라고 묘사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당시 불교문화의 융성을 잘 보여준다.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그 절정기의 산물이었다.

경주 읍성邑城을 쌓을 때 썼던 것으로 성벽이 무너지면서 발견되었다. 4개의 네모난 돌기둥을 조합시켜 조각된 두 면을 표면으로 사용하였던 구조물이다. 네 면에는 나한으로 추정되는 승형僧形의 입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나한이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불교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성자를 말한다. 나한상은 머리를 약간 숙여 공양하고 있는 측면상으로 손잡이가 달린 향로 등을 들고 있다. 연꽃좌대 위에 서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신발의 앞코가 살짝 들린 모습이 석굴암의 나한상과 유사하다. 전신을 감싼 납의衲衣에는 굵은 옷주름을 새겼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석굴암 십대제자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신라의 불교조각
신라의 불교는 공인된 직후부터 크게 일어나 경주 중심지에 흥륜사·영흥사·황룡사·분황사·영묘사·천왕사·담엄사와 같은 큰 절이 지어지고 황룡사 장육존상과 분황사 약사불 등의 금동불과 수많은 석불이 만들어졌다. 신라에서 석불은 7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경주 남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는 인도·중국과는 달리 견고한 화강암을 재료로 독창적인 조각기법을 개발·발전시켰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남산 장창골 미륵삼존불과 배리 삼존불, 그리고 경북 봉화 북지리 반가사유상, 경주 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금동불에서도 신라만의 독특한 미감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편단우견의 착의방식에 오른팔을 아래로 내려 보주를 쥔 여래입상을 들 수 있다.

1925년 경주 남산南山 장창골[長倉谷]의 한 석실石室에서 옮겨왔다. 좌우 보살의 자그마한 몸체와 천진난만한 표정 때문에‘아기부처’로 많이 알려져 있다. 가운데 본존의 자세가 특이한데, 이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倚子座]는 현존하는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 중국의 6~7세기 불상 가운데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상의 존명은 대부분 미륵불이며,『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중국의 예로 볼 때 이 본존불 또한 미륵불로 추정된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왼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굽혀 위로 세웠다. 무릎의 옷주름은 나선형으로 얕게 조각하였다. 이러한 옷주름 표현은 다른 불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예이다. 좌우의 보살은 4등신의 자그마한 체구에 연꽃을 손에 쥐고 있다. 목걸이 모양과 연꽃, 연꽃을 쥔 손모양만 다를 뿐 세부표현은 거의 비슷하다. 머리에는 세 개의 꽃장식이 있는 보관寶冠을 썼으며, 신체에 비해서 큰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단단한 재질인 화강암을 조각했음에도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신라의 대표적인 석불石佛이다.

경주 인왕동仁旺洞에서 옮겨온 것으로, 정확한 발견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나의 돌에 불신佛身과 광배光背, 대좌臺座를 모두 조각하였다. 민머리에 육계가 높게 솟았으며, 얼굴에는 정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옷은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이며, 옷자락은 U자 모양의 주름을 이루면서 대좌까지 덮었다. 두 손은 손가락의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오른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위로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손갖춤을 하였다. 이는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모든 소망을 들어준다는 뜻으로, 모든 부처가 취할 수 있는 손갖춤이라 통인通印이라고도 한다. 전체적으로 단순한 표현 형식과 고요히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에서 7세기 대에 조성된 신라작품으로 추정된다.

머리 위에 작고 봉긋한 육계가 솟아있고 통통한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4등신의 신체비례를 하고 있다. 연화대좌 위에 서있으며 머리에는 두광과 몸에 신광을 갖추었다. 오른손은 들어 시무외인, 왼손은 내려 여원인의 손갖춤을 하였다. 몸에는 두 어깨를 덮는 통견通肩의 방식으로 대의를 걸쳤고, 배 아래로는 옷주름이 연속된 U자형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제작시기는 6세기 말쯤으로 추정된다.

현재 소수서원이 있는 경북 영주 숙수사터宿水寺址에서 1953년 발견된 25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다. 불신과 대좌를 하나로 주조하였으며, 도금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민머리에 육계가 솟아 있고, 눈은 지그시 감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목은 긴 편이다. 법의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 형식으로 옷주름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흘러내려 계단식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한쪽으로 약간 쏠리게 하여 변화를 주었다. 손모양은 오른손바닥을 보이게 올린 시무외인과 왼손바닥을 보이게 내린 여원인을 하였다. 삼국시대의 불상은 대부분 손이 강조되는데 반해, 이 불상은 신체비례에 맞게 적절한 크기로 만들었다. 대좌에는 연꽃을 새겼는데, 꽃잎 끝이 날카롭게 반전되어 있다. 신체비례와 법의, 대좌 형식에서 6세기 후반 중국 북조에서 유행하던 여래입상의 영향을 수용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형미가 우수한 편으로, 신라 초기 불교조각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통일신라의 불상
통일신라의 불상은 고구려·백제·신라 불상이 종합되는 한편, 인도 굽타 조각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성당 불상 양식을 받아들여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종래의 인간미 넘치는 얼굴에 위엄이 서리고, 신체는 적절한 비례로 조화를 이루었으며, 몸과 밀착된 얇은 옷자락으로 인하여 몸의 굴곡과 양감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굴암 조각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다.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부터는 중국의 영향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항마촉지인 여래상이 하나의 보편적인 형식으로 자리잡았으며, 중국과 일본의 비로자나불이 보살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과 달리 머리에 육계를 표현한 여래 모습의 비로자나불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9세기의 불상들은 8세기에 비해 자세가 경직되고 신체비례도 맞지 않는 등 앞 시대 불상에서 볼 수 있었던 생동감은 다소 줄어들었으나, 당시 불교 신앙의 확산과 함께 불상 양식의 토착화와 지방화 현상을 보여준다.

경주 월지에서는 많은 불상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와 같은 판불板佛이 10점 출토되어 주목된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아랫부분에 촉을 단 흔적으로 보아 어딘가 꽂아 두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판불은 금속판을 틀에 대고 두드려 만든데 반해, 월지 판불은 밀랍蜜蠟을 이용하여 주조鑄造한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중앙의 본존불이 있고 그 좌우에 보살을 배치하였다. 본존은 민머리에 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통통하다. 화려한 연꽃받침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설법인說法印의 손갖춤을 하였는데,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을 행할 때 맺었던 손모양인 초전법륜인初轉法輪印이다. 좌우의 보살은 본존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며 손에 연꽃을 쥐고 있다. 머리를 틀어 위로 묶은 보계는 정면에 꽃모양의 장식이 있는 머리띠로 묶여 정돈하였다. 가슴은 불룩하고 허리는 잘록하여 삼곡三曲 자세가 더욱 두드러진다. 광배는 맞새김으로 여러 무늬를 표현하였다. 뒷면에는 밀랍띠를 가로와 세로로 얽어 넣어 심을 만든 자국이 남아 있다.

머리는 나발이며 다소 긴 얼굴에 미소없이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대의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인데, 상의上衣와 군의裙衣의 표현이 매우 사실 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을 하였다. 머리와 등의 뒷면에는 주조 구멍이 있고 내부는 비어 있다. 풍만한 얼굴, 사실적인 육체와 옷주름 표현, 우수한 주조기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8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지에서 출토된 불상 가운데 가 장 우수한 작품이다.

광배는 남아있지 않으나, 별도로 만들어 결합한 불신과 대좌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머리는 곱슬형의 나발에 육계가 높다. 살찐 얼굴에 눈과 눈썹은 선새김으로 표현하였다. 두 귀의 귓불은 길게 활처럼 휘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이 불상은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입은 대의 안쪽에 또 다른 옷을 입고 있어 오른쪽 어깨가 가려지는 착의법着衣法을 하고 있다. 대의 안쪽으로는 가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내의內衣가 보인다. 옷주름은 주물鑄物한 뒤에 끌로 선새김하였다. 대좌는 팔각의 연꽃대좌[八角蓮華座]로, 안상眼象을 맞새김[透彫]한 하단 받침 위에 귀꽃이 솟아 있다. 착의방식과 대좌의 귀꽃으로 보아 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양북면陽北面 장항리長項里의 한 절터에서 옮겨와 복원한 불상이다. 현재 절터에는 이 불상의 대좌와 석탑 2기가 남아 있다. 대좌는 팔각형으로 옆면에 사자상과 신장상 등이 안상에 조각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불상을 세웠던 구멍이 있는데, 그 모양과 크기로 보아 원래 이 불상은 입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광배와 몸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고 촘촘히 새긴 나발 위로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얼굴은 이마에 백호白毫 자리가 파여 있고 눈썹은 타원형 을 이루며 날렵하게 뻗었다. 눈은 반쯤 내려 감았으며, 아랫입술과 턱은 파손된 것을 복원하였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가슴은 당당하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U자형의 곡선을 그리며 몸의 굴곡과 조화를 이루면서 흘러내려 신체의 볼륨감을 드러낸다. 양 손은 파손되어 정확한 손갖춤은 알 수 없으나, 오른손은 가슴 위로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린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전체적으로 배 모양이며,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의 둘레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안쪽에는 연꽃대좌에 앉아 구름을 타고 있는 화불化佛을 조각하였다. 원숙한 솜씨로 화강암을 조각한 통일신라의 사실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는 8세기 중엽의 석불이다.

1959년 경주 남산의 철와골[鐵瓦谷]에서 발견된 부처의 얼굴조각이다. 머리만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크기로 보아 매우 큰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교하게 조각된 앞면에 비해 뒷면은 치밀하지 못하다. 목 뒤를 다른 곳에 기대어 놓을 수 있게 쪼아낸 점에서 처음부터 몸체가 없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민머리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이마에는 백호를 돋을새김하였다. 다소 길쭉한 얼굴에는 곡선의 눈썹과 굳게 다문 입, 그리고 아랫입술과 턱이 두툼하게 조각되었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말 내지 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불
약사불은 중생의 여러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을 막아주는 부처로서 대의왕불이라고도 한다. 약사불은 단독상은 물론 사방불로도 조성되었다. 사방불에서는 동쪽에 위치하여 동방유리광세계의 부처로 인식되었다. 약사불은 대부분 한 손에 약단지를 들고있어 다른 종류의 불상과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이 불상은 남산 용장골[茸長谷]에서 옮겨온 것이다. 화려한 2중의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오른손은 촉지인을 하고 왼손에는 약단지[藥壺]를 들고 있는 약사여래좌상이다. 1975년 동부동東部洞 옛 박물관에서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길 때 머리와 광배 일부를 접합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머리에는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풍만하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법의法衣는 편단우견의 방식으로 입었다. 광배는 배 모양으로 두광과 신광의 안쪽에는 넝쿨무늬를, 그 바깥에는 넝쿨무늬 모양의 불꽃무늬를 조각하였다. 팔각의 연꽃대좌는 상대上臺를 2단의 앙련仰蓮으로, 하대下臺는 1단의 복련伏蓮으로 장식하였다. 긴장감이 떨어진 신체 표현과 장식성이 강조되어 화려하고 복잡해진 광배의 문양 등으로 보아 제작 시기는 8세기 말 내지 9세기로 추정된다.

도금은 거의 벗겨졌으나 탄력적인 몸매와 유려한 옷주름이 서로 조화를 이룬 통일신라 전성기 양식을 볼 수 있다. 머리는 나발이며 널찍한 육계가 높게 올라있다. 신체에 비해 큰 얼굴은 사색에 잠긴 듯하고 목에는 삼도가 있다. 편단우견 방식으로 법의를 착용한 뒤 옷자락 끝으로 오른쪽 어깨를 가렸다. 가슴과 무릎 아래에 중첩된 U자형 옷주름은 유려하면서도 힘이 있다. 당당한 가슴과 살짝 나온 배, 양 허벅지는 부피감이 강조되어 전체적으로 생동감을 준다. 왼손으로 약그릇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아래로 내려간 법의자락을 움켜쥐고 있는데 통일신라 금동불에서 흔하지 않은 자세이다.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은 진리를 상징하는 법신불로 우리나라에서는 『화엄경』의 주불로 생각했다. 중국, 일본의 보살형 비로자나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여래형인 것이 특징이며, 통일신라 8세기 후반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9세기에 널리 유행하였다. 비로자나불은 다른 부처와는 다른 자세를 하고 있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비로자나불은 한쪽 손의 검지를 위로 세우고 다른 한쪽 손은 감싸 쥐는데, 이러한 손갖춤을 ‘지권인’이라고 한다. 이는 이치와 지혜,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은 본래 하나라는 의미이다.

광명을 뜻하는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법신불法身佛로서 『화엄경華嚴經』의 주불主佛로 등장한다. 중국과 일본의 불교미술에서는 비로자나불이 머리에 보관을 쓰고 몸에 영락을 걸친 보살형을 띠는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여래형, 즉 부처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으로, 통일신라 8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손 모양은 곧추세운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데, 이러한 손갖춤을‘지권인智拳印’이라고 한다. 이는 이치와 지혜,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은 본래 하나라는 의미이다. 이 작품은 작고 둥근 얼굴에 눈을 감아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둥근 육계가 솟은 머리에는 격자무늬로 선새김[線刻]을 하였다.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입은 대의大衣 옷자락이 오른쪽 어깨에 살짝 걸쳐졌으며, 가부좌한 다리 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소형의 불상임에도 균형잡힌 신체비례, 얼굴과 옷주름의 표현이 자연스럽다. 통일신라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의 손모양과 달리 손의 좌우가 바뀌어 있다. 넓적한 얼굴은 신체에 비해 크고 머리는 민머리에 육계를 크게 표현하였다. 눈은 지그시 아래로 향하고, 작은 입술은 양 끝을 눌러 미소를 머금었다. 두 귀는 활처럼 휘었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에 내의가 비스듬히 표현되었다. 지권인을 한 손 뒤로 군의를 묶은 띠매듭이 보인다. 옷주름은 배에서부터 아래로 완만한 U자형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법의자락 아래로 군의자락이 보인다. 뒷면은 머리와 몸 전체에 주조구멍이 크게 나있다.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머리와 명상에 잠긴 듯 고요한 얼굴 표정은 종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한쪽 무릎 위에 반대쪽 발을 올려 걸치고 얼굴에는 손가락을 살짝 대어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의 상을 말한다. 반가사유상은 본래 석가모니부처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덧없음을 사유하던 모습에서 비롯되었으며 중국 남북조시대에는 태자사유상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6세기부터 약 100년간 집중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독립된 상으로 만들어졌다. 높이 10~30cm의 작은 상이 대부분이나, 1m에 가까운 대형도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는 반가사유상을 먼 미래에 중생을 구제할 미륵불이 될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머무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

반가사유상은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왼 무릎 위에 오른발을 얹고, 고개 숙인 얼굴의 뺨에 손가락을 대어 명상에 잠긴 자세의 상을 말하며, 인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러한 모습은 원래 석가모니 부처가 출가하기 전인 태자였을 때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사유하던 모습이어서 중국에서는‘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 하였다. 그러나 점차 하나의 독립된 보살상菩薩像형식으로 확립되면서‘반가사유상’으로 불리게 되었다. 독립상의 반가사유상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널리 보편화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금동상金銅像이 많이 남아있다. 이 상은 양산 물금면勿禁面에서 발견되어 신라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소형의 금동불상은 이동이 쉽기 때문에 출토지만으로 국적을 단정할 수는 없다. 살이 오른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반가좌한 다리를 덮고 있는 옷주름은 유려하고 섬세하다. 조형미가 뛰어난 우수한 불상이다.

머리에 삼산관을 쓰고 상체에는 옷을 거의 걸치지 않았다. 이 상은 주조기술이나 세부표현이 뛰어나진 않으나, 국보 제83호 계통의 금동반가사유상과 같은 유형으로 이 계통의 도상이 삼국시대 신라 지역에서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송화산松花山에 있는 김유신장군묘의 재실齋室인 금산재金山齋에 전해져 오던 것을 1930년에 박물관으로 옮겨왔다. 머리와 두 팔은 파손되어 남아있지 않지만, 의자에 앉은 자세에서 오른발을 왼 무릎 위에 올린 반가사유상이다. 벗은 상체에는 장식 없는 목걸이를 돋을새김[陽刻] 하였다. 하체에 걸친 군의裙衣 자락은 무릎 아래에서 자연스러운 옷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려 끝부분에서‘Ω’모양을 이룬다. 허리에 묶은띠 매듭은 왼쪽 옆구리에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대좌의 아랫부분은 원형이고 윗부분은 사각형이며, 하단의 원형대좌에 이어진 연꽃 위에 왼발을 올려놓았다. 이 상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된 경북 봉화 북지리北枝里 출토 반가사유상과 함께 출토지가 확실한 신라의 대표적인 석조반가사유상이다.

머리에 쓴 삼산형三山形의 보관寶冠과 오른쪽 뺨 아랫부분에 손가락을 댄 자국으로 보아 반가사유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살이 오른 둥근 얼굴에 눈은 지그시 감고 있으며, 입술 양 끝을 살짝 눌러 미소 띤 표정을 하고 있다. 경주 황룡사 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불상은 비록 완전하게 남아있진 않으나, 부드러운 미소와 친근한 얼굴에서 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관음보살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자비를 상징한다. 관음보살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대개 작은 불상[화불]이 감입된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보관은 마모가 심하여 화불의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왼손에 정병을 들고있어 관음보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상은 경주 낭산狼山의 중생사衆生寺로 전하는 절터 부근에서 수습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출간된『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사진에 따르면, 이 상의 왼쪽에 석조광배가 놓여있는 등 예전에는 다른 존상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몸에는 복잡한 영락장식을 걸쳤으며, 머리에는 가운데의 화불化佛을 중심으로 앞뒤로 돌아가면서 11구의 보살머리를 일렬로 조각하였다. 이러한 배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경전에는 십일면관음의 형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면의 자애로운 모습의 세 얼굴은 자비심을 내어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함이고, 왼쪽의 분노한 모습의 세 얼굴은 비심悲心을 일으켜 악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오른쪽 흰 이를 드러낸 세 얼굴은 맑고 깨끗한 선업善業을 행하는 사람에게 이를 더욱 권장하기 위함이다. 뒤쪽의 한 면은 크게 웃는 모습으로 선악의 모든 중생을 웃음으로써 거두어들이려 함이고 정상의 한 면은 부처님의 형상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의 마음을 이겨내는 상근기上根機의 중생들에게 불도의 궁극적 이치를 설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 보살상은 몸체의 왼쪽으로 무게를 실어 한쪽 다리를 굽힌 삼곡三曲 자세를 하고있다. 얼굴과 팔이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게 표현되었으며 하체는 짧은 편이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썼고 장방형의 얼굴은 양 볼이 풍만하다. 이마에는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백호를 표현하였고, 눈은 가늘고 길며 입술은 두툼하다. 넓은 어깨에 허리는 잘록하며 천의를 걸쳤다. 군의裙衣는 하나를 덧댄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군의를 묶은 띠는 좌우로 흘러내리며 끝부분에 술이 달렸다. 허리띠 가운데의 커다란 장식은 몸 가운데와 양다리로 나뉘어 그 띠가 흘러내려 뒷면의 띠와 양 옆에서 연결되었다. 손은 유난히 크게 표현되었는데,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 대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정병을 들었다. 상반신에 비해 평면적으로 조각된 발은 발가락이 길며, 앙련의 연꽃대좌와 한 돌에 조각하였다. 따로 제작된 복련伏蓮의 연꽃대좌는 양감이 풍부한 복판연화문複瓣蓮花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뒷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다.

팔부중
불교에서 팔부중은 신과 괴물을 포함하여 8종류로 상징되는 다양한 중생의 무리를 뜻한다. 이 팔부중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 불교미술에서 형상화되었다. 석굴암 전실을 비롯하여 주로 통일신라 하대에 세운 석탑에서 볼 수 있다.

경주 오릉五陵 근방에 있던 신라시대 사찰인 담암사 터[曇巖寺址]에서 옮겨 온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면석石塔面石이다. 팔부중은 원래 인도의 다양한 재래신들에서 비롯되었으며 불교가 성립된 이후에는 불법의 가르침을 듣는 여덟 선신善神으로 재구성되어 부처의 세계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이후 석탑이나 부도, 석등의 면석을 장엄하는 부조상浮彫像으로 많이 등장한다. 담암사 터에서는 석탑의 상층기단면석上層基壇面石에 새겨진 아수라상(오른쪽 사진)과 건달바상(위쪽 사진)이 수습되었다. 아수라는 세 개의 얼굴과 여섯 개 혹은 여덟 개의 팔이 있는 형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쉽게 구별된다. 건달바상은 갑옷으로 무장한 채 머리에 사자관獅子冠을 쓰고 구름 위에 앉은 모습으로 돋을새김 하였다. 좌우로 흩날리는 천의자락으로 인해 상승감이 느껴진다. 두 상 모두 표현이 세밀하고 섬세하며, 조각수법도 세련되어 통일신라 8세기 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오릉五陵 근방에 있던 신라시대 사찰인 담암사 터[曇巖寺址]에서 옮겨 온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면석石塔面石이다. 팔부중은 원래 인도의 다양한 재래신들에서 비롯되었으며 불교가 성립된 이후에는 불법의 가르침을 듣는 여덟 선신善神으로 재구성되어 부처의 세계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이후 석탑이나 부도, 석등의 면석을 장엄하는 부조상浮彫像으로 많이 등장한다. 담암사 터에서는 석탑의 상층기단면석上層基壇面石에 새겨진 아수라상(오른쪽 사진)과 건달바상(위쪽 사진)이 수습되었다. 아수라는 세 개의 얼굴과 여섯 개 혹은 여덟 개의 팔이 있는 형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쉽게 구별된다. 담암사 터 석탑의 아수라상은 세 개의 얼굴과 여덟 개의 손에 해와 달, 금강저 등의 각기 다른 물건을 쥔 채 구름 위에 앉은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두 상 모두 표현이 세밀하고 섬세하며, 조각수법도 세련되어 통일신라 8세기 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유신(595~673)과 천관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천관사터에서 출토되었다. 가루라는 고대 인도의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새로서 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금시조라고도 하는데, 팔부중 상에서는 사람의 얼굴에 새부리 입이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갑옷을 입고 몸을 약간 튼 채 구름 위에 앉은 이 상은 천의를 휘날리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

사리갖춤
사리란 시신을 화장한 후 남은 유골을 말한다. 석가모니불이 입적하자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8개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이 무덤을 스투파라 하는데, 스투파는 곧 탑이다. 탑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서 목탑과 전탑이란 새로운 형식을 낳게 되었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처음엔 목탑과 전탑이 세워졌지만 점차 석탑이 주류를 이루었다. 탑의 구조에 따라 사리갖춤을 안치하는 장소도 다른데, 목탑인 경우에는 심초 밑에, 석탑인 경우에는 탑신부에 구멍을 파 안치하였다. 감은사삼층석탑에서 나온 집모양 사리갖춤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독창적인 것이다. 금·은·동 등의 여러 재료로 만든 사리용기는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

분황사모전석탑은 선덕여왕 3년634에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석탑으로 신라 초기 석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현재 3층으로 복원되었지만 석탑의 전체적인 비례와 주변에 확인된 벽돌모양 석재의 양으로 볼 때 원래는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함은 1915년 분황사 모전석탑을 해체·수리할 때 2층과 3층 탑신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석함 뚜껑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63cm이며, 몸체는 자연석을 다듬어 내부에 사각형의 공간을 마련하고 사리합을 비롯한 각종 공양품을 넣었다. 몸체 바닥 한쪽에는 빗물이 들어갈 경우에 대비하여 배수구排水口를 뚫어 놓았으며, 뚜껑과 몸체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몸체에 돌기를 마련하였다. 석함 안에는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녹색 유리제 사리병 조각과 고려시대에 탑을 수리할 때 넣은 것으로 보이는 은합이 있었으며, 이 은합 속에는 사리가 비단에 싸인 채 들어있었다. 함께 넣은 공양품으로는 정확한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금동제 장식조각, 바늘통, 가위, 향유병, 금바늘과 은바늘, 조개, 여러가지 옥, 상평오수전과 숭녕중보 등이 있다.

1962년 서동리 동삼층석탑을 해체할 때 동삼층석탑 1층 탑신석 윗면의 네모난 사리공舍利孔에서 녹색 유리사리병을 넣은 곱돌 사리호와 흙으로 만든 99개의 작은 탑이 발견되었다. 사리병 안에는 사리 세 과顆가 들어있었으나, 탑을 복원할 때 사리를 새로운 용기에 넣어 탑 안에 다시 봉안했다. 탑은 틀로 찍어 구운 후 표면에 하얀색 호분을 발랐으며, 탑 바닥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다라니경을 넣고 나무 마개로 막았으나 마개는 남아있지 않다. 77개 또는 99개의 탑을 만들고 그 안에 다라니를 넣어 탑에 봉안하면 도솔천에 태어날 수 있는 공덕을 쌓는다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가르침에 따라 99개의 작은 탑을 만들어 석탑 안에 봉안한 것이다. 704년경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다라니를 써 넣은 탑을 만들어 공양하면 수명을 연장하고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 만들어진 탑을 무구정탑無垢淨塔이라고도 한다.

석탑
삼국시대 신라에서는 목탑을 돌로 재현한 백제와 달리 중국의 전탑과 같은 모습의 분황사 모전석탑을 만들었다. ‘모전석탑’은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 대신 안산암을 벽돌처럼 깎아 쌓은 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모전석탑뿐만 아니라 전탑, 모전석탑의 영향을 받은 석탑도 만들었다. 이런 석탑은 지붕 윗면이 지붕받침처럼 단이 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의 석탑은 목탑과 전탑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 두 단으로 된 기단과 지붕, 기둥 표현 등은 목탑에서 온 것이고 여러 층을 이루고 있는 지붕받침은 전탑에서 온 것이다. 석탑을 만들기 시작한 7세기 후반의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82장의 돌을 사용하였으나 8세기 중엽에는 효율성을 도모하며 점차 규격화되어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은 22장의 돌로 탑을 완성하였다. 9세기 석탑은 22장도 채 되지 않는 것도 있다. 전체적인 형태를 유지하되 적은 부재를 사용하여 제작의 편의를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고선사高仙寺는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617~686)가 주석駐錫했던 통일신라시대의 대찰大刹이다. 고선사에 대한 기록은『삼국유사三國遺事』,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고려사高麗史』등에 남아 있는데, 이 기록들로 보아 이 사찰은 686년 이전에 완공되어 적어도 1021년까지는 법등法燈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75년 경주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수몰지역으로 결정됨에 따라 고선사 삼층석탑을 비롯한 발굴문화재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고선사 터 삼층석탑은 감은사 동서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의 초기양식이다. 여러 개의 석재를 짜 맞추어 쌓는 방식을 적용하여 이중의 기단부基壇部와 삼층의 탑신부塔身部로 구성되었다. 1층 탑신석塔身石의 네 면에 문비門扉를 새겼으며 표면에는 금동판 등을 부착하기 위한 작은 구멍들이 확인된다. 석탑 이전 당시에 3층 탑신석 윗면에서 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사리갖춤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주 남산 승소골[僧燒谷] 절터에 넘어져 있던 것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옥개석屋蓋石의 일부와 상륜부相輪部는 결실되었다. 이 석탑은 옥개석의 층급받침 수가 4단으로 줄어들고, 도식화된 사천왕상의 새김수법, 표면의 안상무늬 새김 등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특히 상하층 기단부와 초층 탑신부에 새겨진 상다리 모양의 안상무늬는 9세기 전반에 제작된 경주시 암곡동 무장사 터 삼층석탑, 칠곡 기성동 삼층석탑 등과 비슷하여 양식적인 연관 관계를 보인다.

범종
범종은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는 종을 말한다. 범종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는 이들이 소리를 들으면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한다.

성덕대왕신종은 771년 혜공왕惠恭王 때 만들어진 범종梵鍾으로‘봉덕사종奉德寺鍾’이라고도 한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년)이 아버지 성덕왕(재위 702~737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종을 만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아들인 혜공왕대(재위 765~780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범종을 대표하는 성덕대왕신종은 당시의 금속공예기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다. 종을 거는 고리로는 용 한 마리가 목을 구부린 모습으로 표현된 용뉴龍紐가 있고, 용의 목 뒤에는 마디를 나누어 무늬를 장식한 음통音筒이 있다. 종의 윗판[천판天板]과 음통 사이에는 구멍이 뚫려있으나, 음통의 역할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종의 위·아래에는 유려한 모란넝쿨무늬띠를 돌렸으며, 9개의 연꽃을 에워싸고 있는 네 개의 연곽대蓮廓帶에도 모란넝쿨무늬를 채웠다. 연곽대 아래에는 서로 마주보고 앉아 손잡이가 달린 향로를 들고 있는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 두 쌍이 있다.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撞座는 섬세한 보상화무늬로 표현하였다. 종구鍾口 또한 직선인 다른 범종들과 달리 8개의 곡선으로 구성하여 변화를 주었다. 마주보는 공양천인상 사이에는 종을 제작하게 된 이유와 종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등을 알려 주는 1,00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신라미술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은 주로 불교미술품을 소개하는 공간으로서 불교미술실, 황룡사실, 국은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로비와 중층에도 불교 조각품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전시품으로서 남산 장창골에서 옮겨온 미륵삼존불, 백률사 약사불, 황룡사터 망새 등, 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를 볼 수 있습니다.
참여: 모든 표현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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