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경기도 인물 - Part 1

경기문화재단

나라의 근간, 유교문화, 외세침략

정도전 鄭道傳 1342~1398

고려말 조선초기의 정치가, 사상가. 호는 삼봉. 평택에 불천위를 봉안한 문헌사文憲祠와 기념관이 있다.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 고려말기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 앞장섰다.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정비하여 통해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백성[下民]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지만 얻지 못하면 백성은 인군(人君)을 버린다.”(『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 조선 개국의 기본정책을 규정한 법전, 정도전 편찬)

“옛날에 천자가 사해를 다스리며 관작을 설치하고 봉록을 지급한 것은 신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 임금이 관리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도 오로지 백성을 근본으로 한 것이며, 관리가 임금에게 보답하는 것도 하나같이 백성을 근본으로 한 것이었다.” (『조선경국전』)

황희 黃喜 1363~1452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신, 정치가. 호는 방촌. 파주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으며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상이다. 영의정 18년, 우의정 1년, 좌의정 5년 등 총 24년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90세까지 살았는데 벼슬한 기간만 73년에 달했다. 대쪽같고 강직한 성품이지만 너그러운 면도 있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황익성공(黃翼成公 ; 황희)은 도량이 넓어서 조그마한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스스로 겸손하며, 나이 90여 세인데도 (한 방에 앉아서 종일 말없이 두 눈을 번갈아 뜨면서) 책을 읽을 뿐이었다. 방 밖의 서리 맞은 복숭아가 잘 익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와서 함부로 따자, 느릿 느릿,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는 마라’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나가 보니 한 나무의 열매가 전부 없어졌다. 아침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면 밥을 덜어 주며, 떠들썩하게 서로 먹으려고 다투더라도 공은 웃을 따름이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재상 된 지 20년 동안 조정은 공을 의지하고 중히 여겼으니 개국 이후 재상을 논하는 자는 모두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용재총화[ .齋叢話]』 ; 조선초기에 성현[成俔]이 지은 잡록)

이원익 李元翼 1547~1634

조선중기의 문신. 호는 오리. 광명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으며 충현박물관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실무형 관료로 유명하다. 흔히 ‘오리대감’, ‘오리정승’이라고 불렸으며 청백리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 때 임금이 이원익의 안부가 궁금해 강홍중 姜弘重을 보냈다. 강홍중은 그가 쓰러져 가는 두 칸짜리 초가에서 거문고를 타며 지낸다고 전했다. 이에 인조는 그의 청렴함을 높게 평가해 5칸 집을 하사하며 관감당觀感堂이라는 칭호까지 내렸다. 1631재상을 지낸 지 40년 만에 5칸짜리 집을 하사받으면서도 이원익은 자손들에게 그릇된 재화를 멀리하고 농사에 힘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조광조 趙光祖 1482~1519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 정치가. 호는 정암. 용인에 묘소와 그를 제향한 심곡서원 深谷書院이 있다.
조광조는 중종 때 도학정치 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내세웠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음을 당했다. 그는 요순시대 堯舜時代와 같은 이상정치를 실현코자 하였으며, 그 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사림에게 정신적인 표상이 되었고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했다. 퇴계 이황이 조광조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정암조선생행장靜庵趙先生行狀』은 그의 성품과 학덕, 신하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조광조의 꿈이 펼쳐지지 못한 데 대해 이황은 그 이유로 크게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발탁과 등용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는 것이고, 둘째는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며, 셋째는 귀양 가서 일생을 마친 것이라 하였다.

유배지인 능주지금의 전남 화순에서 결국 사약을 받게 된 조광조는 한양을 향해 큰절 3배를 올린 뒤 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당시 그의 나이 38세였다.

“임금을 어버이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 주리라.” (조광조의 절명시)

이이 李珥 1536~1584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율곡·석담·우재. 파주에 묘소가 있으며 자운서원에 배향되었다.

“율곡의 위대함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내다보고, 온몸을 던져 고치려고 노력한 선각자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어렵거나 더러운 것이 있으면 거기에 편승해 물들어 사는 방법이 있고, 현실을 피해 초야에서 혼자 깨끗하게 사는 길도 있으며, 그것이 아니면 기성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혁명적 도전도 있는데, 율곡은 이 길을 모두 택하지 않았다. 벼슬하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직언하여 위로부터의 개혁, 곧 경장(更張)을 끌어내고자 했으며, 물러나서는 자신의 몸을 더욱 깨끗이 닦는 학문에 집중하면서 후학을 길러 이 땅의 성리학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한영우, 『율곡 이이 평전』, 민음사, 2013)

허목 許穆 1595~1682

조선중기의 문신, 유학자. 호는 미수. 연천에 묘소가 있다.
허목은 송시열 宋時烈, 윤선도 尹善道, 윤휴 尹.와 함께 조선시대의 성리학 논쟁을 일으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나이 50에 이를 때까지 학문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였으며 과거를 치르지 않고 우의정에 올랐을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남인의 총수로서 17세기 후반 서인 계열의 송시열 등과 벌인 두 차례의 예송 禮訟은 성리학적 이상국가에서 본보기가 되어야 할 왕실의 예법을 논한 것으로 당시 사회에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능해 그림을 배우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채제공 蔡濟恭 1720~1799

조선후기의 문신. 호는 번암 ·번옹. 용인에 묘소가 있다.
영조 후반과 정조 때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사도세자의 측근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어떤 불의나 부정직에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으며, 홍국영 洪國榮의 세도에 억울하게 당한 곧고 바른 사람은 모두 신원해 주어 명예를 회복하는 데 앞장섰다. 유능한 인재들을 강력히 추천하고 발탁하여 올바른 행정과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임금을 설득하는 경륜을 지닌 인물이었다.

“바라보면 근엄해 무섭게도 보이지만 대면해 보면 유화하여 뜻이 잘도 통하네. 고요히 계실 때는 쌓아 둔 옥이나 물에 잠긴 구슬 같으나, 움직이면 산이 울리고 바다가 진동하도다. 거센 파도 휘몰아쳐도 부서지지 않고 돌무더기 짓눌러도 닳지를 않네. 아무리 짧고 길며 작고 큰 창날이 겨누어도 정승으로 발탁됨을 막지 못했네. 그 웅위하고도 걸출한 기개는 천 길 높이 깎아지른 절벽의 기상이 있지만 남을 해롭게 하거나 사물을 해치려는 생각은 조금도 마음속에 두질 않았네. 군자답도다, 이 어른이여.” (정약용의 『번옹화상찬[樊翁畵像讚]』중에서)

권율 權慄 1537~1599

조선중기의 명장. 호는 만취당·모악, 시호는 충장 忠莊. 양주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고, 고양에 행주 대첩비가 남아 있다.

“남아(男兒)는 감의기(感意氣)요, 공명(功名)을 수복론(誰復論)하랴!” 행주산성 입구에 적혀 있는 권율의 말로 “남자는 오직 의와 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부귀와 명예를 따지겠는냐”라는 뜻이며, 1593년 2월 행주산성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을 격려한 말이다. 매우 대범한 성품으로, 전투 중에 지휘봉을 땅에 떨어뜨린 것을 알고 태연히 일본군 진영으로 되돌아가 주워 왔다거나 행주대첩 당시 쓰고 있던 투구에 물을 따라 지친 병사들에게 먹이면서 사기를 독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문부 鄭文孚 1565~1624

조선중기의 문신, 의병장. 호는 농포. 의정부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회령 會寧 ; 함경도 북부의 국경인 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적군에 투항했다. 이에 정문부가 의병대장이 되어 경성 鏡城을 수복하고 회령으로 진격,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겨 준 국경인의 숙부 세필 世弼을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12월 정문부의 의병부대는 5천여 명으로 늘었으며, 이듬해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부대를 함경도에서 몰아내는 큰 공을 세웠다. 1624년 이괄 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그가 지은 시에 왕을 반대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하여 체포되었고, 이후 옥사했다. 그 후 누명을 벗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김상헌 金尙憲 1570~1652

조선중기의 문신. 호는 청음. 남양주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김상헌은 청과의 외교에서 타협을 거부하는 강경파였다. 항복하러 나가는 왕을 따르지 않고 바로 낙향한 일로 반대파의 공격을 받자 “신하는 군주의 뜻에 충성하는 것이지 군주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내시나 아녀자들의 충성이지 사대부의 충성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후 청의 출병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에 끌려갔다. 이때 자신의 심정을 담아 지은 시가 전해진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쟈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쟈 하랴마난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청구영언[靑丘永言]』)

이항로 李恒老 1792~1868

조선후기의 성리학자. 호는 화서. 출생지인 양평에 생가와 묘소 , 기념관이 있다.
강직한 성리학자로 ‘위정척사 爲正斥邪’ 사상의 실천을 이끌어 외세의 침략에 맞선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이항로는 “천하에 커다란 시비·분별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 華와 이 夷의 구분이고, 둘째는 왕 王과 패 覇의 구분이며, 셋째는 정학과 이단의 구분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화, 서양을 이로 보고, 성리학을 정학, 천주교를 이단으로 본 것이다. 이와 같은 구분은 그 밑바닥에 중화·사대사상이 깔려 있으며,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을 받던 당시 상황에서 위정척사는 주체의식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최익현 崔益鉉 1833~1906

조선후기의 문신, 의병장. 호는 면암. 포천 출생으로 사당 채산사가 있다.
최익현은 노론 화서학파의 지도자이고 위정척사파의 중심 인물이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상소를 올리고 국내외에 조약의 무효를 선포할 것과 여기에 가담한 박제순 朴齊純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상소 등에 의한 위정척사운동이 집단적, 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아, 지난 10월 20일의 변은 전 세계 고금에 일찍이 없던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 이웃나라가 있어도 스스로 절교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절교하니 이것은 나라가 없는 것이요, 우리에게 토지와 인민이 있어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니 이것은 임금이 없는 것이다.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으니 우리 삼천리 인민은 모두 노예이며 신첩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된다면 살았다 하여도 죽는 것만 못하다.”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중에서)

허위 許蔿 1854~1908

조선말기 의병장. 호는 왕산. 연천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허위는 구한말 정미 丁未의병 당시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한 의병대장이다. 일제의 사전 봉쇄로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가 진격하려 했던 서울 동대문-청량리 구간은 1966년 이후 그의 호를 따라 ‘왕산로’로 불리고 있다. 1907년 대한 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또다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허위는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무장 전력이 크게 향상됐다. 1908년 관동의병장이 된 이인영 李麟榮은 각지 의병장들에게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고, 이들이 모여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허위를 군사장으로 추대하였다. 연합의병의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허위는 13도창의군 총대장으로서 2차 서울 탈환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 6월 11일 일제 헌병에 체포된 그는 서대문형무소 사형수 제1호로 기록되며 그해 10월 21일 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Gyeonggi Cultural Foundation
제공: 스토리

600년 경기도

기획 |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진행 |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팀
집필진 | 강진갑(경기대학교 교수)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이상대(경기개발연구원 미래비전실장)
이지훈(경기문화재연구원 책임연구원)
정형호(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지원 | 김태용, 최서연, 김영대, 이학성, 박소현, 성형모, 김호균, 김경민, 조수진(경기문화재단 홍보마케팅팀)

이 전시는 경기도 600년(1414-2014)을 맞아 우리 역사에서 핵심역할을 담당한 경기도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통일한국의 중심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약의 계기로 삼고자 제작한 『육백년 경기도』를 바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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