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의 임명과 운영

국립해양박물관

수군은 오늘날의 해군을 일컫는 말로, 바다에서 치안과 국방을 담당했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일찍부터 상당수의 수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
1795

1795년 왕명에 의해 유득공이 지휘하여 편집한 전서이다. 원집 8권 6책과 부록 6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은 윤음·교유·사제문·도설·세보·연표로 구성되어 있고, 거북선의 도설이 포함되어 있어 거북선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충민공계초 忠愍公啓草
1662

이 자료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조정에 전쟁 상황을 보고한 문서를 다른 이가 옮겨 적은 것이다. 만력 20년(1592, 선조 23, 임진년 四月 十五日 戌時) 계본을 시작으로 만력 22년(1594, 선조 25 四月 二十日) 계본까지 총 68편이 수록되어있고, 내용은 크게 왜적의 정세를 알리는 내용, 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친 내용, 장수 및 수군들의 공과를 알리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외 이항복(1556~1618)의 「李統制碑銘」, 「故統制使李公遺事」, 박승종(1562~1623)의 「忠愍祠記」가 포함되어 있다.

이순신의 시호는“충무忠武”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인조 20년(1642)“이순신, 고경명 등이 아직 시호를 받지 못했으므로”시호를 내릴 것을 청해 다음해인 1643년“충무”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 32권(선조 31, 1598)을 살펴보면 이순신 전사 후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당을 짓고 충민사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충민忠愍”을 사용한 비석을 현재 남해 충렬사 내부에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노량해전에서 순절한 이순신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충민공이라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충무공가승 忠武公家乘
이홍의(李弘毅) | 1716

1권에는 이순신이 남긴 각종 글이 실려 있다. 임진왜란 중 체찰사 이원익에게 보낸 편지,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아끼던 부하인 정운 장군을 위해 지은 제문, 칼에 새겨진 검명과 한산도 야음 등 4수의 시 등이 실려 있다. 2권에는 이순신의 가문을 소개한 세계世係, 최유해가 지은 이순신의 전기인 행장行狀 등, 3권에는 조카 이분이 지은 이순신의 일대기인 행록行錄이 실려 있다

한글 충무공행장 忠武公行狀
19세기

이 자료는 이순신의 태몽부터 출생, 유년시절, 무과급제, 관직생활, 왜군과의 해전 그리고 전사하기까지 주요 사건들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후손들과 부인 방씨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실려있다. 이순신의 행장은 조카 이분(李芬, 1584~1647)이 지은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 최유해(崔有海, 1588~1641)의 『충무공행장忠武公行狀』 등 여러 본이 있다. 그러나 한글행장은 우리 박물관 소장 『튱무공 장』과 『충무공 장』개인소장, 『션죠충무공 장』 1857년,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소장만이 알려져 있다.

충무공 평생도 병풍 忠武公 平生圖 屛風
조선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그의 일생에서 주요한 사건들을 모아서 그린 12폭 병풍이다. 유년시절의 병정놀이 모습, 거북선 제작, 귀향 가는 모습, 해전, 임진왜란 등 충무공 이순신의 일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여산 송씨가 홍패 礖山 宋氏家 紅牌
1576·1583·1613

여산 송씨 일가 홍패 3점이다. 송전(宋荃)과 송두남(宋斗南)은 임진왜란 당시 『난중일기』에 그 활약상이 기록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형제와 부자간의 홍패는 여산 송씨 가문의 내력이 오롯이 전해지며, 조선시대 군사 관련 연구 자료로써 가치가 높다.

송전(宋荃)의 홍패
만력 4년(1576, 선조 9) 10월에 보인保人 송전이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받은 홍패이다.

송두남(宋斗南)의 홍패
만력 11년(1583, 선조 1) 9월에 정로위定虜衛1) 송두남이 무과 병과 226위로 급제하여 받은 홍패이다.

송지강(宋之綱)의 홍패
만력 41년(1613, 광해군 5) 10월에 교생校生 송지강이 무과 병과 제 14인에 급제하고 받은 홍패이다.

한범석 유서 韓範錫 諭書
1724

유서諭書는 조선 시대 국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렸던 명령서이며, 밀부는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증표이다.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재임 중이었던 한범석은 1724년(경종 4) 1월 27일에 유서를 받고 경상좌수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제주 목사에 임명될 때까지 약 1년 2개월간 근무하였다. 한범석은 1735년 경기도 수군절도사로서 삼도 통어사를 겸함으로써, 무관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격상된 인물이다.

이장렴 고신 李章濂 告身
1859

이장렴(李章濂, 1821~?)에게 내려진 임명장이다. 이장렴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字는 제경霽卿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고 1859년(철종 10)에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이듬해에 강화부유수로 임명되어 병인양요 당시 강화부와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후 1868년에 형조판서, 1869년에 금위대장을 역임하였다. 이 문서는 이장렴을 1859년 12월 24일 절충장군·황해도수군절도사折衝將軍·黃海道水軍節度使에 임명한 교지이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는 조선 시대에 각 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정3품의 무관이다.

김경혁 위도진수군동첨절제사 해유문서 金慶赫 蝟島鎭水軍同僉節制使 解由文書
1796

1796년(정조 20) 김경혁(金慶赫)이 전라도 위도진 수군동첨절제사를 이임할 때 작성된 해유문서이다. 해유문서는 관원이 교체될 때 후임관에게 업무와 물품을 인계하고 재직 중의 회계와 물품관리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작성하는 인수인계서를 말한다. 김경혁은 1793년 12월 27일 위도진 수군동첨절제사에 임명받고 이듬해 정월 18일부터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으며, 1796년 정월 24일까지 약 2년간 재직하였다. 이 문서는 1796년 3월 29일에 후임관 용득주(龍得珠)가 전임관 김경혁의 해유를 위해 호조에 올린 해유첩정과 동년 4월 17일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李)가 호조에 올린 해유첩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영수 창성도호부사 해유문서 閔泳壽 昌城都護府使 解由文書
1893

1893년(고종 30) 평안도 창성부사에서 체직된 민영수(閔泳壽)의 해유와 관련한 문서로서, 필사로 된 2점이 점련된 1본이다. 해유문서란 관원이 교체될 때 후임관에게 그 사무와 관리하던 물품을 인계하고 재직 중의 회계와 물품관리에 대한 책임을 면하는 일을 해유라고 하며, 이때 작성하는 문서를 말한다. 본 문서는 1891년(고종 28) 6월 21일 창성부사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1893년고종 30 5월 26일에 체직된 민영수에 대한 해유 절차를 밟기 위해 신임 창성부사 이(李) 아무개가 상관인 평안도 도순찰사에게 보낸 해유첩정과 이를 받은 평안도 도순찰사가 중앙 관서인 호조에 올린 첩정, 이를 결재 처리한 호조의 확인서가 뒷면에 배서背書되어 있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승보 해유문서 李承輔 解由文書
1860

1860년(철종 11) 이승보(李承輔, 1814~ 1881)가 함경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를 떠날 때 작성된 해유문서이다. 이승보는 1858년(철종 9) 5월 5일에 영흥 부사로 임명받아, 5월 21일부터 임무를 시작하였으며, 1860년 1월 2일까지 재직하였다. 이 문서는 1860년 2월 21일에 후임관 류태동(柳泰東, 1792~?)이 전임관 이승보의 해유를 위해 호조에 올린 해유첩정과 2월 25일에 함경도 관찰사가 호조에 올린 해유첩정이 있다. 배면에는 3월에 호조에서 함경도 관찰사의 첩정의 내용에 따라 전 부사 이승보의 해유를 받기 위해 이조에게 보낸 해유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언섭 장계문 李彦燮 狀啓文
1748

이언섭(李彦燮, 1692~?)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재임했던 1747년(영조 23) 7월~1748년 9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감영과 통영에 대해 보고한 문서와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올린 보고서 등의 공문서를 정리해 놓은 자료이다. 장계의 내용 가운데 ‘다락이 있고 속도가 둔하여 정박시 잘 뒤집어지는 누선보다 갑판으로 덮여 있고 군병이 배 안에 몸을 숨긴 채로 전투할 수 있고 방향 전환이 쉽고 속도가 빠른 거북선龜船을 만들어 군기를 강화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내용이 눈에 띈다. 경상좌수영 관할 지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파악하고 해결해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어재연 시호교지 魚在淵 諡號敎旨
1871

어재연(魚在淵, 1823~1871)의 시호교지이다. 어재연은 1841년(헌종 7) 무과에 급제하고 1866년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강화도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1871년(고종 8)에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순무중군으로 강화도에 급파되었다. 그는 광성진에서 미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1871년(고종 8) 7월에 고종이 어재연을 병조판서 겸의금부 삼군부지사에 추증하고,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리는 교지이다. 의미는 “어려움에 임하여 나라를 잊지 않았으니 충이요, 원야에서 죽었으니 장이라.”는 뜻의 충장忠壯이다.

수군조련홀기 水軍操鍊笏記
조선 후기

수군 조련의 순서를 두루마리에 적어 놓은 조련홀기이며, 작성 연도는 밝혀져 있지 않다. 문서 마지막 부분에 있는 「삼사위례三司爲例」에 사도蛇島, 발포鉢浦, 장흥長興, 낙안樂安 등의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각사초점고各司哨点考」에 대한 순서가 나와 있고, 이어 「조련홀操鍊笏」과 「야조夜操」가 있으며, 「파대오擺隊伍」 대오를 벌림하는 절차를 적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삼사위례三司爲例」가 있다. 조선 후기 수군의 조련 모습을 생생히 알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경상도 군병 성책 慶尙道 軍兵 成冊
1774

경상도 각 진영 소속의 행궁을 교대로 방어하는 입방군이나 봉수군과 같은 군병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대체로 1774년(영조 50) 9월에 작성한 것이다. 각 읍이나 진영별로 작성하였으며 문서의 끝부분마다 해당 지역의 총 책임자가 확인하였다는 수결이 있다. 이외에도 고성현 소속 군에게 지급한 봉급 내역, 동래부 오륙도 앞바다에서 파선한 삼천진 병선의 물품 파악 내역 그리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등이 통제사에게 올린 보고서牒呈 등 관문서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전라도 군적 全羅道 軍籍
1855

군인을 징발하기 위해 대상자의 신상을 기록한 전라도 지역의 군적軍籍이다. 기재 방식은 이름, 소속係, 거주지住, 나이年, 얼굴面, 수염鬚, 키身長, 흉터 자국疤 순으로 열거되어 있다. 거북선二龜船, 龜船, 羅州一龜船 승선 명단을 비롯해 전라도 연안 지역인 임치진·신지도·어란진·위도진·나주·이율진·남도진·무안현·목포진·다경포·영광군·영암군·가리포·금갑도·고군산·마도진에 소속된 나장과 기수의 명단이 정리되어 있다. 끝부분에는 ‘절도사 김節度使 金’의 수결이 되어 있다.

충청수사근무수첩 忠淸水使勤務手帖
18세기

충청수영 수군 지휘관의 임기, 군선 수, 병종, 지출 내역, 공문서 서식 등이 기록된 절첩식 문서이다. 충청수영 및 소속 수군에 대한 현황과 각종 규정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충청수사忠淸水使의 업무파악을 위해 숙종37~42년(1711~1716) 사이에 작성한 자료로 추정된다. 이 자료는 18세기 초반 충청 수군이 보유한 군선의 배치실태와 수영의 재정 운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수군 군적 水軍 軍籍
1863

영등진 군기점검성책, 조라포 화기전선점검성책, 경상도 하동부 수군기즙물점고성책, 경상도 천성보방군등급대성책, 천성보망군, 천성보전병사후선 화기점검기록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각반성명치부책 各班姓名置簿冊
조선

남해를 관장하였던 통영 감영 소속의 군대 편제 구성원의 성명을 기록해 놓은 문서로, 표지를 포함하여 8쪽 1책의 필사본이다. 앞표지에 ‘각반성명치부책各班姓名置簿冊’이라고 적혀 있고, 뒤표지에는 ‘통영교리목록統營校吏目錄’으로 되어 있다.

본 문서는 처음에 통영의 장교와 아전의 명부를 적어 놓은 치부책이었으나 나중에 통영 소속의 수군 명단을 각 반으로 나누어 적어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 다 작성자와 작성 시기는 표시되어있지 않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추적해 보면 작성 시기와 수록된 인물들의 거주 지역을 추정할 수 있으며, 조선 수군의 편제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군조련도 병풍 水軍操練圖 屛風
조선 후기

조선 후기 수군의 훈련 모습을 그린 8폭 병풍이다. 삼도수군통제사영은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대규모 훈련을 개최하였으며, 이때에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 3도의 수군이 모두 집결하였다. 특히, 봄 훈련인 춘조春操에는 군사 3만여 명이 통영에 집결하고, 판옥선과 거북선 등 500여 척의 함선이 동원되었다. 수군조련도를 살펴보면 조선 후기 수군의 편제를 확인할 수 있다. 삼도주사도독사령선三島舟師都督司令船, 삼도대중군사령선三島大中軍司令船, 부선副船,좌·우탐선左右探船, 좌·우한선左右翰船 및 소속 편대, 그리고 중영中營·전영前營·좌영左營·우영右營·후영 後營 등 오영五營에 소속되어 있는 전선들이 그려져 있다. 또한, 세부적으로 묘사된 각 전선은 저마다 수군 깃발을 앞·뒤로 갖추고 깃발에는 선단 체제에서의 위치와 소속 지명이 명기되어 있다. 전선의 앞 선두 부분은 수군 깃발을 통해 이 전선의 수군 편제 예하 어느 지역 소속의 전선임을 알 수 있고 선미 부분은 흑색 바탕에 구분이 가능한 글자가 함께 표시되어 있다. 특히, 선두 부분 깃발을 적색前·황색中李·흑색後李·녹색左李·백색右으로 묘사함으로써 수군 편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이양선 문정 초 異樣船 問情 草
조선 후기

동래부사가 용당포 앞바다에 나타난 외국 선박을 조사한 것을 보고한 문서이다. 이 당시 일반 백성들이 외국인과 말을 하거나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국의 선박이 나타나면 관리들을 현지로 파견하여 조사하게 되어 있었다. 이 문서는 동래부사와 부산진첨사 등이 부산 용당포에 정박한 이양선 2척에 대한 정황을 보고한 것이다. 중국 남경과 무역하기 위해 오가다가 우연히 정박한 홍모국紅毛國, 네덜란드 선박의 모습과 승선한 네덜란드인들의 생김새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그들의 정박 목적을 심문한 결과도 수록되어 있다.

요람 要覽
1866

요람은 중요한 내용만 뽑아 간추린 책으로, 1866년 강화도에 들어선 외국배에 대한 강화유수의 보고 내용이다. 유수는 수도 이외 개성, 강화, 수원, 광주 등 주요 장소에 두었던 장관직으로 행정과 군사권을 가진다. 이 자료의 내용은 강화유수가 올린 장계의 내용이다. 강화유수는 외국 배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적들에게 속수무책으로 길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적들이 서울까지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강화유수가 임금에게 사죄하며 상황을 알리고 있다.

이 사건은 1866년 대원군이 일으킨 천주교도 박해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제독이 조선을 침범했던 병인양요의 시작이다.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 게리에르호(Guerrière)를 기함으로 한 7척의 군함에 600명의 해병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 물치도(지금의 작약도) 근처에 나타나, 강화도 갑곶에 상륙한 뒤 곧 강화부를 점령하여 무기, 서적, 식량 등을 약탈하였다. 이 요람에는 장계와 함께 로즈 제독의 전함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흰 돛· 천주단·화포가 달린 모습이다.

내외직고 內外職攷
조선 후기

고종 연간에 종친부·충훈부·의빈부·돈령부·의금부·육조 및 내외 관직의 정·종품질과 각 도의 군관직·재산·내명부·문묘 위차·연간 제향사 등을 기록한 관안官案이다.

이재면, 이유원 등 고종 연간의 고위 관료들의 이름이 망라되어 있다.

표지는 목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제작되었으며 ‘내외직고內外職攷’라는 책의 제목이 음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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