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 5. 6. - 1991. 10. 3.

변혁의 시대

DDR Museum

독일 재통일 시기의 전형적 일기
베를린 DDR 박물관

1989년 5월 7일 일요일

일기장에게,

오늘 아침 선거가 있었어. 그것은 또 하나의 쓰라린 아픔이었지. 난 선거 위원회에서 나온 SED 여자에게 말했어. 저는 8주 내내 배관공을 기다렸습니다. 정원의 수도꼭지는 찔끔찔끔 새기만 하고 완전 먹통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에 대해 기록하더군. 저녁에 서독 방송을 보니까 어떤 단체들에서 자기네 표를 직접 계산하여 선거가 조작됐음을 증명했다는 거야. 이번에 많은 유권자가 국민 전선당(National Front) 후보들에게 반대표를 던진 모양이야. 그냥 투표나 하고 말썽들을 피워서는 안 되는 건데.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야. 그럼 내 수도꼭지는 언제 고치나?

라이프치히에서 마지막 총선거(Volkswahlen)에 사용된 투표함

배경:

SED가 확정한 '통합 명부(Einheitsliste)'에 근거한 마지막 총선. 투표가 허락된 유권자의 98.77퍼센트가 투표하였고, 선거 위원회에 의하면 투표자의 98.77퍼센트가 국민 전선 후보에 찬성표를 던졌다고 합니다. 독립적 단체들은 투표소에서의 개표 과정을 감시한 끝에, 선거가 조작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1989년 6월 7일 수요일

일기장에게,

우리 회사 동료인 스티브(Stefan Wille)가 시민 권리 행동가가 되었어. 그는 선거 부정에 대한 항의 시위를 하려고 오후 5시에 알렉스(Alex)로 갔어. 교회에 전시된 환경 뉴스레터(Umweltblätter)에서 시위 계획을 읽었던 거지. 알렉스 주변에는 별로 움직임이 없었어. 온통 경찰에 비밀경찰(Stasi)까지. 그는 재빨리 생각을 바꿨어. 경찰보다 스티브가 더 똑똑했던 거야. 이제 매달 7일마다 항의 시위를 하려나 봐.

움벨트-비블리오텍(Umwelt-Bibliothek)의 인쇄기

배경:

1987년 4월 약 1,000부의 환경 뉴스레터가 베를린의 환경 도서관(Umwelt-Bibliothek)에서 비정기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공식적 교회 활동 전용(Nur für den innerkirchlichen Dienstgebrauch)'이라는 표시는 주 정부의 감시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를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1987년 9월 25일 주 정부 보안 담당관들이 지온 커뮤니티(Zion community) 현장을 급습하여 복사기를 압수하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지온스 교회(Zionskirche) 앞에서의 침묵시위와 세계 언론 매체의 외침 덕분에 주 정부가 관용적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환경 뉴스레터는 반대파의 가장 유명한 간행물이 되었으며, 1989년 9월까지 32판이 발행되었습니다.

헝가리에서의 휴가 때 보낸 엽서

배경:

1989년 5월 2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했던 울타리를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철의 장막에 구멍이 생겼습니다. 많은 동독 시민들은 국경을 넘을 수 있는지 보려고 헝가리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들은 부다페스트 소재 서독 대사관 주변에 텐트를 치고 모여있었습니다. 상황은 아직 고요했지만, 분노의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1989년 8월 3일 목요일

일기장에게, 

험악한 날씨. 어제 평균 기온은 섭씨 11.5도였어. 1983년 이후 8월 중 가장 추운 날이었지. 발트 해안 연안 휴양지들에는 전반적인 수영 금지을 알리는 붉은색 폭풍 경고 깃발이 게양됐어. 힐트루트(Hiltrud) 아주머니가 사이프러스에서 엽서를 보내왔어. 엽서에는 짙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고대 사원의 사진이 있더군. 내 평생 이런 나라들을 가볼 수나 있을까? 아마 기껏해야 불가리아나 헝가리겠지. 딸인 아나벨(Annabel)이 부다페스트에서 편지를 보내왔어. 이번 여름은 대단할 거라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1989년 9월 2일 토요일

일기장에게,

동독 시민을 위한 신종 스포츠: 대사관 담장 오르기. 어쩌면 우리는 조만간 이 종목에서 또 하나의 올림픽 메달을 받게 될 거야. 부다페스트와 프라하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어. 수천 명이 대사관 뜰에 앉아 망명을 요청하고 있는 거지. 부디 아나벨은 이런 새로운 집단 시위에 참가하지 않아야 하는데.

휘날릴 것들

배경: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은 8월 22일 방문객을 차단하였습니다. 더욱더 많은 동독 시민이 로브코비츠 궁전(Palais Lobkowicz)의 담을 넘고 있었습니다. 1989년 9월 최종 망명 허가가 내려졌을 즈음 약 6,000명이 대사관 뜰에서 야영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불과 3일 후에는 7,600명의 동독인이 추가로 그 대사관에서 야영 생활을 하였습니다.

1989년 10월 7일 토요일

일기장에게,

40주년 기념 파티는 정말 대단했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호하고, 얼싸안고, 웃었지. 우리는 알렉스 시장에 있었어. 하이델로레(Heidelore)는 요리를 올린 파랗게 둘러 채색된 접시들을 받기까지 반 시간을 기다렸어. 나는 혼자서 맥주 두 세 잔을 마셨지. 저녁 방송에서 알렉스에서의 시위를 보았어. 젊은이 수천 명이 플라조 프로조(Palazzo Prozzo)에 쏟아져 나왔지. 그때 우리는 간만의 차이로 쇼핑한 물건을 집으로 가져갔어. 그 애들에게는 그 애들의 길이 있고, 나에게는 내 길이 있는 법.

배경: 

동독은 호화로운 4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귀빈들이 공화국 궁전(Palast der Republik)에서 기념을 하는 동안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대는 오후 5시에 알렉산더 광장의 월드 클록(World Clock) 앞에 모였습니다. 그런 다음 시위대는 공화국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어둠이 내린 후 동독 경찰은 광폭하게 시위대를 몰아냈습니다.

1989년 10월 9일 월요일

일기장에게,

결국, 상황이 과열되고 있어. 수만 명의 사람이 라이프치히의 거리를 점령했어. 사람들은 SED 중앙 위원회의 케케묵은 녀석들에게 격분하고 있어. 이미 이전부터 흉흉한 소문이 있긴 했어. 직장 동료인 스티브가 말하기를 라이프치히 주변에 탱크가 포진해 있다는 거야. 하지만 고르바초프(Gorbachev)는 분명 탱크 투입을 허락하지 않았어. 나는 집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베를린에서도 시위가 있었더군.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의 월요 시위
월요 시위에 관한 로다 쾨니히(Lothar König) 인터뷰

배경: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회가 수년 동안 매주 월요일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1989년 3월부터 동독으로부터의 망명을 신청한 사람들은 함께 모여 메인 기차역으로 갑니다. 1989년 9월 월요 시위가 축적되고 있는 긴장과 정치적 위기의 신호가 되었습니다. 1989년 10월 9일 약 70,000명이 함께 모여 시 중심부로 향하였습니다.

1989년 10월 25일 수요일

일기장에게,

아나벨은 부다페스트 여름 여행 이후 정말 흥분해 있어. 그 애는 남자 친구와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국경을 넘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 애는 도망치기 보다는 이곳에서 변화를 이뤄나갈 생각을 하고 있어. 어제 그 애는 '정보 기도'를 하러 겟세마네 교회로 갔어. 그러고는 에곤 크렌츠(Egon Krenz)를 국무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한 선거에 항의하려고 베를린을 거쳐 주 의회 건물로 밀고 들어갔지. 시위대는 그곳 도로를 촛불을 밝히며 점거했어. 그들은 이렇게 외쳤어. "에곤 크렌츠. 우리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는다. 에곤, 당신네의 선거는 거짓이다. 국민은 당신을 뽑지 않았다." 그리고 "바보상자를 끄고 참여합시다!" 음 이제 TV가 더욱 재미있어지네.

SED 총 서기장 및 국무 위원회 의장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1976-1989)
10월 24일 베를린에서의 에곤 크렌츠 반대 시위
재연된 모습

배경:

에리히 호네커의 뒤를 이어 SED의 총 서기장이 된 에곤 크렌츠는 국무 위원회 의장에 선출됩니다. 겟세마네 교회에서 시위 서한이 작성되었고 국무 위원회를 집단 점거하기로 하였습니다. 약 12,000명의 시위대가 평화롭게 베를린으로 향하였습니다.

1989년 11월 6일 월요일

일기장에게,

점심에 스티브가 말하길 SDP(사회 민주당)의 베를린 지방 지부가 함부르크 거리의 소피엔 교회(Sophienkirche)에서 창립되었다고 하더라. 부서장인 슈미트 박사가 웅얼거리기만 했어. "창 밖으로 몸을 너무 내놓지 마. 상황이 다시 바뀌면 길바닥에 나자빠질 첫 번째 사람은 네가 될 테니까." 스티브는 자기 할아버지가 예전에 SPD에 있었다고 하더군. 비록 그것은 공산당에 항거하는 좌파였지만, 지금은 그게 바로 옳은 일이야. 조직 운영 능력은 정말 탁월하지. 당에 가입하면 바로 최초 회비인 20DM(독일 마르크)를 걷어가거든. 이들의 등장으로 독일 소련 우호 협회(DSF)와 자유 독일 무역 통일 연맹(FDGB)가 사라졌어.

SDP 최초 회비 영수증

배경:

1989년 11월 5일 동독의 SDP(사회 민주당)의 지방 베를린 지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당은 1989년 10월 7일 슈반테의 어느 목사관에서 설립되었습니다. 다른 지방 지부들도 형성되었고 지부장이 선출되었습니다.

1989년 11월 10일 금요일

일기장에게,

아나벨이 남자 친구와 함께 어느 지하실 아니면 다른 데서 열린 테크노 파티에 갔어. 둘 다 아주 멋지게 차려입었더군. 그 애들이 한밤중까지 돌아오지 않자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 그때 초인종이 울렸어. 이웃인 크라우제(Krause)가 정원 쪽 현관 앞에 섹트 술 한 병을 들고 서 있었어. "베를린 장벽이 열렸네." 그는 환호했지. 모든 국경 통로에는 대혼란이 있었지만 모두 평화로웠어. 크라우제는 이 상황을 28년간 기다려왔다고 했어. 부디 아이들이 이 혼란 속에서도 안전하기를 빈다. 아이들은 새벽쯤에 나타났어. 그 애들은 쿠담(Kudamm)에서 밤새 춤을 추었어. 아나벨의 말로는 최고의 파티였다고 하더군.

1986년에 제작된 수제 조명 시스템

배경:

베를린의 테크노 문화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태어났습니다. 재통일은 1989년 11월 9일 직후 어느 빈 지하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베를린 DJ의 리더인 타니드(Tanith)는 베를린 장벽 붕괴 사운드트랙으로서 테크노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파열음이 있었고 이 파열음은 음악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1989년 11월 12일 일요일

일기장에게,

그야말로 집단 이주다.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 기차 역은 사람으로 초만원이야. 누구도 더이상 신분증을 검사하지 않아. 우리는 통조림의 정어리처럼 에스반(S-Bahn)에 끼어 있었어. 베를린 동물원 역 주변은 온통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고,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었어. 서베를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동독인이 와있는지 보고는 놀라워했어. 나는 100마르크의 '입국 축하금'을 어디에서 받을 수 있는지 물었어. 아무 은행이나 우체국에서 받을 수 있다고 하더군. 교외에서는 줄이 더 짧았어. 그게 무슨 대수겠어? 줄지어 서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닌데 뭐. 분위기는 대단했어. 우체국 직원은 한 사람당 100 서독 마르크를 주었고 우리 신분증에 작은 입국날짜 스탬프를 찍었어.

배경:

동독의 연금 수령자는 서독 통화가 없었기 때문에 주 정부는 오랫동안 동독에서 새로 입국한 각 사람에게 100DM의 환영비를 제공하였습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다음 날 이 관대한 사회적 대책은 도착하는 대규모의 사람들에게로 자동 확대 적용되었습니다.

1989년 11월 11일 서베를린의 바드 거리(Badstraße)에서 입국 축하금을 받으려는 대기 행렬(사진: Matthias Schubert)
입국 축하금을 받은 직후의 빈프리드 비첼(Winfried Witzel)
'장벽 무너뜨리기'

1989년 11월 30일 목요일

일기장에게,

최근 유행은 베를린 장벽을 작은 조각으로 쪼개는 거야. 젊은이들이 다양의 색상의 콘크리트 조각이나 철조망의 일부를 얻으려고 스바비아(Swabia)에서 오기도 해. 나는 공구함을 뒤져 망치와 끌을 챙겨 하이델로레와 함께 그곳에 갔어. 쪼기도 하고 망치질하는 소리가 수많은 딱따구리가 국경 장벽을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어. 때때로 그들은 가방에 조각을 담아 가져갔지. 그것은 장벽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었어.

베를린 장벽의 조각
베를린 장벽의 조각

1989년 12월 15일 금요일

일기장에게,

오늘 부서장인 슈미트 박사가 모두 인사부에 가서 각자의 채용 기록을 가지고 안내 데스크로 가라고 말했어. 스티브는 화를 내면서 교활한 동무들이 자기들이 한 그 놀랍고도 관대한 소행에 대한 단서를 없애려는 것이라고 말했어. 슈미트 박사은 묵묵부답이었지. SED 친구들이 이제 완전히 잠잠해졌네.

DDR 파일

배경:

'직원 기록(Kaderakte)'은 학교에서부터 노령 연금을 수령할 때까지 각 사람별로 유지되는 일종의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프로필이었습니다. 자신의 기록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국가 안보부는 이 문서를 무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1989년 이 파일은 직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에 앞서 흔히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1989년 12월 22일 금요일

일기장에게, 

이제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이 개방되었어. 이곳으로 향하는 길에 있던 장애물이 치워졌어. 내가 이 문을 통과했던 것은 내가 아직 꼬맹이였던 1961년 여름이었어. 나는 오늘 얼마의 눈물을 참았던 것 같아. 이제 새해가 막 시작하려고 해. 새해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독일의 통일? 늘 동독에 대해 비판적이던 아나벨은 갑자기 더할 나위 없이 열정적이야. 조만간 사람들은 호네커과 그의 무리를 내쫓고 뚱보 콜 뒤를 총총거리며 따르겠지. 아나벨은 언제쯤 행복해질까?

1989년 12월 21일 브란덴부르크 문의 장애물 제거
1989년 12월 31일 브란덴부르크 문에서의 신년 전야 축하
1989년 12월 26일 베를린 장벽 뒤의 크리스마스 트리

배경:

서독 수상 헬무트 콜(Helmut Kohl)과 동독 수상 한스 모드로우(Hans Modrow)가 참석한 가운데 브란덴부르크 문이 다시 개방되었습니다. 양 정상은 함께 이 문을 걸어서 통과했습니다. 폭우에 불구하고 약 10만 명이 예전에 장벽이 있던 곳 양편에 모였습니다.

1989년 12월 24일 일요일

일기장에게,

여느 때처럼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야. 지난 해 초콜릿 산타 두 개와 오렌지 몇 개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생각하면 말야. 지난 4주 간의 재림절 기간 동안 받은 서독 돈을 몽땅 모아 온 가족이 노이쾰른(Neukölln)으로 갔어. 혼란. 그곳은 스트레스가 가득했어. 아나벨은 자본주의 사회 제도의 물질주의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말했어. 그 어린 것이 어디서 그런 표현을 배웠을까? 34.20DM을 주고 아나벨에게 워크맨 하나를 사주었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카세트 레코더

1990년 1월 1일 월요일

일기장에게,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열린 하셀로프(Hasselhoff) 연주회에 갔어. 그가 무대로 걸어 올라가자 무리 가운데 있던 사람은 모두 "데이비드 ... 데이비드!"를 외쳤어. 하이델로레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즈막이 말했어. "프랑크 쉐벨(Frank Schöbel)보다 더 멋져 보여." 그때 그가 말하기 시작했어. "저는 자유를 찾아 왔습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 하지만 모두는 '자유'를 따라 불렀어. 자유는 1989년의 화두야.

배경: 

싱글 앨범인 '자유를 찾아서'가 1989년 독일에서 하루 70,000장 넘게 팔렸고 8주간 차트 정상에 올랐습니다. 1989년 신년 전야에 데이비드 하셀로프(David Hasselhoff)는 베를린 장벽에서 50만 명이 넘는 군중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베를린 장벽에서의 1989년 신년 전야
LP 레코드 판 '자유를 찾아서'

1990년 1월 12일 금요일

일기장에게, 

서독 돈을 모두 다 써버렸어. 사실 그렇게 많지도 않았지. 그래도 다행인 건, 동독 사람들에게는 현지 교통비가 무료라 어디든 여행할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커피 한 잔 살 수 없다면 여행을 가서 무엇을 할 수 있겠니? 적어도 아나벨은 여전히 자유를 즐기고 있어. 그 애는 미국 기념 도서관(American Memorial Library)에 가서 책 한 더미를 빌려 왔어. 아나벨은 그곳에는 1961년 8월 31일에 장벽이 세워진 이후 반납할 수 없었던 책을 돌려주려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어. 도서관에서 연체료를 물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뭐야.

1990년 1월 16일 화요일

일기장에게,

리히텐베르크에서 어제 저녁 대규모 시위가 있었어. 정말로 독일 비밀경찰 본부의 입구는 상징적으로 말해 벽돌을 쌓아 올려야 했어. 하지만 무리는 기세등등하여 입구를 타고 넘어가 안에서 문을 열었어. 대중은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가 가구를 창문 밖으로 던졌지. 경찰은 팔을 늘어뜨린 채 조용히 보기만 했어. 마침대 모드로브(Modrow)가 원탁회의에서 직접 나타나 자기 차에 기어들어가서는 확성기를 통해 이곳은 모두 공공시설이라고 방송하더군.

뉴 포럼의 대중적 시위 참여에 대한 호소

배경:

1989년 12월 4일부터 시민 집단은 수도권 지역의 동독 비밀경찰 사무소를 점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뉴 포럼은 1990년 1월 15일 저녁 비밀경찰 본부 앞에서 시위를 열자고 했고, 시위대는 본부를 급습했습니다.

국가안보국의 해체에 대한 시민 위원회의 승인 카드. 노르만넨 거리(Normannenstraße)의 건물에 출입에 사용되었습니다.

배경:

1월 16일 밤 비밀경찰 국장인 엔리히 미엘케(Enrich Mielke)의 사무실에서 비밀경찰의 해체를 위한 시민 위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중앙 원탁(Central Round Table)이 안보를 위한 실무 협의체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국가안보국을 폐지하는 절차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1990년 1월 18일 목요일

일기장에게, 

스티브는 마침내 대단한 혁명가가 되었어. 시민 위원회가 비밀경찰 본부에서 형성되었어. 비밀경찰 국장인 에리히 미엘케(Erich Mielke)의 사무실에 근거지를 두었지. 그 건물은 앞으로 박물관이 될 예정이야. 미엘케는 감옥에 갇혀 자신의 독방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불평하고 있어. 비밀경찰국 구내는 경찰이 감시하고 있고 시민 위원회 멤버는 자체 신분증을 가지고 있어. 스티브는 자기 신분을 보여 주었어. 정말 놀라울 따름이야.

1990년 1월 22일 원탁 참여를 위한 휴가

1990년 2월 9일 금요일

일기장에게, 

스티브가 회사로 와서는 비밀경찰과 관련한 모험담을 들려주었어. 그는 시민 위원회에서 발행한 업무 면제 증서를 인사부에 제출했어. 물론 회사에서는 즉시 순응했지. 슈미트 박사마저도. 그는 아무런 반대도 맞닥뜨리지 않고 서명할 수 있었어. 구 정권을 위해 충실하게 봉사했던 이들은 계속 신정권을 위해서도 봉사할 거야. 삐딱하게 행동했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계속 삐딱할 거고. 스티브에게 최악의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이야.

배경:

비밀경찰 해체를 위한 위원회의 일은 전시간 업무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위원회와 관련한 모든 이들이 급여를 계속 받으면서도 본업을 잠시 쉴 수 있도록 회사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1990년 2월 28일 수요일

일기장에게,

아내가 뒤셀도르프에 있는 처형을 방문하고 돌아왔어. 행렬이 정말 길었어. 처형은 동독인은 모두 게으르고 탐욕적이라고 했어. 동독인은 호네커 정권 하에서처럼 일하고 콜 정권에서처럼 풍족한 생활을 누리길 원한다나. 조만간 놀라게 될 거라더군. 아내는 서독인은 돈만 알고 아무런 이상도 없다고 맞받아쳤어. 독일인의 화합에 대한 훌륭한 전망을 보여주는 본보기이군.

깨어진 우정 ...
... 그리고 관계

1990년 3월 3일 토요일

일기장에게, 

학교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대학 입학시험(Abitur)이 다가오고 있는 아나벨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변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제 토요일에는 더 이상 수업이 없어. 교장은 해임되었고, 똑같이 SED였음에도 이제 교감이 교장 차리를 차지했다고 해. 대부분 SED를 탈당했어. FDJ 역시 와해됐어. 공민학과목은 폐지되었고. 교사들은 역사와 독일인을 위해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어. 학생들끼리 토론을 하는 것도 허용하고, 심지어 학생 대표를 선출하기도 했어. 누가 뽑혔을지 세 번만에 맞혀봐...

수업 계획표

1990년 3월 18일 일요일

일기장에게, 

자발적으로 치러지는 첫 번째 선거. 나는 물론 콜에게 투표했어. 전직 우리 부서장인 슈미트 박사는 콜은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그는 PDS에 투표했대. 하지만 돈은 정확히 동독이 현재 가장 필요로 하는 거야. 독일이 바로 화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될 거야. 아나벨이야 당연히 녹색 대안 시민 권리 행동가에 투표했지. 그쪽도 좋기는 한데 국가를 맡기기에는 미덥지 않아.

1990년 3월 18일 국회 의원 선거를 위한 독일사회당(Deutsche Soziale Union) 포스터
1990년 3월 18일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SED의 후속 정당인 PDS의 선거 포스터

배경:

CDU가 40.6퍼센트를 득표하여 동독 국회인 국민회의(People's Chamber) 선거에서 분명한 승자로 부상했습니다. SPD는 재통일 비용에 대해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여 득표율이 21.8퍼센트에 그치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SED의 후속 정당인 PDS는 16.3퍼센트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여러 시민 권리 그룹은 '통일 90(Bündnis 90)'으로 참가했지만 4.8퍼센트를 득표하여 정치적으로 주변 세력이 되었습니다.

1990년 4월 4일 수요일

일기장에게, 

스티브가 결국 우리 업무 팀에서 떠나 비밀경찰, 즉 국가 안보 사무국(Amt für Nationale Sicherheit)의 후신인 해체 위원회로 공식적으로 전직했어. 이제 그는 비밀경찰 파일을 살펴볼 수 있어. 우리는 점심 시간에 이에 대한 열띤 토론을 했지. 당연히 슈미트 박사는 과거를 청산하고 이를 통해 배워야 한다고 말했어. '누가 비밀경찰의 관련자였는가 하는 것이 이제 뭐가 중요해?'라고 하더군. 사실 나는 그게 궁금해. 특히 SED 골수 분자인 슈미트에 대해서.

국가 안보국 직원의 '접이식 카드(공식 신분증)'
1990년 1월 15일부터 중앙 원탁은 미사용된 국가안보국 신분증을 직원용 신분증 카드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배경:

비밀경찰 공문서를 보면 모든 정당의 주요 멤버들이 국가안보국의 비공식적인 협력자였습니다. 누가 비밀경찰 체제를 위해 일한 밀고자였는가에 대한 광범위한 토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국민 회의로부터 시작하여 요직을 맡는 사람은 확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1990년 5월 5일 토요일

일기장에게, 

오늘 우리 집이 서 있는 부지를 매입했어. 지금까지 우리는 땅을 사용하는 것만 허락되었지만 우리 소유는 아니었어. 이런 식의 법률 제도는 동독에만 존재했어. 독일 통일이 본격화되기 전에 이러한 과정을 마무리지을 심산인 거야. 모두들 현재의 집주인이 수십 년간 살아온 집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해. 땅을 구입하고 토지 등기부에 등재하면 어느 정도 법적 보장이 되겠지.

배경:

3월 7일 매매법은 지방 당국이 공공 소유지를 해당 토지에 있는 건축물의 소유주에게 매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습니다. 10월 3일까지 토지를 염가에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연방 법원(Federal Court of Justice)은 2004년 이러한 조치가 적법하다고 확정했습니다.

공공 소유 재산의 사용 권리 증서

1990년 6월 2일 토요일

일기장에게, 

베를린은 변화하고 있어. 그건 단지 커다란 장벽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정도가 아니야. '유령 역'으로 가는 길목들 역시 개방되고 있어. 알렉산더 광장의 지하 역의 벽은 허물어지고 있고 어느 순간 계단과 플랫폼 그리고 철로가 보여. 우리는 너무도 동독에 고립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장벽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어.

정부 소유 기업인 BVB(Kombinat Berliner Verkehrsbetriebe)의 표

배경:

1961년 8월 13일 이후 베를린 U-Bahn과 S-Bahn 네트워크는 분할되었습니다. 몇몇 지하철 노선은 '유령 역(Geisterbahnhöfe)'으로 알려지게 된 곳에 정차하지 않고 동독을 관통하였습니다. 동독의 정부 기관은 모든 출입구를 봉쇄했습니다. 스타트미테(Stadtmitte)와 알렉산 광장 등의 많은 지하 역이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1990년 6월 10일 일요일

일기장에게, 

이제 너에게 정말 놀라운 얘기를 해 줄게. 화폐 교환 직전에 비밀경찰이 직원들에게 공공 재산을 판매했어. 그 기관이 가지고 있던 돈을 받은 예도 있었지. 길라우메(Guillaume) 스파이 사건은 큰 동요를 일으켰어. 빌 브란트(Willy Brandt)를 퇴진시키게 만들었던 사람이 이제는 에거스도르프(Eggersdorf)의 뵈치(Bötzsee)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어. 이게 바로 우리 조국이 우리의 영웅에게 보답하는 방식이야.

길라우메의 거래에 대한 신문 기사 스크랩

배경:

1974년 서독 총리 빌 브란트의 개인 보좌관인 귄터(Günter) 길라우메가 동독의 스파이로 밝혀졌고 결국 동독에 잡혀 있는 서독 스파이와 교환되었습니다. 그는 스트라우스베르크(Strausberg) 근처의 에거스도르프에서 집을 받았습니다. 그는 1990년 불확실한 상황에서 국가안보국의 정부 재산을 구입했습니다. 이 거래를 무효화하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집을 소유했습니다.

동독 정부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

배경:

14세 미만의 어린이는 1:1의 환율로 2,000 동독 마르크까지 서독 마르크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15세에서 59세 사이의 국민은 같은 환율로 4,000마르크까지, 59세 이상은 6,000마르크까지 교환할 수 있었습니다. 대규모 금융 자산을 포함하여 이 금액을 초과하는 금액은 2:1의 비율로 환전되었습니다. 이러한 환전은 은행 저축 당좌 예금 계좌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1990년 6월 25일 월요일

일기장에게, 

화폐 교환이 이제 슬슬 다가오고 있어. 수상한 사람들이 메인 역, 알렉스 그리고 다른 장소 근처를 서성거리면서, 동독 화폐를 5:1의 비율로 서독 화폐로 바꿔준다고 해. 정상적인 방법은 예금 통장을 만드는 거야. 7월 1일에 1인당 2,000에서 6,000마르크 사이의 금액이 나이에 따라 1:1의 비율로 그리고 그보다 큰 금액은 2:1의 비율로 교환될 거야. 정말 괜찮은 환율이야. 하지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돈이 바로 자기 계좌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아. 돈이 어디서 났는지 대답해야 할까봐 두려운 거야.

1990년 7월 1일 일요일

일기장에게, 

대단한 날이야! 누구나 서독 돈을 가질 수 있다니! 어제 상점의 물건이 바닥났어. 모두 알토란 같은 돈을 몽땅 쓰고 싶어했어. 오늘 아침 일찍 서독의 멋진 제품들이 상점 선반에 채워지기 시작했어. 이제 PDS에서 활동하는 슈미트는 불평이 가득한 목소리로, 온갖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수는 적을 것이라고 말했어.

배경:

독일 마르크가 도입된 이후 동독의 제품은 모두 시장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버터나 우유 같은 지역 제품조차 서독의 포장을 하면 고객들에게 더욱 매력적이 되었습니다. 이는 경제적 난관의 시작이었습니다. 동독 제품은 경쟁력을 상실했고 사업체는 도산했으며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동독 마르크

1990년 10월 3일 수요일

일기장에게, 

구원의 날이다! 독일이 통일되었어. 라이스탁(Reichstag) 앞에서 대규모 축하 행사가 있었지. 불꽃놀이는 놀라웠어. 슈미트 박사는 동독이 독일의 메조기오르노(Mezzogiorno)가 될 거라고 말했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지. 그곳은 이탈리아 남부의 가난한 지역이라고 설명하더군. 음 어쨌든 적어도 더 이상 여행갈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어.

상징 문양이 잘려 나간 동독 국기

배경:

이제 형식상의 문제만 있었습니다. 화폐적 및 사회적 통일로 인해 핵심 요소는 이미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재통일의 날은 라이스탁 앞에서 공식 행사로 기념하였습니다. 이 날 이후 10월 3일은 '독일 통일의 날'로 알려지게 되었고 국경일이 되었습니다.

1990년 10월 14일 일요일

일기장에게,

이웃집 아들이 동독군을 제대했어. 이제 그 애는 연방 국방군(Bundeswehr) 장교야. 적군의 군복을 입고 있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어. 입대 선서를 할 때는 어땠느냐고도 물었지. 조금은 기분이 상해하면서 자기는 언제나 독일군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더라. 명령은 명령이고, 다른 것은 상관없다고 하더군.

배경:

NVA(국가 인민군)는 독일 연방군(Bundeswehr)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건물, 시설, 무기 및 인력이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위 장교들은 전역하여 민간인이 되었습니다. 단지 소수만이 독일 연방군에서 근무하도록 허용되었습니다.

군 신분증 및 NVA '식별표'

1990년 11월 14일 수요일

일기장에게, 

일부 젊은이는 자유를 혼란과 혼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양한 형태의 훌리건들이 마인저 거리(Mainzer Straße)의 버려진 집을 차지하고 있었어. 오늘 경찰이 강제로 이 집들을 철거하기 시작했는데 아나벨도 그 가운데 있었어. TV에 방송될 때 나는 그 장면을 볼 엄두를 못 냈어. 사람들은 지붕에 올라가 물대포로 무장된 경찰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있었지. 동독 시절에는 이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는데.

투척할 준비를 하는 화염병의 재연 이미지

배경:

통일 독일이 된지 몇달 후 동베를린에는 무법 지역이 많았습니다. 서베를린 지역에서 온 무단 점거자들이 동베를린의 버려진 집들로 이사해 와서는 거기서 대안 문화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몸퍼(Momper)가 주도하는 적색-녹색 주 정부는 경찰 폭력으로 대응했습니다.

1990년 11월 26일 월요일

일기장에게, 

재통일은 가치가 있어. 오늘 우체국이 전화선을 가설하여 연결을 시작했어. 누구는 이 순간을 20년 이상 기다려 왔지. 내 전화를 가질 수 있다니 기분이 좋다. 이제 나는 첫 통화를 기다리고 있어.

배경:

동독의 16퍼센트의 가정에서만 전화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전화 연결이 11~12퍼센트로 낮은 구역도 있었습니다. 나머지 인구는 고질적으로 고장나는 공중전화 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1989년에 120만 건의 전화 연결 신청이 접수되었습니다. 20년 넘게 대기 목록에 이름이 올라 있었던 사람조차도 1990년 이전에 전화를 가질 가망이 거의 없었습니다.

1990년 11월 26일 전화 연결 설치에 대한 공고
정부 소유의 통신업체인 페른펠데베르크 노르트하우센(Fernmeldewerk Nordhausen)사가 출시한 '알파' 전화기

1990년 12월 2일 일요일

일기장에게, 

오늘 한 젊은이가 뒷문의 초인종을 눌렀어. 정말 깔끔하게 차려입고 몸가짐이 단정하더군. 나는 그런 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어. 그는 거실에서 나에게 얼마의 멋진 잡지 카탈로그를 보여 주었어. 30권으로 구성된 '고양이와 가정(Katze im Heim)' 잡지 컬렉션을 사면 내가 선택한 곳의 해변에서 휴가를 보낼 기회를 갖게 될 거라더군. 이집트, 크레타, 알가베... 아나벨은 그것은 속임수라고 말하더군. 아무튼 우리는 고양이도 없으니까.

구매 약정에 서명

1990년 12월 11일 화요일

일기장에게, 

공문서 보관소에서 코를 박고 지내던 친구인 스티브가 오늘 회사 크리스마스 파티에 손님으로 왔어. 그는 옛날에 다니던 대학교 학장으로부터 사과의 편지를 받았다고 하더군. 18년 전 스티브는 특정 정당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가 퇴학을 당했었어.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어. 그런데 스티브의 입방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해..

1990년 12월 13일 정치적 이유로 한 학생을 퇴학시킨 것에 대해 훔볼트(Humboldt) 대학교에서 보낸 사과의 편지

배경:

경찰에 구속되었던 사람들의 법적 복권에 더하여 동독에서의 직업적 손해와 교육 기관에서의 퇴학에 대한 논의가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에서 공개 토론이 열렸습니다.

1979년 12월 20일 자동차 주문서
Trabant P 601 S de luxe 자동차의 핸드북: '나는 트라반트(Trabant)를 운전한다'

1991년 1월 20일 일요일

일기장에게, 

동독에는 수많은 농담이 있어. 누가 이런 걸 다 생각해 내는지 늘 궁금했어. 그런데 사실 현실이 최고의 농담이야. 오늘 우리는 1979년에 주문했던 트라반트를 지금 가져갈 수 있다는 통지를 받았어. 얼마나 웃었던지. 지금은 틀림없이 색깔도 고를 수 있겠지.

1991년 2월 2일 토요일

일기장에게, 

오늘 뒤셀도르프(Düsseldorf)에서 온 새로운 경영진이 자기네를 소개하더군. 신탁을 통해 이 회사를 1마르크에 샀더라. 전략적 목표는 시장 전망을 최적화할 수 있도록 더욱 유연하게 되는 거래. 슈미트는 이제 인사 위원회를 관리하고 있어. 그는 분명 조직 경험이 있지.

상징적 거래

배경: 

신탁의 목적은 정부 소유 기업을 관리하고 이를 시장 경제에 맞게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자 계획서를 제출하면 기업가들은 구동독의 기업들을 상징적 비용인 1마르크에 인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들은 부지만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많은 업체가 인수된지 얼마 안 되어 도산했습니다.

1991년 2월 25일 월요일

일기장에게, 

동료인 레히만(Lehmann)은 아내와 이혼하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 속상한 일이 있었나봐. 변호사를 만나고 온 다음 날 완전히 풀이 죽어 출근했더군. 남은 인생 동안 부인에게 돈을 지급하면서 살아야 한대. 이런 게 민주주의냐며 악담을 하며, 이런 일로 길거리 신세가 될 수는 없다고 하더군. 1989년 가을 내내 거리에서 시위하던 녀석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이다.

배경:

동독의 가족법 규정은 경제적 평등과 각 배우자의 독립성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별거하는 배우자로부터 부양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일할 수 없는 경우에만 허용되었습니다. 더욱이 이혼은 복잡하지 않았으며 쌍방이 합의하는 경우 대부분 더 빨리 이혼절차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습니다.

동독 법률 전문 서적

1991년 3월 2일 토요일

일기장에게, 

새로 산 오펠(Opel) 자동차를 비 맞으며 세워둘 수는 없지. 건물 담당 기관에 차고 건설을 신청했어. 거기 직원이 건축법에 관한 자료를 가져와서 신청 절차를 설명해 주었어. 설계도 도면과 사본 여러 부 등을 제출하면 된대. 우리가 사회주의 관료체제를 비난하곤 했던 생각이 난다.

최종 버전 '주거 건축 구조 설계(Baukonstruktionen des Wohnungsbaus)'

1991년 3월 15일 금요일

일기장에게, 

이웃집의 예전 주인들이 서독에서 와서 지금 사는 이웃을 만났어. 그 서독 사람들의 할아버지가 1951년에 서독으로 건너갔다가 1959년에 거기에서 죽었대. 하지만 그는 동독에 있는 자기 작은 집에 관해 얘기하곤 했다더군.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그 이야기가 그 사람들의 마음에 사무쳤단다. 누구도 나를 내 집에서 쫓아낼 수는 없다고 이웃인 크라우제가 말했어. 서독 것들은 도적이고 강도라고 하더군. 이제 그는 사냥용 장총을 하나 사서 자기 집에 얼씬대면 누구라도 쏴버리겠다고 했어. 그 사람이 그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 봤어.

1993년 12월 7일 부동산 재할당에 대한 라이프치히 시장의 서한

배경:

통일 조약은 '금전적 보상 전 배상(Rückgabe vor Entschädigung)' 원칙을 따랐습니다. 이는 재산에 대한 배상 요청의 물결로 이어졌습니다. 대부분은 새로운 소유자가 정부로부터 그 수용된 부동산을 선의로 구매했습니다. 소유자들은 특히 집과 토지에 많은 투자를 했던 경우,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장기간의 법적 분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1991년 4월 1일 월요일

일기장에게,

우체국 앞에 있는 광장은 다시 포스트 광장(Postplatz)으로 불리게 될 예정이다. 지금까지 광장의 이름은 도르프 광장(Dorfplatz), 카이저-빌헬름 광장(Kaiser-Wilhelm-Platz), 프리드리히-베레르트 광장(Friedrich-Ebert-Platz), 아돌프-히틀러 광장( Adolf-Hitler-Platz), 에른스트-퇼만 광장(Ernst-Thälmann-Platz)으로 계속 바뀌어 왔어. 결말이 어찌 될지 지켜보자꾸나.

배경: 

거리와 공공건물의 개명이 다양한 방법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베를린에서는 추천을 담당할 역사학자들과 다른 전문가들로 구성된 도로 명칭 개정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개명 결정은 시 자치구의 소관이었습니다.

도시 정보 및 거리 목록 4판 1989년
막스-엥겔스-광장(현재는 숄로시(Schloßplatz))
베를린-미테(Berlin-Mitte)

1991년 5월 8일 수요일

일기장에게, 

학교 앞의 적색 화강암으로 만든 소련 군인 상은 수년간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었어. 잡초가 너무 자라 덮어버리게 되었지. 이제 CDU는 이 공산주의 독재의 상징을 제거하도록 요구하고 있어. PDS는 이에 분노하고 있고. PDS는 승리의 날 기념식을 마련했고 그 군인 상을 손에 넣어 사유지에 세워 놓으려고 준비를 마쳤지만, CDU는 이를 거부하고 있어. 그 기념물을 공짜로 넘겨줄 수 없다며 돈을 요구하고 있는 거지.

베를린 Treptow의 소련 전쟁 기념관

배경:

러시아와의 철군 협정의 조건에 따라 기념관과 붉은 군대 군사 묘지가 독일에도 유지되어야 하였습니다. 외관이 스탈린주의적이었지만 큰 비용을 들여 이 기념 장소는 복원되었습니다. 이곳은 독일 해방을 위해 숨진 러시안 병사를 기리는 곳입니다.

1991년 10월 3일 목요일

일기장에게, 

오늘은 독일 통일의 날을 축하하려고 스티브와 슈미트 박사를 동네 선술집에서 만났어. 회사는 인수된 후 불과 몇 달 만에 망해버렸고, 모든 직원이 해고됐어. 이 기회에 조금 일찍 은퇴하려고 해. 아나벨은 1년간 미국으로 떠나가 버렸어. 스티브와 슈미트 예전처럼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어. 동독의 모든 것이 다 나쁘지는 않았다고 슈미트는 투덜댔어. 그러자 스티브는 민주주의 찬가를 불렀지. 이제는 마음껏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를 성취한 보람이 있긴 하지. 모든 것에는 좋은 면도 나쁜 면도 있어.

다만 문제는 잔의 반이 차 있느냐 아니면 반이 비었느냐 하는 거야.

잔의 반이 차 있나요 아니면 반이 비었나요?

이 일기에 대해

우베 노이만(Uwe Neumann)은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그와 그의 일기는 DDR 박물관이 지어낸 것으로서 단지 가공의 단편으로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전형적인 체험 사례입니다. 그는 영웅도 아니며 마찬가지로 SED의 골수 지지자도 아닙니다. 탁월한 정신을 소유자는 아니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상황의 흐름에 따라 살지만, 매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동시대인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베 노이만은 실제로 존재하며 불멸의 인물상이라 부를 만합니다.   

www.ddr-museum.de

제공: 스토리

Publisher — Rückel, Robert, Director, DDR Museum, Berlin 
Text — Wolle, Dr. Stefan, Head of Research, DDR Museum, Berlin
Curator — Strohl, Katrin, Head of Collections, DDR Museum, Berlin 
Design — Bänfer, Constantin, Creative Director, DDR Museum, Berlin
Shoot — Wia, Oliver, Photographer, Berlin

참여: 모든 표현 수단
일부 스토리는 독립적인 제3자가 작성한 것으로 아래의 콘텐츠 제공 기관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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