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역사

경기문화재단

조선시대 경제중심지 경기도,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꽃피운 문화의 중심 경기도, 경기도의 훌륭한 문화유산,  조선시대 한양을 지킨 최후의 보루 경기도, 한말, 일제하 민족운동의 전개, 분단의 현장‧통일의 길목 경기도

조선시대 경제중심지 경기도

상업적 농업의 활성화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경기도에서는 도시 근교의 상업적 농업이 활성화되었다 . 왕십리의 무, 살꽂이다리의 순무, 석교의 가지·오이·수박 , 청파의 미나리, 이태원의 토란 등이 한양을 소비시장으로 하여 생산되었다 . 아울러 쌀의 상품화도 이루어졌는데, 쌀의 품질이 좋기로 이름난 이천의 자채쌀은 한양의 대갓집 사람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수공업의 전업화

18세기에 들어 경기도에서는 자급자족적이거나 부업 수준이던 수공업도 점차 전업화 專業化하고 상품화를 목적으로 물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강화의 화문석과 안성유기가 그 한 예이다. 특히 안성유기는 전국적인 상품으로 등장하였고, ‘안성맞춤’이라는 유명한 이름까지 얻었다.

시장의 발달

조선후기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의 발전은 결국 경기지역 내의 상품유통시장, 즉 농촌장시場市와 포구 浦口시장을 확대·발전시키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16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삼남지역 농촌에서 일반화된 장시가 경기지역에까지 확대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으며,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경기도에는 사평 ·광진·누원·검암黔巖·송파장 등 모두 101개의 5일장이 개설되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만기요람 萬機要覽』에 전국에서 손꼽히는 큰 장시 15 개가 소개되는데, 그중에 광주의 사평장· 송파장, 안성의 읍내장, 교하의 공릉장 등 경기도 지역 장시 4개가 포함되어 있다.

경강상인의 활약

18세기 이후 포구시장권의 중심은 경강 京江이었다. 경강은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서울을 끼고 흐르는 한강을 일컫는 말이다. 경강상인은 한양 도성 주민을 상대로 미곡·목재 ·어물 ·소금 ·젓갈 ·주류 등을 도매 또는 소매로 판매하였다.

춘천·가평·충주·여주·지평·양근·이천·용인 · 양천 · 김포 · 통진 · 교하 · 영평 · 마전· 장단· 풍덕 등의 지역이 한강수로를 매개로 하나의 시장권으로 통합되었다. 여기서 남한강 상류의 여주 백애촌 , 임진강 연안의 연천 징파도와 장단의 고랑포가 경기도의 중심포구로 성장하였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경강은 전국 모든 물화의 집산지일 뿐만 아니라 전국의 상품가격을 조절하는 중심시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도시의 발전

경기도에서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한양의 배후도시인 수원, 상품유통거점인 송파장과 누원점 樓院店 등지가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개성 역시 지리적으로 한양과 가까우면서 서쪽으로 평양-의주 -중국을 잇는 대청무역의 중간경로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상업도시로 번성하였다. 정조 때 계획도시로 건설된 수원은 노량진까지 대로가 개설됨으로써 18세기 말 이후 상업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한양 외곽의 광주 송파장과 양주 누원점이 동북지역·삼남지역과 연결되는 유통거점도시로 성장하였다.

조선후기에 경기도에서 상업과 수공업이 크게 발달한 것은 한양이라는 거대 소비도시를 끼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꽃피운 문화의 중심 경기도 
이중환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지리서인 『택리지』에서 경기도를 “300년 동안이 나 명성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유풍 儒風이 크게 떨치고 학자가 무리 지어 나왔으니 엄연한 하나의 작 은 중화 中華였다”라며 우리나라 학문의 중심지였다고 평가하였다. 경기도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으로 문화를 받아들이고 학문을 발전시키며 조선이 나아 갈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근대사회를 준비한 곳이 었다. 

기호학파의 중심지

조선사회를 지배한 사상은 성리학이다. 16세기 이후 성리학계는 이황의 영남학파와 이이의 기호학파가 이끌어 갔다. 이 중 기호학파는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거나 교유를 나눈 문인들인데, 주로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충청·전라도 사림들로 형성된 학파이다.

실학의 터전

조선후기 성리학이 한계에 부닥치자 실학이 발생하였다. 경기도는 실학이 발생하고 발전한 지역이다. 실학은 서울과 남한강을 따라 경기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개혁적인 학자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성호 이익은 안산에 거주하면서 학문에 매진하고 제자를 길러 근기학파 또는 경세치용학파라고도 불리는 성호학파를 형성하였다. 경기도 광주 출신의 다산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 이 밖에 많은 실학자가 서울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각기 혈연 ·지연·교우 관계를 통해 학문 경향을 같이하는 유파를 형성하였다 .

양명학의 성립

18세기에는 주자학의 극복을 주장하는 양명학 陽明學이 경기도에서 성립 ·발전하였다. 양명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709년(숙종 35) 양명학자 정제두 鄭齊斗가 안산에서 강화 하곡으로 옮겨 살면서부터이다. 정제두의 손녀사위 이광명 李匡明과 신대우 申大羽가 강화도로 이주해 오면서 이들 가문을 중심으로 양명학은 강화학파라는 하나의 학맥을 형성하였다.

천주교의 발상지

경기도는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다. 이벽 ·이승훈·권철신과 정약용 형제 등이 중국에서 유입된 서학, 즉 천주교를 학문으로 연구하다가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광주 천진암과 여주 주어사가 천주교의 발생지로 꼽힌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용인 골배마실을 본거지로 하여 안성 미리내와 광주 ·이천 일대에서 활발하게 전교활동을 펼쳤다.

경기도의 훌륭한 문화유산 
경기도는 훌륭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도자기와 화성 華城, 왕릉, 원찰 願刹이 있다. 

한국 도자기의 중심지

경기도 광주 일대에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사옹원 司饔院의 관영사기제조장 官營沙器製造場으로 분원分院이 설립되어 말기까지 운영되었다. 여기서 각종 도자기 , 백자 · 상감백자·청자·상감청자 · 청화백자·철화백자·동화백자·분청자가 제작되었다. 광주의 도자 전통은 20세기 후반 광주·여주·이천지역이 한국 도자기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수원화성의 축성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화성은 규모 면에서도 조선시대 최대의 건설 공사였지만, 당대 실학자의 선진적인 사상과 기술이 낳은 업적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성곽 축조 과정에서 정약용은 중국 및 서양의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거중기를 제조하는 등 새로운 축성기술을 선보였다. 또 실학자들이 일찍부터 사용을 주장해 온 벽돌이라는 새로운 건축 재료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왕릉

경기도는 도성을 에워싸고 있는 곳이기에 조선시대의 능 대부분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의 왕릉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오늘날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울로 편입된 지역에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능은 경기도에 소재하고 있다. 구리의 동구릉, 남양주의 홍릉·유릉, 고양의 서오릉, 화성의 융릉·건릉 등 총 31기의 능이 경기도에 있다. 능은 단순히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종 건축물과 석물을 포함하여 당대 최고의 문화 수준을 보여 주는 곳이다.

불교문화유산

전반적으로 불교가 크게 위축된 조선시대에 유독 경기도에서는 큰 사찰이 많이 세워졌다. 이는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지키는 능찰이었다.

여주의 신륵사는 세종의 능인 영릉 英陵의 능찰로, 남양주 봉선사는 세조의 능인 광릉의 능찰로, 또 광주의 봉은사는 성종과 중종의 능인 선릉과 정릉의 능찰로 이름을 날린 사찰들이다. 이 밖에도 수원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의 원찰이다.

조선시대 한양을 지킨 최후의 보루 경기도
경기도는 한양을 둘러싸고 있으므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한양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래서 성곽이 많다. 

독산성전투와 행주대첩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이때 오산에서의 독산성 전투와 고양에서의 행주대첩이 일본군의 기세를 꺽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독산성은 권율이 근왕병 1만 명을 이끌고 일본군을 물리친 곳이다. 권율은 성곽 내에 진을 치고 진지전을 펼치면서 유격전도 함께 벌여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행주대첩은 권율이 지휘하는 군사 2,300명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 3 만 명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둔 전투를 말한다. 행주대첩 당시 전투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조선군은 화살이 떨어져 대신 돌을 던지고 백병전을 펼쳤다. 이 때 성내의 부녀자들이 치마를 짧게 잘라 허리에 묶고 거기에 돌을 담아 날라 투석전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민족의 성지 남한산성

임진왜란 당시 임금과 신료들이 북으로 피난한 쓰라린 경험 이후 조정은 한양 주변의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修築하였다. 1626 년 인조는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성안에 수어청 守禦廳을 설치하여 요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1636 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 백관을 거느리고 이곳에 들어와 후금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각 도의 원군이 도착하지 못하고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 봉림대군 등이 포로로 잡혔으며 산성 내에 식량마저 떨어져, 인조는 결국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은 끝내 함락당하지 않았으며 , 이곳이 있었기에 인조는 47 일간 항전할 수 있었다. 남한산성은 치욕의 장소가 아니라 민족 자존을 마지막까지 지켜 준 성지이다 .

유수부 설치

호란을 겪은 후 1683년(숙종 9)에 광주부를 유수부로, 1793년(정조 17)에는 수원을 유수부로 각각 승격시켰다. 광주유수는 수어사를 겸하였으며, 휘하에 6,000명의 병력을 두었다. 수원 유수부에는 정조가 설치한 국왕호위부대인 장용영 壯勇營외영外營을 주둔시켰다. 이처럼 유수부는 군사적 성격이 매우 강한 행정기구였으며, 이곳은 한양을 지키는 군사방어도시였다.

천혜의 요새 강화

한양 주변의 방어 기지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강화도이다. 강화도는 서해에서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가는 입구에 자리해, 한양 방어의 요충지이다.
강화도가 이와 같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하였기에 1627년(인조 5)에 유수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강화도의 방비시설을 강화하기 위해 1691년(숙종 17) 외성外城을 축조하였고, 1742년에 파괴된 외성을 벽돌로 개축하기 시작하여 1744년 완공하였다. 내성 內城은 고려 때의 것을 바탕으로 하여 1711년 수축을 완료하였다.

한말, 일제하 민족운동의 전개

한말 의병운동

한말 의병운동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펼쳐진 운동이었다. 경기 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시작된 것은 1894년 일제가 무력을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였다. 이때 유생 안승우가 고향인 지평(지금의 양평 북부지역)에서 의병 모집 활동을 하였고, 1895년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생 김하락·조성학·구연영·김태원·신용희 등이 이천에 모여 경기지역 의병 연합부대의 성격을 띠는 이천수창의소 利川首倡義所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1896년 이천의 백현과 이현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다. 같은 해, 남한산성에 거점을 둔 경기의병은 삼남지방의 의병과 합세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세우기도 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고문정치를 실시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905년 4월 경기지역 각지에서 이인응을 비롯한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1907년 7월 일제의 군대 강제해산 이후 군인들이 외병부 대에서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력은 강화되었다. 그해 12월 경기지역 의병과 황해·강원·충청도 지역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13 도창의대진소 十三道倡義大陣所가 결성되었다. 1908년 8월경에는 경기 동북부 지역 의병 연합부대인 창의원수부 倡義元帥府가 조직되어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경기의병의 20여 년에 걸친 투쟁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무장 투쟁이었고, 그 정신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 투쟁으로 이어졌다.

3•1운동

1919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 나기 위한 3•1 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 경기도의 3•1 운동은 학생과 농민, 천도교인, 기독교인 등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승려, 시천교인, 중소상인, 노동자들이 참여하여 이루어졌다 .
경기도의 3•1 운동은 다른 지역에서와 달리 약 2개월간 끊임없이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자도 많이 발생하였다. 초기에는 서울과 가까운 개성 등의 지역에서 청년 지식인이 중심이 되고 도시노동자와 상인이 참여하였다.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의 경기도에서 3 •1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운동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산하고 도시에서는 다시 만세시위가 펼쳐졌으며, 시위는 평화적인 비폭력 운동에서 무장시위 형태로 변화하였다. 무장투쟁은 처음에 자위 수단이었으나 점차 시위대가 먼저 무력으로 공격하는 공세적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4월 초 안성과 수원에서 경기도에서의 최대 규모 무장시위가 펼쳐졌다.
시위가 확산하자, 일제는 시위대원을 체포하고 학살하였다. 4월 초 수원에서의 시위 중 일본인 순사가 피살된 것과 안성군 원곡 •양성면에서의 무장시위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악탈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도 이때 벌어졌다.
경기도는 전국 13개 도 가운데 3 •1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이다. 만세시위가 282회 이상 펼쳐졌고, 참여 인원도 17만여 명이 넘었다.

분단의 현장, 통일의 길목 경기도
경기도는 분단의 현장이다. 북쪽에 군사분계선이 그어져 있고, 그 양쪽으로 남북의 군사력이 집중 배치되어 있다. 이로 인해 경기도는 행정적 ·경제적으로 주민생활 면에서 많은 제약과 피해를 겪었다. 경기도는 분단의 현장 한가운데에서, 분단으로 인한 피해를 한 몸에 안고 분단의 역사를 헤쳐 왔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들어 남북관계가 대립에서 대화 국면으로 전환되면서부터 경기도는 남북교류의 통로가 되었고, 통일의 길목 역할을 하고 있다.   

분단으로 인한 피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남북 교전병력 쌍방이 대치하고 있던 전선이 군사분계선이 되었다. 쌍방의 병력은 각각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으로 2㎞씩 철수하여 비무장지대(DMZ)라는 완충 지역을 설정하였다. 비무장지대는 남북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설정한 구역이다.

그러나 계속된 군사적 충돌과 남북간의 긴장은 경기북부의 지역주민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민간인통제구역이 설정되고, 군사시설보호법의 시행으로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 결과 경기북부는 1960~1970년대 경제성장 과정에서 개발사각지대로 소외되었다. 그래서 기반시설이 부족하고, 인구밀도와 생산성이 낮았다.

그리고 임진강과 한강 하류에서의 어로활동도 제한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경기북부에는 군부대가 밀집해 군 훈련으로 인한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포 사격 오발과 헬기 추락사건 등이 발생하였다. 미군 부대도 많다. 미군의 주둔은 고용증대와 지역개발 기여 등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매춘 ·범죄문제, 훈련 중 사고로 인한 피해 등 부정적인 요소도 강하게 나타났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

파주를 지나는 군사분계선이 분계선 중 서울과 가장 가까 운 거리에 있고 파주 서북으로 임진강이 흐르기 때문에, 이곳은 북한의 가장 주요한 대남침투로가 되었다. 1970년 대 이전에 이 지역 일대에서는 남북간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1968년 1월 청와대를 기습한 북한의 공격조도 파주를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이 밖에도 북한공작원 침투, 남북간 총격전이 수차례 발생하였다.

군사적 충돌과 무장간첩사건 못지않게 위협을 느낀 것은 군사분계선 지하에 뚫린 땅굴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78년 10월 17일 발견된 제3땅굴이다. 판문점에서 4㎞,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의 파주시 군내면 원당리에서 발견되었다. 아치형의 대규모 땅굴로 시간당 무장병력 3만 명이 통과할 수 있다고 발표되어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남북의관문, 판문점

판문점은 남북분단의 아픔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립의 현장인 동시에 통일로 향하는 화해의 창구이다. 판문점은 경의선과 동해선 남북연결도로가 개통되기 전, 육로로 남북이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였다.
판문점은 1951년 10월 25일 개성에서 열리던 정전회담이 옮겨 오면서 세계의 이목을 모았고, 한국의 분단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이다. 1953년 7월 27일, 긴 정전회담 끝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협정과 동시에 판문점은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판문점은 남북공동경비구역이다. 적대하는 쌍방이 공동으로 경비하는 구역이기에 항상 충돌의 위험이 있는데 , 가장 큰 군사적 충돌 사례는 1976년 8월 18일 발생한 ‘도끼사건’이다. 정전협정의 산실인 판문점이 거꾸로 전쟁발단의 장소가 될 뻔한 사건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판문점에는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1971년 8월 12일 남한이 제안한 남북 적십자회담 개최를 북한이 받아들였고, 8월 20일 6 •25전쟁 후 처음으로 남북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판문점 중립국감독 위원회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이 밖에도 판문점은 남북조절위원회, 남북체육회담, 남북경제회담, 남북국회회담 등 남북간의 직접적인 접촉과 회담 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판문점은 대립의 장소에서 대화의 장소로 바뀌어 갔다.

통일의 길목 경기도

남북간의 교류협력은 1988년 7·7선언 이후 정부와 민간 차원의 노력으로 정착되었다 . 경제 ·사회문화 교류협력을 통해 남북간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인적·물적 교류가 큰 폭으로 늘어났다. 2000년 6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이 만난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7월에 개최된 남북장관급회
담에서 서울-신의주간 경의선 철도와 문산 -개성간 도로를 연결하기로 합의하였다. 남한은 2000년 9월 18일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 12월 말 완료하였으며, 최북단 역인 도라산 역사는 2002년 4월 30일 준공하였다. 이후 2002년 8월에 경의선 철도 ·도로와 동해선 철도· 도로의 착공에 합의하였고, 같은 해 9월 18일 남북에서 동시에 착공식을 진행하였다.

2003년 2월 11일에는 동해선 임시도로 개통식을 치르고 금강산 육로 시범관광을 실시하였다. 2003년 6월 14일에 분단 반세기 동안 끊어져 있던 경의선 ·동해선 철도 궤도를 남북이 동시에 연결하였다 . 2007 년에는 남북철도가 개통되어 임시운행을 하였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 관광이 시작되었으며, 한국 기업이 개성공단에 공장을 세우고 북한 노동자가 일하면서 남북 경제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북교류가 확대되는 속에서도 남북의 긴장과 충돌은 계속되었다. 1999년과 2002년에 두 차례 서해교전이 발생하였고, 2006년에는 북한이 핵실험을 하였다 . 그리고 금강산 민간인 피살 사건(2008), 천안함사건(2010), 연평도 포격 사건(2010) 등으로 결국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교류와 협력이 중단되었다.

Gyeonggi Cultural Foundation
제공: 스토리

600년 경기도

기획 |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진행 |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팀
집필진 | 강진갑(경기대학교 교수)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이상대(경기개발연구원 미래비전실장)
이지훈(경기문화재연구원 책임연구원)
정형호(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지원 | 김태용, 최서연, 김영대, 이학성, 박소현, 성형모, 김호균, 김경민, 조수진(경기문화재단 홍보마케팅팀)

이 전시는 경기도 600년(1414-2014)을 맞아 우리 역사에서 핵심역할을 담당한 경기도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통일한국의 중심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약의 계기로 삼고자 제작한 『육백년 경기도』를 바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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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스토리는 독립적인 제3자가 작성한 것으로 아래의 콘텐츠 제공 기관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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