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옛돌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소개
돌은 인간이 자연에서 얻은 재료 중 가장 견고하고 내구성이 뛰어나 인류 역사 및 문화의 발전 과정에서 늘 함께 해 온 소재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원형을 훌륭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이 석조미술품이다. 우리나라 역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석조문화를 창출했고, 이를 계승 발전시켜왔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에서 찬란한 불교유물인 통일신라의 석굴암, 고려의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을 거쳐 유교문화를 꽃피운 조선의 묘제석물과 궁궐건축까지 특정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의 중심엔 돌이 자리 잡고 있다. 민간에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사랑받은 옛 돌조각에는 우리 민족의 삶의 철학과 정서가 담겨있다.

장군석

능묘를 지키는 장군의 형상을 한 석인으로 갑옷을 입고 칼을 찬 모습이 근엄하고 당당하다. 문인석은 문관(文官,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손에는 홀을 가지고 있음)을, 장군석은 무인(武人)을 상징한다. 무덤 주위에 문인석, 장군석(=무인석), 석수, 12지 신상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의 전한시대(前漢代: 서기전 206-서기 24)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나라는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통일신라시대부터 왕릉에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시대에 이르면 장군석은 사라지고 문인석 한 쌍만이 배치되다가 고려 말기인 14세기 중엽의 충목왕릉부터 다시 문인석과 장군석이 함께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14세기 말의 공민왕릉에는 문인석과 장군석을 한 쌍식 세우고, 돌사자와 함께 돌양이 무덤주위에 배치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에도 문인석과 장군석은 계속하여 무덤 앞에 배치되었지만, 점차 조각수법이 퇴화하고 형식화되었다. 시대에 따른 문인석·장군석의 조각양식의 변화는 능묘제도의 변천과 함께 우리나라 조각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귀면(鬼面)

벽사, 수호의 상징

장군석

금강역사

사찰의 문이나 입구의 좌우에 서서 사악한 기운을 막아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인왕역사’라고도 하며, 여래의 온갖 비밀된 사적을 알고 5백 야차신을 거느리면서 천불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의 두광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힘센 이가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고루 갖추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금강역사상은 입을 굳게 다물고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거나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을 상징하고 있다. 상의를 입지 않고 옷을 허리에 걸친 채 주먹을 쥐어 밖에서 안으로 한 팔을 올리고 한 팔을 내린 자세를 취하거나, 한 손으로 칼을 잡고 있는 모습 등을 취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금강역사상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달리 무섭다기보다는 악의 없는 순진한 모습을 하고 있어 친근한 것이 특징이다.

장명등

사찰 경내나 능묘, 정원 등에 세워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만든 석조물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다. 고려 말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공민왕 현릉(玄陵)의 장명등 이후 왕릉에는 반드시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일품이상 재상의 묘역에만 장명등을 세울 수 있었다. 이처럼, 장명등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묘역이나 건물의 외부공간을 밝히는 데 있으나, 분묘의 장명등은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역할까지 겸하였다.

박쥐(蝠)

행복, 다산의 상징

장명등

구름문(雲紋)

불로장생, 풍요의 상징

바다를 건너온 돌사람, 고국의 품에 안기다
문인석은 장군석,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조각이다. 천 년간 한결같이 능묘를 지켜온 문인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수가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천신일 회장은 “거듭된 전란으로 잃어버린 문화재를 되찾아오고,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싶다.”는 집념으로 해외로 흩어진 문화재 환수에 힘을 쏟았다. 2000년 서울의 한 모임에서 많은 석조유물을 소장한 일본인 쿠사카 마모루日下 守씨에 대한 소식을 듣고, 여러 차례 일본으로 그를 찾아가 설득하며 문화재를 찾아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01년 그의 소장품 중 상태가 양호하고 조각기술이 우수한 문인석과 장군석, 동자석 등 70점을 환수하였다. 바다를 건너 다시 돌아온 돌사람은 한국 석조유물의 힘과 위엄을 보여준다.

문인석

무덤 앞에 배치하는 석물(石物)의 하나로 장군석,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조각물이다. 공복(公服)차림의 문관의 형상으로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량관(金梁冠)을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들고 있다. 능묘 주위에 문인석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의 전한대(前漢代)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신라시대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능묘제도가 정비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문인석은 당시의 조각양식을 보여주고 우리나라 능묘제도의 변천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복두공복(幞頭公服)을 입은 문인석

복두
문무백관(文武百官)이 1품에서 9품까지 공복 착용 시 머리에 쓰는 관모로, 각이 지고 위가 평평하다. 통일신라 진덕여왕 때 관복제가 채택되면서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복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왕과 백성이 모두 복두를 썼다는 기록이 <흥덕왕복식금제(興德王服飾禁制)>에 남아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신하들 역시 공복(公服)을 입고 복두를 썼으나,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을 거치며 신하들이 없어진 공복 대신 상복(常服)을 입게 되면서 점차 복두와 공복의 착용이 줄었다.

공복
왕을 알현하거나 나라의 큰 행사,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문무백관이 착용하던 관복의 일종으로, 곡령대수(曲領大袖, 옷깃이 둥글고 소매가 넓은) 형태이다. 신라는 520년(법흥왕 7) 자의(紫衣)·비의(緋衣)·청의(靑衣)·황의(黃衣) 등 4색의 복색(服色)에 의한 공복제도를 제정하였고, 백제는 이보다 앞서 260년(고이왕 27)에 자의·비의·청의 등 3색의 복색을 정한 용복제도를 제정하였다. 고려는 960년(광종 11)에 비로소 4색 공복제도를 정했다. 조선은 건국한 해 12월에 관복(冠服)을 공복으로 입도록 하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나. 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에는 복두와 공복의 착용이 차츰 줄었다.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은 문인석

금관
조선시대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조복(朝服)을 입을 때 머리에 쓴 관으로, 금량관(金梁冠)이라고도 한다. 앞이마에서부터 우뚝 솟아 둥긋하고 마루지게 하고 뒤에 닿는 부분인 양에는 금빛의 세로줄을 그어 골이 나게 하였는데, 품계에 따라 양의 수가 달랐다. 1품관은 5량, 2품관은 4량, 3품관은 3량, 4품∼6품은 2량, 7품∼9품은 1량이었다.

조복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대사(大祀)·경축일(慶祝日)·원단(元旦)·동지(冬至) 및 조칙(詔勅)을 반포할 때나 진표(進表)할 때에 착용하는 예복(禮服)으로 금관(金冠)과 함께 쓴다고 하여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고도 한다. 태종이 관복색을 설치하여 제복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제용감에서 만들어 관사에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입었다. 그러나 중종 이후에는 개인적으로 준비하여 입어야 했으므로 조복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에는 주변에서 빌려 입었다.

홀(笏)

조선시대 신하가 임금을 알현(謁見)할 때 손에 쥐던 것으로 길이는 30cm 가량이고 넓이는 아래가 6cm, 위가 3.5cm정도 된다. 본래는 임금의 말씀을 메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의례적으로 홀을 손에 갖추어 들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1~4품까지는 상아홀을, 5~9품과 향리는 나무로 만든 홀을 들었다고 한다.

기원의 언덕, 소원을 품다
동자는 도교(道敎)에서는 신선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불교(佛敎)에서는 부처님이나 보살을 곁에서 모시며, 유교(儒敎)에서는 무덤 주인의 심부름을 하는 아이이다. 동자석은 16세기-18세기 중반까지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왕실가족과 사대부 묘역에 조성된 석물이다. 쌍상투를 틀고 천의를 입고 지물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공손히 시립하여 엄숙한 묘역에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이다. 불교, 도교, 유교, 무속신앙 등 여러 요소들이 혼재되어 다채로운 형태를 지니며 그 역할 또한 무덤의 수호신, 마을의 지킴이 등 다양하다.
동자석의 조성 초기에는 불교 동자상과 같은 장식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며 생동감이 강조된 모습이었으나, 서서히 단정한 모습의 유교적 시동상의 모습으로 형태가 변화된다. 17세기 이후로는 점차 문인석과 혼합되는 양상을 보이는 등 조선후기로 갈수록 동자석 고유의 특징이 사라진다.

쌍계(雙髻)

쌍계(雙髻)를 틀고 옷 위에 천의(天衣), 어깨 위에 운견(雲肩)을 두른 모습으로 공손히 서서 손을 가리고 있거나 꽃, 부채, 방망이 등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다. 천의를 입은 동자석은 무덤 주인과 참배객 사이의 두 세계를 왕래하며 심부름하는 시동의 역할을 한다.

쌍계(雙髻)

동자석

주머니(囊)

수호, 장수의 상징

동자석

부채(扇子)

벽사, 기복의 상징

오리(鴨)

장원급제, 수호의 상징

한국인의 얼굴, 희로애락을 노래하다
옛 사람들은 마을 입구나 길가에 사람의 얼굴을 한 벅수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장승을 부르는 이름가 서 있으면,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이나 잡귀들이 겁을 먹고 마을로 들어오지 못 한다고 믿었다. 또, 재화를 막고 복을 가져다주는 신비스러운 힘이 있다고 여겨 마을의 벅수에게 갖가지 크고 작은 소원을 정성스레 빌었다.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지만 그 생김새가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수더분하고 익살스럽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각 지방의 구전설화와 민중의 정서가 반영되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닌 벅수는 민초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며,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과 해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벅수

낫(鎌)

수확, 풍요의 상징

학(鶴)

장수, 상서로움의 상징

벅수

거북(龜)

무병장수, 다산의 상징

벅수

집(宅)

번영, 소우주의 상징

돌의 정원
염화미소 “꽃을 들고 미소를 띠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자 모인 사람들 중 가섭이라는 제자만이 그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이에 석가는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한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 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를 깨닫는 마음 등의 불교 진리를 전해 주었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 中

민불(民佛)

민간에서 제작된 불상으로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기우제단(祈雨祭壇)

“雨나이다 雨나이다”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제의장소에 설치한 제단으로 4면에 용이 조각되어 있다. 동양문화에서 용은 물의 신으로, 비雨를 관장한다고 여겨졌기에, 옛 사람들은 용이 조각된 석조물이나 용머리처럼 생긴 용바위 앞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이곳은 박물관에서 서울시내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느낌이 드는 공간이다.

하마비(下馬碑)

大小官吏過此者皆下馬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라고 쓰여 있는 조선시대 석비이다. 왕이나 장군, 고관,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져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했다.

석호

젖을 먹는 어린 양

어머니의 정성, 한땀 한땀 사랑을 짓다
자수는 엄격한 유교문화 속에서 여인들의 미적감흥과 꿈을 표현하는 유일한 세계이자, 자신의 마음을 섬세하고 자유롭게 표현한 예술이다. 옛 여인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던 자수는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자연스럽게 내려온 것으로 수를 놓으며 자신의 품성을 닦고, 세상살이의 고단함도 해소하였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옷과 장신구 등의 생활용품과 의례용품에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길상문양을 넣어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왕실과 사대부는 물론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애용된 자수는 한국 여인들의 삶의 기록이자 규방문화의 결정체이다.

The embroidered wrapping cloths from Gangwon

Provinceare characterized by geometric patterns in vertical and lateral symmetry and unique colors that bring to mind the splendid stripes of five cardinal colors. The outstretching branches and the geometrically expressed leaves are the symbols of vitality full of auspicious energy and of women’s wishes for good fortune and prosperity.

The embroidered wrapping cloths from Gangwon

The embroidered wrapping cloths from Gangwon

자수보자기(刺繡褓)

특유의 아름다운 문양과 독특한 색채의 구성으로 실용성과 미적 아름다움을 함께 지닌 대표적인 한국 생활미술품이다.

조각보자기(褓)

조각 천을 이어 붙이고, 수를 놓아 정성스럽게 만든 보자기에는 복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조각보자기(褓)

기러기와 기러기보자기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신부 댁에 보내는 기러기와 기러기를 감싸는 보자기이다. 전통혼례에 전안례(奠雁禮)라는 의식이 있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찾아가 나무로 깎아 만든 기러기를 전하고 신부를 데려가겠다는 일종의 신고식이다. 기러기는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어 다산을 의미한다. 또, 기러기는 한 번 맺은 짝을 잃는다 해도 일생을 홀로 살기 때문에 정절의 상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안례를 치르는 것은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평생 함께할 것을 처가에 다짐하는 맹세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수베개

베갯모에 자수로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십장생·모란문양·연꽃문양·과일문양 등을 넣어 나쁜 기운을 막고, 행복한 꿈을 꾸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부귀를 뜻하는 모란과 생명의 창조와 번영을 상징하는 연꽃을 수놓아 길상의 의미를 담았다.

딸기, 포도와 같은 과일을 수놓아 다산을 기원하였다.

희(囍), 다남자(多男子), 수복강녕(壽福康寧) 등의 글자를 수놓아 행복과 평안을 빌었다.

참여: 모든 표현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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