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3. - 2016. 11. 30.

[Project 2]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

부산비엔날레

시공을 초월해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 디지털 기술은 전 지구를 하나의 커뮤니티로 묶어버렸고,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해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하나의 앱 속에는 전 세계 10억 인구가 인종, 종교, 국가를 초월하여 네트워크화 되어 있습니다. 인류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다른 ‘다중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종교,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적의 예술인과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토론하는 비엔날레야말로 다중의 시대에 가장 적합한 전시형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문학이나 음악, 영화 등 다른 문화 영역이 가지지 못한, 미술이라는 장르와 비엔날레라는 형식만이 가진 고유한 장점입니다.

2016부산비엔날레 Project 2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 전시장 스트리트 뷰

Busan Biennale 2016 Project 2 'Hybridizing Earth, Discussing Multitude' Virtual Tour

리다 압둘은 그녀의 모국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작업으로 유명하다. 35년간의 전쟁을 겪은 이곳에서 그녀를 사로잡은 풍경은 다름아닌 폐허의 흔적들이다. 작품 <in transit>(2008)은 20여년 간의 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카불의 교외 풍경을 배경으로 하며, 5살에서 9살 가량 된 아이들 70여명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새로운 미래와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추락한 폭격기의 모든 총알 자국을 목화로 메우려 애쓰고 폭격기를 밧줄로 묶고 연처럼 날리기 위해 끌어 당긴다. 아이들은 비극적이고 난폭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진난만함으로 자신이 처한 비극적인 상태를 중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작품 <time, love and the workings of anti-love>(2013)은 사진 카메라, 300여개의 여권사진, 그리고 음향(가슴 아픈 글을 아름다우면서도 괴롭게 전달하는 목소리)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소리, 또는 그것의 부재는 리다 압둘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다.

리다 압둘

리나 베너지의 작업 속에는 흩뿌려진 사람들, 서로 채우며 수정하는 육체, 대지, 바다와 공기가 나타난다. 작가가 주로 하는 작업은 묶고, 철사를 구부리고, 봉합하고, 붙이는 것과 같은 수공예 작업이다. 그녀는 단절된 부분들이나 서로 호환되지 않는 재질들을 잇는 것에 몰두하며, 즉흥적으로 골라 둔 여러가지 것들을 다시 연결하고, 이를 통해 새롭고 다양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미학적 탐구를 지속하고 있다.

리나 베너지

아야 벤 론은 병과 관련된 신체, 죽음과 도덕에 대한 인식, 고통에 대한 무의식적 기억을 사회사적으로 최대한 확장하여 탐구한다. 그녀의 모든 작품은 수년간 의료 관련 매뉴얼 및 스케치, 질병, 의학적 처치를 철저하게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벤 론은 양쪽 학문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의 작품에는 죽음과 고통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병에 대한 미화나 감성적인 개입을 찾아볼 수 없다. 아야 벤 론은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고 냉엄한 유머로 의료 절차를 최대의 사회사적 연장선상에서 탐구하고 있다.

아야 벤 론

부흥, 만물, 근대화는 70~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즐겨 사용하던 정치적 슬로건이자 대중적으로 즐겨 사용하던 단어들이었다. 한때는 전 국민이 애용하던 이러한 단어들은 시골 변두리 상점 간판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풍경이 되었다. 전혀 부흥할 것 같지 않은 부흥 상회와 만개의 물건이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좁은 만물 상회, 그리고 새로움으로 다가오지 않는 근대화 상회의 간판 문구로부터 시대적 욕망의 키워드를 찾을 수 있었다. 한 시대의 풍요에 대한 거대한 염원은 빈곤과 쇠락, 결핍과 부재를 동반한 채 그렇게 역설과 부조리 안에서 그림자처럼 현재로 이어진다. 조형섭은 그 편린들 속에서 혹은 그 경계 위에서 우리가 놓쳐버린 이상과 가치에 관해 이야기한다.

조형섭

<long may you run> (2016)은 남겨진 고려제강 수영공장의 옛 벽면에 약 300개의 구멍을 뚫는 것으로 시작한다. 뚫어진 구멍들은 옛 공간과 신생 공간을 잇는, 잊혀진 과거와 달라진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기대를 사이에 두고 교류하는 통로 역할을 자처한다. 각 구멍들은 ‘과거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물건이거나 그 일부’, 또는 ‘버리지 못하고 간직했지만 이제는 그 이유가 퇴색한 어떤 것들’로 메워져 있다.

최기창

최성록은 동시대의 사회, 문화, 역사적 풍경과 사건들을 디지털 기술과 뉴미디어를 사용하여 서사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 <작전명 두더지-앤드게임operation mole–end game>(2016)은 HD 디지털 2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1970년대 북한의 남침용 땅굴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이 작업은 동시대 사건들과 다양하고 복잡하게 연결되고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하나의 파노라마를 형성한다. 이 작품은 우리 문명 내부에서 벌어지는 야만과 부조리의 장면들, 기억들을 하나의 장면 안에 나열하고 혼합시킨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연결되고, 생성되고, 파괴되고, 다시 시작되는 풍경들은 시간의 축과 게임의 형식을 타고 교묘하게 배합되고 재구축된다.

최성록

<rose garden>(2014)은 텍사스의 한 술집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이 영상작품은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의 초현실주의 영화 <황금 시대 the golden age>(1930)의 모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술집의 이름 ‘장미 정원’은 아마도 ‘We Don’t Promise You a Rose Garden’라고 적혀진 해병대 신병 모집 포스터에서 따 왔을 것이다. 하지만 군대가 무식하게 용도 변경한 이 슬로건은, 정교한 환상 속의 세상을 만든 한 정신분열증 여성에 대한 책 ‘I Didn’t Promise You a Rose Garden’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작품은 극단적인 이야기 전개와 가벼운 구성의 대조가 핵심적인 영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러 개의 이야기들이 독립적으로 공존하지만 각각의 장면들은 서로 오버랩된다. 줄거리는 부뉴엘 영화 속 장면처럼 충분한 설명 없이 진행된다. 대화는 마치 아이가 작사한 것처럼 논리적이지 않고 때로는 연기자의 입모양과도 맞지 않다. 사운드트랙은 분위기를 변화시키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장면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는 마치 대안 현실과 같다.

캐런 시터

필리핀의 사회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키리 달레나는 아티스트이자 사회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인 <after mebuyan>(2016)은 필리핀 토착 신화에서 나오는 지하 세계의 여신으로 쌀을 매개로 삶과 죽음을 관장한다. 가슴이 많이 달린 형상의 메부얀은 쌀을 절구질하는 탁자 위에 올라앉아 양손에 생명을 의미하는 쌀알을 가득 쥐고 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땅으로 흩어져 내리는 곡물은 ‘군중과 사람들을 위한 죽음을 선언’을 의미한다. 마노보스(Manobos, 필리핀의 오스트랄라시안 토착 농민)는 민다나오(Mindanao)의 부족으로써, 시신을 매장한 후 쌀밥으로 사람 형상을 조각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2016년 민다나오의 북부 코타바토 지역의 농부들은 엘니뇨로 인한 극심한 가뭄에 직면하였다. 6,000여 명의 농부들은 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인간 바리케이드를 형성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무장 경찰을 투입하여 물 대포와 총검으로 이들을 난폭하게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농부 한 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after mebuyan>(2016)에서 635는 지난 15년간 필리핀에서 국가 공권력으로 인해 죽은 소작농과 인권운동가들의 숫자이다. 작가는 필리핀 신화에 나오는 의식을 차용하여, 14K 금으로 635개의 쌀알을 만들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추모한다.

키리 달레나

폴케르트 드 융의 작업은 심리적, 신체적인 인간의 조건에 대한 관심에서 착안한 표현적 조각인 동시에 설치 작품이다. 드 융은 문화적 상징이나 역사적 인물을 새롭게 살펴보거나 현존하는 서사를 변형시키는 조각의 잠재력에 관심을 가진다. 그는 특히 캔디색의 폴리우레탄이나 스티로폼과 같은 단열재를 사용하여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성하는데, 이러한 재료의 선택은 단순히 반계급주의적 표현은 아니다. 이 재료들은 근본적으로 환경에 매우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오염물질들이다. 2016부산비엔날레에 소개되는 작품 4점은찰스 다윈의<인간의 유래>(1870)와 알베르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operation harmony>(2008)는 마치 살아있는 주검처럼 공간을 가로지르며 늘어져 있는 새까맣게 타고 훼손된 신체를 고정시켜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early years>(2008)에서 내포하고 있는 유인원의 순환은 유인원에서 인간으로의 진화가 아닌 단순한 움직임을 묘사하고 있다. <operation harmony>(2008)의 핑크색 틀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에서 가져온 단편일 수도 있고, 유인원 타워는 ‘나쁜 것은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마라’ 는 윤리에 대한 어떤 시도일 수도 있다. <double happiness>(2008)는 인류가 자신들의 독창성과 고유성에 대해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파생한 작품이다. 점성학에서 그 상징적 의미를 가져온 두 마리의 흰 원숭이들은 인간이 과소평가하는 자연을 나타낸다. 원숭이들은 인간이 지구의 일부가 되기를 배우고, 유약함과 유한함을 받아들여야 할 때에 오히려 그 자연적 순환을 탈피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폴케르트 드 융

팡리쥔은 중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하나이다. 그의 페인팅에 등장하는 ‘대머리’ 형상은 중국 현대미술의 가장 고전적인 기호가 되었으며 그의 작품 스타일은 비평가들에게 ‘냉소적 사실주의’로 정의 내려졌다. 냉소적 사실주의는 당시의 주류 문화에 대한 반항이었으며 황망한 화면과 더불어 근엄한 주제로부터 탈피하려는 표현이 주를 이루었다. <2014-2015>(2015)는 팡리쥔의 최근 대표작으로 8미터 폭의 대형 회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보이는 무수히 많은 커다란 아기들은 관람객을 등진 채 큰 태양을 향해 있고, 태양으로부터 발산된 강렬한 빛은 마치 원자핵이 방출하는 거대한 에너지처럼 보인다. 작품 속 아기들은 침묵한 채 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이처럼 강렬하면서도 차분한 모순적 상황은 팡리쥔의 최근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흡입력 있는 부분이다. 최근 몇 년 간 그의 작품은 화면이 점점 커지는 추세를 보인다. 또한, 과거 팡리쥔의 작품이 대머리 형상이 주를 이루었던 것에 비해 근작에서는 아기의 형상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는 아마도 2005년에 태어난 그의 딸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딸의 탄생은 팡리쥔에게 아버지로서의 삶으로 전환되는 커다란 변화였을 것이며, 무의식적으로 개인의 삶에 녹아 들어 그의 작품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팡리쥔

조로 파이글의 작업은 움직임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다양한 흔적들로 이루어진다. 그의 작업은로프에 전달되는 운동 에너지와 반복되는 패턴이 빚어낸 강력하고 우아한 설치다. 바다의 기복이 작품을 형성하는 작품<조수 untangling the tides>(2014)에서 바다는 해변을 만들고 해변은 다시 바다를 만든다. 두 개의 굵은 로프가 공간에 펼쳐져 마치 파도가 물결을 해변으로 밀듯이 로프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밀려 들어오고 나가는 조수를 모방하면서 로프는 서로 접촉하고 가로지르면서 또다시 풀린다. 검은 고리들이 강관을 따라 왔다 갔다 움직이는 <굴렁쇠 hoop>(2015)는 아이들이 즐기는 일종의 게임처럼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돌고 회전한다. 때로는 서로 격하게 튕기면서 뒤틀리다가 갑자기 기품 있게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춤을 춘다.작은 고리는 큰 고리를 쉽게 통과하고 끊임없이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부딪치며 율동적 안무를 만들어 낸다.거대한 방수천이 펼쳐지며 파도치고 펄럭이며 우아하게 춤추는 작품 <양귀비>(2012)는 연약하고 여린 양귀비꽃을 연상시킨다.하지만 이 최면적인 춤에는 아름다운 힘이 연관되어 있다.. 중력, 마찰, 원심력 간의 난폭한 전투가 드러난다.

조로 파이글

‘움직임 없이 소리는 없고 소리 없이 이미지는 없다. 이 세 가지 요소는 필연적인 공범이고 절망적으로 뒤얽혀 있다.’ 이벨리쎄의 퍼포먼스 <selvage>(2016)는 3개월 간 중국의 우당산의 도교승과 소림사의 불교 수도승과 함께 수행하면서 우슈, 쿵후, 채찍을 배우며 영감을 얻어 발전시킨 작품이다. 흰 벽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는 이 퍼포먼스는 이벨리쎄에게 순환적 명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채찍의 움직임은 소리를 만들고 벽에 검은 흔적을 남긴다. 퍼포먼스는 최소 3시간 동안 진행되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진적으로 벽에 자국이 남는다. 이렇게 남는 것은 움직임, 소리, 이미지에 대한 찬사이다.

이벨리쎄 과르디아 페라구티

<requiem>(2016)은 아동, 소녀와 여성을 성의 노예로서 기계처럼 일하기를 강요하는 비인간적 학대를 나타낸다. 프로비르 굽타는 이 작품으로 오늘날의 성 노예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작품 뒷면엔 포로가 된 여성들을 추모하기 위해 철판에 꽃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시각적으로 비정상적인 이 작품은 인간의 악행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
<we are in the same boat brother>(2012)는 인도의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를 반영한다.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디스토피아 속에서 인도 내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도 내 유대교회당의 관리인은 3대를 이어 이슬람교도가 지키고 있는데, 교회당의 관리인들과의 대담에 대한 영상에서 우리는 뼈대의 구조, 사물들, 이스라엘 시민들의 피드백이 어우러진 통합된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노인과 바다>를 참고문헌으로 하고 있는 이 작업은 시끌벅적하게 붐비는 콜카타의 길 위에서 위협받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의 실제 상황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프로비르 굽타

홍원석의 <홍원석 대리운전 프로젝트-joyous experience, socar>(2016)는 프로젝트성 퍼포먼스이다. 70년대와 80년대 한-중-일의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아방가르드를 다루는 프로젝트 1, 부산시립미술관과 90년대 이후 글로벌 비엔날레를 다루는 프로젝트 2, 고려제강 수영공장, 이 두 전시장을 참여작가, 큐레이터, 시민 등과 함께 택시에 타고 다니면서 국내와 전세계, 삶과 문화, 상업성과 국가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한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서 시장의 비효율성과 인간의 비합리성, 시장과 제도에 종속된 미술의 근원적 취약성 등을 모두 성찰하는 불편하고 고통스런 현장이 되길 바란다. 홍원석의 대리운전 프로젝트는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의 축소판이다.

홍원석

대형사진을 촬영하는 방식을 차용하는 후지에밍의 영상 작품 <共時 synchrony>(2016)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군상의 모습을 담는다. 대형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성은 서로 뒤얽힌 시공간 속에서 펼쳐지고, 변화하는 각양각색의 장면들은 다양한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영상의 소재는 오래된 옛날 사진에서 가지고 왔다. 이 옛날 사진 속 인물들은 작가의 친구부터 각기 다른 시간 속의 역사적 인물들 등으로 매우 광범위하다. 후지에밍은 특수효과를 활용하여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에 움직임을 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각기 다른 시간과 지역으로부터 온 사진 속 인물들은 각양각색의 외형적 특성을 지나고 있다. 작가는 이들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엮음으로써 교배적인 정체성과 각각 삶의 여정들을 표현하고자 한다.

후지에밍

살레 후세인의 작품 <and everything around us is beautiful>(2016)는 인도네시아의 아랍 사회주의운동의 꿈과 희망을 얘기하는 ‘PASI의 빛’ (Tjahaja PASI)이라는 찬가에서 착안한 허구의 작품이다. 1966년에 발생한 폭동 때 인도네시아 정부는 사회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금지했다. 이중에는 노래, 작곡, 찬가마저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포함되었다. 이 작품은 정치적 발언, 통일된 메커니즘, 또는 대중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도구로서 정당이 노래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들여다본다. 이를 위해 이 작품에서는 서양의 문화(오케스트라의 금관 악기 부 관악기와 성가대)를 이용하여 아랍사람들의 글로벌화에 대한 시각을 반추한다. 작품은 정치권에서 매우 자주 선전의 도구로 사용하곤 했던 인도네시아의 오래된 영화상영 스타일인 ‘layartancep’(야외 영화)를 재현한다.

살레 후세인

멀티미디어 작가인 에달 인시는 영상작업을 통해 복제된 동작에 대한 실험을 한다. 작가는 때로는 조명이나 다른 사물을 든 작가자신이 공공장소를 지나는 모습이 무한 반복되어 마치 최면을 거는 듯한 영상이나 GIF파일을 만든다. 인시는 조명의 노출의 정도에 따라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완전히 사라지기도 하면서 그의 작품은 더욱 신비하고 몽환적인 영상이 된다. 인시는 녹화된 퍼포먼스를 계속 복제하면 영상이 끊임없이 움직이게 되는 것에 착안했다. 이 작품은 동일한 퍼포먼스의 모든 시간 별 단계를 1,2초와 같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볼 수 있는데, 그는 이를 거대한 인원을 움직이는 안무가 또는 프레임을 형태와 색이 아닌 움직임으로 채울 수 있는 화가처럼 생각했다. 에달 인시는 전통적인 예술과 공예, 춤과 반복에서 사용되었던 패턴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움직임, 퍼포먼스, 실제 환경들에 대한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에달 인시

장재록은 거대한 인공 구조물과 정교한 기계적 장치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동양화 그림들도 눈금표를 써서, 자로 잰 듯, 기계적으로, 설계도면처럼 그려낸다. 일필휘지 기운생동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계와 인공구조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그리는 것은 매끈하게 정제된 기계의 외관만이 아니다. 그의 작품 속 기계나 구조물은 마치 인체 해부도처럼 기괴하고 공포로 다가오는 듯 하다.

장재록

중국의 동북지역은 중국중공업의 핵심지역으로 중국의 근현대사에 있어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한 곳이다. 중국의 동북과 북방 지역 전역은 일찍부터 중국 경제의 고속 성장을 가지고 온 곳이지만, 1980년대부터 90년대를 지나며 경제적 쇠퇴를 맞았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중공업 공장들이 도산하거나 폐쇄하였고, 수 만 명의 공장노동자들은 이직하거나 퇴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과거 계획경제하에서의 절대평등주의는 눈깜짝할 사이에 시장경제의 능력주의로 바뀌었고, 이 노동자들을 포함한 사회가 겪은 불행과 적막함은 시대의 상흔과 아픔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면밀히 관찰해 온 지아아이리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폐허적’ 장면이라고 하겠다. 지아아이리는 ‘폐허’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매우 흐릿하게 기계와 인물들을 그려내는데,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혼란스러운 환경과 고독한 개인을 상기시킨다. 그의 회화에서 보이는 삶의 모습에는 모두 시대적인 무력감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거대한 화면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미약한 존재로 남는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지난 날을 되돌아보게 하고 현실과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픈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지아아이리의 신작 <행성의 은둔자 hermit from the planet ⅱ>(2016)는 우주 공간의 한없이 넓고 아늑한 화면으로 무대가 옮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서 일관적으로 보여지는 ‘폐허감’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아아이리

진양핑은 모더니스트와 사회주의가 남긴 유산에 대한 환멸과 염증을 즐기면서 공공연히 ‘B급 회화’를 생산해낸다. ‘B급 회화’는 현 시대 인간 존재의 근원적 취약성과 인류 영혼의 보편적인 약점들을 공격하기 위해 주류적 가치와 형식을 공개적으로 왜곡하고 전복시키는 경향을 말한다.
마치 해체주의가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의 억압성을 고발함과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거대담론을 해체하듯, 그는 당대 중국미술계의 형식과 내용을 동시에 공격하고 있다. 진양핑은 독창성이나 진품성을 조롱하며, 작업의 완결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불연속적이며, 무작위적이고 파편화된 형식으로 나타난다. 진양핑의 작업들은 ‘반시대적 철학’이며 이것은 ‘B급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진양핑

<hyphenated lives>(2015-2016)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환상적인 돌연변이 과정을 재구성한 것으로, 국가를 상징하는 여러 종의 새, 동물, 나무, 꽃을 새롭게 교배시켜 국가간 갈등을 하이픈을 사용하여 상징적으로 결합한다. 리나 칼랏는 어떤 것의 존재 혹은 소멸이 다른 종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을 통해 발언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의 모티브가 된 것은 전기 케이블이다. 생각과 정보를 전송하는 이 전선은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장벽과 같은 철조망을 변형시키는 매우 복잡한 관계가 된다. 이러한 독립성과 상호의존성에 관한 탐구는 개인적으로 갈등하는 자아와 이웃 혹은 국가와의 관계를 비추고, 우리의 복잡한 존재를 구성하는 수 많은 관계와 경계를 생각하도록 한다. 그녀는 수년 동안 이러한 맥락의 작업을 지속해왔지만 2010년 시드니 캠벨타운 아트센터에서 발표한 <two degrees>가 이 시리즈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연관이 깊은 국가간의 관계에 대한 오랜 관심에서 확장되어 인도-파키스탄, 아일랜드-영국,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북한-남한, 미국-쿠바와 같은 분열된 국가간의 충돌과 논쟁의 근본 원인이 되는 천연자원에 주목한다.

리나 칼랏

김학제는 ‘세계의 다중지성은 진정으로 인류를 위한 공감을 획득해 나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류의 역사는 욕망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취약한 속성을 그 시대 시대마다 남긴다. 현대 다중지성으로 대표되는 최고 가치 형태는 급격히 발전된 테크놀로지와 그에 따른 우주로의 진출로 정의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것들을 향한 세계지성의 결합과 경쟁의 이면에 숨어있는 욕망의 그늘을 함께 표현하고자 한다. 제작된 모조 인공위성은 바닥과 벽에 묘지처럼 설치되고 모조 인공위성의 날개에 부착된 사진들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얘기했듯이 탈코드화된 흐름을 전제로 하는 유일한 사회인 ‘자본주의 기계’의 화폐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을 전제로 하는 ‘정신분열증적 현상’과 ‘욕망’의 코드를 도상으로 보여준다. 벽면에는 광활한 우주에 쓸쓸히 거니는 로봇과 인간의 모습을 영상으로 투사하여 전체적으로 묵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우주인과의 교신을 내용으로 한 선구적인 팝음악 데이비드보위의 ‘space oddity’와 10CC의 ‘I’m not in love’이 교차 편집되어 흘러나온다.

김학제

권순관은 <어둠의 계곡 the valley of darkness>을 통해 우리 근대사에 관련된 한 장면을 보여준다. 수 십 년 전에 일어났던 근대사의 비극,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과 관련된 현장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 6.25 전쟁 당시 피난하던 양민 300여명이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군에 의해 학살되어 암매장되었다고 추정되는 역사의 현장은, 권순관의 사진 속에서 마치 검은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다.
수많은 가능성 중 선택한 한 장면, 그 어두컴컴한 사진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채 오리무중에 빠져 있음을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장면을 찍은 사실이지만, 무엇인가를 열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이 어두운 장막을 관객이 스스로 들추도록 남겨둔다.

권순관

이세현의 붉은 산수는 환각을 일으킬 정도로 강한 비주얼을 가지고 있다. 작품은 비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런 몽환을 헤치고 한 발 더 다가가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은 매우 사실적이고 익숙한 풍경들을 마주하게 된다. 작품 속에는 우리 주변의 자연, 건물, 마을, 사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의 작품은 현실적이고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다. 한 장의 그림 속에 인간과 자연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재된 인간의 폭력적 시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자연에 각인된 역사의 상처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며, 동양과 서양,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내보인다. 그의 작업은 인간과 자연의 상처 모두를 아우른다.

이세현

현대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문화 간의 교류와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인간의 미디어 이용은 정치와 문화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새로운 예술의 구현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포스트모던의 선상에서 미디어는 어느 아방가르드보다도 지속적이며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테크놀로지 혁명의 세기는 비디오에서 출발하여 가상현실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술이 고조되어 이제는 가상조각에 이르렀다. 새로운 디지털 매체는 전 세계인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게 하였으며, 시지각과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 자본주의 발달과 세계화로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유입되고 혼혈을 재현하는 미디어는 문화, 역사, 사회적 현상, 매체의 특성과 메시지 등 여러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진다. 그리고 혼혈을 구성하는 미디어는 인종, 언어, 기호, 이미지, 문화 등의 미디어 매개체를 통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이이남은 우리사회에서 미디어가 어떻게 혼혈하는 지구를 다루고 있는지, 또는 혼혈하고 있는 지구를 대표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VR을 착용하면 무수히 많은 한자들이 입체적으로 채워진 가상의 공간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문자와 영상 등 다양한 미디어에 의해 혼재된 인간의 의식체계를 시각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로써 오랜 역사를 지닌 한자가 디지털공간에서 하나의 정보(DATA, PIXEL)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대상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이이남

리밍은 퍼포먼스와 영상 작업을 통해 개인과 사회 관계의 핵심을 찌르는 연구를 진행해왔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세 작품들은 모두 작가가 직접 출연하는 작품들로 그의 신체는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는 가장 좋은 실천적 매개가 된다. 한정된 시간의 영상 작품에서 작가는 신체를 통해 반복적인 동작을 끊임없이 이어나가고 이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소진될 때까지 계속된다. 작품에 함축된 그의 ‘집착’ 은 매우 호소력이 짙다. 작품 <361>(2014-2016)은 361개의 일회용 라이터를 깨부수는 것을 촬영한 것이다. 리밍은 이 퍼포먼스를 위해 일회용 라이터의 문헌적 연구와 기록 영상 제작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연구하였다. 작가는 고집스럽게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개인적인 어떤 목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전체가 작동하는 흐름에 대한 반성과 사회적 아이덴티티의 당혹스러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이동 movement>(2014)은 총 여덟 대의 텔레비전과 두 대의 싱크로나이저(synchronizer)로 구성된다. 하나의 싱크로나이저에는 네 대의 텔레비전이 연결되고, 화면에서는 여덟 편의 영상이 동시에 재생된다. 작품 <자연 nature>(2011)은 네 대의 텔레비전 화면을 십자 모양으로 배치하여 자연의 힘과 인공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관념과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리밍

라우라리마는 스스로 ‘이미지’라 일컫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리마의 ‘이미지’는 퍼포먼스도, 설치물도, 영화도 아니다. 작가가 사용하는 ‘이미지’는 시각적 명료함과 사실의 공고함을 축적시킨 작업을 개념화한 것이다. 이 철저한 개념적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작업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Man=flesh/Woman=flesh (Homem=carne/Mulher=carne)이다. 라우라리마 작품의 일부는 장식 철학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리마는 장식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직접적으로 반박한다. 그녀는 일반화되고 보편적이라고 간주되는 정의 및 개념을 비틀고 전복시킨다. .
2016부산비엔날레에서 선보이는 작품 <ascenseur>(2013, 2016)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마주하였을 때 우리는 열쇠꾸러미를 짚으려고 벽 아래에서 뻗어 나오는 팔에 직면한다. 작가는 우리가 매우 쉽게 이 팔이 나와 관계없는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판단 하지만이 팔은 우리 자신의 팔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은 존재와 상호작용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건드린다.

라우라 리마

리우신이는 작품을 통해 국제적 문화 충돌과 해소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번 출품작인 <세계의 중심 the centre of the world>(2011)을 통해 동서양의 여러 국가들이 자신의 국가를 세계의 중심에 두고 지도를 출판하는 것에 대한 의문으로 ‘세계의 중심은 어디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리우신이는 세계 영토의 자전 형식을 인체의 둔부에 투영함으로써 세계의 중심을 인간 배설물의 출구가 되도록 표현하여 절대적인 세계의 중심은 없음을 해학적으로 나타낸다. 또한 다음 작품인 금융센터의 야경 이미지를 수집하여 하나의 섬으로 편집한 <보물섬 treasure island>(2012)에서는 화려하지만 공허한 해양도시의 신기루가 펼쳐진다. 이러한 몽환적 풍경은 기형적이고 불필요한 발전에 매진함으로써 거품 경제의 재해지가 된 중국 사회를 연상시킨다.

리우신이

다나 릭센버그의 <imperial courts>(1993-2015) 프로젝트는 영상작업과 방대한 흑백사진 시리즈를 조합하여, ‘임페리얼 코트’라 불리는 중남부 로스엔젤레스의 작은 커뮤니티가 변화하는 모습을 추적한다. 사진과 영상은 리센버그가 1992년4월 로드니 킹 사건이 발발한 시점에 로스엔젤레스를 여행하면서 친숙해진 장소, 임페리얼 코트의 주민들과 맺은 폭넓고 협동적인 관계를 통해 탄생한 작품이다. 릭센버그는 1993년부터 2015년 봄까지 22년 이상 지속적으로 이 커뮤니티의 자화상을 제작하면서, 파괴의 광경으로부터 벗어나 참사가 일어날 때에만 이목의 집중을 받는 전형적인 삶들에 눈을 돌렸다. 임페리얼 코트에서 제작한 작품으로는393점의 흑백사진과 2015년 로마출판사에서 발행한 단행본 이외에도 루프되는63분짜리 3채널 비디오 프로젝션이 있다. 릭센버그가 자신의 영상에서 포착한 임페리얼 코트의 삶은 극적인 드라마와 놀이에서부터 의미 없는 일상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종종 일탈적이고 극단적이라고 조롱 받은 미국 도심 지역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임페리얼 코트는 변함없는 도심 풍경을 배경으로 커뮤니티의 연속성을 형성하며 선정주의와 구경거리를 반대하고 민감성을 선호한다. <imperial courts>(1993-2015)는 이러한 방식으로 천사의 도시(LA)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라틴 아메리칸들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22년 동안 기록한 작업이다.

다나 릭센버그

자비에르 루체시는 카메라 없이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을 시도한 작가이다. 루체시는 이를 위해 색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장비들을 가지고 작업을 시도 하였는데 엑스레이 기계와 스캐너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 그의 이미지는 단순히 이미지를 제작하는 보편적인 방식이 아닌 사물을 통과하는 방식을 취한다. 어떤 물체 뒤에 있는 표면에 엑스레이 광선을 쏘면 그것은 실제의 그림자를 없애 버린다. 이는 우리가 볼 수 있는 ‘환영’인 것이다. 광선이 사물을 통과한다는 것이 단순히 이쪽에서 저쪽의 반대편으로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광선이 사물을 통과한다는 것은 사물의 실제를 드러낸다는 것이고, 이는 일종의 관찰자가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영혼을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체시가 피카소의 회화과 같은 명작들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작업을 할 경우, 작품의 일면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시각적으로 극적인 장면을 표현한다. 또 그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을 그려내는 뇌의 시뮬레이션 능력과 기술력과 사이에는 접점이 있는데 주목한다.

자비에르 루체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동성애 혐오 관련 법을 제정하고 서양의 동성애자를 향해 심각한 편협성을 내보일 때 유독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법을 내놓으며 자신을 다른 나라들과 구분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흑인 성소수자(LGBTI: 레즈비언,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렌스젠더, 인터섹스)들은 혐오살해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취약한 흑인 레즈비언들은 종종 잔인한 살인의 희생양이 되거나 주변인과 친구들로부터 ‘치료를 빙자한 강간’을 당한다. 2013년, 무홀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기쁨과 슬픔이 서로 이어져 보이는 흑인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기록하였다. 이번에 선보이는 자넬레무홀리의 사진 설치작품은 슬픔과 축하의 현상이 어떻게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자넬레 무홀리

<허브 herb>(2016)시리즈는 '인간의 기억 속에 감춰진 갈등과 공포와 두려움에서나타난 다면성'의 치유를 기본 화두로 하고 있다. 나의 작품은 감춰진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창작의지와 인간의 원(怨), 한(恨)의 실체인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바이오 코드’가 나타난다.이 작품들은 꽃과 약초, 텍스트를 통해 현대인에게바치는 헌화(獻花)의 의미를 담는다. 이 시리즈는 대상 또는 기억의 재현을 통해 어떤 고정된 이미지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기억으로부터 유추된 인상을 종교적 경전이나 고백문의 텍스트를 분해하고, 재조립하여 이미지와 결합해 관념의 텍스트가 아닌 시각화된 보기의 텍스트로 완성해 ‘독해’와 ‘매혹’의 중간 어느 지점에서 관객과 마주하게 되기를 기다리는 존재이다.

오윤석

올타는2009년 타마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6인으로 구성된 일본 아티스트 콜렉티브 그룹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은 미디어로부터 송출된 영상과 같은 엄청난 양의 정보들로 넘쳐난다. 올타는 작품 <walking cascade>(2016)에서 이러한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경험을 폭포에 비유한다. 폭포에 가기 위한 여행,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 폭포수가 낙하하는 소리, 온도, 습도, 그리고 주변환경까지, 우리는 모든 감각을 통해 폭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볼 때, 촬영된 영상은 부차적 결과물인 것이다. 올타는 신작을 통해 정보의 누적과 변환을 세가지 방법 - 영상의 창작자로서의 작가들의 신체를 이용하는 방법, 정보수신자의 신체를 이용하는 방법, 문서화하고 기록하는 매체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시각화하려 한다. 올타는 이번 전시에서 서일본 농부들이 염불할 때 추던 일본 전통의 불교 민속 무용 인로쿠사이넨부쯔 춤(Rokusai Nenbusu Odori)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여러가지 형태와 전통이 있겠지만, 대부분 몇몇으로 구성된 무리가 마을의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밤새도록 북과 종과 피리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 올타의 퍼포먼스에서 멤버들은 자신의 목소리와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로 만든 악기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 퍼포먼스의 촬영과 결과물의 반복재생, 관람객의 몸짓이 결합되어 이 설치는 완성된다.

올타

오를랑은 자신의 신체를 작업의 재료이자 시각적 지지대로 만든다. 자신의 신체 자체를 토론장으로 사용하고 전시하는 것이다. 그녀는 신체 예술의 창시자이자 1989 성명서에서 정의한 ‘육체적예술’의 주요 인물이다. 오를랑의 집념과 자유는 그녀의 작업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녀는 모든 작업에서 혁신적, 의문적, 파괴적 입장을 견지한다. 오를랑은 데이터를 끊임없이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관습과 ‘레디메이드’ 사고를 무너뜨린다. 그녀는 사회적, 정치적인 자연적 결정론, 남성 우월주의, 종교, 문화적 분리, 인종차별 등의 지배적인 유형을 반대한다. 오를랑은 종교적 도상과 바로크 시대의 여성의 신체의 묘사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아프리카,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인도, 중국의 문화를 탐색하는 동시에 그들의 물리적, 감성적 그리고 가상적인 현실을 가장 현대적인 과학, 생물학 그리고 컴퓨터 기술로 살핀다. 그녀의 최신 연작<masks beijing opera, facing designs and augmented reality>(2014)에서 오를랑은 베이징오페라의 가면을 인터랙티브 기술에 접목하여 작품으로 풀어낸다. 증강현실 어플리케이션 '오그먼트(Augument)'를 활용하여 자기 교배(self-hybridization)와 모든 소스들이 QR코드로 변한다. 관람객의 태블릿과 스마트폰에 오를랑의 아바타가 출연하여 여성에게는 금지되었던 베이징오페라에서 곡예를 선보인다. 관람객은 이 3D 아바타와 함께 사진 촬영도 할 수 있다.

오를랑

탄야 오스토이치는 유럽 사회 및 예술계가 직면한 문제에 밀착하여 퍼포먼스와 영상, 사진과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문제 의식을 제기하며 다각적으로 연구하는 실천적 작가이다. 그녀의 대표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인 <벌거벗은 삶 naked life>(2016)은 집시들과 깊은 유대를 형성하여 지역 커뮤니티, 사회 운동가들과 함께 토론하는 플랫폼을 통해 식민주의적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격한 슬픔을 덜어내는 공유와 치유의 장을 마련한다. 특히 이번 출품작인 <벌거벗은 삶 6 naked life 6>(2016)은 발제 형식의 퍼포먼스로 집시들의 가난한 삶과 사회 및 정치적 배제, 추방,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증과 같은 문제들을 다룬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떻게 현대 유럽 사회에서 특정한 인종 집단이 끊임없이 노출되며 정치 및 사회적으로 인간적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윤리적 물음을 던진다.

탄야 오스토이치

개인의 욕망의 가치를 규정하는 척도는 사회적 기준에 의해 나뉘어진다. 다시 말해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하면서 갈등이 유발된다. 그러나 사회적 기준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의 욕망은 어느 정도 통제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각각의 욕망의 모습은 다르지만, 모든 관계들 속에는 이 사회적인 억압에 의한 심리적 불안감이 내재하고 있으며, 이 불안감은 개인과 개인에게 복잡하게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는 현대사회에서 지속적인 폭력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폭력을 인간 관계와 그 상호성에 대한 문제로 인식하고 작업으로 펼친다. 관계에 대한 고민은 거대한 대상이 아닌 가장 가까운 대상, 연애, 사랑, 질투, 연민과 같은 일상과 밀접하다. 가장 친밀한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관습, 신화, 형식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곳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으로만 이루어진 장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개인을 지배하는 수많은 관념과 욕망들이 충돌, 교환, 타협하는 복합적인 장이자 언제나 원초적 갈등이 잠복하는 장이다. 나는 친밀한 관계이면에 존재하는 욕망, 드러나지 않는 폭력을 동화, 설화 혹은 상징적인 오브제와 더불어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개인적인 경험들을 조합하여 관계 속에서의 일방적인 집착을 담아낸다. 그리고 인간 관계에서의 애정과 갈등뿐만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맺기에 내포된 이면의 모순, 갈등이나 불안을 수평적 시간과 수직적인 시간이 교차하는 진공적인 상황을 만들어내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영상을 만든다.

박지혜

도박열풍이 불었던 대만의 1980년대에는 작은 신상들이 특히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당첨번호를 맞추지 못하면, 이 신상들은 마치 주인의 기대치를 저버린 강아지들이 유기견 보호소에 보내지듯 재활용 센터에 버려졌다. 인간은 마치 신들의 응징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 마냥 자신들 마음대로 신들을 처벌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신들은 인간이 쉽게 조작할 수 있는 작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god pound busan>(2016)에서, 501개의 조각상들은 대만 인형극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을 바라보며 전시공간을 채우고 있다. 스크린 속 한 마리의 강아지는, 신들이 숭배의 대상이었을 때부터 이후 버려진 폐기물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를 통해 작가는 유기견 보호소와 신의 수용소가 평행선상에 놓여있음을 상기시킨다. 펑홍즈의 작품 속에서 단지 작은 존재들로써 모인 501개의 조각상들은 과거 성스러운 신앙의 대상임과 동시에 현재 버려진 무가치한 폐기물이 된다.

펑홍즈

작가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의료모형들을 활용해 다양한 행위를 이행한다. 종교의식을 연상케하는 동작들은 멋진 마술 쇼처럼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이 영상은 푸쉬파말라 엔이 민족 국가의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제작한 장기프로젝트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그녀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는 정부의 프로젝트들을 인류학, 민족학, 우생학의 역사를 통해 다시 들여다본다. 그녀는 작품 속에서 직접 퍼포먼스를 하며 자신을 탐색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역사의 대리인이자 결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푸쉬파말라 엔

조아나 라이코프스카의 영상<my father never touched me like that>의 중심에는 아버지와 딸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묘사했다. 작가는 아버지가 그녀의 얼굴을 만져줄 것을 청했는데 그것은 어쩌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아우슈비츠로 수송되던 중 탈출을 시작으로 가족과 아내를 떠나는 순간까지 늘 도망치는 삶을 살았다. 그는 한번도 어린 자식의 기저귀를 갈아준다거나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여하거나, 심지어 패혈증으로 그녀가 입원을 했을 때 조차도 곁에 없었다. 또한 그의 아내가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조차 오롯이 부르던 그의 이름까지 외면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일상생활의 표면 아래에 있는 기억들의 층위를 겉으로 드러내면서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조아나 라이코프스카

로만 지그너가 우리를 위해 구축하는 예술적인 일들은 과정, 놀이, 경험, 경이에 기반을 둔다.그의 재료는 기본적인 물리-현상–관찰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놀라운 해학으로 세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미술계에서는 발견된 바 없는 매우 미묘한 해학의 모습을 띄고 있다. 고요하고, 명료하고, 가벼운 지그너의 행동은 우리에게 감명을 준다. 이것은 ‘물은 흐르고 의자는 의자다’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지당하게 고민한 70년대 어떤 예술처럼 중언부언하는 따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지그너의 제스처는 영웅적이지 않지만 서스펜스의 희곡 작가처럼 보이며, 정신적 감각의 폭발과 같은 폭발적 해방을 일으킨다. 그는 기발한 예술가, 개인주의적 예술가 등 우리가 기대하는 예술가의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사물의 놀랍고 예상치 못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선보인다. 우리는 평범한 스프레이 통, 고무 장화, 자전거나 부엌의자가 가진 가능성을 알게 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에서 바라보는 만물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깨닫게 된다.

로만 지그너

시니크스미스의 세 편의 퍼포먼스는 제스처, 사물, 개념적 영감이 주를 이룬다. 그녀의 작업은 점성술, 연금술, 신화적인 서정시와 도시 교차로의 움직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작가 게리페녹(Gary Pennock)과의 협업으로 탄생한<gesture iii: one great turning>(2015)은 스미스의 벽화<일곱개의seven moon junction>앞에서 항공 비디오와 지상비디오 카메라기술을 동원하여 촬영되었다. 이 퍼포먼스에는 작가의 개인사와 인생에 영향을 미친 일들을 기반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스미스의 페인팅과 대형설치 및 퍼포먼스가 총망라되고 그녀가 작품제작과 전시연출에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어렸을 적 나는 데르비시의 수피춤을 배웠고, 순수한 마음에 그들과 똑같이 추고자 노력했다. 나는 볼티모어의 뒷마당에서 내 마음이 해방될 때까지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았다.’ 라고 자신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언급했다. 이 경험은 스미스가 최면에 걸린 듯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벽화로 표현하고 확장 시키는 작업의 출발선이 되었다. 작품의 무용수들은 스미스가 파라솔과 커다란 실크 천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제작한 의복을 입는다. 스미스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던 카이로스 무용단(KAIROS Dance Company)은 그녀의 안목이 이끄는 즉흥성을 따르고 카이로스의 기존 작업 ‘그녀 (Her)’로부터발췌한것을 더하여 다이나믹하게 전개되는 놀라운 협업작품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게리페녹의 전문적인 편집 기술과작곡이 더해져 스미스의 아이디어를 더욱 완벽하게 표현 하고 있다.

시니크 스미스

손정희는 도조(陶彫)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꿈을 현실화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피카소가 ‘상상한 모든 것은 현실이 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녀가 표현하는 상상의 세계는 흙으로 빚어 구워 내는 순간 현실적인 존재가 된다. 손정희의 작업 주제는 일상에서 비롯되었다. 어린 자녀들에게 ‘백설 공주’등의 동화를 읽어주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의 결말을 비틀고 풍자하는 것이 작업의 컨셉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업의 다양한 소스들을 동서고금에서 찾게 되었다. 이 이야기들은 다시 작가적 상상력의 개입을 거쳐 변형되고, 사회현상의 풍자와 비판 혹은 비틀기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손정희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적인 정조(情調)는 연민과 해학, 기다림(願望), 비상 등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손정희

해변으로 떠밀려온 아이들의 시체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는 자유롭지만, 결코 자유롭지 못한 세계에 살고 있음을 직감한다. 영토의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들은 오직 생명이 아닌 것들뿐이다. 이 장벽은 영토와 영토 사이, 영토와 생명 사이, 생명과 생명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존재하며 끊임없이 우리를 분리시키고 진짜 적대와 마주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과거 악명이 높았던 남아프리카의 인종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의 ‘다름’이 아니다.
<이미 여기에 늘 평화롭게 존재한다 already peacefully existing here as always>(2016)는 과거 담벼락 위에 설치하여 미지의 이웃과의 분리를 가능하게 하고 사적 소유권을 지킬 수 있었던 쇠창살의 근원적 원리를 가시화 하여 유령적인 아파르트헤이트를 마주 하게 한다.
뿌리가 탄 채로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무와 창문을 통해 재난으로부터 탈출하는 남자 영상, 저울 접시의 숨겨진 무게를 드러내는 사진은 분리라는 것을 통해, 적대를 공존시키고 그로 인한 잔여물마저 유지하는 현 상황에서 새로운 삶을 기획하는 일을 구성한다.

송기철

스튜디오 콘텍스트는 덴마트 오르후스 건축학교에서 시작되었으며 다양한 나라에서 모인 학생, 건축가, 시민들의 헌신과 기술이 통합된 결과물을 선보인다. 스튜디오 콘텍스트는 지리적, 역사적, 인류학적, 사회적 현상이 반영된 주거와 지속 가능한 건축을 연구하며, 각기 다른 문화적 요소가 혼합된 디자인을 탐구한다. 2016부산비엔날레에서 스튜디오 콘텍스트는 대나무라는 독특한 재료를 사용한 작품 <cocoon ⅱ>프로젝트(2015)를 선보인다. 대나무는 지난 수세기 동안 아시아 국가들에서 실내 내장재나 생활 소품으로 이용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건축 디자인 분야에서도 유용한 친환경적인 건축 재료이다. 대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첫 번째 실험적 프로젝트 <cocoonⅰ>에 이어 <cocoon ⅱ>(2015)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기능, 재료, 그리고 구축에 대한 교육학적인 접근 방법과 실험은 범문화적인 협업의 개념을 이끌어 냈다. 작업은 지역의 재료와 기후조건에 알맞도록 고려되어지며 지역 주민들과 긴밀한 협업을 통해서 이루어짐과 동시에 실험적인 접근방식을 유지해 나아갔다. 코쿤 프로젝트는 공간, 건축, 재료 그리고 대나무의 세계에 대한 현재 진행중인 실험이다.

스튜디오 콘텍스트

<point of contact #2>(2016)는 단순한 개방형 스위치로 이것은 램프를 밝히는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 이 작품은 깜박이는 백열등으로 전기적 ‘접촉’이 있다는 것을 물리적으로 보여준다. 백열등은 접촉에 의해서만 작동하며 그것은 오직 백열등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작품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극단적이고 즉각적인 물리적 존재이다. 타무라 사토루는 우리에게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든 존재가 어떤 것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에 이유를 붙이고 갈망하는 존재는 우리 인간들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은 발전과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무분별하게 환경을 파괴하고 인종, 종교, 사회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맹목적 믿음을 바탕으로 서로를 배척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이 모든 것은 인간 욕망의 여러가지 변형된 모습일 뿐이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 때 어떤 목표를 세우거나 무언가를 주장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무라 사토루의 작품을 통해 현실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재설정하고 번뇌를 넘어선 삶의 방식을 성찰할 수 있다.

TAMURA Satoru

츠치야 노부코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유발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며, 기억과 상상의 관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자 노력한다. 그녀의 작업은 자신의 여러 가지 생각, 언어적, 음악적, 논리적, 관능적, 감각적, 경험적 또는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사용한 결정의 축적물이다. 그녀는 작업을 통해 균형과 불균형의 어떤 지점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구성 요소를 최대한 압축하려 한다.

츠치야 노부코

한강.

나는 아주 넓고 큰 집을 오른다. 저기, 사내 모습을 한 회색 늑대가 길 앞으로 나아가며 이놈 저놈을 먹어버린다. 피를 빨아 마신다.
큰 집을 오르면서 보이는 지붕, 옥상에서 앞을 보니 나무로 지은 큰 배가 있다. 그 배를 바라보니 흔들거리며 바이킹처럼 상하 짓을 한다. 스으윽, 스으윽.
어느 샌가 배의 우측 끝자락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 큰 집을 내려와 길을 걷는다.
이제, 일어난다.

양아치

유성훈은 특별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현재의 도시공간이 조성된 부산에서 창고로 지어져 사용된 공간이 2016부산비엔날레 프로젝트 2의 전시장으로 쓰이게 된 것은 부산의 지형적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5개월 간 한 장소의 변화과정을 기록한 <공간의 전시 the exhibition of the space>(2016)를 통해 특별한 장소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이 지역과 인간사에 대한 많은 감흥을 자아냄을 전하고, 또 다른 작품 <빈 터the empty site>(2016)를 통해 고향집에 대한 기억들과 전시공간 사이의 연상관계를 나타내고자 한다.

유성훈


손끝의 작은 지문과 스마트 폰이 만나면 모든 것이 한눈에 펼쳐진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세상과머리 속의 세상이다. 작은 프레임에 갇힌 부유하는 모든 말과 글은 보편적 힘을 갖지만 금방 스며들고 얼룩지고 사라진다. 봄의 황사가 세상을 흙먼지로 뒤덮듯 세상은 텍스트와 이미지로 가득하다. 외부의 빛과 소리, 맛과 감촉에 관심을 쏟는 동안 우리의 일상은 파편이 되어 고장 난 등처럼 깜박거린다. 언제부턴가 몸을 움직이고 시간과 공을 들여야만 가능해지는 육체노동은 그 소중한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지금의 노동은 단말기의 간섭 속에서 지연되다 미완으로 머무르는 피로한 어떤 것이다. 정신의 각성 속에 육체는 무게가 되고 육체의 관성 속에서 정신은 잡음이 된다.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고, 회복시키는 힘은 여전히 노동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윤필남은 일상의 고이지 않는 흐름을 부단히 움직이는 노동에서 찾아야 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윤필남

카타리나 제츨러의 영상 작품 <everything is gonna be>(2008)은 노르웨이의 로포튼 아일랜드로 이주한 아마추어합창단이 비틀즈 곡 ‘Revolution’을 부르는 장면을 담고 있다. 마치 자장가처럼 부르는 합창단의 노래는 불안할 정도로 성의없는 톤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제츨러는 두 가지 거리를 드러낸다. 하나는 존 레논이 1968에 작성한 가사에서 보이는 격변에 대한 비평적 거리이고 다른 하나는 노래의 의미와 영상에 나타나는 중년의 사람들 사이의 이념적 거리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제츨러는 불확실성들을 물리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과정, 즉 개인적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개개의 목소리가 조화롭게 모이는 과정을 완벽하게 표현하려는 시도에 중점을 둔다. 개인의 은밀한 개별적 존재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태도와 공동의 목소리에 녹아드는 것을 망설이는 듯한 비자발적 태도들이 모호하게 채워져 있다. 말하듯 노래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서 희망적이기보다는 불길해 보이는 거리감과 냉담함을 전달한다.

카타리나 제츨러

쩡하오는 개인 내면의 정신 상태와 사적인 인상, 직접 느낀 환경의 변화를 화폭에 담는다. 그의 회화에서는 침대, 옷장, 화분 그리고 수줍은 표정의 인물 형상과 같은 보편적인 물건들을 볼 수 있다. 특히 <1998년 5월 9일 4시 6분 04:06am of May. 9th, 1998>(1998)은 그의 대표 시리즈 작품 중 하나로 인물, 가족, 전기와 같은 각종 소품들을 배열하여 서로 관계 없는 조합이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의 배후에 있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쩡하오가 그린 가족의 모습이나 공간의 어떤 단면에는 어떤 추측하기 어려운 불투명한 소외감이 있으며, 보기에는 완전해 보이지만 원근법으로 벗어난 적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인간 관계의 취약한 본질과 현대사회의 경계화 된 현실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쩡하오

저우원도우는 개념주의적 창작 스타일과 유머러스하고 해학적인 예술적 언어를 통해 일반적인 중국 동시대 작품과는 다른 시각을 표현한다. 작품 <adhd>(2015)는 직경 2m가 넘는 원형 설치 작품으로 구의 정수리 부분에서는 끊임없이 잉크가 뿜어져 나오고, 표면에 설치된 20개 이상의 ‘차량 와이퍼’는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분출하는 잉크를 닦아낸다. 작가는 이러한 기계적인 동작을 통해 현재 생활 속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현대인의 비 자동제어적 성격과 지나치게 반복적인 행위와 습관을 넌지시 암시한다. 또한 작품을 통해 끊임 없이 기계적으로 소식을 제조하는 인터넷 시대와 점차 주의력 결핍으로 둔해지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저우원도우
참여: 모든 표현 수단
일부 스토리는 독립적인 제3자가 작성한 것으로 아래의 콘텐츠 제공 기관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Google 번역
찾아보기
주변
프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