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신화, 한국의 호랑이

국립중앙박물관

국토의 4분의 3이 산으로 이루어진 한국은 일찍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의 나라’로 불리웠습니다. 한민족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신화檀君神話는 곰과 호랑이로부터 시작합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부리는 군자의 나라’의 사람들로 일컬어지고 해마 다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전해질 만큼 호랑이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1392~1897)에 이르기까지 호랑이에 대한 신앙과 외경심은 고분 미술에서는 수호신守護神으로, 불교 미술에서는 산신山神의 정령으로, 회화에서는 군자君子와 벽사辟邪의 상징으로 표출되었습니다. 한국 미술 속 호랑이는 사납기보다는 근엄한 모습이나 해학적인 미소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모습에는 덕德과 인仁을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과 낙천적이며 해학적인 한국인의 정서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인에게 호랑이는 신통력을 지닌 기백있는 영물靈物이고 해학적이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친구였습니다.

호자
백제
높이 26.5cm, 너비 26.0cm

백제(기원전 18~서기 660)의 도읍 부여의 나성터에서 발견된 호자입니다. 호자란, 호랑이 모양으로 만들어진 남성용 이동식 변기입니다. 호자는 원래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부터 남북조시대까지 주로 강남지역의 상류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물건입니다. 한나라때에는 왕이 호자를 변기로 사용하였는데 시중이 그것을 들고 따라다녔다는 서경잡기西京雜記의 기록이 있습니다. 전설에는 신선神仙이 호랑이의 입을 벌리게 하고 거기에 소변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러한 전설을 따라 남성용 변기를 새끼 호랑이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제의 토제 호자는 앞발을 세우고 오른손으로 호자를 들었을 때 입구가 높고 자신을 향하도록 되어있어, 더 사용하기 편하도록 제작되었습니다. 백제의 토제 호자는 세부 표현은 생략되었지만 백제식으로 변형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어, 중국제 수입품의 백제화를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중국과의 활발한 문물 교류를 통해 호자가 유입되었습니다. 이것은 백제의 도읍인 부여에서 출토된 것으로 백제의 왕경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물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토제 호자는 뒷다리를 굽히고 앞다리로 상체를 버티고 서서 입을 크게 벌린 채 고개를 좌측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백제의 호자는 중국의 것에 비해 세부가 생략적이면서도 백제식으로 변형된 형태여서 중국제 수입품의 백제화를 보여줍니다.

머리에서부터 등에는 둥근 손잡이를 붙여 들고 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백제의 토제 호자는 중국의 호자와는 달리 앞발을 세우고 오른손으로 호자를 들었을 때 입구가 높고 자신을 향하도록 되어있어, 더 사용하기 편하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얼굴에는 눈동자와 콧구멍을 점으로 찍고, 눈썹과 수염은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했습니다.

백호모사도
일제강점기
종이에 색, 155.0×330.1cm

고구려(기원전 37~서기 668)의 무덤, 진파리眞坡里 1호분에 그려져 있던 백호의 모사도입니다. 진파리 1호분은 현재 평양시에 있는 흙무지 돌방무덤입니다. 이 모사도는 당시 일본 도쿄미술학교 조교수였던 오바 쓰네키치(少場恒吉, 1878-1958)가 그린 것입니다. 고구려인은 진파리 1호분 무덤방 네 벽면에 회를 바르고, 동서남북 방향에 맞춰 각각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 벽화를 그렸습니다.

백호는 사신의 일원으로, 사방四方을 지키는 방위신方位神 중 하나입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중국에서 오행 사상에 의해 동서남북에 각각 별자리 7개씩 28수(28宿)를 할당되었고 사신이 배속됐습니다. 한대漢代(기원전 206~서기 220) 에는 사악한 것을 피하는 벽사辟邪의 기능과 풍수지리상의 방위신 역할이 더해졌습니다. 이러한 사신을 무덤에 그린 이유는 피장자의 공간을 신성시할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후한後漢(25~220) 시기 대표적인 학술사상서인 『풍속통의風俗通義』에서 호랑이가 귀신까지 잡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고와도 통합니다.

이 백호도는 날개가 달린 신령한 짐승(神獸)으로서의 백호를 묘사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가늘고 긴 몸체와 다리, S자로 유연하게 구부러진 목, 앞다리 옆에 화염처럼 묘사된 날개 등의 표현은 실제 호랑이라기보다는 이상화된 형상에 가깝습니다.

또한 백호 배경의 오색五色의 구름 속에 꽃송이가 흩날리는 신비로운 장면은 상서로운 기운에서 생명체가 화생하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백호의 표현이 매우 세련되고 유려하며, 배경에 빠르게 흐르는 기운과 흩날리는 꽃의 표현 형식을 통해볼 때, 이 고분은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십이지상
신라

이 토제 십이지상은 1988년 경주시 내남면 화곡리의 화장된 묘 주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화장묘는 화장 유골을 담은 항아리인 골호骨壺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한 석함으로 구성되었고, 십이지상은 석함 주변에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석함 뒤쪽인 북쪽에서 돼지상, 쥐상, 소상, 호랑이상이 발견되었고, 토끼상, 양상, 원숭이상, 닭상, 개상은 위치가 이탈되어 수습되었습니다. 석함의 남쪽 방향에 놓였던 용상, 뱀상, 말상은 공사중 망실되어 현재 총 9점만 남아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676~935)에는 삼국시대에 도교 사상과 함께 확산되었던 사신과 십이지의 개념이 고분 미술에 본격적으로 표현됩니다. 십이지란 땅을 지키는 신으로, 시공간을 12개로 나누어 12방위와 12시간의 개념에 12가지 동물, 쥐(子), 소(丑), 호랑이(寅), 토끼(卯), 용(辰), 뱀(巳), 말(午), 양(未), 원숭이(申), 닭(酉), 개(戌), 돼지(亥)를 결합시킨 것입니다. 무덤에 십이지를 장식하거나 부장한 이유는 무덤 안을 작은 우주로 만들며 십이지가 각 방위에서 사자死者의 영혼을 수호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십이지상은 모두 동물의 얼굴에 평복을 입은 사람의 몸의 형태로 얇은 환조의 소조상입니다. 머리와 몸체는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두 손은 가슴에 올리고 꿇어 앉은 자세입니다. 호랑이상은 귀가 짧고 송곳니를 두드러지게 표현해 호랑이의 특징을 표현했습니다.

산신
조선
종이에 색, 109.5×81.0cm

산의 왕, 즉 ‘산왕山王’으로 신앙되던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그린 산신도입니다. 구름과 먼 산을 배경으로 깊은 산 기슭,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든 산신과 동자, 앉아있는 호랑이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화엄경華嚴經』에는 불법을 외호하는 신들 중 하나로 주산신主山神이 있습니다. 이는 불교가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토착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산신은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佛法을 지키는 신으로 격상되었습니다. 그래서 18세기 중후반 이후로 각 마을의 동제당洞祭堂이나 산신각에 모셔졌던 산신도를 사찰의 전각에 봉안하게 되었습니다. 조선후기의 산신도는 산속을 배경으로 노인과 호랑이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노인이 산신이고 호랑이를 산신 옆에서 보좌하는 사자使者로 보기도 하지만, 호랑이 그 자체를 산신으로 보고 옆의 노인을 호랑이를 의인화한 산왕山王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산신은 18세기 신중도神衆圖에서 한 구성원으로, 어깨에 나뭇잎을 두르고 영지靈芝를 든 모습으로 먼저 그려지다가 19세기에 들어서 단독으로 동자를 대동하고 호랑이와 함께 있는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사찰내 산신각山神閣에 봉안되었습니다.

이 산신도는 파란 하늘에 그려진 장식적인 구름 표현, 골짜기나 소나무, 태점胎占이 그려진 바위 등 민화풍의 배경 묘사가 특징적입니다.

언덕 위에는 세 그루의 소나무를 그렸고, 소나무의 아래, 바위 위에는 산신이 탕건宕巾을 쓰고 깃이 달린 봉황 등이 장식된 붉은색 옷을 입었습니다. 어깨와 허리에는 나뭇잎을 두르고 있으며, 손에는 부채를 든 산신은 볼 부근까지 내려오는 긴 눈썹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수염이 범상치 않습니다.

산신 옆에는 동자가 두 개로 묶은 머리에 불자拂子를 들고 서있습니다. 호랑이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입을 벌리고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모습입니다.

용과 호랑이 그림을 짝으로 같이 걸었던 대형의 걸개 그림입니다. 그림의 상단에는 굵은 줄을 넣고 종이를 접어 붙여 줄로 고리를 만들어 옥외에 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정월 초에 나쁜 기운을 쫓고 복을 맞이하기 위해 궁궐과 관청의 문비門扉나 대청에 세화를 붙였는데, 그러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입니다.

호랑이
조선
종이에 먹, 221.5×218.0cm

호랑이 그림은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오다 문득 바위와 소나무를 돌아보며 포효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조선 호랑이 그림 중 가장 클 뿐만 아니라 거침없는 용필과 용묵을 보여주는 용호도로서 17세기 전통회화와 19세기 민화를 연결해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먹과 백색의 세필로 털가죽을 꼼꼼히 묘사하고, 바위와 소나무는 굵고도 속도감 있는 묵필 위로 옅은 채색을 더했습니다.

화면 상단에 드리워진 꼼꼼한 소나무 가지와, 솔방울의 표현, 넝쿨의 필치 등에서 화가의 숙련된 솜씨가 엿보입니다. 솔가지 끝에 앉은 한 쌍의 까치 모티프는 조선에서 특히 애호되었던 호작도의 특색입니다.


조선
비단에 먹과 옅은 색, 73.0×95.5cm

용은 비와 구름을 가져오는 전설속의 동물로, 용 그림은 초자연적이고 강력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져 세화歲畫의 소재로 사랑받았습니다. 그림 속의 용은 먹구름을 뚫고 용트림을 하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인데, 사람의 얼굴을 닮은 용의 호탕한 표정이나, 묵중하고도 사실적인 먹구름의 표현, 그리고 웅장한 구성에서는 조선시대의 여느 용 그림과도 구분되는 격조와 솜씨가 느껴집니다.

오른쪽 뒷다리가 아직 파도가 넘실대는 물에 살짝 잠겨 있어 막 물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순간을 표현했습니다.

호랑이
조선
종이에 먹, 97.6×55.5cm

조선후기에 그려진 호랑이 그림 <맹호도猛虎圖>입니다. 이 그림 속에는 소리없이 지나가던 호랑이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도로 산에서 걸어 나오는 호랑이 그림은 중국 북송 때 호랑이 그림으로 유명했던 조막착趙邈齪에 의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중기 이후에 감상을 위한 이러한 맹호도가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심사정沈師正의 호인 “현재玄齋” 낙관이 있으나, 화제에 쓰여진 갑오甲午의 연도가 1714년 혹은 1774년으로 심사정의 활동연대와 맞지 않아 작자미상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그림에 남아있는 화제와 낙관은 후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용맹스럽게 이를 가니 감히 맞설 수 있겠는가? 獰猛磨牙孰敢逢
동해의 늙은 황공은 시름이 이니 愁生東海老黃公
요즈음 드세게 횡포스런 자들 于今跋扈橫行者
이 짐승과 똑같은 인간인 줄 누가 알리오 誰識人中此類同

그림 속 호랑이는 가는 붓을 반복하여 동세를 따라 움직이는 털을 한올 한올 먹으로 그려내었습니다. 하나하나 셀 수 있을 듯이 세밀하게 그려진 털은 마치 손을 대면 보송보송한 털이 만져질 듯 생생합니다. 이러한 치밀한 묘사는 호랑이의 존재감과 관객의 몰입감을 높여줍니다. 빽빽한 털의 집약체로 묘사된 이 호랑이의 존재감은 윤곽선으로 형상을 그려낸 호랑이 그림과는 차원이 다른, 사실적이고 진중한 무게감을 보여줍니다.

종이에 먹으로 그려진 호랑이는 걸어 나오며 고개를 돌려 방향을 틀면서 머리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노려보는 위협적인 동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생생합니다. 위로 솟구친 듯한 빳빳한 수염, 패기 넘치는 눈, 부드러운 동작 속에 서린 위엄은 백수百獸의 왕이자 신령스런 동물로 신성시되었던 호랑이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수작입니다.

『주역』에서는 호랑이와 표범이 가을의 안개 속에 몸을 감추고 털갈이를 한 후에, 빛나고 융성한 모습으로 일변하는 것에 대인군자大人君子가 면목을 일신하여 뛰어나고 훌륭한 면모를 이룬 것을 비유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신처에서 나오는 호랑이는 그러한 “훌륭한 면모를 이룬 군자”, 그리고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숨은 선비가 세상에 나오는 출세出世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18세기에 김홍도가 그린 2점의 호랑이 그림입니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감상용 호랑이 그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로, 각종의 그림에 뛰어났던 단원檀園 김홍도의 솜씨를 잘 확인할 수 있는 가작佳作입니다. 이 그림들은 호랑이가 산에서 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출산호出山虎’의 유형으로, 이는 백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주어 위정자로 하여금 엄정하고 바른 정치를 권장하는 의미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용맹한 호랑이>와 함께, 김홍도의 이 호랑이 그림은 조선사람들이 생각했던 호랑이의 위엄과 미덕을 화원 양식으로 정교하고 생생하게 형상화한 조선 호랑이 그림의 이상적인 전형을 보여줍니다.

소나무 아래 호랑이
조선 , 김홍도·임희지
비단에 먹과 옅은 색, 90.3×43.8cm

이 그림은 소나무 아래 호랑이를 그렸는데 거친 등걸을 호방하게 담아내 소나무 그림으로서도 매우 훌륭한 필치를 보여줍니다.

소나무 옆에는 “표암이 소나무를 그리다(豹菴.松).”라는 글귀가 있어 그의 스승으로 알려진 표암 강세황姜世晃(1713~1791)과 합작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소나무를 강세황의 화풍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그림의 완성도와 격조는 매우 높은데, 특히 세필로 꼼꼼하게 묘사한 털 표현, 그리고 호랑이와 소나무의 비례미는 탁월합니다. 육중한 괴량감과 민첩하고 날쌔 보이는 호랑이의 솟구치는 기와 세가 쩌렁쩌렁하고, 문인사대부 계층의 취향이 반영된 호랑이 걸작품입니다.

대나무 아래 호랑이
조선 , 김홍도
비단에 먹과 옅은 색, 91.0×34.0cm

김홍도의 이 그림은 대나무 아래에서 꼬리와 등을 세워 고개를 틀고 있는 호랑이의 자태를 섬세하게 잡아낸 걸작입니다.

그림 오른쪽 위에는 강동江東 현감과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지냈으며 서예를 잘했던 황기천黃基天(1760~1821)의 제발이 남아 있습니다.

「世人罕畵虎憂狗之似. 此幅却令眞虎自愧. 朝鮮 西胡散人, 畵虎 水月翁 畵竹, 菱山道人 評.」
“세상 사람들이 간혹 호랑이를 그릴 때 개처럼 비슷하게 될까 우려한다. 이 그림은 도리어 진짜 호랑이가 자괴감을 갖게 한다. 조선의 서호산인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리고, 수월옹 임희지가 대나무를 그렸으며, 능산도인 황기천이 평을 쓴다.”

임희지는 대나무를 그리는 솜씨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 못지 않다는 평을 받았던 중인 출신 문인화가였습니다. 대나무는 호방하고 과감한 필치의 묵으로 그려졌고 호랑이는 터럭 한 올 한 올이 정교하게 묘사되었습니다.

호랑이의 흰 눈썹과 수염은 한껏 빳빳하게 서 있는데,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는 호랑이의 표정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을 줍니다. 김홍도가 산수, 풍속, 도석인물道釋人物 뿐만 아니라 화조, 영모 그림에도 두루 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까치 호랑이
조선
종이에 색, 96.8×56.9cm

조선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그려진 까치호랑이 민화입니다. 호랑이는 고개를 세우고 앉아 포효하고 있으며, 세 마리의 새끼를 돌보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화면의 모든 요소는 윤곽선을 따라 가위로 오려붙인 듯한 느낌을 주며, 호피와 삼신산, 소나무 줄기의 비늘 등의 패턴화된 묘사에서 주술적인 부적과 같은 분위기도 느껴집니다. 이 그림 속 호랑이와 까치에서는 마스코트나 아이콘이 주는 전형적이면서 단순하고 강렬한 시각효과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기원과 주술성이 짙게 담긴 정초 부적과 같은 분위기의 이 작품은 완전히 민간화된 조선 까치호랑이의 민화적인 변용과 확장의 사례를 보여줍니다.

그림 오른쪽에 쓰여진 “갑술원단甲戌元旦 신재현사申在鉉寫.”라는 글씨가 있어 설날 아침에 신재현이 일종의 세화歲畵로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소리 천리 밖에 들리고, 높은 벼랑 포효는 바위를 파열하네(風聲聞於千里 吼蒼崖而石裂).”라는 묵서와,

“호랑이 포효하는 남산에 까치들 모두 모이네(虎嘯南山郡鵲都會).”라고 쓴 묵서는 그림 속 포효하는 모습의 호랑이와 까치를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호랑이의 파괴력과 권세를 비유하는 듯한 이 글귀는 맹수로서의 호랑이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또 그림의 다른 한편에 불쑥 끼어든 삼산불로초三山不老草와

매미의 모티프는 불로장생不老長生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 호랑이가 삼신산에 사는 신령스러운 짐승임을 드러냅니다.

어미 등에 올라탄 새끼호랑이 옆에 쓰여진 ‘슬하손膝下孫’이라는 글자에서는 새끼를 돌보는 호랑이를 통해 인수仁獸로서의 자애로움을 강조하면서 효성있는 후손과 많은 아들(孝孫多男)을 기원하는 바램이 엿보입니다.

호랑이와 십이지를 그린 병풍
조선
종이에 먹과 색, 43.6×25.8cm

〈십이지신도〉와 〈까치호랑이〉 그림이 양면에 그려진 12폭 병풍입니다. 까치호랑이는 조선시대 호랑이 그림 중 가장 빈번하게 그려졌던 주제로 현재는 민화 형식으로 제작된 것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민중의식이 성장하면서 <맹호도>와 같은 사대부층의 권위적이고 격식을 갖춘 도상을 민간 화가들이 변형시키면서 까치호랑이 그림은 진솔하고도 재미있는 민화의 대표적인 유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선의 까치호랑이 그림은 민화民畫적인 변용과 의미의 확장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간 양식으로 확산된 까치호랑이 그림은 다양하게 변화된 화풍을 보였습니다.

이 병풍의 호랑이는 까치호랑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호랑이의 모습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까치를 보려고 목을 쳐들고 있는 호랑이,

뒤를 돌아보거나 자세를 반대로 바꾼 호랑이, 정면을 보는 호랑이가 있습니다. 또한 호랑이의 털무늬는 줄무늬, 표범과 같은 반점무늬, 이 두 가지가 혼재된 무늬 등 다양합니다.

특히 3폭은 까치가 없고 담배 피는 호랑이 앞에 두 마리의 토끼가 그려진 것이 눈에 띕니다. 기존의 산속 시냇가의 배경이 생략되고 호랑이, 소나무, 까치로 화면 구성이 단순해지면서 담배 피는 모습의 호랑이 형상처럼 의인화되는 등 익살스러운 호랑이로 변모합니다.

반대편에 그려진 십이지는 동물의 얼굴에 사람의 몸의 형태로 주름이 풍성한 옷을 입고 저마다 수호용 지물持物을 들고 있습니다. 제3폭에 그려진 호랑이는 한 손과 한 발을 들고 공격적인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십이지 중의 호랑이(寅)는 동북동 방향과 새벽 3-5시를 가리킵니다.

십이지는 땅을 지키는 신으로, 시공간을 12개로 나누어 12방위와 12시간의 개념에 12가지 동물, 쥐(子), 소(丑), 호랑이(寅), 토끼(卯), 용(辰), 뱀(巳), 말(午), 양(未), 원숭이(申), 닭(酉), 개(戌), 돼지(亥)를 결합시킨 것입니다.

권응수 초상
조선
비단에 색, 163.0×88.0cm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인 권응수權應銖(1546~1608) 장군을 그린 초상화로, 보물 제668호입니다. 권응수는 선조 17년(1584)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무찌르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고, 그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봉해졌습니다. 권응수 장군의 모습을 담은 영정은 선조 임금이 하사한 것으로 선무공신에 봉해질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초상화는 17세기 공신 초상화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고, 가슴에는 무관을 상징하는 호랑이 흉배를 부착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흉배는 조선시대 왕족과 문무관文武官이 상복常服의 가슴과 등 부분에 달아, 품계品階를 드러내던 표시입니다. 기린麒麟, 백택白澤, 해치獬豸, 공작, 학, 호표虎豹 등을 수놓아 품계를 표시하고 의복을 장식했습니다. 무관의 흉배는 18세기 영조 대까지는 1, 2품은 호표, 3품은 웅비熊羆였다가 19세기 고종 대에는 당상관堂上官은 쌍 호랑이(雙虎), 당하관堂下官은 한 마리의 호랑이(單虎)를 사용했습니다. 호랑이의 용맹함에 기인하여, 무관武官의 표시로 관복의 흉배에 호랑이를 수놓았던 것입니다.

호랑이무늬 가마덮개
일제강점기
모, 169.3×118.5cm

신부가 타고 가는 가마의 지붕을 덮어 가릴 수 있게 만든 혼례용품입니다. 혼례식을 마치고 신방新房을 치른 후 시가媤家로 돌아가는 길에 신부는 화려하게 꾸민 사인교四人轎를 탔습니다. 사인교의 둘레에는 흰 천으로 휘장을 두르고 지붕에는 호랑이의 가죽을 덮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용맹스러운 호랑이가 신부에게 해를 끼치는 잡귀를 쫓아내고 액운을 물리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무차별적인 포획으로 인해 호랑이가 사라지면서 가죽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호랑이 가죽무늬가 있는 모직물 덮개를 대신 사용했습니다.

이 호랑이 무늬 가마덮개의 겉면은 홍색 모사毛絲의 씨실과 흰색 면사綿絲의 날실을 사용하여 평직平織으로 직조됐습니다. 바닥면은 흑색에 가까운 진한 밤색 모사의 씨실과 고동색 면사의 날실을 사용하여 평직으로 만들었고 테두리는 별도의 장식 띠로 마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직물 생산은 일찍이 북방 유목 민족과의 교류를 통해 발달했으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주로 모깔개가 많이 만들어져서, 통신사를 통해 호피虎皮무늬나 홍색의 두꺼운 모깔개가 일본으로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범과 모란
박생광, 종이에 먹과 색, 250.0×140.0cm

민화 호작도에 보이는 호랑이와 새라는 전통적인 테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박생광의 <범과 모란>입니다. 박생광은 1970년대 말부터 민화나 불화, 무속화에 나타난 우리 고유의 소재들을 단청과 색동, 탱화의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여 한국 채색화의 현대화를 이끈 작가입니다. 원색으로 표현한 전통 회화의 길상적 도상들이 화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왼쪽에는 앞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두 마리의 새를 향해 고개를 돌린 호랑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청색의 모란과 호랑이 머리 위로 노랑, 빨강의 색면으로 구획된 까치의 모습은 전통 민화를 넘어서는 색채의 변주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오른쪽에는 어미와 새끼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모두 민화의 유형인 호작도나, 또 어미 호랑이와 새끼 호랑이를 그린 유호도乳虎圖에서 등장하는 호랑이의 전형적인 자세로 표현되었습니다. 화면 하단에는 장식화적으로 단순화된 괴석의 형태가 보이고

구름에 가린 붉은 해와 초록의 초승달이 화면 상단의 좌우에 그려져 있습니다. 해와 달이 함께 있는 것은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작가는 초록의 초승달이라는 형태로 궁중장식화의 전통을 변용했습니다.

원색의 양식화된 도상들이 화면 가득 중첩되었지만 작가 특유의 붉은 윤곽선들이 형태와 색면을 정확히 구획하면서 역동적인 화면을 창출해 내었습니다. 화면 곳곳에 찍은 묵점들은 원색의 대비 속에서 통일된 리듬을 주고, 자연스럽게 호랑이의 검은 줄무늬가 주변으로 확산되는 효과를 만들면서 화면 전체에 거대한 호랑이의 기운이 퍼져나가는 느낌을 자아내었습니다. 이 그림은 전통적인 호작도의 소재를 민화, 불화, 궁중장식화의 장식적 기법으로 재해석하여 화려한 색채와 역동적인 화면의 현대작품으로 변주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스토리

특별전 "동아시아의 호랑이 미술", 가상현실(VR)로 둘러보기

2018 평창동계올림픽 기념 특별전
“동아시아의 호랑이 미술”

2018.1.26.-3.18.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총괄│민병찬
기획│최선주
진행│김혜원, 박경은
보조│정미연, 이정은, 신영호, 김영미, 장성욱, 강건우, 김민정, 마대진, 최원실, 정희재, 이정은
디자인│전배호, 최훈이, 한경섭, 손호연
홍보│이현주, 송재영
보존처리 및 환경│장연희, 박승원, 박미선, 이승은, 곽홍인, 박영만, 박지혜, 노현숙, 황진영
교육│전인지, 원금옥, 박경미
국제교류│김연신
영상│박종우

공동주최│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중국 국가박물관
협력│국립박물관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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