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5. - 2015. 4. 11.

근대회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대한제국에서 1950년대까지

근대회화 : 대한제국에서 1950년대까지
대한제국기(1897-1910)에서 1950년대까지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롭게 성립된 개념과 제도를 통해 현재 한국화단의 기틀을 마련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급변하는 근대회화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대한제국 시기와 관련된 기록화, 어용화사가 그린 초상화, 그리고 당시에 발행된 우표와 교과서 등에서는 황제국의 위엄과 황실을 통해 받아들인 새로운 문물과 기술의 도입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전통서화書畵를 계승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여러 근대 회화교육기관에서는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장우성, 김기창, 이응로 등 1920년 이후 한국근대화단의 성장을 주도하는 대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서화 진흥 분위기는 서화를 배우려는 취미인들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으며 대중문화 속의 미술이라는 새로운 시대 인식을 형성하게 하였다. 한편 해외에서 유학한 작가들과 국내작가들에 의해 형성된 서양화단은 다양한 미술단체의 설립과 전람회 제도 등을 통해 빠른 성장을 이루게 된다. 이밖에 당시의 대표 서화가들을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고, 김활란을 비롯한 이화여대 관련인들을 주축으로 발족한 금란묵회의 활동을 통해서는 서화의 창작과 전시는 물론 감상과 같은 문인문화文人文化의 의고적 행태가 해방 이후,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었던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한국 근대화단의 초석을 마련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근대회화들을 통해 전통적 삶의 양식과 인식 체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근대인들이 추구했던 시대의식을 조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회화의 태동 : 대한제국
대한제국기(1897-1910)는 청과 일본, 서양 제국주의의 압력 속에서 자주독립과 근대화라는 이중과제를 모색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정치, 사회적 정황은 회화에도 잘 드러난다. ‘근대회화의 태동 : 대한제국’에 전시되는 <명성황후 발인반차도>는 경운궁에서 시작된 행렬의 노선과 행사에 사용된 각종 의물 등을 통해 황제국의 위엄을 드러내었던 명성황후 국장의 과정을 기록한 그림이다. 구한말 장중했던 어가행렬의 모습을 묘사한 <대한제국 동가도>에는 조선의 궁중 기록화와 달리 왕이 등장하고 서양화법이 활용된 육필화로 완성되는 등 새로운 형식의 어가행렬도의 모습이 나타난다. 또한 <군국기무소회의도>는 갑오개혁을 주도하였던 초정부적 기구인 군국기무소의 회의장면을 기록하고 있다.한편, 이 시기는 새로운 문물과 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황실은 시각문화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사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사진을 보고 그 윤곽과 음영에 의거해 그리는 새로운 화법으로 정밀하게 그린 어용화사의 초상화에서는 사진술과 서양화기법의 도입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우표와 교과서 도안은 근대적 시각문화의 형성과 함께 일상적 삶의 개량화에 일조하였던 인쇄미술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바로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문화와 예술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탄생시키려는 대한제국의 황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895년 10월 8일 서거한 명성황후의 장례는 약 2년 후인 1897년 에 치러졌다. 이 장례식의 발인행렬을 그린 그림이 <명성황후 발인반차도>이다. 이화여대박물관 소장의 <명성황후 발인반차도>에는 종이를 덧붙여 내용을 수정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며,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의 <발인반차도>에는 이러한 수정사항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행사시의 착오를 막기 위해 여러 차비관들의 검토를 거쳐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명성황후 국장은 대한제국 선포 직후 황제국으로서 위용을 드러내는 행사였으며, <명성황후 발인반차도>는 이러한 준비과정과 고민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명성황후 발인반차도> 부분 : 신련神輦·봉여鳳輿
고종은 광무원년 정유(1897) 9월 17일 황제즉위식을 갖고 왕비를 황후로 책봉하고 나서 ‘광무원년 정유 9월 30일’ 모든 의물을 황색으로 변경할 것을 지시했다. 발인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내에 황후의 예를 갖추기 위해 봉여를 비롯하여 새로운 의물들이 제작되었는데, 이때 새롭게 제작된 의물들은 청대 건륭24년(1759)에 완성된 『황조예기도식皇朝禮器圖式』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모본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명성황후 발인반차도> 부분 : 대여大輿

대여는 국상 때 왕과 왕후의 관인 재궁梓宮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상여이다. 수십 명이 메고 가는 가장 웅장한 가마이며, 대여 위에는 지휘자가 서서 인도하였다.

<대한제국 동가도>는 고종高宗(1852-1919)의 동가행렬을 그린 기록화이다. 권두卷頭에 ‘대한제국동가도 석지사大韓帝國動駕圖 石芝寫’라는 표제가 있어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채용신蔡龍臣(1850-1941)의 작품으로 전해지나, 필치의 분방함 뿐 아니라 행렬 순서, 문자 정보, 장첩 순서가 정확하지 않아 작품의 제작 연대와 작가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다. 그러나 그림속의 문자 기록과 화법의 분석을 통해 이 행사는 삼군부의 재설이 공식화된 1868년 3월 23일에서 7월 2일 사이의 군대열무 장면이며, 이 그림은 1897년에서 1930년대 사이에 채용신의 진작을 토대로 재탄생된 후대의 모사본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존의 의궤와는 달리 왕이 등장하고, 인각 채색법이 아닌 서양화법이 활용된 육필화로 장중하고 화려한 고종의 동가행렬을 그린 흥미로운 작품이다.

<대한제국 동가도> 부분 : 왕의 등장
이 그림에는 기존의 궁중기록화와는 달리 왕이 등장하는데, 두루마리 중반 이후 고종이 네 번 묘사되어 있다. 겸내취와 내관의 인도를 받으며 백마 탄 군복차림의 첫 번째 고종이 나타나고, 갑자기 화면이 분리되면서 곤룡포에 익선관을 갖춘 두 번째 고종이 의마醫馬・어숙마御塾馬와 동행하여 등장하며, 당상관 무리와 함께 가마를 탄 고종이 두 번 연속 출현한다

최고 정책 결정 기관으로서 갑오경장을 추진했던 군국기무소의 회의 장면을 화원이었던 조석진이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우측상단에는 “갑오칠월이십육일甲午七月二十六日 설군국기무소說軍國機務所”라고 쓰여, 1894년(고종 31) 7월 27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하였던 군국기무소의 설립을 기념하여 남긴 그림으로 보인다. 화면의 하단에는 영상총재領相總裁 김홍집金弘集, 회의원會議員인 박정양朴定陽, 김윤식金允植, 유길준兪吉濬, 민영달閔泳達, 김종한金宗漢, 조희연趙羲淵, 김가진金嘉鎭, 이윤용李允用, 안경수安駉壽, 정경원鄭敬源, 이원긍李源兢, 권영진權濚鎭, 김학우金鶴羽, 김하영金夏榮, 박준양朴濬陽, 이응익李應翼, 서상집徐相集 등 발족 당시의 회원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문장인 이화문양과 태극문양을 주 도안으로 하고 있으나 우표 도안에 처음 이화문양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화우표’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우표를 처음 도안한 사람은 구한말 서화가였던 지창한池昌翰(1851‒1921)으로 알려져 있으며, 독일에서 주문한 인쇄기로 국내 기술진에 의해 인쇄된 우리나라 최초의 고급 인쇄물이다.

근대회화교육의 탄생 : 서화미술회, 서화협회
신문물이 유입되는 개화기에는 전통서화書畵를 계승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1911년의 경성서화미술원, 1912년의 서화미술회, 1915년에는 서화연구회, 1918년에는 서화협회가 창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근대식 미술교육을 주도한 것은 1912년 6월 1일에 설립된 서화미술회이다. 서화미술회의 전신은 윤영기의 주도하에 설립된 경성서화미술원으로 이는 ‘청년화가’를 양성하는 강습소 기능 중심의 서화미술회로 재설립된다. 교수진은 조석진과 안중식을 중심으로 강진희, 정대유, 김응원, 강필주, 이도영 등이었다. 중국의 화보畵譜와 교수진이 제작한 체본體本의 임모臨模를 통해 전통 화법을 교육하였으나 안중식의 타계에 영향을 받아 1919년 해체된다. 서화미술회를 통해 촉진된 서화 진흥 분위기는 후진양성과 함께 서화를 배우려는 취미인들을 위한 강습소 설립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1918년 6월 16일, 조석진, 안중식, 김규진, 오세창, 고희동 등을 포함한 13인의 대표 서화가들은 대중문화 속의 미술이라는 새로운 시대 인식에 입각하여 한국 최초의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를 발족하였다. 서화협회는 미술 문화의 근대화와 활성화를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시도하였으나 1936년 제15회 서화협회전을 마지막으로 그 활동을 중지하였다.이러한 여러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의 영향으로 서화미술회에서는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등이, 서화협회의 신인공모전을 통해서는 장우성, 김기창, 이응로 등의 대가들이 배출되어 1920년 이후 한국근대화단의 성장을 주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도영은 안중식의 문하생으로 서화미술회에서 조교급으로 일했으며 1911년에 조선미술회 회원, 1918년에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이 작품은 안중식의 신추풍미도와 같은 기명절지도이지만 구멍 뚫린 가야토기, 뿔잔 등 전통적인 기물들을 함께 배치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화면 위로 옥당의 맑은 기품玉堂淸品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도영이 그렸음을 적어 넣었다.

玉堂淸品
貫齋李道榮作
옥당의 맑은 기품 관재
이도영이 그리다.

묵란화墨蘭畵에 뛰어났던 김응원이 수묵이 아닌 채색으로 그린 보기 드문 작품이다. 청록색의 난초잎과 붉은 꽃이 수묵의 바위와 조화를 이루며 고고한 기품을 드러내고 있다. 제화시題畵詩를 통해 맑은 선비의 기상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傍石疎花秀 臨風細葉長
靈均淸夢遠 遺佩滿沅湘
小湖金應元
돌 옆이라 성긴 꽃이 빼어나고 바람 맞으니 가는 잎이 더욱 기네
영균(굴원)의 맑은 꿈은 아스라한데
남긴 자취 원상(소상강)에 가득하네
소호 김응원

근대 동양화단의 발전 : 새로움의 모색
19세기 후반 이후 유학 및 해외 유람을 경험한 지식인들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조선에 외국의 문물과 화풍이 도입되며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황철과 지운영은 각각 상하이와 고베에서 사진술을 도입해 직접 사진관을 운영하며, 사진가인 동시에 서화가로서 활동하였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또한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였는데, 일찍이 유화작업을 하였지만 1920년대 중후반부터 동양화로 전향하여 전통양식에 서양화 기법을 가미한 새로운 면모를 드러냈다.1920년대에 이르러 식민지 조선의 미술을 제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총독부가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하면서 근대미술의 형성과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전통 수묵채색화는 ‘동양화’라는 이름으로 개조되어 전람회의 창작미술로 재탄생되었으며, 수묵산수화, 채색인물·화조 분야로 나뉘었다. 수묵산수화는 안중식과 조석진을 중심으로 서화미술회를 통해 배출된 화가들이 전통양식을 전승하였으나, 결국 신미술 경향에 자극을 받아 개량화에 앞장섰다. 탈속적인 군자풍 산수화에서 벗어나 일상적이며 세속적인 경관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상범은 점차 향토색이 짙은 경물을 그리면서 한국적 서정미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였다.한편 채색인물화와 화조화는 김은호를 비롯해 그 제자들이 새로운 화풍을 주도하였다. 일본에서 유학한 김은호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화풍을 발휘하였으며,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는 세밀하고 섬세한 작업을 하면서도 일본화의 영향에서 벗어난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였다.

지운영은 조선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문인화가로 1882년과 1883년 일본에서 사진술을 도입하여 사진가로 활동하였으며, 고종어진을 촬영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은 소동파가 적벽에서 노니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적벽부’는 문인들이 애호했던 소재로 조선시대에 즐겨 그려졌다. 지운영의 이 작품은 전면에 절벽을 부각시킨 파격적인 구도가 특히 인상적이다.

東坡先生赤壁遊圖
是歲卽蘇子赤壁遊之十四週壬戌也
絶代之下 感於奇遇 特畵此圖
以寓追慕風韻之意焉
七十一翁 白蓮 池運英
동파선생적벽유도
이 해는 소동파가 적벽에서 노닐었던 14주년 되는 임술년(1922)이다.
시대가 한참 뒤 기이한 우연에 느낌이 일어 이 그림을 특별히 그려서
소동파의 운치를 추모하는 뜻을 부친다.
71세옹 백련 지운영
여기에 기록된 14주년은 840년을 말한다. 육십갑자六十甲子에
의거해 1주년을 60년으로 셈한다.

김은호는 산수와 화조, 영모를 많이 그렸는데, 특히 세밀하고 정밀한 채색화를 잘 그렸다. 작품 화면 중앙에 잎이 성근 가을 벚나무 가지 위에 새가 한 마리 앉아있고, 그 뒤에 낮은 몇 줄기의 대나무 가지가 배경을 이룬다. 이러한 벌레 먹은 나뭇잎을 세밀히 묘사하거나 박제한 새를 꼼꼼히 모사한 듯 한 사생풍 그림은 일본의 색채사생화를 연상케 한다. 화면 좌측 하단에 이당사以堂寫라는 관서款書와 김은호인金殷鎬印의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있다.

이상범의 1958년 작품으로 우월 김활란의 60세를 기념하여 그린 그림이다. 개천가 언덕 위 숲속에 기와집이 있는 풍경으로, 언덕 위의 꽃들이 화사한 봄기운을 표현하고 있다. 담묵과 농묵의 조화가 세련되고 개성있는 필치가 돋보인다. 화면 우측에 ‘梨園佳滿高堂 戊戌春爲祝又月先生六十壽之慶 靑田畵 배꽃 동산의 아름다운 기운이 높은 집에 가득하네. 무술년(1958) 봄. 우월 선생의 60세를 축하하며 청전이 그리다’라는 제발과 낙관이 있다. 이원梨園은 본래 장악원掌樂院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이화여자대학교를 가리킨다.

문인문화의 근대적 향유 : 금란묵회
금란묵회는 서울 환도 이후, 1953년경 김활란과 이정애를 중심으로 하는 서화동호회로서 정식 발족되었다. ‘단단하기가 쇠와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 향기와 같은 사귐’이라는 의미의 ‘금란지교金蘭之交’에서 이름을 정했다. 손재형, 김윤중, 이상범, 김용진, 김은호, 이병직, 황성하 등 근대기 활발했던 서화가들을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고, 회원으로는 김활란을 비롯해 이화여대와 관련된 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에 의하면, 1960년대 후반까지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매년 회원전을 열었다. 금란묵회는 여항문인에 의해 조선 후기부터 이어온 탈속적 아회雅會, 그리고 근대기로 이어졌던 다양한 규모의 서화창작모임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화여대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당대 서화골동 수장가로 유명한 묵회의 구성원들을 참고해볼 때, 서화의 창작과 전시는 물론 감상과 같은 문인문화의 의고적 행태가 해방 이후,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었던 예라는 점에서 금란묵회의 미술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서양화단의 형성
한국 근대 서양화단은 1915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고희동을 필두로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온 유학생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학한 화가들의 귀국과 다양한 미술단체의 설립, 전람회 제도 등을 통해 작가군이 두터워지면서 서양화단은 빠른 성장을 이루게 된다. 이 장에서는 근대기 서양화단의 주요 아카데미즘 작가들의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적 역할을 한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인물화에서는 개인의 자의식을 반영한 주제가 중점적으로 다뤄지며, 새로운 문화의 상징물로 인식된 서구식 가구와 의복, 책, 유화도구 등이 근대 지식인의 삶을 대변하는 주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또한 흔히 접할 수 있는 주변의 풍경을 관찰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상들을 화폭에 옮긴 행위들은 근대적 창작활동의 일면을 보여준다. 각종 기물, 꽃, 과일 등이 그려진 정물화에서는 사실성에 근거한 표현기법의 발전과 더불어 작가의식을 표현하는 상징적 소재들이 점차 부각되며, 한국의 고유한 정서를 담고자 했던 시도를 읽을 수 있다. 한편 입체주의와 추상미술 같은 전위적인 경향을 실험적으로 도입하여 한국 서양화단의 전기를 마련했던 작품들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한국 서양화단의 기틀을 다지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작품들을 통해 전통적 삶의 양식과 인식 체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서양화가들이 추구했던 시대의식을 조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1923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이종우는 1925년 파리로 유학을 떠나 겔랑 연구소와 슈하이에프의 연구실에서 사실주의 기법을 심화시켰다. 당시 파리는 실험적인 전위미술의 경향이 주된 흐름이었으나 이종우는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 화풍을 연구하여 고전적인 조형양식을 작품에 담아냈다. 한국 근대화단이 일본을 통해 서양화를 받아들였던 상황에서 이종우는 서양 회화의 본고장에서 직접 수학하여 서양화 도입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는다. <독서하는 친구>는 1926년 파리에 머무를 당시 한국인 유학생을 그린 작품으로, 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지식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인물의 모습을 이상화하지 않고 얼굴의 표정, 근육, 주름 등을 명확하게 표현하여 실제 모습의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박영선은 1955년 프랑스로 건너가 4년간 유학하면서, 새로운 미술사조의 동향과 조형 양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용하여 발전시켰다. <la femme à paris>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파리에 체류할 당시 그린 것이다. 입체주의적인 화면분할과 평면적인 오브제의 표현, 그리고 청회색조와 홍색조의 색채표현은 파리시기 작품의 주요 특징이다. 그는 실내의 여인좌상이나 누드여인상을 주제로 한 다양한 연작들을 남겼으며 대개 갸름한 용모에 코가 오똑한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여인의 모습을 이상적인 미의 전형으로 표현하였다.

도상봉의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물화는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영역이다.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도자기, 꽃, 과일 등을 소재로 한 정물화를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제재들이 품고 있는 보편적인 이상미를 발견하고자 했다. 회갈색과 짙은 흙갈색조의 차분한 색감이 특징인 <궤와 병>은 조선말기의 목제 궤와 백자 팔각병을 모티브로 하여 회고적인 정취를 느끼게 하며, 밝고 어두운 색조의 대비와 두 사물의 조화로운 배치가 인상적이다.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을 이끈 선구자로 일본 유학시절부터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1934 및 백만회1936와 같은 혁신적인 그룹을 조직하고 새로운 미술운동에 심취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서는 산, 강, 달, 학, 매화, 달항아리 등 자연과 전통의 소재를 채택하여 한국적 정서와 미감을 절제된 조형언어로 더욱 밀도있게 표현하였다. <무제>는 파리 유학시기에 속하는 작품으로 광복 이후부터 지속되어 온 한국적 모티브에 대한 작가적 탐닉이 심화된 작품이다.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운 푸른색은 당시에 제작된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두드러지며, 둥근 달과 산 그리고 그 위를 날아가는 새의 형상은 형태를 제거하지 않은 구상이면서도 대상의 본질적인 요소를 단순한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양식화함으로써 추상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제공: 스토리

기획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총괄 장남원
전시자문 오진경 홍선표
전시진행 김주연 신일지 장 미 장효진 황이숙

참여: 모든 표현 수단
일부 스토리는 독립적인 제3자가 작성한 것으로 아래의 콘텐츠 제공 기관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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