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곡리 구석기유적

전곡선사박물관

한탄강 변에 있는 전곡리 구석기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구석기시대 문화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구석기문화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이며 세계 구석기 고고학에 큰 영향을 준 유적이다. 전곡리 남서편의 현무암 대지 약 80만㎡가 국가사적 제268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경기도는 전곡리 선사유적의 영구적인 보존과 적극적인 활용을 위하여 전곡선사박물관을 2011년 4월 25일에 개관하였다.  

전곡리의 주먹도끼 
전곡리의 주먹도끼주먹도끼는 큼직한 돌을 다듬어서 끝이 뾰족하거나 타원형으로 날을 만든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대형석기이다. 주먹도끼라는 이름은 그 모양이 지금 우리가 나무를 쪼개는 데 쓰는 쇠도끼와 비슷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하지만, 주먹도끼는 나무 다듬는 데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짐승의 가죽을 벗겨 내고, 고기를 발라내고, 뼈를 부수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 사람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만능도구였다. 그래서 주먹도끼를 흔히“구석기시대의 맥가이버칼”이라고 부른다. 1978년 전곡리에서 주먹도끼가 처음 발견되기 전까지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선사고고학자였던 모비우스 교수(H. Movius)는 인도의 동쪽 즉 동아시아에는 양면가공을 하여 잘 만든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인 한반도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들이 발굴되면서 모비우스의 학설은 큰 도전을 받게 되었다. 세계 구석기시대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된 것이 바로 전곡리에서 출토된 주먹도끼 들이다. 이 주먹도끼들이 발견된 이후에 아슐리안 석기공작을 재평가 하는 수많은 논문이 나타났으며 현재에도 동서양의 아슐리안과 아슐리안형 석기공작에 대해서 논쟁이 진행 중이다. 아슐리안을 유럽·아프리카의 주먹도끼 석기공작을 지칭하는 용어로 정의한다면 전곡리안 (Chongoknian)은 동아시아 지역의 비교적 원시적인 모습을 한 주먹도끼공작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용어를 재설정 했음에도 불구하고‘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납작하고 자르는 날이 긴 전형적인 아술리안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던가?’의 문제와 석기공작 내에서 주먹도끼의 빈도가 낮은 이유는 앞으로 설명되어야 할 숙제이다. 

아슐리안 주먹도끼
아슐리안은 프랑스의 생따슐(St, Acheul)지방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전기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석기 공작이다. 약 140만 년 전 에티오피아의 콘소 가둘라 유적에서 등장하여 오랜 시간 지속하다가 약 10만 년 전쯤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타원형 또는 삼각형 모양으로 양쪽 면을 모두 고르게 손질 하여 석기의 옆면이 마치 두 손바닥을 모은 모습을 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른 시기의 것들은 거칠게 가공한 것들이 많았지만 점차로 대단히 정형화된 것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도 초기 아슐리안형이 많이 보이지만 석영석재 임에도 불구하고 전면을 가공한 타원형의 주먹도끼가 나타난다.

전곡리 구석기유적의 발견과 조사
전곡리 구석기유적은 1978년 당시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미군병사 그렉보웬이 한탄강에 소풍을 왔다가 강변에서 우연히 구석기시대의 석기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보웬이 발견한 석기들은 당시 서울대학교박물관장이던 고(故) 김원룡 교수에게 신고되었고, 학술적 지표조사를 거쳐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발견 이듬해인 1979년 첫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2010년까지 30여 년 동안 17회 이상의 발굴조사가 시행되었다. 조사결과 주먹도끼, 가로날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홈날, 찌르개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들이 최고 8m에 이르는 퇴적층에서 발견되었다. 고고학적인 발굴조사 이외에도 유적의 형성과정과 연대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자연과학적 학술조사도 여러 차례 시행되어 전곡리 유적이 적어도 35만 년 전에 형성된 구석기유적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전곡리 구석기유적의 지질과 층위

지질의 형성
한반도의 지질을 남북으로 나누는 추가령지구대의 동북지역에서 흘러내려 오는 한탄강은 전곡을 지나서 임진강과 합류하고 다시 문산지역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들어가게 된다. 전곡지역에서 서해까지는 약5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전곡의 동편 포천지역에서 부터는 산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강은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된 경기편마암지대에 오래전에 만들어진 골짜기를 따라 흘러가는데 곡저부에는 신생대 제4기에 형성된 현무암이 강의 양쪽 또는 한쪽에 대지를 이루고 문산지역까지 연속되고 있다.

전곡리유적 일대는 한탄강을 따라 강 양편으로 곳곳에 크고 작은 용암대지와 거의 수직에 가까운 현무암 절벽이 형성되어 있는 등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특이한 지형구조는 신생대 제4기에 접어들면서 철원, 평강지역의 오리산(鴨山,452m:평강)과 680m고지(680m:검불랑역 부근)와 같은 분화구 들에서 용암이 분류하여 형성되었다. 이렇게 분출한 용암들이 예전의 한탄강을 메우면서 이곳 전곡 일대를 지나 문산 일대까지 흘러갔다.

당시의 용암은 대단히 유동성이 강하여 아주 먼 거리, 거의 90km까지 흘러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한일공동자연과학적 조사결과 한탄강 임진강 유역의 현무암은 기본적으로 전곡현무암과 차탄현무암 두 종류로 밝혀졌고 전곡현무암이 50만 년 전 그리고 차탄현무암은 17만년 전에 분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용암대지가 형성된 다음 한탄강은 용암대지 위를 흐르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자갈, 모래 그리고 실트와 같은 강흐름 퇴적들을 남기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한탄강이 용암대지를 침식하여 낮아지게 된 후에는 멀리서 바람에 의해 흔히 뢰스라고 하는 고운 입자의 퇴적물들이 강퇴적물이나 호소성퇴적물을 덮게 되었다. 전곡의 구석기인들이 남겨놓은 석기들은 바람에 의해 쌓인 것으로 생각하는 점토층에서 발견되고 있다.

층위
전곡일대의 용암대지 위에는 4m에서 8m 두께의 퇴적물이 남아 있다. 지점에 따라서 강흐름 퇴적인 모래층이 두텁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현무암이 높은 지점에서는 점토층만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퇴적층 상부의 점토층의 두께는 두터운 지점에서는 4 내지 6m 정도 인데 바람에 의한 풍성층, 즉 뢰스퇴적과 뢰스퇴적이 토양화 된 부분이 교대로 쌓여있다. 고토양의 표면을 따라 수평으로 배열된 상부에서 내려오는 수직균열흔이 있다. 전형적인 퇴적구조는 지난 2000년에 발굴된 E55S20-Ⅳ피트에서 볼 수 있고 이 발굴구덩이는 박물관 내부에 복제되어 전시되고 있다.

전곡리 구석기유적의 연대

최근에 조사한 E55S20-IV 피트에서는 지표 아래 30cm지점에서 일본의 AT화산재 그리고 1m 지점에서 약 10만 년 전의 Ktz 화산재가 발견되었다. 이 두 시기가 다른 화산재가 퇴적층에서 확인됨으로써 지표 1m 아래는 10만년 보다 오래된 층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퇴적층의 퇴적속도는 대체로 7만년 동안 70cm 내외의 속도를 보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350cm 깊이에서 나타나는 석기군들을 35만년 전으로 추정한 것이다.

전곡리 유적의 바닥을 이루는 현무암은 두 가지의 다른 절대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가 50만 년 전으로 동일하게 측정되었다. 또한 9만 5천년 전의 Ktz 층과 최하층 석기군 출토면 사이에서는 다수의 OSL 연대들이 10만년 전에서 20만 년 전으로 나타나고 있어 석기군의 형성추정 연대를 뒷받침하고 있다. 전곡리 석기공작의 특성으로 미루어 볼 때 시기가 오래된 석기군들이 보이고 있지만 전곡리의 절대연대문제는 아직도 풀어야할 숙제가 많이 남아있다.

전곡리 옛사람들의 생활 
추가령 지구대의 중심부에 해당되는 전곡지역은 강변의 평탄 충적대지가 계곡을 따라서 발달하고 낮은 구릉성 산지가 연이어 있는 지형으로서 황해의 수분을 머금은 편서풍들이 많은 비를 가져와서 풍부한 자연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이다. 빙하기에는 보다 건조했겠지만 보편적으로 다양한 식생이 발달하여 구석기인에게 좋은 삶의 터전이 되었을 것이다.

아득한 선사시대, 전곡리 선사유적 주변에 흩어져 살았던 전곡리 옛 사람들에게 산과 들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식물들과 나무 열매들은 소중한 먹을거리였을 것이다. 이들은 한탄강에서 조개를 줍고 물고기를 잡아먹었을 것이며 때로는 강으로 물을 먹기 위해 내려오는 동물들을 사냥하기도 했을 것이다.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서 바람막이 막집도 지었을 것이고 먹이가 부족 할 때는 먹이를 따라서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생활 했을 것이다.

전곡리 유적에서 발견 된 주먹도끼를 비롯한 석기들은 이들이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만들면서 남겨진 것들이다. 전곡리 유적의 몇몇 지점에서는 수 백 점의 석기가 좁은 장소에서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한다. 이 곳에서는 동물을 도살하거나 사냥과 채집에 필요한 석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듯 전곡리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 이었던 것이다.

고 삼불 김원룡 교수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의 창시자이며 전곡리 구석기유적 발굴조사를 처음부터 지휘하였다. 전곡리 유적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 유적이 사적으로 보존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적지 내의 제 2지구의 숲속에 화장한 그의 유골이 산골되었으며 전곡리 유적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자그마한 비석을 세웠다. 
전곡선사박물관
제공: 스토리

총괄|배기동
기획|이한용
큐레이터|김종헌, 심현철
사진자료|전곡선사박물관 아카이브
프로젝트 지원|김태용, 최서연, 김영대, 이학성, 박소현, 성형모, 김호균, 김경민(경기문화재단 홍보마케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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