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은 1897년 성립하여 1910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제국임을 보여주는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고종은 1897년 연호(年號)를 ‘광무(光武)’,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인 1900년(광무 4)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는 본격적으로 전시관을 건설하고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교류를 통해 세계 변화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였다.

『파리박람회안내서(The Paris Exhibition)』에 실려 있는 파리만국박람회장의 지도로 한국관은 C2에 위치하고 있다. 파리만국박람회는 대한제국이 최초로 독립적인 전시관을 만들어 참가한 박람회로 이를 통해 대한제국의 자원과 산업을 대대적으로 소개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 시대에 공식 장관과 상인에게 발행 된 여권은 세계 무대에 대한제국이 출현 한 것을 보여준다.

고종은 서양의 발전 사례를 참고하여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외국인들을 적극적으로 초청, 활용하였다.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작가인 비숍(1831~1904년)은 우리나라의 정치·사회·문화·풍속 등을 기록하여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이라는 책을 펴냈다. 비숍은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부터 1897년까지 네 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했고 11개월에 걸쳐 답사를 하였다.

1880년대 이후에 조선에 온 서양인들은 왕실의 고문이나 선교사, 사신으로서 조선의 정치·사회 문제에 참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상당수의 기록들을 남겼다. 외교관 샌즈의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등이 현재 전해지고 있는 책들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시작으로 국가사무와 왕실사무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어 담당하게 하였다.
이 책은 궁내부에 대한 연혁, 소속 관청의 규정 등을 기록한 책이다. 궁내부는 1894년(고종 31)에 관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왕실 사무를 국가 사무와 분리하여 전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일본지조선(日本之朝鮮)』(1911년)에 실린 창덕궁 인정전 앞 사진이다. 1887년(고종 24) 경복궁에 최초의 전등이 켜진 이후, 1894년(고종 31)에는 창덕궁의 전등이 점화되었다.

1898년(광무 2)에는 철도의 부설․관리․감독을 담당하는 철도사(鐵道司)를 설치하고, 국제표준규격에 맞추어 철도를 건설할 것을 규정한 「국내철도규칙」을 제정, 공포하였다. 또한,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을 설치하여 국가 자본으로 철도를 부설하고자 하였다.
서북철도국(1900~1904년)의 최고 책임자인 총재가 사용했던 인장이다. 서북철도국은 해외 열강들의 철도부설권 쟁탈전에 맞서서 국가 자력의 힘으로 경의선 철도를 부설하고자 1899년(광무 3) 궁내부의 내장원(內藏院)에 설치된 관청이다.

1900년(광무 4)에는 전국적으로 38개 우체사(郵遞司)와 341개의 임시 우체사가 개설되었다.
이 지도는 근대기의 우편업무를 관장하던 우체사(郵遞司)와 전보사(電報司)의 위치, 전신 선로, 임시 전신 선로, 교환소 등을 표기한 지도이다. 이외에 철로, 전보 선로, 전화 선로, 수로 등이 표기되어있다.

외국과의 무역과 근대적인 경제 체제의 도입을 위하여 1883년(고종 20)에는 최초의 근대적 조폐기관인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하여 근대 화폐를 발행하는 등 화폐제도 개혁에도 착수하였다. 또한 태환서(兌換署)를 별도로 설치하고 호조태환권(戶曺兌換券)을 발행하여 신·구 화폐의 교환을 유용하게 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 지폐인 호조태환권의 원판이다. 1891년(고종 27) 「신식화폐조례」 공포에 따라 신·구 화폐의 교환업무를 위하여 설치된 태환서(兌換署)에서 제조되었으나 운영상의 문제로 발행 되지 못하였다.

1897년 2월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한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로 개정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제정하였다. 10월 12일에는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그 다음날 조서를 내려 이를 선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대례의궤(大禮儀軌)』는 대한제국 선포와 관련된 여러 의례와 작업들을 기록한 책이다. 황제 즉위식과 황후・황태자 책봉, 각종 의장물과 어책・어보 제작 등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반차도 도설이 실려 있다.

대한제국을 선포함과 동시에 이미 서거한 명성왕후(明成王后, 1851~1895)를 황후로 책봉하면서 제작한 금보와 금책이다. 어보의 뉴 형태는 대한제국 이전의 거북이 형태와는 다른 용 모양으로 바뀌어 제작되었다.

대한제국의 선포는 기존의 옥책을 금책으로 바꾸어 제작하기에도 이르렀다. 이 어보와 금책은 제작 후 명성황후의 신위를 모시던 혼전인 경효전(景孝殿)에 모셔졌다가 1921년 부묘되면서 종묘에 봉안되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함과 동시에 왕세자빈(순명효황후)민씨를 황태자비로 책봉하면서 제작한 금보이다. 인면에는 ‘황태자비지보(皇太子妃之寶)’라고 새겨져있다. 1904년에 승하 후 의효전(懿孝殿)에 모셔졌다가 1928년 부묘되면서 종묘에 봉안되었다.

조선왕조가 창업되었을 때 태조 이성계의 4대조에 대한 추존작업이 있었던 것처럼 황제국이 된 대한제국에서도 창업자(태조)와 고종황제의 4대조(장조, 정조, 순조, 문조)에 대한 추존작업이 이루어졌다. 옥으로 제작되었으며 손잡이는 모두 용의 형태이다.

1900년(광무 4)에는 두 아들 의화군 ‘강(堈)’과 ‘은(垠)’의 호칭도 격상하여 황제의 아들과 형제를 일컫는 ‘친왕(親王)’으로 격상시켜 각각 ‘의친왕(義親王)’, ‘영친왕(英親王)’으로 책봉하면서 황제국으로서의 위엄을 갖추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영친왕부(英親王府)는 영친왕(英親王)과 관계된 업무를 전담했던 관청에서 사용했던 인장이다.

고종은 정궁을 경운궁으로 정하여 자주독립과 근대국가 건설을 이루고자 하였다. 경운궁은 영국, 독일, 미국, 러시아 공사관들로 둘러싸여있어 유사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대처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종은 아관파천 기간 동안 경운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하여 이곳을 새로운 제국의 중심지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경운궁 동쪽 앞에 중국 사신 숙소였던 남별궁(南別宮)을 허물고 그 자리에 황제국의 상징인 환구단
을 세워 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고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경운궁(慶運宮)

황궁우(皇穹宇)

환구단(圜丘壇)

고종은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국장이 친일내각의 주도로 진행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계속 미루었다. 이에 대한제국 선포와 동시에 황후로 격상하고 국장을 진행하였다. 이 의궤는 1898년(광무 2)에 제작된 것으로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후 각종 제도 개혁과 선진 문물 수입, 외교 관계의 다변화를 추구하며 자주독립,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전통시대의 군주로서 고종은 황제의 위엄을 신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이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에 1902년 즉위 4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 해는 고종이 51세[망육순(望六旬)]가 되는 해이기도 하였기에 기로소(耆老所)에 직접 들어 진연(進宴)을 베풀고 어진(御眞)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고종의 망육순[望六旬(51세)]과 즉위 40년 기념장이다. 앞면에는 기로소에 있던 ‘영수각(靈壽閣)’이라는 누각을새겼으며, 뒷면에는 기념문구와 황제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새겼다.

대한제국기를 전후하여 황실에는 급격히 서양식 의식주 문화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서양식 관복 제도가 도입된 시기는 1895년 을미개혁 때였는데, 무관복부터 「육군복장규칙」과 「경무사 이하 복제(警務使以下服制)」를 제정하여 군의 근대화에 발맞춰 나갔다.
벽돌 건물 앞에서 찍은 고종(좌)과 황태자(훗날 순종, 우)의 정면 사진이다.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가 쓴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에도 수록되어 있다. 고종과 순종이 각각 대원수복과 원수복을 입고 있다.

서양식 문무관복은 크게 예복(禮服)과 상복(常服)으로 나눠 행사와 일상 업무 등에 용도별로 구분하여 입었으며, 신분에 따라 문양이나 개수에 차등을 두었다.
영친왕(1897~1970년)이 3~4살 때(1900년경)에 입었던 군복으로 부장(副將)예복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당시 서양과 일본에서 상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자동차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1910년대에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황제의 어차와 황후의 어차(御車)가 아직도 전하고 있는데, 이는 각각 미국의 지엠(GM)사와 영국의 다임러(Daimler)사에서 제작・수입한 것이다.

차체는 모두 목재이고 칠漆로 도장하였으며, 자동차의 내・외부는 황실의 상징인 황금 오얏꽃으로 장식하여 황실의 소유품임을 알렸다. 이 중 황후의 어차는 전 세계적으로도 3대만 남아있는 희귀한 차종으로, 당시 황실의 생활사와 함께 세계의 자동차 발달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한제국 황실의 미혼자들은 전통이나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귀족들과 강제로 혼인을 하여야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李垠)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 일본 귀족의 딸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이후 이방자李方子)]와 혼인하였다.

제공: 스토리

국립고궁박물관

박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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