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 1937년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 연대기

한국영상자료원

이는 1937년 윤봉춘이 쓴 ‘나운규 일대기’와 그의 일기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나운규의 연대기이다. 윤봉춘(尹逢春, 1902-1975)은 나운규의 고향 친구이자 영화적 동지였다

“천재는 단명이라 하니 군도 일찍 죽었으니 천재라 하자. 천재를 다 발휘치 못하고 죽은 것은 뭐라고 할까 미완성 천재라고나 할까? 그런 건 내가 알 바도 아니지만은 예술가에게는 죽음이 없다더라.”

- 윤봉춘, ‘나운규 일대기’, 『映畵演劇』 1집, 1939년 11월호, 4쪽.

“그 때에 운규 군은 보통학교 4년급을 졸업하고 그 보흥학교(普興學校)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그것이 바로 운규 군의 나이 16세 되는 봄이었다. 내가 운규 군을 알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한 학교 동창이고 나이도 같았다.”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그의 아버지는 구한말 군인 출신으로, 한약상을 하고 있었다.

“소학시대의 운규는 연극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 당시에 임성구(林聖九)니, 동지좌(同志座)니 하는 신파극단이 가끔 지나가는데 구경이라면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극장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밤이면 아이들을 자기 집 정지에 모아놓고 연극을 하기 좋아하였다”

나운규가 함께 한 소인극(素人劇)장면
1918년 간도 명동중학교 입학

1919년 간도 명동중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가담하였고 이 일로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어 만주 일대와 러시아를 방랑했다. 러시아에서는 백군에 입대하였다가 탈영하였다.

“무엇 하러 러시아에 갔느냐고? 무엇 ‘하러’가 아니라 (중략) 조선에 올래야 올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까닭 없이 시베리아 일대를 곡마단의 곰 모양으로 헤매고 있다가 어찌나 밥이 그립고 따스한 방이 그립던지 러시아 백군(白軍)에 입영하였다.”

- 나운규, ‘나의 러시아 방랑기’, “문예영화” 창간호, 1928년 3월, 23-27쪽.

다시 간도로 돌아와 광복군의 비밀결사조직 도판부(圖判部)에 가담, 윤봉춘과 함께 무산령 터널을 폭파하라는 지령을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서울 와서는 중동학교도 다니고 고등 예비과에도 다녔다. 상경한지 얼마 후 회령서 경관 두 사람이 상경해서 군을 다시 회령으로 압송하였다.”

도판부 사건 혐의자로 체포, 1921년 3월 5일 청진형무소 수감. 나운규 수형기록.
1923년 청진형무소 2년 만기 출소 후

“다시 회령을 떠나서 서울에 오게 된 것은 마침 회령에 신극단체 예림회(藝林會)가 오게 되었던 것이다. 군은 이 단체에 정식으로 입사하여 간도(間島)를 들러 나와서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다. 예림회는 중간에서 해산되고 군은 다시 학교에 입학하였다.”

“군은 서울서 공부는 하면서도 상설관은 하루도 결근한 일이 없다. 연속사진을 볼 때는 필기장에다가 사건을 도해해 가면서 보러 다니는데 그 중에도 <명금 (名金, the broken coin)>(1915) (조선 개봉명: <precious coin>)의 행방을 도해해놓고 인물들을 배치해 가며 그린 필기장은 재미있게 보았다.”

초창기 조선영화가 일본영화의 번안으로 존재의 가능성을 모색할 때, 나운규는 서구영화의 스타일을 통해 조선 관객과의 접점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출연뿐만 아니라 감독직을 내걸고 연출까지 한 <풍운아>의 한 장면에서도 서구 연속영화의 활극성을 의도한 것을 엿볼 수 있다.

<풍운아>(조선키네마프로덕션, 나운규, 1926)

“이 때에 부산서는 조선키네마주시회사가 창립이 되어서 윤백남 씨가 감독이 되고 안종화, 주삼손 등 여러 사람이 모여있었다. 군은 조선에도 영화회사가 있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날로 책자와 이부자리를 팔아서 노비를 만들어 일로(一路) 부산으로 갔다. 그것이 1921년 가을인 듯 싶다.”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해의 비곡>(1924) <운영전>(1924)에 처음 단역으로 출연했고, 이어 <심청전>(백남프로덕션, 이경손, 1925)에서 심봉사역을 맡았다.

<해의 비곡>(조선키네마주식회사, 왕필렬(王必烈), 1924)

“처음부터 끝까지 흐리멍텅한 중에 나운규의 힘있고 선 굵은 연출만이 홀로 뛰어나서 단조로운 스토리를 잘 조화하여서 가끔 웃기는 것이 적이 성공이라 하겠다. 이 일편만으로도 나운규 군이 영화배우로서의 소질을 풍부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김을한(영화동호회), 영화평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6.27. 

“<농중조(籠中鳥)>는 재미있는 영화이다. 비극 장면보다는 희극 장면이 많다. 나운규 군의 낙천가적 표현은 꽤 잘한다. 서양식 격투, 유도가 가미하여 화양식(和洋式) 격투 참 볼만한 격투이다”

- K생(生), 조선일보, 1926.6.12.

나운규는 <농중조>를 통해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감독은 이규설이었지만, 나운규는 각본에도 참가했고, 그가 출연하는 장면은 직접 연출하기도 하였다.

<농중조>(조선키네마프로덕션, 쓰모리 슈이치(津守秀一), 1926)

“그 당시에 조선에 오는 양화를 보면 수로는 서부활극이 전성시대요, 또 대작 연발시대다. 그리피스의 <폭풍의 고아>(1921)를 보던 관중은 참다 못하여 발을 굴렀고 더글러스의 <로빈후드>(1922)는 조선 관객의 손바닥을 아프게 하였다. (중략) 나는 어떻게 하면 조선영화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하고 밤을 세워가며 애를 썼으나 관객과 나날이 멀어져 가는 원인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대로 탄식만 하다가 선배 이경손 선생에게 “화나는데 서양 사람 흉내를 내서 한 작품 만들어 봅시다.”하고 말했더니 “서양 사람과 동양 사람은 체격이 틀리니 안 되오”라고 했다.”

- 나운규, [조선영화감독고심담] <아리랑>을 만들 때, 『조선영화』 제1집, 조선영화사, 1936, 46~47쪽.

“이 작품 시작할 때에 깊이 느낀 것은 졸립고 하품 나지 않는 작품을 만들리라. 그러자면 스릴이 있어야 하고 유머가 있어야 한다. 외국물 대작만 보던 눈에 빈약한 감을 없이하려면 사람을 많이 출연시켜야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 조선서 처음으로 800인이라는 많은 사람을 출연시켰다.”

- 나운규, [조선영화감독고심담] <아리랑>을 만들 때, 『조선영화』 제1집, 조선영화사, 1936, 47쪽.

“이렇게 처음 된 <아리랑>은 의외로 환영을 받았다. 졸음 오는 사진이 아니었고, 우스운 작품이었다. 느리고 어름어름하는 사진이 아니었고 템포가 빠르고 스피드가 있었다. 외국영화를 흉내낸 이 작품이 그 당시 조선 관객에게 맞았던 것이다.”

- 나운규, [조선영화감독고심담] <아리랑>을 만들 때, 『조선영화』 제1집, 조선영화사, 1936, 48쪽. 

<아리랑> 광고, 『키네마준포』, 1926년 12월 11일(248호)
현대비극 <아리랑> 웅대한 규모! 대담한 촬영술! 조선영화사상의 신기록! 당당봉절! 촬영 3개월간! 제작비용 1만 5천원 돌파! - 단성사 광고, 조선일보, 1926.10.1

“그러는 동안에 <아리랑>이 완성되었다. 단성사가 터질 듯 했다. 개봉 말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만원이었다. 바로 우리나라 흑백 무성영화시대의 획기적인 이 작품은 서울 장안을 설레게 했다. <아리랑>이야말로 최초의 구극조(舊劇調)를 탈피한 첫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또 한 가지 장점은 관객의 심정을 만족할 만큼 포착한 점이었다. 마치 어느 의열단(義烈團)원이 서울 한 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 그것도 비밀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느끼게 했다.”

- 이경손, 무성영화시대의 자전, 신동아 1964년 12월호, 326쪽.

“한국영화사상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영화를 꼽는다면 <아리랑>을 뛰어넘을 경우가 없을 것이다.”(조희문)

“나운규의 영화는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이 아니라 시대 안에 존재하는, 즉 신파와 활극이라는 당대의 유행하는 장르 또는 경향 내에 존재하는 작품”(이순진)

“<아리랑>은 일본 신파영화의 영향 아래서, 서구영화의 만듦새를 직접 염두에 두고 조선적 실천에 성공한 영화다.”(정종화)

단성사의 후원을 얻어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자신의 원작·감독·주연 영화를 잇달아 선보였던 1927년에서 1929년 사이, 스타이자 감독으로서 나운규는 과연 조선영화의 일인자였다.

<잘 있거라>(나운규 프로덕션, 나운규, 1927)
<옥녀>(나운규프로덕션, 나운규, 1928) 
<사랑을 찾아서>(나운규 프로덕션, 나운규, 1928) 로케이션 촬영 현장
<사랑을 찾아서>(나운규 프로덕션, 나운규, 1928)

“1931년에 경성촬영소가 되고 원산만(遠山滿)이 제작하는 <금강한(金剛恨)> 영화에 출연하기로 하고 입사하였다. 그 때의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는 전 영화인의 적이라고 생각할 때에 군이 입사하고 보니 문제는 더욱 확대되고 드디어 영화동인회에서 임시 대회를 개최하고 나운규 성토회까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은 아무 말 없이 <금강한>에 출연하였다.”

1925년부터 1951년까지 일본영화 시대극의 검극배우로 활약했던 도야마 미쓰루(遠山滿)는 경성 흥행계의 실력자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朗)를 내세워 1930년 12월 13일 ‘경성촬영소 원산만프로덕션’을 후루이치마치(古市町) 19번지에 설립했다. 당시 나운규는 나운규 프로덕션이 해체된 직후였기 때문에, 민족적인 경계를 떠나, 본격적인 영화 스튜디오에 참가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1년 <금강한> <남편은 경비대로> <룸펜은 어디에> 3편을 제작하고 조선영화계를 떠나, 다시 일본영화계로 돌아갔다.

<금강한>에서 나운규는 색마를 물리치는 영웅이 아니라 그 스스로 색마가 되었는데, 이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나운규를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했다.(이순진)

1932년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는 스타 나운규가 자신의 정형화된 캐릭터를 버리고 배우로서 재출발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삭발까지 하고서, 아내도, 딸도, 자신의 일터도 지키지 못한 늙은 뱃사공 역을 연기한 이 작품에서 나운규는 연기 변신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이순진).

“근데 나형, 이발소에 가서 바리깡으로 깎으셔도 되는데 왜 면도칼 가지고 깎으셨습니까?”

“하하 지금부터 촬영 준비까지 한 20일 걸릴 것 아니오”

-이규환 편, 한국예술연구소 편저,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성동호·이규환·최금동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임자없는 나룻배>(유신키네마, 이규환, 1932)

나운규는 <오몽녀>를 통해, “예술가로서의 새로운 고민의 첫 발자국(안석영)”을 내딪지만, 이는 마지막 발자국이 되고 말았다.

1936년 10월 18일

오늘부터 나군은 <오몽녀(五夢女 )> 각본을 쓰기로 착수하였다. 이번 작품을 만들어서 도쿄(東京マハビハ)에 개봉시킬 작정으로 착수하기로 하였다.

1936년 10월 19일 

<오몽녀>의 각본을 작야(昨夜)에 끝내서 오늘 운규 군이 촬영소에 가서 의장(衣裝) 기타의 준비를 시켜놓았다. 그것이 끝나는 대로 통천(通川) 지방으로 로케이션을 떠나게 되었다. 

<오몽녀>(경성촬영소, 나운규, 1937)

“앞으로는 출연도 하지 않고 원작도 하지 않고 연출 방면에만 주력하겠다고 하였다. <오몽녀> 제작 도중에 과도한 피로로 인해서 군의 몸에 숨었던 병은 다시 머리를 들게 되었다. 그 때는 벌써 폐병 3기도 넘었을 때다. 군의 친우인 이순원이라는 의사는 매일 촬영소까지 쫓아와서 정양하기를 권하고 주사를 놓아주었다. <오몽녀>는 1936년의 작품이고 나 군의 최후 작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무성영화로 최초의 작품 <아리랑>이 명편이었고 군의 최후 작품인 발성영화 <오몽녀>가 명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레코드 소리가 들렸다. 군은 손을 허공에 저으며 그 음악을 따라 바이올린을 하는 흉내를 내고 입을 벌리고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한참 바둑을 두다가 나는 건너다보았다. 눈을 뜬 채로 부채를 쥔 채로 우리를 보고 그냥 있었다.”

8월 9일

새벽 한 시 25분에 나운규 군은 아주 세상을 떠나가 버렸다. 36세를 일기로 억울하게도 갔다.

8월 10일

아침 10시에 발인하였다. 동리 사람들이 많이 구경 나오고 영화인들도 많이 모였다. 독립문(獨立門)을 지날 때도 슬펐고 홍제원(洪濟院) 고개를 넘을 때는 비도 몹시 왔다. 악사들은 ‘아리랑’ 곡조를 불러서 더욱 슬펐다.

- 윤봉춘 일기,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사흘 만에 상여가 집을 떠나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영화인은 전부 모였다. 독립문 근처에는 어찌도 사람이 많이 모였든지 그야말로 인산인해 격이었다. 자동차와 전차가 중지되고 있었다. 행렬을 지어 상여가 가는데 상두꾼의 소리도 슬프게 들었지마는 악사들이 부는 처량한 나팔 소리는 더욱 가슴이 메어졌다. 소학생과 중학생들이 가끔 달려와서 맨 앞에서 가는 운규 군의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울고 돌아서는 것을 볼 때도 마음이 이상하였다. 홍제원(洪濟院) 고개로 상여가 넘어갈 때는 소낙비가 끝일 줄 모르고 쏟아졌다. 고개로 넘어가던 악사들은 곡조를 돌려서 나 군이 옛날 부르던 ‘아리랑’곡을 슬프게 불러서 소낙비와 눈물이 앞을 가리워서 걸어갈 수가 없었다. 촬영대가 언덕에 서서 카메라를 돌리는 모양도 보였다.”

<종로>(대구영화촬영소, 양철, 1933)

“사실 조선영화계에서 나운규 군 만큼 영화의 기술적 스텝을 다분히 갖고 있는 영화인도 없었다. 때를 못 만난 영웅처럼 시불리혜(時不利兮)한 가운데에서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내고 대중의 인기를 끌고 나간 사람은 나운규 군 밖에 없다.”

서광제, ‘고 나운규 씨의 생애와 예술”, 조광 제24호, 1937년 10월호. 쪽. 

“맹랑한 연출 센스가 나운규의 영화적 재질이었다. 한 시퀀스에서 다른 시퀀스로 옮겨갈 때 그는 복선의 필요와 불필요를 아는 데, 대체로 우연히 많았던 것도 사실이나 <풍운아>에서 인력거군 변장, <오몽녀>의 라스트, 모두 활달한 센스가 그럴 듯 하였고 또 무엇보다 리듬과 템포를 수업했고 영화 창작의 중요 부서인 편집의 능, 관록 붙은 연출가라고 한 것도 당분간 이 점에서 타자의 추종을 불허하는 까닭이다. 각색도 그의 것은 빈틈이 없다. 우선 영화적이 아닌 것과 영화적인 것을 추려서 그것에 템포와 리듬을 맞춘다. 그의 작품을 잘 보면 알 듯이 무엇보다 스피드가 있는 것은 먼저 영화를 해득(解得)한다는 실증일 것이다.

- 김태진, 영화계의 풍운아 고 나운규를 논함(하), 동아일보 1939.8.11.

<풍운아>(조선키네마프로덕션, 나운규, 1926)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1902~1937) 

1921년~1936년, 15년 동안 모두 27편의 출연작과18편의 연출작을 남겼다.

제공: 스토리

Curator — Chung Chong-hwa, Korean Film Archive
Publisher — Yoo Sungkwan, Korean Film Archive
English translation — Free Film Commun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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