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이후, 한국의 반공영화

조준형의 글 「한국 반공영화의 진화와 그 조건」(『근대의 풍경』, 소도, 2001.)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반공영화란
공상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을 강조하거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의욕을 고취하는 영화를 말한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 이데올로기의 확산과 정치적 목적 등으로 ‘반공’의 내면화가 전방위로 이뤄졌다. 영화는 반공 의식을 강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돼 해방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정권과의 관계 및 장르 진화 속에 적극 제작되었다.”"

이승만-장면 정권기 반공영화 (1949~1961)

이승만 정권은 극우적 공동체에 기반한 정권으로 친일 세력을 감추고 민족적 정통성을 세우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 시기 반공 이데올로기는 어떤 의미에서 반일 이데올로기보다 약했다고 볼 수 있다.
반공 의식이 가장 고조된 시기는 재일교포의 북송이 시작되는 1959년 시점. 장면 정권 하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훨씬 소극적인데 이는 장면 정권이 4월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정권이라는 점 등의 이유를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반공이 오락의 소재가 될 만한 시간적 거리도 충분치 않았고, 전쟁 스펙터클 영화를 만들만한 기술적 역량도 갖춰지지 않았다. 영화를 정권 차원에서 전 국민의 동원을 위한 이데올로기 기제로 사용할 정도로 세련되지는 못했다.

(한형모, 1949),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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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는 좌우익 대립을 가족 안에서 풀어냄으로써 반공극영화의 효시로 인정받는 영화이다.

(홍성기, 1954),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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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소재 첫 영화 <출격명령>(홍성기, 1954)

(한형모, 1954),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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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영화의 효시 <운명의 손>(한형모, 1954)

<운명의 손>(1954)

<5인의 해병>(1951)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은 한국전쟁 뒤 지리산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는 빨치산들을 다룬 작품으로 빨치산을 추적하는 토벌대의 영웅적 면모 대신 빨치산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켰다는 이유로 격렬한 ‘용공 논쟁’을 낳았다. 작가 최정희 같은 문인이나 평론가들이 휴머니즘을 앞세운 영화라 평한 가운데 일부 신문 등에서 빨치산을 극악무도한 무리가 아닌 인간적 갈등을 겪고 있는 인물로 묘사한 것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을 금지시켰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검열에서 문제가 됐다. 화면에 혼자 백사장으로 걸어 나오는 애란이 자유를 찾아 내려온 것인지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시인 김종문은 <한국일보> 1955년 7월 24일 자 마지막 장면에 대해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애정문제와 산속 생활에 대한 염증이 더 부각된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시나리오 작가 오영진은 이 영화가 휴머니즘을 강조한 고차원적 반공영화라고 옹호하며 지상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반공 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가 아이러니하게 ‘용공’ 혐의를 받은 것. 이로 인해 1955년 8월 24일 국도극장에서 예정된 상영이 취소되자 결국 감독은 홀로 살아남은 빨치산 애란이 ‘자유대한’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묘사하기 위해 백사장을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에 태극기를 삽입하고서야 극장 개봉할 수 있었다.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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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의 마지막 장면. 용공시비에 휩쓸려 빨치산 애란이 귀순하는 마지막 장면에 태극기를 오버랩 시킴

광고 전단지,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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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1955)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 중 50년대 가장 많이 제작된 것이 '이산멜로드라마'(분단으로 헤어져 흩어진 가족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들이다. 이산멜로드라마는 반공을 직접 표방하지 않았지만 전쟁의 비극을 통해 우회적으로 반공사상 고취에 앞장섰던 장르였다. 이 시기에 국민들은 전쟁의 비극을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보다 사적인 비극으로 인식하는 단계였으므로 이산멜로드라마는 1950년대 후반에 반공영화를 대체할 정도에 이르렀다. 대표적 작품으로 <인생화보>(이창근, 1957), <처와 애인>(김성민, 1957), <비극은 없다>(홍성기, 1959) 등이 있다.

(1957),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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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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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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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전반기 반공영화 (1962~1967)

박정희 정권은 5·16 이후 반공을 국시로 전방위의 반공 정책을 펼친다. 이와 함께 경제성장을 근간으로 한 근대화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반공과 성장 이데올로기가 결합됨으로써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 본격화되고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모든 이적행위를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기 시작한다. 특히 박정희는 영화가 선전 매체로 탁월한 효과를 가진다고 판단해 영화법 개정 및 영화 검열 등의 제도적 방법을 통해 반공 의식을 내면화하도록 하였다. 

이 시기는 이러한 사회전반적 분위기 아래 반공영화가 장르로 고착되고 절정에 달하게 된다. 5·16 이후 혁명영화 혹은 재건영화의 필요성이 강조되며 1962년 이후 반공영화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1966년까지는 반공영화의 하위 장르 중 스펙터클 전쟁영화가 주도적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정부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반공영화가 선전 계몽의 측면보다 오락거리로서 관객에게 소비되었음을 의미한다.

시가행진,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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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이후 영화인들이 재건복을 입고 시가행진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국책성 영화의 제작을 장려하는 것은 물론 사안이 있을 때마다 영화인들을 직접 동원하곤 했다.

1960년, 1961년에는 반공영화가 거의 제작되지 않았으나 1962년에는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제작편수가 크게 늘어난다. 5·16 이후 영화계에 국가재건에 대한 영화인의 동참, 혁명영화의 생산요구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영화 또한 정권의 요구에 부응하여 만들어졌을 것이다.

(1963),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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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인은, 1962),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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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랑, 1962),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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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초, 1962),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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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만리>(양인은, 1962), 1962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 광고, <육체는 슬프다>(이해랑, 1962), <붉은 장미는 지다>(이원초, 1962) ( 포스터: 양해남 컬렉션)

<오발탄>, <7인의 여포로> 등 반공법 검열 강화

1962년 이후 영화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본격화되었다. 1963년 정부는 영화법을 개정하여 영화사를 통폐합하고 검열을 보다 강화하였다. 특히 이 시기 영화법에 의해 사법적으로 문제가 된 영화들로 <오발탄>(유현목, 1961), <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 등이 대표적이다. 이만희나 유현목과 같은 감독들은 반공영화라는 제도적인 장르 안에 자신들의 개성을 기입했다. 이로 인해  <오발탄>은 노모의 대사인 “가자, 가자”가 북으로 가자는 말로 오인할 수 있다며 문제가 되었으며 <7인의 여포로>는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묘사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유현목 감독이 <춘몽> (1965)을 통해 외설혐의를 받은 것은 이만희를 옹호한 것에 대한 보복조치였다. 

서울지검 최대현 부장검사는 “65년 3월 25일 세계문화자유회의의 세미나에서 유현목이 『은막의 자유』라는 제목의 의견발표를 통해 ‘검찰이 문제 삼는 영화 <7인의 여포로>에서의 괴뢰군 묘사는 생명 있는 인간을 표현해야 되며 결코 종전과 같이 그들을 인형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북괴가 괴뢰군을 자비와 생명이 있는 인간이라고 선전하고 있는데 동조하였다”고 하여 유현목 감독이 반공법을 위반하였음을 주장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1961),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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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발탄>(유현목, 1961)은 노모의 대사 “가자, 가자”가 문제가 되었다.

<7인의 여포로>(1965),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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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는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묘사하였다 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오발탄>(1961)

우수반공영화 시상

1966년 대종상부터 우수반공영화 및 반공영화 각본에 대한 시상이 거행되어 1967년에는 우수반공영화의 제작사에게 외화수입 쿼터 1편을 배정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반공영화의 제작이 꾸준히 늘어난다.

(1967),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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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김수용, 1967)은 1967년 대종상 우수반공영화 각본상 수상한다.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의 귀순 실화를 영화화했다. 이후 이수근이 이중간첩임이 밝혀져 상영금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많은 이들이 이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였으며 1998년 12월 결국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라는 무죄 판결이 나왔다.

(1966),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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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 없는 용사>(이만희, 1966)는 1966년 대종상 우수반공영화 각본상 수상한다.(포스터: 양해남 컬렉션 )

1966년에 반공영화가 폭발적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국내에 소개된 ‘007 시리즈’의 영향으로 국제첩보물이 1966년에 처음 등장했고 1965년 본격적으로 월남 파병이 시작되며 월남을 소재로 한 영화가 1966년에 등장하였다. 이산멜로드라마 또한 꾸준히 제작돼 <산불>(김수용, 1967) 등의 문예물, <월남전선 이상없다>(김묵, 1966)등과 같은 월남전 소재 전쟁영화 등이 소수나마 제작된다. 

이 시기 가장 눈에 띄는 하위 장르는 전쟁 스펙터클 영화와 국제첩보물이다. 또한 전쟁 스펙터클과 첩보전이 결합하며 전방위로 반공영화의 오락성을 획득하였다. 1966년 반공영화의 폭발적 증가는 새로운 소재에 대한 관심과 이전 소재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오락성이 강했던 두 장르가 반공영화의 주류를 형성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반공영화의 생산이 정권의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개별 영화 제작에서는 대중성이나 흥행성이 주요한 기준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8240 K.L.O>(1966),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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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O.는 Korean Landing Organization의 줄임말이다. <8240 KLO>(정진우, 1966)는 6·25 전쟁 때 젊은 생명을 바친 K.L.O의 실화를 엮은 영화이다. 현역 첩보원인 김동현 원작, KBS-TV 드라마를 곽일로, 유한철, 나한봉이 공동각색하였다. 장르적으로 전쟁 스펙터클에 기반한 첩보물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경향신문 1966년 5월 4일 자,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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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6년 5월 4일 자 기사 일부. 실제 첩보원이었던 김동현이 첩보물 붐을 타고 본인의 시나리오 <8240 KLO>로 화제를 모았다. 

(1966),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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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지대>(이한욱, 1966)는 미국에서 방첩교육을 받고 온 주인공이 깡패를 가장하고 간첩 일당을 일망타진한다는 내용을 다룬다.

(1966),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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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113)(편거영, 1966)은 007 영화의 유행에 편승한 작품이다. 간첩신고번호인 113 홍보를 위한 방첩활동에 중점을 둔 오락영화. 난파된 간첩들의 갖은 만행과 그 중 한명이 탈출을 감행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포스터: 양해남 컬렉션 )

(1966),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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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와 산 자>(이강천, 1966)는 북한에 의해 총살당한 남편의 복수를 위해 1·4 후퇴 이후 첩보활동을 하게 되는 여성 이야기이다. (포스터: 양해남 컬렉션 )

(1966),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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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와 북경, 평양을 연결하는 국제 첩보 조직이 있는 홍콩. <스타베리 김>(고영남, 1966)은 홍콩 나타난 한국정보원 스타베리 김이 국제 첩보 조직을 일망타진한다는 내용. 홍콩을 무대로 한 한홍합작영화로 알려져 있다.(포스터: 양해남 컬렉션 )

(1966),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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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홍콩에 비밀조직을 가지고 있는 북한 간첩단에게 대남공작금으로 사용될 금괴가 수송된다는 정보에 한국 정보원이 홍콩에 급파해 일망타진한다는 내용. 한국 홍콩 합작영화.(포스터: 양해남 컬렉션)

(1966),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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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작전>(김묵, 1966)은 주월 맹호부대의 베트남 활약상뿐 아니라 베트콩 여간첩의 귀순을 유도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베트남에서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했다.(포스터: 양해남 컬렉션 )

(1966),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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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 강재구>(고영남, 1966)는 사병이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부하들을 구한 고(故) 강재구 소령의 실화를 다룬다. 강재구 소령의 희생뿐 아니라 육군사관학교의 위엄을 선전하는 영화. 국방부, 공보부, 문교부가 후원하였다.(포스터: 양해남 컬렉션 )

(1966),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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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선 이상없다>(김묵, 1966)는 주월 한국군의 활약상을 담은 장편 기록영화로 신필름에서 제작했다.(포스터: 양해남 컬렉션)

(1967),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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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김수용, 1967)은 극작가 차범석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한 영화. 기존의 전쟁영화와 달리 전쟁으로 남자들이 없는 산골 마을에 사는 여자들의 욕망에 초점을 맞춘다.

<산불>(1967)

(1968),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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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후예>(유현목, 1968)는 해방 후 평안도 양지골을 휩쓴 조선 노동당원들의 지주를 상대로 한 재산 몰수와 숙청 사업 등을 다룬 문예물이다. 황순원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그려낸다.

(1969),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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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인간이 되련다>(유현목, 1969)는 1949년 월북한 작곡가 백성봉의 이념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유치진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잔학성과 이에 희생된 젊은이의 비극을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 후반기 반공영화 (1968~1979)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에게는 위기의 시기였다. 1968년 1월 21일 대통령 및 정부관료를 암살하기 위해 북한에서 공작조가 파견되었는가 하면(1·21사건), 1월 23일에는 미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납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내부적인 결속과 외부적인 적응이 요구되는 시기였다. 

이에 대한 적응책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었다. 이는 유신을 위한 호도에 불과하였고 1973년 8월 28일 북한의 최후통첩을 끝으로 남북적십자회담까지 중단되었다.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의 주요한 테마는 ‘자주국방’이라는 구호로 전개된다. 자주국방의 실현이 실체성을 획득하고 확대된 것은 미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공산화되어버린 월남패망이 가져다준 위기감 때문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시기에 영화법은 두 차례 개정되었다. 1970년의 3차 개정은 영화수입권을 제작사에게 주던 것을 분리시킴으로써 사실상 영화 기업화 정책을 포기하였고 우수영화제도를 통해 외화수입 쿼터를 배정하던 것을 우수반공영화에 한정시켰다. 1973년 유신에 맞춘 영화법 4차 개정은 영화수입권을 다시 제작사에게 되돌렸고 검열을 강화하였으며 영화진흥공사를 설립했다.

김신조 체포,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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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및 정부관료를 암살하기 위해 파견된 북한의 공작조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가 체포되는 모습(1968)

6대 대통령 취임식(1968),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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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대통령 취임식(1968)

반공궐기대회,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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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말 안보에서의 위기의식은 대대적인 반공궐기대회를 야기했다.

향토예비군 창설식,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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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른 간첩사건 이후 정권은 향토예비군을 조직했다

영화진흥공사 국책영화

영화진흥공사는 1973년 1억2천만 원이라는 엄청난 예산을 들여 <증언>(임권택, 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울지 않으리>(임권택, 1974),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 <잔류첩자>(김시현, 1975), <태백산맥>(권영순, 1975) 등을 직접 제작했다. 국책영화 제작은 영화진흥공사에서 제작진을 구성하여 작품의 소재와 주제를 기획하고 시나리오 작가, 감독 등을 섭외하여 진행하였다. 민간업자들이 제작하기 어려운 대규모의 제작비와 내무부, 국방부 등 국가기관의 총력 지원으로 제작 진행되었다.

(1973),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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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임권택, 1973)

(1974),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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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으리>(임권택, 1974)

(1974),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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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반공 만화영화

1970년대에는 반공 교육이 전방위로 실시된다. 반공을 주제로 한 웅변대회, 글짓기, 포스터 대회 등이 이뤄지는데 이때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 것은 반공 만화영화의 대표작인 ‘똘이장군’ 시리즈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똘이장군’은 극장뿐 아니라 학교에서 자체 반공교육교재로 상영되며 북한을 괴물, 늑대로 이미지화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똘이장군 제3땅굴편>(1978) 은 해방 이후 제작 상영된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에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3편까지 이어지며 인기를 끌었다.

(1979),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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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잡는 똘이장군>(김청기, 1979)

(1978),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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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이장군 제3땅굴편>(김청기, 1978)

B급 액션과 결합된 첩보물 유행

“사실 38선 이북의 북괴는 이제 과거의 6.25동란 때의 남침기도와는 달리 무장간첩 남파, 지하공작을 비롯해서 동경이나 홍콩, 해상 등의 루트를 이용해서 삼각 정보화 등에 크게 열을 올렸다.” 
- 이영일

하나의 장르로서 반공영화는 1960년대 후반부터 뚜렷한 노쇠화의 경향을 띠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경향의 일단으로 전쟁영화의 뚜렷한 감소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스펙터클 영화의 감소와 함께 국제간첩물의 부상이 눈에 띈다. 1960년대 후반의 국제첩보물의 유행은 1965년 ‘007 시리즈’ 2편이 수입된 이후 한국 관객을 매료시켰던 국제첩보 장르의 유행에 편승하고자 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후반기에 이르면 장르로서 반공영화는 대중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한다. 소재가 서서히 고갈되기 시작하고 TV 드라마의 소재로 활용되며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간첩물 역시 퇴조한다.

(1968),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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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특파원>(김수용, 1968)

(1973), 제공: 한국영상자료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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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수사본부와 기생 김소산>(설태호, 1973). ‘특별수사본부’ 시리즈는 기생 김소산을 시작으로 5편이 연이어 제작된다. 그 첫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특별수사본부와 기생 김소산>은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는 국일관 기생 김소산과 특별수사본부 오제도 검사의 이야기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극화한 작품이다.

제공: 스토리

Curator—Park Hye-Young, Korean Film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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