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 2006년

영화보다 영화 같은 삶: 영화감독 신상옥

한국영상자료원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1978년 납북되어 북한영화계를 혁신시켰으며, 극적인 탈북 이후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로서 활동했던,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자 제작자, 신상옥의 영화 같은 삶

신상옥(1926~2006)

신상옥은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1960년대 한국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지옥화>(1958), <로맨스 빠빠>(1960),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연산군>(1961), <성춘향>(1961), <빨간 마후라>(1964), <대원군>(1968) 등 한국영화사의 걸작 영화를 포함하여 80편에 가까운 작품을 연출하였다(기록에 따라 편수가 정확하지는 않다). 그는 단순히 영화감독이 아니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20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한 신필름의 대표이자 한국영화산업의 거물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홍콩과의 합작영화를 주도하는 등 한국영화의 국제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정부와의 갈등이 심해지던 중, 1975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영화사 허가 취소를 당하고, 1978년 1월 부인 최은희가 납북되고, 그해 7월에 그 역시 납북된다. 이 사건은 한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1983년부터 그는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북한에서 영화를 연출, 제작하였고,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함으로써 북한 영화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했다. 1986년 북한을 탈출한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1990년대 초중반 할리우드에서 몇 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닌자 키드 3 ninjas> 시리즈는 상당한 흥행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남한, 북한, 홍콩, 미국에서 영화를 만든 세계 유일의 영화인’이라는 설명처럼, 그는 영화라는 국가 내에서 살다 간 인물이었다.  

최은희(1926~ )

신상옥과 최은희는 1953년 처음 만나 <코리아>(1954)를 찍으며 가까워진 후 결혼에 이르게 된다. 최은희는 1940년대부터 연극과 영화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1970년대까지 대표적인 한국 여배우였다. 그녀는 초중기 신상옥의 거의 모든 영화에 주연을 맡았던 영화적 동반자였으며, 세 편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자, 안양예술고등학교의 교장으로서 후학 양성에 힘을 쓴 교육자이기도 했다. 1978년 납북 당한 후 남편 신상옥과 함께 북한영화의 발전에 힘썼다가 1986년 탈출했다.  

한국전쟁 중 방한한 미국배우 마릴린 몬로와 최은희(1953)
연극무대 출연 당시 최은희(1940년대)

신상옥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1940년대 말, 당시 한국 최고의 테크니션이었던 최인규 감독의 문하에서 영화를 배웠고,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양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악야>로 데뷔한다.

“나는 최인규 감독으로부터 영화에 있어서 편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익혔고, 기술의 중요성도 배웠다. 영화는 편집부터 배워야 한다. 편집을 하면서 영화의 템포와 리듬이 몸에 배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

<악야>는 실험적 요소가 강한 16미리 작품으로 …  영화를 찍는 중에 6.25가 터져 필름을 싸들고 대구로 내려가서 어렵게 완성하여 부산에서 개봉했다.”

- 신상옥

신상옥의 스승이었던 최인규
신상옥의 데뷔작 <악야> (1952)
<코리아>(1954)
<꿈>(1955)
<무영탑>(1956)

1952년 데뷔 이후 신상옥은 1957년까지 꾸준히 영화를 제작 연출하였다. 그러나 <꿈> <젊은 그들> <무영탑> 등 시대극을 주로 연출한 그는 당시까지는 가능성이 큰 신예에 불과했다. 

1958년에 들어와 그의 한국영화계 내 존재감은 커진다. 1958년 연출한 <지옥화>는 당대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훗날 신상옥의 대표작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이후 그는 현대 멜로드라마 장르를 통해 비평과 흥행면에서 당대 대표적 한국영화 감독으로 부상했다.

“영화의 기업화를 꿈꾸는 내게 있어서 흥행에 대한 자신감은 매우 소중한 소득이었다. 만약 이 작품(<어느 여대생의 고백>)마저 흥행에 실패했으면 그 후 나의 영화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신상옥

<지옥화>(1958) 영화 보기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자매의 화원>(1959)
<동심초>(1959)의 한 장면(최은희, 김진규)

<동심초>를 통해 최은희는 단아하고,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전쟁미망인 역을 맡았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한국의 전통적인 여인상으로 자리를 잡았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를 통해 강화되었다. 최은희 본인은 이러한 이미지로 고착화되는 것을 싫어하여 <로맨스 그레이>(1963)의 악녀와 같은 이미지를 일부러 선택했다고 한다.   

1950년대 중후반 현장에서 신상옥의 모습. 최은희의 동생이자 촬영감독인 최경옥(좌)과 촬영감독 정해준

1959년 신상옥은 논란의 소지가 될 작품을 연출한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은 1960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독립운동 이력을 미화하기 위해 만든 영화였다. 1960년 부정선거와 국민들의 봉기로(4월 혁명) 이승만 정권이 퇴진한 후 신상옥은 이 영화의 연출 이력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나의 초기 작품 중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작품은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자유당 말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승만 대통령의 선전을 위해 전 영화계를 강제 동원하여 만든 영화였다.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은 나에게 스케일 큰 작품에 대한 가능성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구한말부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우리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그것이 내게는 큰 소득이었다. ”

- 신상옥 

4월 혁명 이후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의 논란이 있었지만 신상옥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1960년을 맞이하였다. 서민의 생활을 담백하게 다룬 가족 코미디 영화 <로맨스 빠빠>가 작품성이나 흥행에서 고루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이 생명 다하도록>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로맨스 빠빠>(1960)
<로맨스 빠빠>(1960) 영화 보기
<이 생명 다하도록> 촬영 현장(남이섬)에서 신상옥, 최은희 부부(1960)
<성춘향>(1961) 포스터

1961년 신상옥은 최은희 주연 <성춘향>을 연출, 제작한다. 최인규 감독에게서 함께 영화를 배웠던 선배 홍성기 감독이 연출하고 그의 부인 김지미가 주연한 <춘향전>과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제작하여 감독-주연배우 부부의 경작(競作)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이 두 영화는 한국영화사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였다. <춘향전>이 먼저 개봉했으나, 결과적으로 <성춘향>이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 경쟁의 승자는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된다. 이 영화의 기록적인 흥행 성공은 신필름 발전의 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초 그는 <상록수>(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연산군> 연작(1961), <열녀문>(1962),<벙어리 삼룡>(1964), <빨간 마후라>(1964)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 되었고, 신필름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사가 되었다. 

<성춘향>(1961) 영화 보기

“<성춘향>은 장장 75일간 상영되면서 40여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사람에 따라서 36만 명, 38만 명, 혹은 40만 명이라고 했지만, 아무튼 당시 서울 인구가 250만 명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공이었다…

<성춘향>의 성공으로 나는 ‘기업으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얻었다. 내가 꿈꾼 것은 한국식의 메이저 영화사였다. 이 꿈을 향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 ” 

- 신상옥

1962년 어느 잡지에 난 신필름 광고. 사옥이 배경에 있다. 대표 신상옥, 전무 황남, 사장 신태선(신태선은 신상옥의 형이었다) 영화의 왕국이라는 수식어가 상단에, 신필름의 상징이었던 향로가  좌상단에 보인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 영화 보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를 통해 최은희는 한국의 어머니 상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이 작품은 제9회 아시아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1962년 1월과 2월에 연이어 개봉한 <연산군> 전후편은 <성춘향>을 통해 터득한 칼라 시네마스코프의 기술을 본격적인 역사극에 적용한 사례였다. 칼라와 시네마스코프로 재현된 화려한 왕가는 역사가 어떻게 스펙타클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초기의 사례로, 이후 한국 왕조 사극의 모델이 되었다.

<연산군> (1962) 
<연산군>(1962) 영화 보기
전근대 시기 과부에게 강요된 정절과 이에 저항하는 여주인공을 다룬 <열녀문>(1962)은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농촌계몽운동을 그린 <상록수>(1961)는 농촌과 국민계몽운동이 다시 현안으로 떠오른 4월 혁명 국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상록수>는) 16미리로 대량 카피를 해서 전국적으로 돌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본 작품이기도 하다. 유료 관객은 아니지만 관람자 숫자만으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을 보고 박정희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다고 했고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당 간부들의 교육용 영화로 권장했다고 한다. 하나의 작품을 두고 적대적인 남북의 수뇌부가 다 같이 공감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가 뿌듯하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힘이라고 믿는다. 이 영화는 이른바 ‘문예영화’의 물꼬를 튼 작품이기도 한데, 나 역시 대표작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 신상옥 

1962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9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최은희, 신상옥. 이 영화제에서 신상옥이 제작 연출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최우수 작품상을, <상록수>의 주연배우 신영균이 주연남우상을 수상하였다. 이 영화제를 통해 신상옥은 홍콩 영화의 거물 런런 쇼를 만난다. 이 만남은 이후 한국과 홍콩 간의 활발한 공동제작의 계기가 되었다.
1964년 도쿄에서 개최된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한 최은희 신상옥. <로맨스 빠빠>의 주인공 김승호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벙어리 삼룡>(1964) 문학소설을 원작으로 벙어리 하인의 주인 마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다루었다.  
<빨간 마후라>(1964) 한국전쟁 당시 공군의 활약상을 한국 최초의 공중촬영을 통해 담아낸 작품으로 한국과 동남아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제11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 편집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국내는 물론 대만 등 동남아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상영되었다. 대만의 장징궈 총통이 내게 “우리도 이런 영화 하나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한국 영화로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정식으로 수출되어 제대로 흥행에 성공한 것은 <빨간 마후라>가 최초였다.”

- 신상옥

안양촬영소 전경

1967년 신필름은 국내 최대의 스튜디오 안양촬영소를 인수한다. 안양촬영소의 유지와 운영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고, 이는 신필름의 경영에 큰 부담이 되었다.

“원래 내가 운영하던 신필름 안양촬영소는 전 소유자가 파산하여 황폐할 대로 황폐한 것을 김종필 총리와 박정희 대통령이 호의로 은행 융자를 알선해주어 내가 인수하여 다시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상옥

안양촬영소를 인수한 이후 신필름은 오히려 더욱 상황이 어려워졌다. 대규모 스튜디오의 인수비용, 유지비, 인건비 등이 고정적으로 지출되었다. 이 고정비를 상쇄하기 위해 신필름은 1년에 30편에 가까운 영화를 양산해야 했고, 편당 수익률은 떨어졌다. 이는 다시 저예산 영화의 양산이라는 악순환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더해 60년대 후반 이후 박정희 권위주의 정권의 검열이 강화되기 시작하고, 정부 영화정책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신상옥은 정부와 부딪히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 들어 한국영화산업은 급속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결국 1975년, <장미와 들개>는 영화의 검열 당시에는 없던 키스신이 예고편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영화사의 허가가 취소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 신상옥과 여배우 오수미의 불륜으로 사실상 파경에 이르렀던 부부 관계는 1976년 이혼으로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대원군>(1968)

“내 경우에는 사회에 대한 관심과 비판 의식을 지속적으로 가지려고 노력했고, 그것을 작품의 밑바닥에 깔아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대원군> 같은 영화도 군사정권의 지나친 야당 탄압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비판을 담은 작품이다. 물론 그것이 의도대로 성공했느냐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 신상옥 

<내시>(1968)

<내시>(1968) 의 한 장면

왕과 후궁, 후궁의 전 애인 사이의 위험한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동성애 장면을 비롯, 비교적 수위가 높은 애정신을 포함하고 있어 신상옥은 음란물제조배포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기도 했다.

영화사 허가 취소의 계기가 된 <장미와 들개>(1975)

“그로부터 3년 동안,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신필름 영화사 허가를 다시 내주기를 간청했지만 사면초가였다. 내 인생에 있어서 영화와 강제로 격리된 그 3년의 세월이 가장 힘들고 답답하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 신상옥

 

1975년 영화사 허가 취소 후 신상옥은 끊임없이 재기를 모색했으나 쉽지 않았다. 투자자를 찾기 위해 신상옥이 해외를 떠돌던 1978년 1월 최은희가 홍콩에서 납북 당하고, 아내를 찾아 홍콩을 방문한 신상옥 역시 7월에 납북 당한다. 각각 별도로 감금당했던 그들은 1983년에 해후했다. 그 배후에는 김정일이 있었다. 이후 그들은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신필름종합영화촬영소를 설립하고, 영화를 제작한다. 1983년에서 86년까지 불과 3년 동안 신상옥이 연출한 영화는 7편(<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탈출기>(1984), <사랑 사랑 내 사랑>(1984), <소금>(1985), <심청전>(1985), <방파제>(1985), <불가사리>(1985)), 제작한 영화는 20편에 달했다. 그리고 신상옥의 연출작 중 <돌아오지 않는 밀사>, <소금> 등은 카를로비바리,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수상하여 북한 영화의 위상을 높였다.

김정일 최은희 사진, 납북 직후(1978)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부둥켜안았다. 박수소리가 요란하다. 누가 사진을 찍는지 플래시가 번쩍하고 터진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

그(김정일)는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고는 신감독 손을 잡아 추켜들고 좌중을 향해서 외쳤다.

“동무들 신선생은 이제부터 내 영화고문이요.” ”

- 최은희

김정일-최은희-신상옥 사진(1983)
김일성-최은희-신상옥 사진(1985)
경향신문 1984년 4월 2일
동아일보 1984년 4월 2일 / 신상옥과 최은희의 납북사실은 비밀에 부쳐지다 1984년에야 한국 정보 당국에 의해 공개되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사랑 사랑 내사랑>(1984) 

“북한 주민들에게 가장 큰 문화충격을 준 것은 역시 춘향전을 뮤지컬로 만든 <사랑 사랑 내 사랑>이었다. 그때까지 북한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영화 제목에 쓰인 적이 없고, 영화대사로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 제목에 ‘사랑’이라는 낱말이 세 번씩이나 들어 있으니 그것부터가 신선한 파격이었다. 

이처럼 파격적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김정일 부자도 이 영화를 대단히 흡족하게 생각하여, 1985년 1월 1일 김일성이 주최한 신년축하 연회가 끝난 후 참석자들에게 특별상영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들도 새로운 소재의 개발이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상옥

북한영화 <탈출기>(1984) 촬영현장에서 신상옥

“내가 <탈출기>를 제작하면서 제일 통쾌하게 느꼈던 것은 폭력단에 가담한 주인공이 다이너마이트로 화차를 폭파하는 이 영화의 라스트 신을 찍을 때였다. 열차폭파 장면 같은 것은 모형을 만들어 특수촬영으로 처리하는 게 보통인데 북한에는 특수촬영의 기술이 없어 나는 허실 삼아 실제 화차를 1량 폭파하게 해달라고 신청했더니 좋다는 허가가 금방 나왔다.”

- 신상옥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촬영현장에서 신상옥과 최은희. 신상옥은 이 영화로 1984년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의  한 장면

“상영이 끝나고 전깃불이 켜지자 김정일은 은희와 내 손목을 붙잡고 “대만족입니다. 조금도 불만이 없습니다. 마치 유럽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곧 수령님께도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라며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

- 신상옥

<심청전>(1985) 촬영스튜디오
<불가사리>(1985) 촬영현장

“<불가사리>는 북한 영화로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괴수영화다. 외국 영화인들에게는 “노골적인 정치 선전영화밖에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북한에 이런 영화도 있는가?”라는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전래해오는 민담을 소재로 하여 일본 도호영화사 특수촬영팀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이 작품은 세계 시장 배급을 목표로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탈출로 공개가 금지되다가, 1998년 동경에서 일반인에게 상영되어 호평을 받았다.”

- 신상옥 

신상옥이 연출한 <소금>은 1985년 제14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최은희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1985.7)

“모스크바에서 영화 상영이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데 객석에선 쥐 죽은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었기에 신감독과 나는 맥이 풀렸다. 그때 박수 소리가 터지기 시작하더니 온 극장이 박수갈채로 흔들렸다. 돌아보니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이 모두 기립 박수를 치고 있었다. 40여 년 연기 생활을 했지만, 기립 박수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 신감독과 내가 노력해서 이뤄낸 이 순간, 북한에 억류된 슬픔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심사위원들과 평론가들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보다 훨씬 좋았다고 평했다.”

- 최은희

베를린 국제영화제 북한대표단으로 참석한 신상옥 최은희(1986)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만난 최은희와 김지미 (1986). 최은희와 함께 50-60년대 한국영화의 가장 중요한 여배우인 김지미는 경쟁부문에 진출한 <길소뜸>(임권택, 1985)의 주연 여배우로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다.

“우리는 감시원들에게 둘러싸여 베를린 영화제 개막 파티에 참석했다. 신감독이 일본 영화인들과 환담을 하다 말고 나를 불렀다.

“최여사, 이리 와요. 지미가 왔어요.”

나는 깜짝 놀라 둘러보다가 김지미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

- 최은희

당시 일간지 기사에 대서특필 된 탈출 기사(1986) 

1986년 3월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빈의 미 대사관으로 망명 신청함으로써 극적으로 북한을 탈출한다.  이후 그들은 미국으로 망명해 CIA가 제공한 집에서 3년간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중 그들은 자서전을 썼고, 처음으로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1990년 신상옥은 <마유미>를 연출하며 영화 일을 재개했다. 일본인 지인의 투자로 제작하여 디즈니가 배급한 <닌자 키드 3ninjas>가 1992년 박스 오피스 10위 내에 올랐고, 그 해 투자 대비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로 기록되었다.  <닌자 키드> 시리즈는 컬럼비아를 통해 3편이 더 만들어졌다.  이 중 신상옥은 1994년 3편 <닌자 키드 3 3ninjas knuckle back>의 연출까지 맡았다. 그리고 1994년에는 박정희 정권기를 고발하는 <증발>을 연출하기도 했다. <닌자 키드>의 성공으로 신상옥은 한국, 북한에 이어 세번째 자신의 이름을 딴 프로덕션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다른 두 편의 영화 <갈가메스 galgameth>(1996)와  <가드너 the gardner>(1998)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닌자 키드 3 Ninjas>(1992)
<닌자 키즈 3 Ninjas 4편 High Noon at Mega Mountain> 제작 당시 헐크 호건과 함께(1998)
<닌자 키드> 촬영현장에서 신상옥(1992.7)

신상옥이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닌자 키드 3 ninjas>는 디즈니를 통해 배급되어 1993년 미국 박스오피스 10위 안에 들고, 제작비 대비 수익률이 가장 높은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는 이후 4편까지 시리즈로 제작되었는데, 3편은 신상옥 본인이 연출했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은 말년 신상옥의 영화작업을 위한 재정적인 뒷받침이 되어주었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이 아동 영화였다. 아이들 영화라면 출연료 비싼 스타가 안 나와도 되니 300만 달러 정도로도 제작할 수 있고, 잘만 만들면 흥행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상옥

<갈가메스> 촬영현장에서 신상옥(1996)

“내 경우에도 두 편의 영화에서 실패를 경험했고, 재정적으로도 적지 않은 손해를 입었다. 북한에서 만들었던 <불가사리>의 주제를 서양의 중세시대로 옮겨 어린이 영화로 만든 <갈가메스 galgameth>(1996)와 아름다운 꽃을 가꾸는 정원사의 살인을 다룬 스릴러 영화  <가드너 the gardener>(1998)를 만들었는데 배급망을 잡지 못한 것이다. <갈가메스>의 경우는 특수촬영의 효과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고,  <가드너>의 경우는 인기 스타가 나오지 않으면 관객이 들지 않는다는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의 생리를 무시한 것이 문제였다. 무시했다기보다는 제작비가 한정되어 있으니 비싼 배우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 메이저 배급망을 만족시키지 못한 이유였다.”

-신상옥

제47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과 함께. 1994.5.

신상옥은 제47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그의 작품 <증발>이 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되어 특별 상영되었다. 영화제 집행위원들은 이 작품을 뛰어난 반체제 영화로 평가해주었는데, 영화제의 심사위원이면서 동시에 작품을 상영하는 일은 칸 영화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신상옥, 그 옆이 프랑스 영화배우 카트린느 드뇌브,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증발>(1994)

“<마유미>(1990)나 <증발> (1994)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보면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마유미>는 북한 정권의 야만적인 테러를 고발했고 <증발>은 한국 군사정권의 횡포를 신랄하게 파헤쳤다. 이 두 작품을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내가 남과 북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정치적 이용 대상이 아니라 어디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고, 진실이 있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나는 모험적인 좌익도 싫어했고 모럴 없는 우익도 싫어했다. 예술가란 본질적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해야 하기에 둘이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

- 신상옥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핸드프린팅 현장에서 신상옥과 최은희(2001.10)

1999년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납북된 지 20여 년 만에 한국에 다시 돌아와 정착했다. 신상옥은 여전히 영화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고, <함흥 철수작전>, <징기스칸> 등 대작을 구상했다. 두 편은 모두 영화화되지 못했고, 소품으로 만든 <겨울이야기>(2004)가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신상옥은 2006년 4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인생과 영화의 동반자 최은희는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딴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다.

신상옥의 마지막 연출작 <겨울이야기>(2004)
<겨울이야기> 촬영현장에서 신상옥(2001.12.)

“신상옥 감독이 말년에 쓴 자서전 제목은 <난, 영화였다>이다. 감히, 일개인이 하나의 매체와 동격을 자처하다니! 하지만 신상옥의 삶은 영화를 빼고는 남는 것이 없다는 것, 영화를 빼면 사생활도 개인재산도 변변히 없다는 것, 남겨진 유산은 영화 필름들뿐이라는 것, 그의 인생은 주제도 소재도 영화였다는 것, 그런 이에게 ‘난, 영화였다’는 말은 과장도 허세도 아닌 그저 단순한 고백이었을 수 있다. ...

그는 관념적인 태도를 경멸하고 사상이념은 짐짓 등한시하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이고자 했지만, 오히려 요동치는 정치현실 한가운데서 영화인 다른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격정적인 개인사를 살아야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 구절양장 우여곡절 와중에 그의 머릿속은 의외로 아주 단순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를 찍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간다!’”

-조선희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촬영현장에서

참고문헌

. 신상옥, 최은희, <조국은 저하늘 저멀리(상,하)>, 행림출판, 1988

. 최은희, <최은희의 고백>,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 신상옥, <난 영화였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 사단법인 신상옥 감독 기념사업회 기획, <영화감독 신상옥: 그의 사진풍경 그리고 발언 1926-2006>, 2009, 열화당

제공: 스토리

Curator — Cho Jun-Hyoung, Korean Film Archive
Publisher — Yoo Sungkwan, Korean Film Archive
English translation — Free Film Commun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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