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 1996년

코리안 뉴웨이브

한국영상자료원

1980년대 말, 새로운 한국영화와 감독들이 돌연히 등장하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1961년 이후 26년간 이어진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봉기한 국민들의 힘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으나, 그 해 12월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후보들이 분열됨으로써 군사정권은 연장되었다. 전면적인 민주화와 자유화는 유보되었으나, 큰 흐름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한국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1986년 제6차 영화법 개정으로 외화수입이 자유화되고, 외국의 회사가 한국에서 영화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치는 이전까지 한국영화사가 수입하여 배급하던 방식과 달리, 할리우드의 영화사가 한국에서 직접 배급을 수행하고 이익 역시 반출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988년 9월, 미국영화 배급사 가운데 처음으로 UIP가 국내에 첫 직배 영화 <위험한 정사 fatal attraction>(애드리안 라인, 1987)을 상영했다. 군사독재 기간 동안 엄혹한 검열과 잘못된 영화정책으로 산업적 기반이 상실되다시피 했던 한국 영화인들은, 미국영화사의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해진 상황에 위협을 느꼈고, <위험한 정사>의 개봉에 저항하여 직배 저지투쟁 및 영화법 개정투쟁 등을 벌였다. 할리우드 직배에 대한 한국영화인들의 투쟁은 87년 6월항쟁 이후 당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반미 분위기와 결합하여 강렬하게 진행되었다. 6월항쟁과 할리우드 직배 반대투쟁은 당시 한국의 지성계와 예술계가 가진 진보적, 민족주의적 의식의 일단을 드러낸 사건으로, 코리안 뉴웨이브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배경이 된다. 

첫 직배영화 <위험한 정사 Fatal Attraction>(애드리안 라인, 1987)
직배 반대투쟁에 나선 한국영화인들(1990)

이 시기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난다. 민주화 이후 확대된 소재와 주제를 활용하여 영화와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사고하는 세대, 그리고 영화 미학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 세대에 속하는 많은 감독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박광수, 장선우, 정지영, 이명세 감독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중반 사이 특히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좌우익 대립이나 베트남 전쟁의 의미 등 군사독재 기간 중에 금기시되었던 역사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있는 사회적 억압과 한국사회의 변화를 향한 전망을 도출해내고자 했으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한국영화의 미학적 형식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들은 코리안 뉴웨이브라 불린다.

박광수 감독
정지영 감독
장선우 감독
이명세 감독

“박광수와 장선우가 예민한 사회적 이슈들을 건드리면서도 영화언어에 대한 실험을 놓치지 않았다면 정지영은 전통적인 영화어법에 기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주제들을 다루는 쪽이었다. 한편 이명세는 사회비판의 장에서 벗어나 영화매체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열중했다. 이처럼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들은 작가/예술영화라는 큰 범주 외에는 단일한 성향이나 경향으로 묶기 힘들다.”

 -정종화

“1990년대에 박광수라는 이름은 한국영화의 방부제 명(名)이었으며 발전기 상표이기도 했다. 스타일로는 다양한 방식을 왕성하게 실험한 탐구자였고, 내용으로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타협 없는 태도로 깊숙이 파고 들어간 지식인이었다. <칠수와 만수>는 두 인물의 슬픈 가족사를 지난한 한국사와 연결지어 충무로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그들도 우리처럼>은 새로운 영화 미학으로 한국영화 최고봉 중 하나로 우뚝 섰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분단의 비극을 해원(解寃)과 상생의 몸짓으로 달랜 가작이었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예술가의 신념과 의지가 시대정신과 만나 빚어낸 수작이었다.”

- 이동진

박광수 (1955~ )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재학 중 영화 서클 얄라셩에 가입하여 영화작업을 했고, 이후에는 연극 활동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유학하여 영화교육특수학교(E.S.E.C)를 졸업하고, 1988년 <칠수와 만수>(제42회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청년비평가상 수상)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들도 우리처럼>(1990, 제12회 낭뜨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베를린 리포트>(1991), <그 섬에 가고싶다>(1993),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이재수의 난>(1998) 등을 연출하였다. 그의 영화는 짙은 사회성을 회화적인 미장센 속에 담아낸다. 그는 진보적인 입장에서 현실에 대한 영화적 개입을 선호했으나,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관점으로 옮겨간다.

<칠수와 만수>(1988)미전향 장기수의 아들로 연좌제의 피해를 감당한 채 간판 그림을 그리며 살아야 하는 만수와 미국으로의 도피를 꿈꾸는 그의 조수 만수의 절망적인 삶을 우화적으로 그려낸다. 
<칠수와 만수>(1988) 영화 보기
<칠수와 만수>(1988) 촬영현장에서 박광수(우측)

◀ “만수라는 인물은 아버지가 장기수입니다. 그래서 그는 분단으로 비롯된 갈등, 예컨대 어릴 때부터 빨갱이 피해 의식에 주눅들어 있어요. ... 대신 칠수는 5공화국 이후 등장한 소비 사회적 인물과 외세에 의해 피해 입은 인물의 복합형이죠. 결과적으로 이 두 인물을 통하여 한국 사회의 문제를 그린 것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 박광수 

▶ <그들도 우리처럼>은 탄광촌의 시커먼 색감으로부터 기획된 작품이었던 거죠. 검은 땅으로 이미지가 집약된 한국사회 속으로 수배자가 들어간다, 그가 어떤 여자를 만난 후 다른 뭔가를 깨닫고 그곳을 나올 때는 눈이 와서 하얀 탄광이다, 라는 게 이 영화 첫 모티브였습니다. 그런데 영화사에서 흥행이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자꾸 크랭크 인을 미루는 바람에, 결국 첫 촬영을 4월에 하게 됐어요. 눈 장면은 물 건너 간 거였죠.  

- 박광수

<그들도 우리처럼>(1990)  수배를 피해 탄광촌으로 피신한 운동권 지식인, 다방 레지,  지역 부호의 아들인 깡패의 삼각관계를 그린다.
<그들도 우리처럼> 촬영현장에서 박광수 감독(우측)(1990)        
<그들도 우리처럼>(1990) 영화 보기
<그들도 우리처럼>(1990)
<베를린 리포트>(1991) 어린 시절 극우주의자에 입양되어 양부의 성적 노리개가 된 채 살아야했던 영희, 견결한 사회주의자가 된 오빠, 영희를 사랑하게 된 한국 언론인 성민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회의 분단의 근원을 세계적인 문제 속에서 찾고자 시도한 영화  

“<베를린 리포트>는 박광수 영화 중 가장 삭막한 영화이며 감독의 세계에 대한 발언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다. 박광수는 서구와 아시아, 남과 북, 애정과 애욕 사이를 오가면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묻고 있다. ”

- 이효인 

“내가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의 분단 상황이 한국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박광수

<그 섬에 가고싶다>(1993)  한국전쟁 당시 한 섬마을을 배경으로 좌우익의 대립과 비극, 상처와 화해를 그려낸 영화.      
<그 섬에 가고싶다> 촬영현장(1993)에서 박광수 감독(가운데) 

◀ “내 작품의 주제는 <한국사회의 현실>입니다. 그것을 그리려다 보니 자꾸 분단 문제가 거론될 뿐이에요.”

- 박광수

▶ “전태일은 사실 실존인물을 다룬 거지만 전태일이란 인물을 전적으로 파고들어간 영화라기보다는 60년대, 70년대를 바라보던 그 당시의 지식인을 현재와 비교해보면서 현재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행할 것인가, 이런 화두를 던졌던 거였어요.”

- 박광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6) 1960년대 서울 의류회사에서 근로환경개선을 위해 투쟁하다 근로조건 개선을 촉구하며 1970년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일대기를 당시 지식인의 눈을 통해 제시한 영화. 이 영화의 제작비 일부를 일반 공모로 모금했는데, 7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에 응했다. 

“아마 장선우 감독은, 한국영화의 역사가 시작된 후 가장 많은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감독일 것이다. 그에겐 사회적 금기를 조롱하는 듯한 자유로움이 있었으며 끊임없이 사회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도 싸웠다. … 

그의 영화는 언제나 당대의 전위였고, 포괄적 의미의 정치적 영화였으며, 풍자와 비판 사이에서 날카롭게 도려낸 현실의 단면이었다.”

- 김형석

장선우(1952~ )

1970년대 중반 반독재 투쟁으로 체포, 군대 징집, 감옥생활 후 영화평론가이자 미학운동가로 활동하다 1986년 <서울황제>의 공동 연출자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그는 <성공시대>(1988), <우묵배미의 사랑>(1990), <경마장 가는 길>(1992), <화엄경>(1993),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꽃잎>(1996), <나쁜 영화>(1998), <거짓말>(1999) 등을 연출하였다. 자본주의 시대의 성공신화를 우화적으로 비판한 <성공시대>를 제외한다면 그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일상 민중, 혹은 지식인의 이중적인 삶을 포착했다. 또한 불교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 허무적인 시각을 종종 드러낸다. 90년대 그가 만든 영화들은 언제나 한국영화계 안팎에서 논쟁의 중심에 섰다. 2002년 대규모 예산을 들인 <성냥팔이소녀의 재림>의 흥행 실패 이후 영화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문제적인 감독 중 한 명이다.         

<성공시대>(1988) 장선우의 두 번째 연출작이자, 단독 감독 데뷔작.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성공을 향해 돌진하다 비극적으로 파멸하는 주인공의 행로를 과장되고 우화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성공시대>(1988) 촬영현장에서 장선우 감독(가장 우측)    

◀ “초창기엔 주로 풍자적이고 재미있고 우화적인 것들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은 검열이 주는 외적 조건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마당극 활동을 통해 얻어진 감성적 훈련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 때문이죠.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해서 영화 속에서 다시 표현하고 싶습니다.”

- 장선우

▶ “<우묵배미의 사랑>에서는 사회적, 계급적 전형이나 전망은 일단 접어두고 그 묘사의 진실성에만 치중했습니다.”

- 장선우

<우묵배미의 사랑>(1990) 하층민 유부녀와 유부남의 불륜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각으로 그려냈다. 남녀의 사랑 보다는 민중들의 삶의 소박함과 건강함에 카메라를 비춘다.      
<경마장 가는 길>(1991) 영화 보기

“세계를 볼 때 절대적인 객관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주관적인 관찰자를 벗어난 객관성은 없다는 겁니다. 원작에서의 문체도 R이 가지고 있는 주관성과 화자가 가지고 있는 객관성을 동시에 표현하는 구조였어요. ”

- 장선우

<경마장 가는 길>(1991) 한국사회에서 포스트모던 논쟁을 일으킨 동명의 소설 원작. 프랑스 유학 후 귀국한 R은 답답한 한국사회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며, 프랑스에서와 달리 자신을 피하려 하는 J와 섹스를 둘러싼 줄다리기를 벌인다. 원작 속 지식인의 위선에 대한 자기 반영, 자기 비판적인 시각이 영화에도 투영된다. 이 작품에서부터 장선우의 영화적 실험이 본격화된다.   
<화엄경>(1993) 선재라는 소년이 어머니를 찾아가는 과정을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불교식 우화로 녹여내었다. 1994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알프레드 바우어 상을 수상했다.  
화엄경(1993) 촬영현장에서 장선우 감독(우측)

◀ “나는 종교로서의 불교도는 아니지만 하나의 철학 및 인식체계로서의 불교에는 큰 매력을 느낀다… 주관과 객관을 넘고 정과 동을 동시에 수용하며, 비극과 희극을 동시에 추구하는 그런 화엄의 세계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한 앞으로도 이런 실험은 계속할 생각이다.”

- 장선우

▶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어떤 특정 경향이나 이념적 수식어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데서 오는 장선우 감독 특유의 가벼움을 견지하면서 현시대에 대한 총체적 반어를 기도하고 있다.”

- 이정하

▶ “진정성을 배반하는 것에 대한 풍자나 비판이 진정성 자체에 대한 의심과 뒤섞여 억압에 저항할 이유를 박탈하고 있으면서 억압에 도전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 김종엽

 <너에게 나를 보낸다> 촬영현장에서 장선우 감독(가운데)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당시로써는 높은 수위의 성묘사와 지식인, 진보주의에 대한 자기 반성 및 조롱으로 개봉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꽃잎>(1996)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 시위 군중이 학살당한 “광주항쟁”을 영화의 무대로 올렸다. 이 영화는 광주항쟁에서 어머니를 잃고, 충격으로 정신이상에 빠진 소녀와 공사장 인부로 일하는 부랑자 남성간의 가학과 피학의 관계를 그렸다.

“같은 걸 반복하는 걸 워낙 싫어한다. <꽃잎>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시작했다. 돌아보지도 않았고. 다음엔 뭘 할 것인지 관심 있을 뿐이다. 난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고, 절실함 때문에 하는 거니까.”

- 장선우

“하고 싶었던 소재를 다루었다기보다는 스스로를 씻어내고, 광주의 무게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에서 시작한 작품이었다 .”

- 장선우

정지영(1946~ )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했다. 초기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몇 편의 영화를 연출하였다. 그의 영화와 사회관이 전환한 것은 6월항쟁 이후의 사회분위기, 무엇보다 할리우드영화 직배 반대투쟁을 거치면서였다. 직배반대투쟁에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던 그는 1990년, 한국전쟁 기간 남한 내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공산주의자들을 다룬 <남부군>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의 잔학함과 그들의 내면적 상처를 다룬 <하얀전쟁>(1992), 한국인들에 미친 할리우드 영화의 정신적 영향을 비판적으로 다룬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등을 발표했다. 90년대 후반 작품이 특별히 호응을 받지는 못했으나, 2012년 개봉되어 한국 사법제도를 비판한 <부러진 화살>(2011), 군사정권의 고문상을 고발한 <남영동 1985>(2012)를 연달아 발표하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남부군>(1990) 냉전과 군사독재 시기에 금기시되었던 한국전쟁 기간 중 남한에서의 빨치산들의 활동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 빨치산 구성원의 신념과 희생이 휴머니즘적 입장에서 그려진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좌파와 우파로부터 모두 다소간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학생들이 지적하는 게 어떻게 빨치산을 신념으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그릴 수 있느냐는 것인데, 나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어요. 어떤 집단, 조직이든 그렇게 신념으로만 뭉칠 수 없다고 봅니다. 만약 내가 그런 조직에 들어갔다면 끊임없이 그 조직에 대해 회의하고 점검하면서 그 조직과 함께 커 나간다고 생각해요.”

- 정지영

<남부군>(1990)에 이어 정지영은 또 하나의 금기를 깨는 영화 <하얀전쟁>(1992)을 연출한다. 이 영화는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포장되었던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의 숨은 본질을 폭로한다.        

◀ “원작에선 용병이란 개념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이걸 더 구체화시켜 이 전쟁이 경제 도약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정부의 의도였다는 것 등이 드러나야겠다. 그리고 원칙 없는, 명분 없는 전쟁에 임했을 때 그 전쟁 상황은 어떠했을까를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들을 취재하는 동안에 가다듬었습니다.”

- 정지영

▶ “할리우드 직배영화의 규모가 전 세계에서 6위인 나라 남한,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의 이익 규모가 전 세계에서 2위인 도시 서울, 그 한복판에 자리한 ‘한국영화의 할리우드’ 충무로에서 영화를 한다는 것은 어떤 역사와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일까? 정지영 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그 패배의 연대기를 따라가는 자기 성찰의 영화이며, 한편으로 가슴이 빠개지도록 사무치는 충무로 키드들의 내면의 황폐하고 치욕적인 자기 비판의 센티멘탈리즘이다.” 

- 정성일

정지영이 1994년 연출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온갖 할리우드 영화로 청소년기의 기억이 잠식당한 한 시나리오 작가의 비극적 삶을 비판적으로 돌아본다. 이 영화는 1988년 이후 직배 투쟁에 헌신했던 정지영 감독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제42회 산세바스찬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

“난 보편성을 찾는 편입니다. 하지만 어느 한 개인이 경험한 특수한 것 혹은 특정 집단의 공통적 경험 등은 중요시하지 않아요. 난 나의 얘기를 하는데 있어 시간과 역사적 상황을 가능하면 배제시킵니다. 내가 욕심이 큰지 모르지만, 그럼으로써 100년이 지나더라도 살아 움직이는 매개로서 존재하게 하고 싶습니다.”

- 이명세

이명세(1957~ )

이명세는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 중에서는 이질적인 성향을 가진다. 그는 사회운동이나 영화운동을 통해 한국사회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다른 감독과 달리, 기존 한국영화계 내에서 성장했으며 탈현실적이고 예술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다. 대학 영화과를 나와 1982년 배창호 감독의 연출부로 본격적으로 영화수업을 시작한 그는, 이후 배창호의 주요 작품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1989년 <개그맨>으로 데뷔하여 1990년대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1), <첫사랑>(1993), <남자는 괴로워>(1995), <지독한 사랑>(1996),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4년간의 휴지기를 가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2005년 <형사 dualist>, 2007년 <m>을 연출하였다. 그의 영화들은 사실적이거나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양식적이며 표현적, 몽상적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사실주의를 주조로 한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영화 감독들 중 그를 돋보이게 만든다.         

<개그맨>(1989)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우연히 총을 가지게 된 삼류 개그맨, 변두리 이발소 주인, 정체 모를 여자 세명의 좌충우돌 로드무비. 꿈과 현실이 모호하게 뒤섞이는 한여름밤의 꿈과 같은 영화다.              
<개그맨>(1989) 영화 보기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한낱 꿈속의 꿈인가,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인가”라는 안성기의 내레이션이 영화의 대미를 만드는 <개그맨>은 “숙명적으로 대중 예술일 수밖에 없는 영화의 신기루 같은 느낌”과 “인생과 영화”에 대한 이명세 감독의 표현이었다. "

- 김형석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1) 신혼부부의 일상의 결들을 섬세하고, 아기자기하게 포착한 영화. 이명세 특유의 인공적 공간감과 소품의 배치가 눈에 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촬영현장에서 이명세 감독(왼쪽에서 두번째)      

“삭막해져 있는 현실 그리고 무겁고 심각한 영화들에 경의를 표하는 한국영화계에 대드는 경쾌한 반란”

- 김홍숙

<첫사랑>(1993) 대학교 1학년 여주인공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환상적이고 인공적인 화면으로 담아낸다. 이명세 고유의 스타일이 확립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완벽주의자인 이명세 감독은 원하는 느낌이 나올 때까지 세트를 열두 번이나 다시 짓도록 했다고 한다.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이 80년대 가장 낭만적인 한국영화였다면, 90년대엔 <첫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 이동진

“저는 영화를 통해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흔적을 남겨놓음으로써 시간을 붙잡고 싶은 것입니다.”

- 이명세

199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었고,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와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다. 다른 한편 90년대 후반 한국영화산업은 급격한 양적 성장세를 보였으며, 산업적 시스템이 갖추어진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도래했고, 강제규,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홍상수, 이창동, 김기덕 등 새로운 후속 세대가 부상했다. 이 시기에 코리안 뉴웨이브 역시 끝이 난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대략 10년 만의 일이다. 

참고문헌

. 이효인, 한국의 영화감독 13인, 열린책들, 1994 외

제공: 스토리

Curator — Cho Jun-Hyoung, Korean Film Archive
Publisher — Yoo Sungkwan, Korean Film Archive
English translation — Free Film Commun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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