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는 신라 동궁 안에 있던 인공연못이다.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안압지로 불 렸으나 신라 사람들은 월지라고 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연못과 주변 건물터에서 3만여 점의 문화재가 출토되었다. 월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문화재는 신라 왕실과 귀족의 화려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월성 맞은 편 연못은 오랫동안 경주 사람들의 휴식처로 사랑받았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에 시인‧묵객은 이곳에 기러기와 물오리가 노니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만들었다 전하며 주변의 밭 사이로 주춧돌과 섬돌이 남아 오래 전 이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케 했다.

출토품 가운데 “동궁아東宮衙” 명문이 있는 자물쇠가 있다. 동궁아는 동궁東宮의 관리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아래로 여러 부서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월지악전月池嶽典있다. 월지는 연못의 이름이며 악전은 조경을 담당하는 부서이다. 신라시대 이곳에는 동궁이 있었으며, 연못의 본래 이름도 ‘월지’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잊혔던 신라 때 이름을 되찾았다.

1974년 연못을 단장하고자 준설하던 중 ‘습비부習比部’, ‘한지漢只’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75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연못과 주변 지역의 발굴에 착수하였다. 조사 결과 건물터 26곳, 담장터 8곳, 인수시설과 배수시설, 석축 등을 확인하고 총 3만 3천여 점의 문화재를 수습하였다.

기존까지 신라의 유물 대부분은 무덤이나 사찰터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월지 출토품은 궁궐 건물의 부재나 궁중의 실생활용품이란 점에 차이가 있다. 아울러 대부분이 펄에 묻혀 공기와 차단되어 있었던 까닭에 매우 양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문무왕이 연못을 조성한 이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재위 927~935)이 고려의 첫 임금 왕건王建(재위 918~943)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일 때까지 신라와 운명을 함께한 월지와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을 통해 신라의 왕실 문화를 살펴본다.

연못을 파다
문무왕 14년(674) 2월,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 삼국사기
기와와 전돌
월지에서는 모두 24,000여 점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단일 유적에서 발굴된 것으로는 가장 많은 양이며, 종류와 무늬도 다양하여 통일신라 기와 및 전돌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치미는 용마루 양쪽 끝에 다는 기와로 재앙으로부터 건물을 지키는 벽사적 기능 뿐 아니라 건물을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는 장식적 역할도 한다. 월지에서는 이와 동일한 형태의 치미 조각이 약 20여점 출토되었다. 능골의 단면이 반원형을 이루고 중앙은 크게 휘어져 올라가 있다. 능골과 몸통에는 한 줄의 돋을선을 돌리고 몸통에는 보주寶珠 무늬를 넣었다.

녹유를 입힌 용 얼굴 무늬 기와이다. 녹유 기와는 중요한 건축물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특수한 기와이다. 전면 가운데에 용의 얼굴 정면상을 꽉 차게 나타내었으며, 양감量感이 강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의 추녀마루 끝에 부착·사용한 것으로써 뒷면에는 고정시키기 위한 반원형 고리가 세로로 달려 있다.

6세기 전반에는 고구려의 영향으로 꽃잎 끝이 급격히 축소거나, 백제에서 많이 볼 수 있듯 둥근 꽃잎을 가진 무늬를 넣었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 다른 나라와 구분되는 신라식 연꽃무늬가 등장하였다. 7세기 중엽까지 이어진 이 시기의 연꽃무늬는 꽃잎은 홑잎으로 중앙에 능선을 넣었으며 양감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보상화는 연꽃무늬와 다양한 식물무늬를 결합한 상상 속의 꽃이다. 보상화에는 두 종류가 있는 데, 연꽃무늬를 변형해 만든 8엽의 꽃과 사횡으로 표현한 꽃에 잎과 줄기를 자유롭게 배치한 것 이 있다. 보상화무늬는 7세기를 전후하여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처음 등장했고 당나라를 거쳐 신라에 소개되었다. 신라에서는 수막새나 전돌의 무늬로 많이 사용했는데, 다양한 변화를 주어 화려함을 더했다. 보상화무늬 수막새는 전통적인 신라 기와의 무늬를 크게 바꿔 놓으며 통일신라 전 시기에 걸쳐 널리 활용되었다.

가릉빈가迦陵頻伽는 불교경전에 나오는 가공의 새로 사람의 머리를 갖고 있으며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가릉빈가무늬 수막새는 월지 이외에도 황룡사지, 분황사, 삼랑사지 등에서도 출토되었다.

두 마리의 새가 나란히 서서 하나의 가지를 물고 있다. 새의 위아래로는 연꽃이 있고, 외곽 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슬무늬를 돌렸다. 월성, 감은사터 등에서도 이와 같은 형식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녹유綠釉는 토기 표면에 바르는 유약의 하나로, 잿물이나 규산硅酸에 연단鉛丹을 넣고 발색제로 철을 섞어 만든다. 녹유기와가 출토된 곳은 월성, 월지 등 궁궐이나 사천왕사 터四天王寺址, 감은사 터感恩寺址 등 나라에서 건립한 대형 사찰인 성전사원成典寺院과 같이 중요 건축물에 한정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겹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는 통일신라 수막새를 대표하는 무늬이다.

암막새는 암기와 열의 끝을 마감하는 기와로 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종류로 구분된다. 신라의 기와는 고온으로 구워 회갈색을 띤다. 막새면은 끝단을 보강하여 두껍게 만든 뒤 무늬를 넣었는데, 당초무늬를 넣은 것이 가장 많고 이외에 인동무늬, 초화무늬를 넣은 것도 있다. 무늬의 구도는 양끝에서 뻗어 나온 덩굴이 중앙에서 교차하여 대칭을 이룬다. 간결한 줄기와 무늬 사이의 적당한 여백이 안정감을 준다. 이와 같은 암막새는 경주 사천왕사 터四天王寺址와 월성해자月城垓子 등에서도 발견된다. 대체로 660~680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은 바닥에 깔거나 건물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월지에서는 바닥에 깔았던 전이 다량 출토되어 당시 화려했던 궁궐건축의 편린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월지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전은 윗면을 보상화로 장식하여 통일신라 초기에는 이 문양이 매우 성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보상화무늬 전의 측면에는 주로 용과 두 마리의 사슴무늬가 표현되는데, 월지에서는 사슴을 새긴 전이 많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에는 사원을 제외한 궁궐건축에서는 사슴무늬가 유행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고대 건물 주위 바닥에는 일반적으로 무늬가 없는 전을 깔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다만 사찰의 법당 주변 등 주요 지역에는 용무늬 전으로 장식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 전의 윗면에는 중앙에 연판, 그 외측에는 커다란 보상화무늬를 두고 네 모서리에는 별개의 꽃잎을 장식하였다. 특히 옆면의 사슴무늬는 양감이 적당하고 주위에 넝쿨무늬를 화려하게 배치하여 구도면에서 완벽한 균제감을 느낄 수 있다. 월지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제작 연대는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경으로 추정된다.

측면에 “조로 2년(680년) 한지벌부 출신인 소사벼슬의 군약이 3월 3일에 만들었다…調露二年 漢只伐部君若小舍 三月三日作康…”라는 글을 새겼다. ‘한지벌부 漢只伐部’는 당시 신라 육부 중의 하나인 한지부漢只部를 가리킨다. 육부는 초기 신라를 구성했던 부족집단과 해당 집단이 거주했던 지역을 의미했지만 점차 수도의 행정단위로 변모하였다. 수키와 가운데에도 ‘한漢’이나 ‘한지漢只’라는 명문을 새긴 것을 여럿 볼 수 있는데, 이는 한지부에서 납품한 기와라는 의미로 각 부가 공사 자재를 분담하여 공급했음을 보여준다.
같은 곳에서 출토된 「儀鳳四年의봉사년」(679년) 명문이 있는 암키와가 함께 문무왕대 월지를 착공했다는 기록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윗면 중앙에 여덟 개의 잎을 가진 보상화를 넣었다. 네 모서리에도 무늬가 있는데, 주변을 끼워 맞추면 십자형 꽃무늬가 된다. 측면에는 당초무늬 사이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사슴을 넣었다.

목제품
한국은 대부분의 토양이 산성으로 땅속의 유기물이 쉽게 부식된다. 따라서 목재, 섬유 등의 유기물 재질의 문화재가 남아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월지는 연못 아래 펄 층이 있어 일부 목제품이 부식되지 않고 남을 수 있었다. 월지에서는 당시 건물의 부재, 기록물인 목간, 생활용품 등 다양한 목제품이 발견되었다. 다른 유적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로 당시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마름모꼴 6면, 육모꼴 8면을 가진 14면체 주사위이다. 면마다 한자로 서로 다른 동작을 기록했다. ‘술 석잔을 한 번에 마시기(三盞一去)’, ‘혼자 노래 부르고 혼자 마시기(自唱自飮)’, 마음대로 노래를 청하기(任意請歌)’와 같이 술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아마도 주연酒宴 시 흥을 돋우기 위한 놀이도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귀족의 풍류나 흥취를 엿볼 수 있는 물건이다. 월지 서북쪽 호안석축의 펄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굴 이후 보존처리 과정에서 소실되었다. 현재는 복제품을 전시 중이다.

1975년 월지 연못의 동쪽 석축 바로 앞에서 뒤집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월지 위에 띄워놓았던 목선木船으로, 1척의 완형과 2척분의 파편들이 수습되었다. 목선임에도 불구하고 못 바닥에 가라앉아 산소가 차단된 진흙 속에 묻혔기에 썩지 않고 발견되었다. 완형의 배는 세 쪽의 나무를 통째로 파내어 배 모양을 만든 뒤, 배의 미물과 고물 쪽에는 참나무로 다듬은 비녀장 모양의 막대기를 배 안쪽 바닥에 하나씩 가로질러 조립하였다. 이러한 배는 통나무배에서 구조선構造線으로 넘어가는 반구조선半構造線의 형태이다. 전체 형태를 알 수 있는 나무배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못의 물높이를 조절하는데 썼던 것으로 못 북쪽의 배수시설 구멍에 꽂힌 채 발견되었다. 앞에 둥글게 튀어나온 손잡이가 있다.

금속공예
금속공예품 중에는 의·식·주와 관련된 유물이 많아 당시 왕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음식 담는 그릇과 숟가락을 비롯해서 금동문고리, 옷걸이, 용머리장식 등이 있다. 금동가위는 당시 뛰어난 금속공예 수준을 보여준다.

월지에서 발견된 용 얼굴 무늬 문고리이다. 부릅뜬 눈과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도록 크게 벌린 입 등 동적인 모습이다. 둥근 손잡이는 입에 물려 있다. 크기와 모양이 매우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틀에서 주조한 뒤 도금한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월지에서는 보상화무늬를 맞새김 기법으로 장식하고 가운데에 둥근 고리를 단 문고리도 출토되었다.

납작하게 찌그러졌지만 본래 둥근 형태였다. 몸통의 표면에 2조의 돋을선隆起線帶을 등간격 으로 긋고 사이에 선새김 기법으로 당초무늬를 새겼다. 위 아래로 작은 구멍이 있다.

금동 용머리 장식은 월지에서 두 점이 나왔는데, 하나의 틀에서 주조한 듯 비슷한 모습이다. 툭 불거진 눈, 벌름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코, 날카로운 송곳니 등을 보면, 상상의 동물인 용이 실제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될 만큼 매우 사실적이다. 선새김으로 용의 비늘과 갈기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귀와 갈기의 가장자리는 짧은 선을 촘촘하게 새겨서 장식하였다. 머리의 뿔과 입 안의 혀는 따로 만들었다. 뿔은 머리에 뚫린 구멍에 끼우는 것이고(오른쪽 사진), 혀는 바닥에 못으로 고정시켰다. 머리 뒷부분의 가장자리에 고정시킬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 끼워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지에서는 실제 생활에 사용된 청동제 대접, 접시, 숟가락 등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일상생활 용기가 많지 않으므로, 월지에서 출토된 이러한 그릇들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보주寶珠 모양의 꼭지가 달린 뚜껑과 대접이 한 벌을 이룬 청동 그릇이다. 대접에는 끝이 밖으로 벌어진 높이 1센티미터 정도의 굽이 붙어있다. 뚜껑은 대접과 맞물릴 수 있도록 끝이 안쪽으로 조금 들어갔다. 뚜껑의 안쪽과 대접의 바깥쪽 바닥에 두 그릇이 한 벌임을 알 수 있도록‘仇’자를 새겼다. 이 대접과 비슷한 모양의 다른 대접에는 글씨가 없어, 특별히 뚜껑이 있는 이 그릇에만 글씨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등잔의 심지를 자를 때 쓰는 가위로 월지에서 발견되었다. 원래는 금동이었으나 지금은 도금 부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가위의 손잡이는 넝쿨모양을 응용하여 만든 유려한 형태이고, 가위의 앞면은 선새김 기법으로 넝쿨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넝쿨무늬 이외의 바탕 면은 모두 구슬무늬새김 기법으로 꼼꼼하게 채웠다. 가위의 날 부분에는 잘린 심지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반원형 테두리 두 개를 양쪽으로 붙였는데, 가위를 오므리면 그 테두리가 원형을 이룬다.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했던 궁중생활을 떠올리게 할 만큼 매우 세련된 디자인의 금속공예품이다. 이것과 형태나 용도가 비슷한 가위가 일본 나라[奈良]의 쇼소인[正倉院]에 보관 중이다. 쇼소인에 보관된 문화재들은 대부분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당시 통일신라와 일본 사이의 활발했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철제품
가래·보습·쇠스랑·호미·낫·작살 등의 농어구, 망치·도끼·송곳 등의 목공구, 투구·검·창·화살촉 등의 무기, 그리고 발걸이·말띠드리개·재갈 등의 말갖춤이 발견되었다.

‘ㄷ’자형으로 몸통에 ‘東宮衙鎰동궁아일’이란 글씨를 새겼다. 이 명문은 월지 지역이 동궁이었다는 사실과 말해준다. 이 외에도 ‘思正堂北宜門사정당북의문’, ‘合零闡鎰합령천일’ 명문이 있는 자물쇠도 발견되었다. 동궁의 부속건물로 사정당思正堂, 북의문北宜門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동쪽 호안 펄에서 발견되었다. 맨 위에 반구형半球形의 덮개가 있고 위로 장식을 꽂았던 구멍이 2개 뚫려 있다. 아래는 두 장의 오목 한 철판을 맞붙여 둥근머리 못으로 고정하였다. 함께 출토된 쇠비늘札甲은 투구 하단 가장자리에 있는 구멍과 연결하여 목과 어깨를 가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의 투구로는 유일한 것이다.

불교조각
금동판불, 화불, 금동불 등 형태와 제작 방법이 다양하고 시기도 7세기에서 10세기 초에 걸친 것들로 통일신라의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제3건물터를 중심으로 연못 안의 펄층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경주 월지에서는 많은 불상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와 같은 판불板佛이 10점 출토되어 주목된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아랫부분에 촉을 단 흔적으로 보아 어딘가 꽂아 두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판불은 금속판을 틀에 대고 두드려 만든데 반해, 월지 판불은 밀랍蜜蠟을 이용하여 주조鑄造한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중앙의 본존불이 있고 그 좌우에 보살을 배치하였다. 본존은 민머리에 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통통하다. 화려한 연꽃받침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설법인說法印의 손갖춤을 하였는데,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을 행할 때 맺었던 손모양인 초전법륜인初轉法輪印이다. 좌우의 보살은 본존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며 손에 연꽃을 쥐고 있다. 머리를 틀어 위로 묶은 보계는 정면에 꽃모양의 장식이 있는 머리띠로 묶여 정돈하였다. 가슴은 불룩하고 허리는 잘록하여 삼곡三曲 자세가 더욱 두드러진다. 광배는 맞새김으로 여러 무늬를 표현하였다. 뒷면에는 밀랍띠를 가로와 세로로 얽어 넣어 심을 만든 자국이 남아 있다.

경주 월지에서 출토된 판불은 모두 10점으로, 그 가운데 2점은 삼존불 형식이며, 나머지는 모두 단독의 보살좌상菩薩坐像이다. 이 보살상은 합장合掌한 손갖춤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삼존불상과 양식, 제작기법 등이 동일하다. 통통한 얼굴에 머리의 높은 보계는 꽃모양의 장식이 있는 띠로 묶었고, 양 어깨로 보발寶髮이 늘어져 있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두 손은 가슴 앞에서 합장하고 있다. 대좌 아랫부분에 좌우로 길이가 다른 두 개의 촉이 있어 이 조각상 역시 어딘가 고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천의天衣는 마치 날아오르는 듯 어깨 위로 부풀어 올라 광배의 넝쿨무늬로 연결된다. 광배 가장자리는 불꽃무늬로 마무리하였다.

월지에서 출토된 광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배모양舟形으로 당초문과 화염문을 맞새김하였다. 윗부분에는 서있는 작은 불상이 있다. 금속판 중앙에는 불상의 촉과 끼워 넣던 구명이 뚫려있다. 광배의 크기로 볼 때 불상은 20cm 정도였을 것이다.

The excavated artifacts include 26 pieces of craftwork featuring a single incarnate Buddha. The face was simply outlined without any detailed description and most of them depicted a canopy used to shield a Buddha statue. Given the elaborate casting technique and the succinct design with clouds minimally expressed as dots, they are estimated to have been made in the mid-8th century or earlier.

The two-figure incarnate Buddha consists of one Buddha and another making an offering or putting his hands together as if in prayer. Decorations featuring this kind of Buddha come in various types, including one with two Buddhas standing on clouds without a canopy above them, and another bearing clouds decorated with or without cintamani.

All of the ornaments adorned with the triad Buddha feature seated Buddha, with the exception of one piece. The triad Buddha are depicted riding on clouds with a canopy above them. Artifacts featuring this kind of Buddha are very few in number, compared to other counterparts. It is estimated that each of the triad Buddha must have been attached to the upper part of the aureola of a Buddha statue

These two pieces of ornaments were depicted incarnate Buddha paying respect to Sarira: two featuring a three-story pagoda on the back of elephants and horses and one with a seated Buddha putting his hands together on the back of an elephant. Each ornament has a protrusion like their other variants or cintamani, but it is not confirmed whether they were actually fitted into the aureola of a Buddha statue.

Cintamani-shaped ornaments come in six types: those with nothing attached; those with a flame design; those with an incarnate Buddha design; those with a cloud design; those with a flowery design; and those on bronze plates. With the exception of those with a flame design, all the others were made of crystal inlaid on a Buddha statue and, in most cases, the crystal cintamanis were placed on clouds to represent the splendor of the heavenly world.

불상의 광배나 금동번금동번金銅幡 등을 장식했던 것으로 제2~4건물 터에서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화불化佛과 보주寶珠로 구분된다.
화불은 형식상 독존獨尊, 이존二尊, 삼존三尊, 화불, 천인상天人像, 천개天蓋, 보주, 사리봉영상舍利奉迎像, 신장상神將像 등으로 분류된다. 독존형식 화불은 26점이 출토되었다. 얼굴은 세부묘사를 생략하고 윤곽만 표현하였으며 대부분 천개를 표현하였다. 주조기법이 섬세하고 도안이 간단명료하며 구름무늬가 단순한 점으로 볼 때, 8세기 중반 또는 그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존형식 화불은 부처와 공양상 또는 합장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름을 타고 있는 이존화불은 천개가 없는 것도 있으며 구름에 보주를 장식한 것과 없는 것 등 형태가 다양하다. 삼존형식 화불은 입상 1점을 제외하면 모두 좌상이다. 구름을 타고 있고 위로 천개가 있다. 삼존화불은 다른 화불에 비해 수가 매우 적은데, 광배 상단에 하나씩 부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봉영상화불은 코끼리와 말의 등에 삼층탑을 실은 특이한 도상이 2점, 그리고 코끼리 위에 합장상이 앉아있는 도상이 1점으로 총 3점이 있다. 모두 화불이나 보주와 마찬가지로 촉이 달려 있지만 불상 광배에 꽂아 장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천인상화불은 80여 점으로 숫자가 가장 많다. 불상 광배에 천인상을 가장 많이 장식하였음을 보여준다. 천인상 가운데 악기 를 연주하는 모습의 주악천인상은 4점에 불과한데, 대금, 퉁소, 비파 등을 연주하고 있다.
보주는 독립보주, 불꽃보주, 화불보주, 구름보주, 꽃보주, 동판銅板보주 등 여섯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화불보주를 제외하면 모두 수정水晶을 감장하였다. 수정은 주로 구름 위에 넣어 화려한 천상세계의 이미지를 나타냈다.

토기
완형을 포함하여 복원이 가능한 1,600점의 통일신라 토기가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청자와 백자파편도 출토되었다. 단일 유적에서 이처럼 방대한 양의 도자제품이 발견된 것은 처음으로 토기의 편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제까지 알려진 통일신라의 토기는 대부분 무덤에서 발견된 것들로 부장용으로 사용한 것이지만, 월지에서 수습된 것들은 궁중에 썼던 실생활용품이기 때문에 궁중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1975년 월지에서 발견된 아궁이와 연통煙筒을 갖춘 풍로이다. 위쪽에는 두 종류의 음식물을 동시에 끓이거나 데울 수 있도록 크고 작은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릇을 놓는 자리의 바깥 부분에 점토로 띠를 덧붙여 화력의 소모를 막았다. 풍로 외면 위쪽에는 새가 날개를 펴서 날아가는 모습을 도장무늬로 한 바퀴 돌렸으며, 중간에는 점줄무늬를 연속적으로 찍었다. 풍로 안쪽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어 실제로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월지 출토품들은 궁중에서 사용했던 실생활품이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유물의 제작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여러 개의 다리가 있는 백족연百足硯과, 원통형 받침이 있는 것 두 종류가 있다. 비교적 고온에서 구워 흑회색을 띠는데, 이 중에는 먹이 묻어 있거나 오랫동안 사용하여 벼루면이 닳은 것도 있다.

칠기
서쪽과 남쪽 연못가의 석축 아래 펄층에서 용기류와 특수용도의 칠공예품이 40여점 출토되어 통일신라 칠기연구의 새장을 열었다.

불단佛壇을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꽃잎 8개가 한조를 이룬다. 각각의 꽃잎 표면에는 꽃과 나비모양으로 오린 얇은 은판銀板을 붙이고 그 위에 옻칠을 한 뒤, 무늬부분의 칠막을 긁어냈다. 이와 같은 기법을 평탈平脫기법이라 하는데, 당시 당나라에서도 유행하였다. 일본 쇼소인 소장품 중에도 이 기법을 사용해 만든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일면을 짐작케 한다.

옥, 석, 뼈제품 등
월지 출토품 가운데는 돌・유리・뼈로 만든 것도 있다. 곱돌蠟石로 만든 제품은 주로 그릇과 장식품이다. 그릇은 대접・뚜껑・작은 단지 등이 있는데, 대체로 금속제 용기와 형태가 같다. 납석제 장식품은 사자상獅子像이 있는 향로 뚜껑과 문진文鎭 등이 있다. 이 외에 건축부재인 돌난간, 새와 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뼈장식 등은 당시 화려했던 궁중생활을 짐작케 한다.

월지에서 발견된 사자 향로 뚜껑으로 곱돌이라는 무른 재질을 이용하여 사자상을 정교하게 조각했다. 바닥에 구멍을 뚫어 입과 코, 귀로 향이 나올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사자는 정면을 향하여 허리는 꼿꼿이 세우고 뒷다리는 부려 앉은 자세이다. 갈기는 정수리부터 몸통 뒷면까지 좌우 대칭으로 나누어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눈동자는 검게 칠하여 생동감을 더하였으며, 발톱 끝을 날카롭게 세워서 바닥을 짚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자상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작품으로 손꼽힌다.

꽃과 새무늬가 새겨진 뼈장식으로 월지 배수시설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진흙 속에 묻혀 있었기에 상태가 양호한 편이 다. 길쭉한 동물뼈의 한 쪽을 잘 갈아낸 뒤 일정한 간격으로 작은 구멍을 뚫고 구멍과 구멍 사이에는 새와 꽃을 번갈아 음각陰刻하였다. 새는 두 마리가 한 쌍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날개를 펴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다. 이와 유사한 새무늬가 새겨진 바둑알이 일본 쇼소인에도 보존되어 있어 양국간의 문화교류 양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꽃무늬는 꽃잎과 줄기, 좌우로 퍼져 있는 잎이 잘 표현되었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새와 꽃무늬 등을 통해 당시 화려했던 궁중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병풍屛風 또는 탁자의 가장자리 장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최근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7년부터 “동궁과 월지” 동편을 발굴하고 있다. 현재 동해남부선 철로 북측에 해당하는 가 지구(6,575㎡) 조사 결과, 대형건물군 및 동궁 창건기에 속하는 명문기와가 발견되어 동궁의 전체 규모는 현재 정비된 영역보다 훨씬 넓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월지관
국립경주박물관 월지 출토품을 살펴볼 수 있다. 월지관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것이다. 신라식 벽돌을 쌓아 올린 외벽에 기와를 올린 단순한 외관은 전통적인 창고에서 이미지를 따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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