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고 조선(朝鮮) 영조(英祖) 27년(1751) 광주유수(光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중수(重修)하고 침괘정(枕戈亭)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이 부근은 옛부터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였다는 설이 전하고 있고, 또 이 건물 우편에는 군기고(軍器庫)가 있어 명(明)나라 사신 부총병(副摠兵) 정룡(程龍)이 총융무고(摠戎武庫)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이 부근에는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비교적 규모가 크며 높이가 높다.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형식이다. 남측의 2칸열에 우물마루를 간 마루방을 두었으며 그 나머지는 건물 3면에 걸쳐 난간 없는 툇마루를 두르고 그 안쪽에 온돌방이 구획지어 길다랗게 축조된 평면형태이다. 양측면과 전면 퇴각열의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온돌방을 비롯한 그 나머지 부분의 천장은 격자형의 우물천장을 설치하고 있다.
네모지게 대충 다듬은 자연석 주춧돌 위에 각기둥이 세워졌으며 굴도리를 사용한 전형적인 2고주 7량가의 가구구조를 갖추고 있다. 공포는 주심도리 부분에 출목도리 없이 주심부분에만 이익공을 짜올린 것으로서 주간 사이에 화반과 주심부분에는 첨차를 사용한 조선후기의 익공계 양식이다.
온돌방과 마루방의 외부쪽 각 면에는 궁판이 이는 2짝의 세살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고 온돌방 내부의 칸막이 부분에는 유사시 접어서 들어 올릴 수 있는 4짝의 세 살 분합문이 모두 설치되어 있다. 온돌방은 모두 전면쪽 툇마루 밑을 파고 내려간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어 고멕이 벽쪽에서 불을 때게 되어 있고 후면쪽 화계시설 첫 단 부분에 전벽돌로 축조된 높은 굴뚝이 있다.
비교적 길게 내밀어진 처마는 처마의 안허리곡이 앙곡에 비해 급하게 휘어져 있으며 지붕의 기와 끝은 와당으로 처리되어 있고 양측면 합각벽은 풍판으로 처리하고 있다. 건물 내/외부 모두 모로단청으로 깨끗이 채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