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호胎壺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왕자·왕녀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산봉우리에 안치하는데 사용된 용기이며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행해졌다. 태호의 안치는 먼저 내호에 태를 잘 싸서 담고 이것을 다시 큰 외호에 넣어 끈으로 뚜껑을 몸통과 묶어 밀봉한다. 그리고 태지석胎誌石과 함께 큰 석함에 넣어 지하에 매장하고 작은 태비胎碑를 세워 기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태를 안치하는 것은 김유신의 태봉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는 태를 신성시하였던 우리 선인들의 산물이라 하겠다. 태를 담는 항아리는 15세기 중엽까지 분청사기가 사용되었고, 15세기 말경부터는 주로 백자가 사용되었다.이 항아리는 조선 전기에 사용된 내·외호가 갖추어진 인화문 분청사기 태호이다.먼저 내호는 장란형 몸통을 가진 항아리에 꼭지가 달린 접시 모양의 뚜껑이 덮인 날씬한 기형을 가진 것이다. 그 중 항아리는 내만하는 아가리에 어깨부분이 둥글게 벌어져서 몸통의 최대경을 이루고 몸통은 팽이모양으로 아래쪽이 점점 좁아지다가 평저부로 이어진다. 어깨부분에 뚜껑과 몸통을 고정시키기 위해 만든 고정을 위한 고리형 귀가 네 곳에 서로 대칭하게 배치되고 몸통 상단부를 중심으로 외벽에 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문양은 아가리 아래와 몸통 상부에 음각된 평행집선문이 둘러지고 그 중간 즉 네 귀가 달린 부분에는 백상감의 국화문이 인화되며 몸통 중간에는 침선으로 파상집선문이 조잡하게 세로 방향으로 시문되어 있다. 뚜껑은 오목한 접시 모양이며 정상부에 부착된 고리형 꼭지에도 네 개의 구멍을 두어 몸통 네 귀와 고정되도록 하고 있다.다음 외호는 전기한 내호와 대동소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기형이 장대하면서 안정감을 주고 몸통 외벽의 인화문이 전면에 시문되면서 상·하단에 각각 집선거치문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국화문을 가득 채운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의 태호로서 내·외호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도자기와 사회풍속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