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비닐 위에 문자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그려나간 작품이다. 언뜻 보면 흰 바탕에 먹으로 획을 긋는 동양 전통의 서예와 비슷해 보이지만, 비닐과 아크릴 물감이라는 재료의 특성은 한지와 먹이 갖는 속성과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기본적으로 먹은 종이에 흡수되며 발색되는 것으로, 물을 머금은 정도에 따라 진하게 보이기도 흐리게 보이기도 하는 것으로 동양화로부터 화업을 시작한 이응노는 이러한 속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물감을 전혀 흡수하지 않는 속성의 비닐은 검은 색을 검은 색 그 자체로 발색되게 할 뿐 아니라 동양화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번쩍거리는 표면을 가졌으며, 그 속성상 산업화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동양 전통을 연상케 하는 문자 형상들과 서로 밀어내는 듯한 형국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과감한 시도는, 이응노가 자신이 속한 문화의 전통을 새로운 현대의 것과 과감하게 만나게 하고 동양의 것을 서양의 것과 만나게 했던 다양한 시도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