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 3년(1899)에 '신문환무 장헌광효(神文桓武 莊獻廣孝)'라는 시호를 올리고 만든 장조의 금보이다. 장조는 이복형인 효장세자[후에 진종으로 추존]가 요절한 후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하여 1년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뒤주에 가두어 8일만에 돌아가시게 하였다. 영조는 장례 때 친히 나아가 스스로 신주(神主)에 제주(題主)를 하면서 나라를 위하여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으나 곧 뉘우쳐 위호(位號)를 복위시키고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다. 1776년 정조(正祖)가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광무(光武) 3년(1899) 고종이 장조(莊祖)로 추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