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일제 치하 시절 함경도에 영흥학교, 전라도 목포에 목포학원, 1942년 안산 선감도에 선감학원 등 감화원을 설치하여 식민지 지배 정책에 철저히 순응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하였다. 열악한 수용 시설, 외부와의 접촉 차단,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 유린, 자급자족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노역이 있었다. 탈출시도로 인한 사망, 구타 또는 영양실조,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씹다가 독버섯류를 잘못 먹어 죽는 경우 등 수많은 어린 소년들이 희생되었던 그 곳! 지금의 경기창작센터!
그리고 나는 소년들의 피 비린내가 베어있는 이 곳, 바로 옛 선감학원 터 그 건물에서 먹고, 자고, 작업을 하며 사는 작가다. 한 끼니 만 굶어도 핑~도는 것이 죽을 것만 같고, 시간 반도 되지 않는 아트농장의 잡풀 제거 작업에도 다리가 후덜덜, 하고 싶은걸 못하게 되기라도 하면 주둥이가 됫발은 나오기가 일쑤인데 하물며 소년들인데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뎌갔을지...
소년들의 조막손으로 채석하여 방조제를 만들어 바다가 육지가 되어버린 선감동. 현재는 다양한 염생식물과 아름다운 갈대밭으로 변한체로 버려져있지만, 1946년 선감학원의 수많은 아이들을 동원, 희생시켜 금싸라기와도 같은 소금, 인간이 인간을 짓밟는 힘의 원천이 되었던 염전의 옛 터 위에 작업을 설치하게 되었다. 동물들도 먹을 만큼만 사냥을 한다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왜 음식도 땅도 편의를 위해 만든 화폐까지도 쌓아두려 안달을 부리게 되는 걸까? 아마도 정신병이지 싶다. 해방된지 이제 겨우 70년이 지났다. 이겨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하자. 사라진 바다는 어부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했고, 배는 버려졌다. 어부들은 희망을 잃고 지금의 내수면을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어부는 깊고도 긴 한숨을 내 쉬었으리라 아니 곡을 했으리라. 이 나라 어디 한 곳 곡소리가 나지 않았던 곳이 있을까!
아픔을 이겨낸 척, 그런 일은 없어다는 듯이 살아내고 있는 그들을 태우고 여행을 떠날 배를 갈대 밭 위에 띄워 놓았다. 일 나갈 채비를 하는 어부의 희망에 찬 거친 숨소리와 만선을 본 듯한 상상을 하며 갈대밭 위에 배를 띄웠다. 전쟁도 선감학원도 염전도 없었던 그 바다위에 어제 밤 새로 수리해 놓은 어망이 잔득 실려 있는 비린내 나는 배를 갈대밭 위에 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