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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 동방삭화찬

조선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 대한민국

중국 서진의(西晉) 하후담(夏侯湛)이 지은 동방삭화찬(東方朔畵贊)을 왕희지가 해서체로 쓴 것을 새긴 석각이다. 왕희지 해서(楷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것으로 그가 50세 때 쓴 것이다. 후반부 일부가 탈락(脫落)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부(大夫)의 이름은 삭(朔), 자는 만천(曼倩)으로 평원(平原) 염차(厭次) 사람이다. 위(魏)나라 건안(建安) 연간에 염차를 나누어 악릉군(樂陵郡)으로 하였으므로 또 그 고을의 사람이 되었다. 선생은 한무제(漢武帝)를 섬겼는데 『한서(漢書)』에 그 일이 상세히 실려 있다. 선생은 뜻이 크고 대단하며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고 임기응변에도 뛰어났다. 혼탁한 세상에서는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하찮은 벼슬을 하였다. 구차하게 세상에 나와서는 도(道)를 바르게 펼칠 수 없다고 여겨 유유자적히 지내면서 세상을 도외시하였다. 세상을 도외시해서는 교훈을 내릴 수 없으므로 올바른 간언을 하여 절개를 밝히려고 하였다. 절개를 밝혀서는 오랫동안 편안히 있을 수 없으므로 우스갯소리를 하여 임금의 은총을 취한 것이다. 그 도를 깨끗이 하면서 그 자취는 더럽게 하고, 그 본 바탕은 맑게 하면서 그 외적인 것은 더럽게 하고, 느슨함과 긴장을 하면서도 사악한 짓은 하지 않고, 나아가고 물러서면서도 사람들을 떠나지는 않았다. 원대한 마음과 넓은 도량에 해박한 지식과 넉넉한 지혜에 대단한 재주를 가지고서 기개가 드높고 사물에 해박하였고, 모든 종류의 일에 부딪혀도 능력이 많았으며, 변화에 적응하여 계산을 분명히 하였으며, 심오한 지혜로 미래를 알았다. 『삼분(三墳)』·『오전(五典)』·『팔삭(八索)』·『구구(九丘)』와 음양학(陰陽學), 도참학(圖讖學) 그리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모든 학파의 이론까지 두루 통달하여 민첩히 논변하였다. 사람의 운수를 미리 아는 술수, 맥을 짚고 약을 짓는 기예, 활쏘고 말타고 글 쓰고 계산하는 기술 등을 정밀히 연구하고 그 이치를 궁리하여 익히지도 않고서 그 교묘한 경지까지 다하였다. 눈길만 가도 입으로 술술 나오고, 귀로 스치기만 해도 마음으로 기억하였다. 그는 지혜롭고 활달하였으며 도량도 넓었다. 경상(卿相)을 능멸하고 호걸(豪桀)도 조롱하였으며, 만승(萬乘)의 임금을 희롱하기를 동료처럼 하고, 높은 관직에 있는 이를 보기를 초개草芥처럼 여겼다. 높은 절개는 일반 사람을 뛰어넘었고 고상한 기개는 세상을 덮었다. 모든 사람 가운데서 뛰어났으며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이라고 부를 만하다. 논평하는 이들은 또 말하기를 “선생은 대지의 맑은 기운을 마신다. 묵은 기운은 뱉어내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여 매미처럼 허물 벗고 용처럼 변화한다. 세상을 떠나 신선이 되었으며, 귀신같은 재주는 조물주와 친구처럼 지내고, 죽어서는 영혼이 별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것 또한 기괴하고 황홀하니 상세히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대인(大人)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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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왕희지 동방삭화찬
  • 제작연도: 조선
  • 권리: 국립고궁박물관
  • 재료: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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