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추상과 ‘파리동양미술학교’(1970년대)
고암은 1960년대 중반부터 문자를 활용한 새로운 추상 작업에 몰두하여 ‘문자추상’이라는 새로운 작품을 발표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서 익힌 서예를 토대로, 자연의 형태를 추상화하거나 음과 뜻을 획과 점이라는 조형적 형태로 표현한 한자에서 또 다른 동양적 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초기 문자추상 단계에서는 주로 평면 위에 상형문자와 같이 변형된 서체와 한지 위에 번진 수묵의 우연적인 효과가 어우러진 서예기법을 현대추상으로 재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면, 후기 문자추상 단계에서는 문자 자체의 기하학적인 형상들을 해체하고 변형하여 다시 재구성하는 경향이 주를 이뤘다. 1970년대 그는 한글과 한자가 가진 추상적인 패턴에 주목하고 이것을 다양하게 조합하면서 무수한 변주를 창조하기에 이른다.
한편, 1964년 고암은 세르누쉬 파리시립동양미술관(Musée Cernuschi) 내에 파리동양미술학교(Acadé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를 설립하여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유럽인들에게 한국화와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파리동양미술학교는 세르누쉬 미술관장인 엘리세프(V. Elisseeff)와 함께, 아르퉁(H. Hartung), 술라주(P. Soulages), 후지타(Fujita), 자우키(Zao Wou-Ki)등 세계적인 작가와 국제적인 인사들의 발기와 후원 하에 설립되었다. 이는 유럽 내 설립된 유일한 동양미술 교육기관으로, 고암은 파리동양미술학교를 통해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던 유럽인들에게 한국화를 보급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