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의 사적을 기념한 비석으로 신라 왕족의 가계, 왕의 업적, 유언 등을 기록하였다. 비의 말미에는 “화장을 하고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典葬以積薪, 滅粉骨鯨津)”는 내용이 있다. 국학소경國學少卿 김□□金□□가 글을 짓고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글씨를 썼다. 조선시대의 관리 홍양호洪良浩(1724~1802)는 『이계집耳谿集』에서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 비를 찾고자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고, 이후 36년이 지난 후에야 비편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해동비고海東碑攷』에 이 비를 수록하고 1817년 비의 하단을 발견 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청나라에도 전해져 유희해劉喜海(1794~1852)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도 소개되었다. 김정희는 건립 연도를 687년으로 추정하고 낭산 남쪽에 있는 비석받침에 들어맞는다고 하였다. 김정희가 맞춰보았다는 비석은 현재 사천왕사지 앞에 있는 거북 모양 비석 받침으로 추정된다. 문무왕비는 이후 다시 사라져 탁본으로만 전해오다 1961년 하단 부분을, 2009년 상단 부분을 다시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