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엔의 중추로 대한민국을 수호하다

6·25전쟁에서 UN군의 핵심 축을 담당했던 미국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한국에 도착한 미 해병대유엔평화기념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미국에게 유엔의 가치아래 연합군 지휘권을 행사하는 권한을 위임하면서 미국 정부에게 유엔군사령관으로 맥아더를 임명할 권한을 부여하였습니다.  유엔사는 이처럼 유엔안보리 결의 82, 83, 84호에 의해 만들어진 다국적 군사기구로 1950년 7월에 창설되었고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 구성에 22개 국가가 참여하였으며 전체 병력의 90%는 미군이었습니다.

미국 공군 항공 허가증유엔평화기념관

6·25전쟁에 가장 먼저 투입된 부대는 일본에 있던 제8군 제24사단이었습니다.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제21연대 제1대대가 사단의 선발대로 6월 30일 오후 3시 부산 수영 비행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낙관적이었던 미국의 생각과 달리 스미스 대대는 7월 5일 최초의 교전이었던 오산전투에서 400여 명 중 150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는 큰 피해를 입게되었습니다. 여섯 시간 15분 동안의 이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의미 있는 전투임이 분명했습니다.

낙동강 전선의 미 해병대,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진주 인근에서 작전하는 미 해병대,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창녕지역 전투에서 휴식을 취하는 미 해병들,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창녕근교에서 작전지도를 검토하는 미 해병대,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북한지역에서 행군하는 미 해병대,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횡성지역에서 진격하는 미 해병대 병사들,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간략히 보기자세히 알아보기

1950년 8월~9월의 낙동강 방어선 전투, 1950년 9월 15일 5,000분의 1의 확률로 성공한 인천상륙작전 , 11월부터 12월까지 혹한과 싸워가며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낸 장진호 전투, 그리고 20만여 명의 민간인과 군인을 철수시킨 흥남철수작전 등 미군은 국군과 함께 불리하던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맥아더 자료유엔평화기념관

"한국으로부터 철수하지 않는다!"

“한국으로부터 철수하지 않는다”는 맥아더 원수의 지침에 따라 1950년 8월 중순까지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부산 교두보를 확보합니다.

평양에서 맥아더 장군을 맞이하는 워커 장군유엔평화기념관

전선이 밀리고 밀려 낙동강 전선까지 온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유엔 지상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끝까지 대한민국을 사수하기로 결심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타임지-월튼 해리스 워커 육군 장군 표지유엔평화기념관

Stand or Die! 지키지 못하면 죽는다!

"지키지 못하면 죽는다! 지켜라 그렇지 못할것 같으면 죽어라! 죽기를 각오하고 지켜라! " 필사의 각오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워커장군과 대원들은 낙동강 이후로 더이상 적의 침략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기로 유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이끌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열세에 밀린 전쟁에서 기적같은 승리를 만들어 냅니다.

사다리로 넘는 병사들 사진(인천상륙작전)유엔평화기념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은 인천 지역의 파도 높이와 상륙지점 점검 등의 세밀한 준비끝에 상륙작전 허가를 요청했으나 미 합참은 이에 부정적이었고 특히 갯벌 천지인 인천항의 해안 환경 때문에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은 5000천분의 1이었지만 맥아더는 원수 계급장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오히려 불가능에 가까운 환경이 완벽한 기습 공격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라이프지 - 인천상륙작전유엔평화기념관

불가능을 극복하고 한국을 구한 인천상륙작전

맥아더의 계획은 강행되었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진하여 평양을 탈환하였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게됩니다.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 4개 사단을 맞아 4차 공세를 막았고 중공군 제 5차 공세 이후 휴전 협상이 전개되는 동안 피의 능선전투, 단장의 능선전투, 불모고지전투, 삼각고지전투 등의 진지선을 수행합니다.

북한 지역에서 성조기를 꽂는 미군병사들,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간략히 보기자세히 알아보기

장진호 전투:“후퇴라니, 말도 안돼!” Retreat, Hell유엔평화기념관

장진호 전투 : 후퇴라니,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중이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함경남도 장진군 지역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중국군 제9병단에 속한 3개 군단 병력과 벌인 전투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여 북한의 수도 평양까지 점령, 임시수도인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장진호에 해병대 만 2천명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진호 일대에 국경을 넘어온 중국군 12만 명이 매복되어있었고 해병대는 10배가 넘는 적들에게 공격당하게 됩니다.

장진호 미 해병대유엔평화기념관

이들의 적은 중공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는 중공군 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장진호 전투:“후퇴라니, 말도 안돼!” Retreat, Hell유엔평화기념관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포함하여 세계 3대 동계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의 살인적인 추위는 총열이 얼어붙어 사격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북한 장진지역의 미 해병대유엔평화기념관

장진호 전투는 미국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철수 사례 전설적인 후퇴 작전이기도 하였습니다.

장진호 전투:“후퇴라니, 말도 안돼!” Retreat, Hell유엔평화기념관

미 해병1사단의 감투 덕분에 동부전선으로 진격했던 다른 미군과 국군 부대, 그리고 10여만 명의 피란민들이 철수 할 수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진호 전투:“후퇴라니, 말도 안돼!” Retreat, Hell유엔평화기념관

1950년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벌어진 이 전투의 생존자는 '장진호에서 선택 받은 이들(The Chosen Few)' 라 불립니다. 전투에 참여한 미 해군 1사단은 4418명의 전사상자를 냈고 748명이 사망했으며 192명이 실종됐습니다.

군용 스노우 슈즈,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방한장갑과 방한용 모자,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울 침낭,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반지형 라이터,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추위에서 살아남기 핸드북 (Cold fact for keeping warm),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간략히 보기자세히 알아보기

흥남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탱크들유엔평화기념관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

장진호 전투에서 시간을 끌고 있을 무렵, 1950년 12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진했던 미군과 국군이 피난민과 함께 함경남도 흥남항에 몰려 서둘러 철수를 시작합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흥남철수작전유엔평화기념관

함흥에서 가까운 흥남 부두에는 국군과 미군 병력 10만 5천명과 2만 대에 가까운 차량, 3만5천여 톤의 전투 물자가 이동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 해군은 125척의 수송선을 동원했지만 배는 절대 부족했습니다. 12월 15일 철수를 시작한 배에 엄청난 피난민이 부두로 몰려들었습니다. 김백일 소장과 현봉학 통역관은 피란민들을 배에 태워달라고 미군에게 요청하였고 알몬드 장군이 유엔군사령부를 설득하여 피란민을 포함한 흥남철수작전을 펼쳐 10만명이 가까운 피란민이 자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흥남부두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군용차량들유엔평화기념관

12월 24일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났었던 배는 매러디스 빅토리호로 이 배의 선장 레오날드 라루에는 피란민을 태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배에 있던 화물과 무기를 버리고 1만 4천명에 달하는 피란민을 태웠습니다. 사흘의 항해 끝 거제도에 도착한 피란민의 수는 다섯이 늘어나 있었는데, 배에서 태어난 이 아기들에게 미군은 '김치'라는 애칭을 붙였습니다. 12월 25일에 마무리 된 이 흥남철수작전을 '크리스마스 기적'이라고 합니다.

본국으로 귀환하는 미해병제1사단 병사들유엔평화기념관

22개 유엔 참전국 중 가장 많은 연인원 180만여 명을 파병한 미국은 전사 3만 4천 여 명, 실종 약 3,700여 명 등 약 13만 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6·25전쟁 정전후 본국으로 철수 하는 미 해병 제1사단 마지막 부대유엔평화기념관

전쟁 수행과정에서 미군은 유엔군이 수행한 역할의 대부분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도적으로 전쟁을 운영하였습니다.

휴전 후 본국으로 철수하는 미 해병제1사단유엔평화기념관

미국은 결과적으로 참전을 결정하면서 설정한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여 유엔의 목적과 목표인 '국제평화의 유지와 안전'이라는 유엔의 목적과 목표에 기여하였습니다.

미 공군 비행사 헬멧,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미 공군 구명조끼,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미군 패치,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미국 공군 나침반,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미국 제 1해병사단 패치,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
미 해군 모자, 제공: 유엔평화기념관 컬렉션
간략히 보기자세히 알아보기
참여: 모든 표현 수단
일부 스토리는 독립적인 제3자가 작성한 것으로 아래의 콘텐츠 제공 기관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보기
관련 테마
한국의 비무장지대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역사, 자연, 예술의 관점에서 살펴보세요
테마 보기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맞춤형 Culture Weekly를 통해 새로운 소식을 확인하세요

완료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첫 번째 Culture Weekly가 전송됩니다.

Google 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