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월 흑인 인민 회의(the Black People’s Convention)는 스티브 비코가 해방운동에 기여한 점을 고려하여 만장일치로 그를 명예의장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고, 앨레드 스터브즈(Aelred Stubbs)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는 '커뮤니티 개발의 모범(a showcase for community development)'을 구축했습니다.
"나는 자유의 투사임을 자처하고자 하며 지금까지 누군가 물을 때마다 그렇게 밝혀 왔다."
- 비코
1977년 8월 스티브 비코는 자유를 향해 달려온 그의 마지막 여정에 착수했습니다. 당시 3년간 핵심 정치 세력 즉,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범아프리카 회의(the Pan African Congress; PAC)와 신통합 운동(the New Unity Movement) 간의 통합을 주도했습니다. 1977년 이전에 이미 그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이었던 로버트 망갈리소 소부크웨(Robert Mangaliso Sobukwe) PAC 의장과 직접 면담했습니다.
로버트 망갈리소 소부크웨, 범아프리카 회의(PAC) 창립자 및 초대 의장(1959-1963)
1977년 8월 17일, 비코와 그의 동료 피터 존스(Peter Jones)는 신통합 운동의 지도자인 네빌 알렉산더(Neville Alexander)와 통합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케이프타운을 향해 떠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레이엄즈타운(Grahamstown)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기다리던 외스투이젠(Oosthuizen) 중위 일당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포트엘리자베스(Port Elizabeth)의 악명 높은 보안부대에 배속됩니다.
포트엘리자베스 특수부대는 요한 쾨체(Johan Coetzee)및 블라크플라스(Vlakplaas) 부대와 같은 고위급 아파르트헤이트 요원과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이 요원 중 한 명이 아파르트헤이트의 '고급 스파이'였던 크레이그 윌리엄슨(Craig Williamson)으로, 그는 라르스 군나르 에릭손(Lars Gunar Eriksson)이 이끌던 스웨덴계 국제대학교환기금(International University Exchange Fund; IUEF)에 잠입하여 부회장까지 지낸 바 있습니다. 윌리엄슨은 군 '복무' 중에 정보기관에 발탁되었습니다. 이전에 남아프리카학생동맹(National Union of South African Students; NUSAS) 부의장으로 진보정치 세력에 관여한 점과 이후 망명을 위한 도주로를 주선한 점을 정치적 이력으로 활용하여 일부 해방운동 세력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IUEF에 진입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비코의 구금 및 사망은 그가 올리버 탐보(Oliver Tambo)를 만나기 위해 비밀리에 출국하려던 시점이었습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어요.”
- 크레이그 윌리엄슨, 스웨덴 외교관이자 '스웨덴과 남아공 해방운동(Sweden and the Liberation in Southern Africa)'의 저자인 토르 셀스트롬(Tor Sellstrom)과의 인터뷰에서
IUEF는 흑인의식운동(Black Consciousness Movement; BCM), PAC, ANC 등 남아공의 여러 단체를 지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슨의 일차적인 전략은 자신의 승인 권한을 이용해 '내부적 골칫거리'였던 BCM에 대한 지원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ANC에 잠입하여 해방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지원 동향을 감시하는 것도 그의 또 다른 임무였습니다. IUEF 부회장이라는 직위로 인해 윌리엄슨은 비코와 ANC 임시의장 올리버 탐보 간의 통합 논의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란웨지 해리 넹웨쿨루(Ranwedzi Harry Nengwekhulu)와 타보 음베키(Thabo Mbeki; 전 남아공 대통령)의 주선으로, 보츠와나 독립 10주년이던 1976년 9월 최초의 회담이 추진되었습니다. 회담이 결렬되자 1977년 5월 마세루(Maseru)에서 개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마저 실현되지 못하자 최종적으로 1977년 9월 첫째 주에 보츠와나에서 회동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O.R. 탐보, ANC(아프리카 민족회의) 의장, 1969~1985
1977년 9월 회담에는 비코, 탐보 외에 올로프 팔메(Oluf Palme)도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그는 1976년 선거에서 패배하여 스웨덴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남아공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고자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비코는 보츠와나에서 이 지도자들을 만난 후 즉시 본국으로 송환될 예정이었으며, 이 회담은 IUEF 측에서 주선했습니다.
구금 중 사망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개인적인 안락함이나 안전, 직업이나 고상한 직위, 그리고 가족까지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사상자가 없는 투쟁은 투쟁이 아니다."
- 비코, 진정한 인간성을 찾아서
비코가 체포된 것은 이 회담 예정일을 2주 앞둔 1977년 8월 18일의 일이었으며, 올로프 팔메는 이후 암살당합니다.
포트엘리자베스의 산람(Sanlam) 빌딩 보안경찰 본부 619호실에서는 비코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이 건물은 보통 사무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연인지 인위적인지 몰라도 건물에서 바로 몇 미터 앞 고가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소음으로 이곳이 고문실이라는 모든 명백한 징후가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1977년 9월 11일 그는 산람 빌딩에서의 혹독한 고문 끝에 교도소 내 병원으로 이송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날 밤 시베르트(Siebert) 대위, 윌켄(Wilken) 대위 및 니우트(Niewoudt) 경사는 그를 경찰 지프 뒷좌석에 벌거벗긴 채로 눕혀 놓고 포트엘리자베스에서 프리토리아 맥시멈(Pretoria Maximum) 교도소까지 1,000km 이상을 달렸습니다. 그는 의료진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9월 12일 사망했습니다.
포트엘리자베스(Port Elizabeth)의 산람 빌딩(Sanlam Building)에서 프리토리아 맥시멈(Pretoria Maximum) 교도소까지
"곧 사라질 뜻을 위해 사느니 영원히 남을 뜻을 위해 죽는 것이 낫다."
- 비코
"그를 알게 된 후 지난 3년간, 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온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인물이며 말하자면 그동안 일하면서 만날 수 있었던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확신에 추호의 망설임이 없었다."
- 도널드 우즈(Donald Woods), 데일리 디스패치 인 이스트 런던(Daily Dispatch in East London) 편집인
비코의 장례식에서 앨리스 '맴체테' 비코(Alice 'Mamcete' Biko), 은츠시키 비코(Ntsiki Biko), 아들 사모라(Samora)(2세)
"때로는 역사의 흐름이 억눌린 자의 소망과 열망을 담아 시대를 이끄는 지도자를 전면에 내세울 때가 있다. 스티브 비코가 바로 이렇게 이 시대를 위해 태어난 인물이며 대중을 다시 일깨워주는 자랑스러운 표상이다."
- 넬슨 만델라
—Steve Biko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