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

시인 윤동주가 꾸준히 적어내렸던 영롱한 시어들에는 그의 삶과 실천의 궤적이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고요하면서도 치열했던 그 성찰과 모색의 길목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윤동주 졸업사진(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어려운 식민지 상황에서도 문학을 통해 꼿꼿이 시대와 삶의 방향성을 모색했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현실을 고민하고 성찰하는 시를 한글로 꾸준히 남겼고, 바로 이 때문에 독립운동이라는 죄목으로 수감되어 27세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험에 빠트렸던 시편들은 이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며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육필원고 디테일컷(2019)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의 시  

그가 남긴 124편의 시와 산문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동아시아인이 기억하고, 세계인이 공감하는 시가 되었습니다. 그는 '서시', '십자가', '별 헤는 밤' 등의 시를 통해 맑고 순수한 영혼이 지상에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신념의 길을 걷고자 했던 윤동주의 시는 그 이후에도 각 시대와 청년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미상의 조부 윤하현 장로 수연(1936)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소년 윤동주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과 모친 김용(金龍, 1891—1948)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윤동주 집안은 19세기 말 이곳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명동촌은 민족교육, 독립운동, 신앙생활을 지향한 조선인 공동체의 터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윤동주는 이러한 고향 마을에서 자연스럽게 한글, 한학, 신앙심을 함양하며 자라났습니다.   

윤동주의 은진중학시절 윤동주(1932)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1932년 용정으로 이사한 윤동주는 만 14세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는 동기들과 교내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선수로도 뛰고, 교내 웅변대회에서 1등도 하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던 1934년 12월 24일 윤동주는 성탄절을 기다리며  '초한대' 등의 시를 쓰게 되는데, 이것은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입니다. 그는 이때부터 작품과 창작날짜를 적은 시편을 창작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윤동주의 용정에서 윤동주와 송몽규가 함께 찍은 사진(1935)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1935년 만 17살의 윤동주는 평양 숭실학교 3학년으로 편입합니다. 이곳에는 고향 친구 문익환이 먼저 와있었습니다. 그해 숭실학교의 교지 "숭실활천"에 윤동주의 시 '공상'이 게재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시가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온 것을 보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듬해 미션스쿨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소란스러워져 윤동주는 평양에서 다시 용정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광명학교에 다니며 카톨릭계 잡지 "카톨릭 소년"에 7편의 동시를 발표하였고, 1937년 12월에 졸업합니다.   

윤동주의 윤동주 습작노트 (1934)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소년 윤동주의 창작 노트  

이 시기 소년 윤동주는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이나 백석(白石, 1912-1996)을 비롯한 여러 시인의 문학작품을 탐독하고 일간지에 실린 작품과 평론을 스크랩하기도 하며 시 창작을 시도했습니다. 용정 외가에 들른 동요 시인 강소천(姜小泉, 1915-1963)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습작노트는 두 권인데, 1934-1937년까지 쓴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와 1936-1939년까지 쓴 '창'이 있습니다.   

윤동주의 윤동주 습작노트 에 실린 「나무」(1937)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는 습작기에 알기 쉬운 시어로 동시도 창작하는 등 여러 방도로 시 창작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이 시기 윤동주는 주로 고향마을의 자연과 주변환경을 서정적이며 간결한 시어로 노래했습니다.  '나무'와 '반딧불'과 같은 시에서는 바람, 나무, 길, 별 등 그의 주요한 시적 모티브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나무'를 창작하던 무렵  잡지 "카톨릭 소년"(1937.3.)에 동시  '무얼먹고 사나'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윤동주의 윤동주 습작 노트 에 실린 시 「아우의 인상화」 윤동주 습작 노트 에 실린 시 「아우의 인상화」(1938)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 식민통치 강화라는 현실 속에 탄생된 윤동주의 소년기 습작시에는 시대와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윤동주에게는 남동생 윤일주(尹一柱, 1927—1985), 윤광주(尹光柱, 1933—1962)와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1924—2011)이 있었습니다.  '아우의 인상화' 에는 험난한 식민지기를 살아가야 할 천진한 아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형의 착잡한 심경이 담겨 있습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윤동주의 윤동주 습작 노트 에 실린 시 「남쪽하늘」(1935)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의 습작노트에는 명랑한 동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 '가슴1'과 '꿈은 깨어지고'에서는 역사적 현실과 시대의 아픔을 감지하며 성장하는 소년의 내적 갈등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남쪽하늘'과 '고향집'에서는 두만강 남쪽 조국을 정신적 고향으로 삼았던 윤동주의 애달픈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북간도 지역에서 성장한 그에게 남쪽하늘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한결같이 남쪽하늘의 언어인 한글로 시를 썼다는 것은 그의 정신적 지향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남쪽하늘

제비는 두 나래를 가지었다.
시산한 가을날―

어머니의 젖가슴이 그리운
서리 나리는 저녁―

어린 영은 쪽나래의 향수를 타고
남쪽 하늘에 떠돌 뿐―

1935.10.평양에서

연세대학교 박물관의 졸업앨범에 실린 윤동주와 연희전문 친구들3(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연희전문학교 시절 청년 윤동주  

윤동주는 1938년 4월 경성(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로 유학을 갑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 고향 용정으로부터 경성으로 오는 머나먼 여정을 떠났던 것일까요? 윤동주는 본디 우리말과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였고 더 넓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가득한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식민교육정책 속에서 민족과 세계의 지식과 문화를 온전히 배울 수 있는 곳은 드물었습니다. 윤동주는 미션스쿨 연희전문의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 속에서 꿈꾸던 문학과 학문을 본격적으로 흡수하고자 했습니다.

연세대학교 박물관의 졸업앨범에 실린 윤동주와 연희전문 친구들1(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가 연희전문에서 만난 인연들은 청년 시인 동주의 모습을 알려주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강처중(姜處重,1917–?), 김삼불(金三不, 1920-?), 유영(柳玲, 1917–2002), 장덕순(張德順, 1921–1996), 정병욱(鄭炳昱, 1922–1982) 등은 시인의 짧은 생애 중 가장 빛나는 시기였던 윤동주의 청년기에 관한 귀한 기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들은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인 동주가 찾아오는 이들을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고 그들의 이야기에 다정하게 들어주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연세대학교 박물관의 핀슨관 전경(1928)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연희전문에 입학한 윤동주는 기숙사 핀슨관에서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고향에서 함께 온 송몽규와 새롭게 사귄 강처중과 함께 방을 공유했습니다.  이 시기 마음과 시심을 나눌 동료들을 만난 동주는 그 해에 '새로운 길'을 비롯한 13편의 시, 그리고 산문 '달을 쏘다' 등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국에서 온 다양한 배경의 청년들과 교류하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회현실과 부딪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 동주는 자신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며 삶의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연세대학교 박물관의 졸업앨범에 실린 윤동주와 연희전문 친구들2(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연희전문에서 여러 스승들을 만난 윤동주의 시세계는 더욱 깊고 풍부해졌습니다. 그는 최현배(崔鉉培, 1894–1970)에게 체계적인 한글을, 이양하(李敭河, 1904–1963)에게 영문학을, 손진태(孫晋泰, 1900–?)에게는 민족과 세계역사를 배웁니다. 그는 정인섭에게 세계문학을 배우며 과제로 쓴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배운 바를 바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낸 동주의 모습에 친구들은 놀랐다고 합니다. 그에게 강의실과 캠퍼스는 시창작의 산실이었습니다.    

윤동주 소장도서 모음(2019)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의 스크랩북과 소장도서를 보면, 그의 관심 분야는 다양하여 동서양의 고전, 철학, 예술뿐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각종 사상들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충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프란시스 잠(Francis Jammes, 1868–1938),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등 세계문학도 탐독했습니다. 그는 깊이 있는 독서와 토론으로 닦은 사유를 누구에게나 소통 가능한 쉽고 아름다운 시어로 담아내고자 고민했지요.

연희전문학교의 연희전문 문과대 교지 (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는 1941년 6월 문과대학생 잡지 "문우"에  '새로운 길'과 '우물 속의 자상화' 를 실었습니다.  강처중이 문우회장으로 "문우"의 편집 겸 발행인을, 송몽규가 문예부장으로 편집후기를 담당했지요.  출판 검열로 잡지 전체가 일본어로 출발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윤동주, 송몽규, 김삼불 3인의 시만은 오롯이 한국어로 실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글시를 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던 것일가요?  "문우"는 윤동주의 시가 실린 호수를 마지막으로 종간됩니다. 

윤동주의 윤동주 자필원고 (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탄생  

윤동주 생애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어버린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은 시집입니다. 원래 그는 이를 자선 시집으로 77부 출간하려했지만, 당시 한글 출판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던 상황에서 주변인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에 윤동주는 자필로 시집을 3부 작성하여 1부는 자신이 가지고, 스승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단 한권의 윤동주의 자필 시집은  정병욱에게 선사한 것입니다. 

윤동주는 한국의 역사에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서시', '별 헤는 밤'과 같은 소명과 신념의 시를 남겨, 한국 문학사에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세상이 병든 시대에 타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병원'을 썼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빛이 되어준 '십자가'와 '태초의 아침', '팔복'을 통해 신앙적 성숙의 과정을 아로새겼습니다. '자화상'과 '참회록'에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며 내적 공고함을 통해 저항의 힘을 이끌어내던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윤동주의 윤동주 「서시」 육필원고(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윤동주의 윤동주 「별헤는 밤」 육필원고(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쟘」, 「라이너․마리아․릴케」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써보고,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

...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1941.11.5.   

윤동주의 윤동주 「병원」 육필원고(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뒷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40.12.

윤동주의 윤동주 「참회록」 육필원고(1942)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 24.  

윤동주의 윤동주 「십자가」 육필원고(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5.31.  

윤동주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육필원고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육필원고(1942)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현해탄을 건넌 5편의 시  

윤동주는 1942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10월까지 릿쿄대학(立教大学) 문학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릿쿄대 원고지에 시를 써서 강처중에게 편지로 보냈는데, 「쉽게 씌어진 시」를 포함한 5편의 시가 그가 남긴 마지막 시입니다. 이 시편들에는 고향과 조선 땅을 떠나 제국의 수도에서 유학하게 된 식민지 청년의 자의식이 그가 거닌 이국의 거리와 하숙방을 배경으로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이 시대에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얼까 질문하며 다가올 미래에 대한 비장한 각오를 다집니다.

쉽게 씌여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육필원고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6.3.  

윤동주의 윤동주가 용정에서 또래 친척들과 찍은 사진(1942)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마지막 여름방학의 당부  

윤동주는 릿쿄대학을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교토로 이동하기 직전 여름방학에 잠시 고향마을에 들릅니다. 이때 각지에서 모인 또래 친지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에 그의 인자한 미소가 잘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배와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검문과 검열이 삼엄한 국경을 건너 고향에 도착한 그의 내면은 복잡했습니다. 전시체제 하에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던 동주는 식민지 말기 민족 문화가 말살되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한글로 쓴 인쇄물이라면 무엇이든지 모으라는 당부를 동생들에게 남겼다고 합니다.

미상의 윤동주가 일본 우지강에서 친구들과 찍은 마지막 사진(1943)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청년 시인, 체포되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1942년 도시샤대(同志社大学) 영문과에 편입합니다. 그는 교토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송몽규, 그리고 윤영춘(尹永春, 1912-1978) 등과 함께 우에노(上野) 공원, 비파호(琵琶湖) 등을 산책하며 국내외 정세와 독서에 관한 담소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총력전 시기 일본에서의 상황도 악화되어 조선인에 대한 감시가 삼엄해졌고, 1943년 7월 결국 송몽규와 윤동주도 차례로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며 원고 및 소지품이 압수되었습니다. 

윤동주의 윤동주의 장례식 사진(1945)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교토지방(京都)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의 혐의로 2년 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로 이송됩니다. 윤동주는 가족이 보내준 "영일대조 신약성서"와 함께 투옥의 시간을 견디고자 했고, 동생에게 보내는 엽서에는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 준다. 고마운 일이다’라는 문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형무소에서 여러 고초를 겪다가 1945년 2월 16일 해방을 미처 보지 못하고 운명합니다.  한달이 채 못되어 송몽규도  그의 뒤를 따릅니다.   

매달 오던 동주의 엽서를 기다리던 윤동주의 가족들은 그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전보로 듣게 되었습니다. 부친과 당숙 윤영춘은 황망한 마음을 추스르며 황급히 움직여 그의 시신을 수습했고 그의 유해는 고향 마을에 안장됩니다. 학사모를 쓴 졸업사진은 장례식 영정사진이 되고 말았고, 그가 연희전문 잡지 "문우"에 발표한 두 편의 시가 추모시로 낭독되었습니다. 그해 6월, 윤동주의 묘소에는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비석이 세워졌고, 비로소 그는 '시인 윤동주'라 불리워지게 됩니다.

윤동주의 초판본 (1948)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세상의 빛을 보다  

윤동주 시집은 시인이 낯선 타국에서 온갖 고역과 외로움 속에 세상을 뜬 후, 해방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출간될 수 있었습니다. 1948년 윤동주의 가족과 지인들은 그의 유고 31편을 모으고 시인 정지용의 서문을 더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였습니다. 동생 윤일주가 작품 선별과 편집을, 이정(李靚, 1924-1995) 화백이 시집 표지와 디자인을 담당했습니다. 이루어지지 못했던 한 청년의 소망은 이렇게 남은 자들의 노력으로 실현됩니다.   

윤동주의 증보판 (1955)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1955년에는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이들이 그의 10주기를 기념하여 89편의 시와 4편의 산문을 엮어 증보판을 펴냅니다. 정병욱의 자문으로 동생 윤일주가 편집을 맡았고, 표지는 김환기(金煥基, 1913-1974) 화백이 그렸습니다. 시를 더 많은 실을 수 있었던 것은, 누이동생 윤혜원이 1948년 해방공간을 가로지르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고향집으로부터 윤동주의 중학시절 원고를 서울로 가지고 온 덕분이었습니다.   

윤동주의 증보판 (1968)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1967년도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푸른 표지로 출간됩니다. 박두진(朴斗鎭, 1916–1998), 백철(白鐵, 1908–1985), 문익환, 장덕순 등 시인, 평론가, 지인 등이 이 시집에 윤동주와 그의 시에 관한 회고와 평론을 남겼습니다. 이 시집은 60~90년대 청년들에게 시대적 양심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연세대학생들의 주도로 최초의 윤동주 시비가 핀슨관 앞에 건립됩니다. 이 시비는 동생 윤일주가 설계했고 윤동주의 '서시'친필이 확대되어 새겨졌습니다.  

윤동주 졸업사진(1941)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가 우리 마음에 살아 있다는 것  

윤동주는 자신의 시 '서시'처럼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문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고, 시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었습니다. 삶과 시와 지식과 실천이 한 바탕에 있었기에 윤동주라는 존재와 시편은 누구에게나 근원적인 울림을 줍니다. 그는 결코 내적 고민에 함몰되지 않고 시인의 소명에 천착하며 타인과 소통하고자 했습니다. 각 시대의 청년들은 그로부터 그 시대가 지향해야 할 가치들을 발견해왔습니다. 그는 우리 자신의 비추는 거울입니다.  

여기에서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상여행을 떠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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