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성곽은 인조대에 쌓은 중심성인 본성과 숙종대에 쌓은 외성으로 구분된다. 남한산성에서 봉암성과 한봉성, 신남성 등 외성을 제외한 중심성을 원성(元城)또는 본성이라고 한다. 원성의 범위는 대체로 신라의 주장성과 인조 대에 수축한 남한산성이 상호 겹치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청량산을 정점으로 하여 남북으로 뻗은 줄기의 여맥이 동서로 길게 뻗어나간 자연지형(自然地形)을 이용하여 축조 주로 능선(稜線)을 따라가며 축조하였다.
숙종 12년(1686년) 3월 광주유수 윤지선이 본성의 보강차원에서 외성인 봉암성 축조를 주장함으로써 수어청 소속 군병을 징발하여 50여일 동안 성역과 1,000석 정도의 재원을 확보하여 신축하게 되었다. 그 결과 둘레 962보, 여첩 294타, 암문 4개, 군포 15개를 신축하였다. 이러한 봉암성 신축 사실을 뒷 받침해 주는 금석문인 蜂巖新城丙寅磨崖碑文이 봉암성 자연석 뒷면에 정사각형의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또한 숙종 19년(1693년)에는 수어사 오시복이 한봉 외성을 신축하였다. 봉암성과 달리 한봉성은 폐곡선을 이루지 않고 용도 형태로 한봉 정상부까지 한줄로 성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한봉성의 둘레는 851보이고 여첩이 227개, 암문이 1개였다. 이후 한봉성은 숙종 31년(1705년) 淸人이 성의 일부를 헐어 버렸으며, 영조 15년(1739년) 수어사 조현명이 개축하여 둘레 895보, 여첩이 272타가 되었다. 또 같은해 수어사 민진후의 건의에 따라 봉암성에 2개의 포루를 설치하였으며 장경사 원성부분에도 포혈을 신축하여 장경사 옹성의 대포와 함께 협공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방어력을 증강 시켰다.
숙종 45년(1719년) 수어사 민진후가 이전에 있었던 성터를 다시 개축하고 둘레 743보, 성첩 238타 규모의 성곽을 설치하고 포루 1개를 구축하였는데 이를 신남성 또는 남격대라 한다. 신남성은 원성에서 남쪽 2.6km지점에 있는 검단산(534m) 정상부에 설치된 성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주둔하면서 포격을 하였던 곳이다. 이후 영조 29년(1753년) 돈대 2개소가 수축 됨으로 원성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외성의 완성이 이루어져 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수도권 방어체계가 일단락 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