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궁(行宮)이란 왕이 도성을 떠나 행행(行幸) “행행(行幸)이라는 것은 백성이 거가의 행림(行臨)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거가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는 은택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다 이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제 내 거가가 이곳에 왔으니, 저 백성이 어찌 바라는 뜻이 없겠는가? 옛사람이 이른바 행행의 의의를 실천한 뒤에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으니, 경들은 각각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아뢰라.” 『정조실록』권8, 정조 3년 8월 3일.
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시․능행시․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개 이상의 행궁이 있었다. 그 중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다. 남한산성행궁의 건립연도는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인조실록』등에 나타나는데,『중정남한지』에는 1624년 9월 착공하여 1625년 4월에 건립된 것으로, 『인조실록』에는 1625년 6월 23일에 행궁을 짓도록 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1636.12.14~1637.01.30) 항전하게 된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행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한남루(漢南樓)’는 정조 22년(1798) 광주 유수 홍억이 행궁의 대문이 번듯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건립한 2층의 누문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영사 이폴리트 프랑뎅이 촬영한 사진에서 현판․주련․장주초석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복원된 한남루의 장주초석중 정면 4개는 주변에 있던 본래의 부재를 수습하여 재사용한 것이다.
현판과 주련은 서예가 정도준 선생의 글씨를 받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0호 서각장 이규남 선생이 제작한 것으로,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 헌종 13년(1847)에 홍경모가 편찬한 경기도 광주군 읍지로 <규장각본>, <장서각본>이 있다.
에 기록되어 있는 주련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守一城講龍虎韜(수일성강용호도)
한 성을 지킴에 용호(龍虎)의 도략(韜略)을 강(講)하고,
鎭百里閱貔貅士(진백리열비휴사)
백리(百里)를 누르니 범 같은 용사를 훑어 보도다.
大將軍御下威信(대장군어하위신)
대장군은 아랫사람을 위엄과 신의로 다스리고,
良刺史宣上恩德(양자사선상은덕)
좋은 원님은 임금님의 은덕을 선양하네.
是地兼繭絲保障(시지겸견사보장)
이 땅은 길쌈과 보장을 겸하지만
暇日則雅歌投壺(가일칙아가투호)
한가한 날에는 노래하며 투호하기도 한다네.
縱未能復讐雪耻(종미능복수설치)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恒存着忍痛含寃(항존착인통함원)
항상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