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금석문은 당시 부윤겸수어사 홍전(선조39 1606~현종6 1665)과 별장, 영장, 감역관 등이 목수, 석수, 야장, 이장 등을 동원하여 축성한 내용을 적고 있다. 홍전의 생몰연대로 보아 무인년은 인조16년(1638)으로 생각된다. 원래는 옹성의 끝부분 포루로 나가는 홍예문에 있던 받침돌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무너져내려져 땅바닥에 일부가 묻혀있다. 크기는 가로 115cm, 세로 60cm이며 글자수는 모두 105자로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
이 비문은 仁祖16년(1638) 7월에 남한산성을 증축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이 비문의 내용을 보면
관리책임자인 都廳은 通政大夫 守廣州府尹兼防禦使인 洪전(宣祖39:1606~顯宗6:1665)이고
別將은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崔晩득
領將은 禦侮將軍 行龍양衛司果 宋孝祥
監役官은 前部將 金明律, 前司果 慶以孝, 前部將 金義龍
또한 축성에 동원된 匠人은 木手가 梁南 等 74명
石手는 姜福 等 13명
冶匠은 李己嘆 等 2명
泥匠은 金乭屎 等 7명
*홍전(洪전, 宣祖39:1606~顯宗6:1665) : 본관 南陽, 字 伯潤, 號 竹巖, 洪友直의 아들. 그는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 오달제, 홍익한 등과 斥和를 주장한 인물로, 廣州 府尹에 발탁되어 그후 강계부사, 의주부윤, 경상도방어사, 우승지, 황해도관찰사, 청주목사, 제주목사, 길주목사, 한성좌윤, 충주목사 그리고 한성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광주목를 광주부로 승격시킨 후 두 번째로 부윤으로 제수되어 병조판서 이시백의 건의에 따라 인조 16년 남한산성의 재수룩의 총책임을 맡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