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앞에 배치하는 석물(石物)의 하나로 장군석,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조각물이다. 공복(公服)차림의 문관의 형상으로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량관(金梁冠)을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들고 있다.
능묘 주위에 문인석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의 전한대(前漢代)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신라시대(BC 57-AD 935)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능묘제도가 정비된 이후 조선시대(AD 1392-1910)까지 이어진다. 문인석은 당시의 조각양식을 보여주고 우리나라 능묘제도의 변천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복두
문무백관(文武百官)이 1품에서 9품까지 공복 착용 시 머리에 쓰는 관모로, 각이 지고 위가 평평하다. 통일신라 진덕여왕 때 관복제가 채택되면서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복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왕과 백성이 모두 복두를 썼다는 기록이 <흥덕왕복식금제(興德王服飾禁制)>에 남아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신하들 역시 공복(公服)을 입고 복두를 썼으나,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을 거치며 신하들이 없어진 공복 대신 상복(常服)을 입게 되면서 점차 복두와 공복의 착용이 줄었다.
공복
왕을 알현하거나 나라의 큰 행사,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문무백관이 착용하던 관복의 일종으로, 곡령대수(曲領大袖, 옷깃이 둥글고 소매가 넓은) 형태이다. 신라는 520년(법흥왕 7) 자의(紫衣)·비의(緋衣)·청의(靑衣)·황의(黃衣) 등 4색의 복색(服色)에 의한 공복제도를 제정하였고, 백제는 이보다 앞서 260년(고이왕 27)에 자의·비의·청의 등 3색의 복색을 정한 용복제도를 제정하였다. 고려는 960년(광종 11)에 비로소 4색 공복제도를 정했다. 조선은 건국한 해 12월에 관복(冠服)을 공복으로 입도록 하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나. 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에는 복두와 공복의 착용이 차츰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