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 16년(1638)에 지은 사당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시고 있다. 뒷날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1636) 때 싸우다 죽은 이서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원래 건물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에 왕이 ‘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성내 로터리에서 산책로를 따라 수어장대(守禦將臺)로 올라가는 도중에 위치한다. 사당(본전)과 부속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본전 아래쪽 동측에 사당(부전)이 1동 더 부설되어 있다. 그 맞은편에 전사청이 있고 중앙의 협문을 지나 아래쪽에 강당 건물이 있으며 맨 앞에 솟을삼문이 대문역할을 한다. 남저북고(南低北高)의 지형으로서 외국은 전면쪽 솟을삼문 양옆쪽을 제외하곤 대부분 낮은 막돌담장이 층단지어 둘러쳐져 있다.
본전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신위를 안치한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이다. 전,후면 모두 겹처마인데 공포는 초익공만 있는 익공계 양식이며 전후면 익공의 형태가 서로 약간 다르다. 굴도리가 사용된 1고주 5량가 가구구조로서 종보의 상부 중앙에는 파련대공을 세워 치장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전퇴 및 기단바닥에 방전(方塼)을 깔았는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양측면에만 막돌화방벽을 설치하였고 후면에는 화방벽이 현재는 없다. 원래는 있어야 하는 것이 통례임에 비추어 볼 때 후에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본전(本殿) 바로 아래쪽 2동의 부속시설 중 동측의 건물은 산성 축성당시 총책임자였던 수어사 이서의 신위를 모신 신당으로서 부전(副殿)에 해당된다. 본전과 같이 개방된 전퇴(前褪)를 둔 사당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홑처마이고 풍판이 없이 박공만 달은 맞배지붕으로서 장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형태이고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본전과 같은 형식으로 상면이 둥글게 가공된 주춧돌 위에 기동만 민흘림 원기둥이 사용되었고 내부 바닥에만 포방전이 깔려 있다. 익공이 없는 공포구조이다. 꾸밈이 없이 단아하고 소박한 느낌이 든다. 굴도리가 사용되었으며 1고주 5량가 가구구조이다. 문짝은 전면 중앙칸만 4분합문이고 양협칸은 2분합문이 설치되었으며 모두 궁판이 된다. 양측면과 후면에는 막돌 화방벽이 둘러쳐져 있다. 건물 내,외부 모두 연등천장이고 석간주가칠과 뇌록가칠로 마감되어 있다.
부전은 맞은편(서쪽)에 대칭으로 세워진 건물은 전사청(典祀廳)으로서 향제를 지낼 때 의례 및 제사준비를 위한 시설물로서 구조 및 양식이 간략화되어 특별한 치장요소가 없는 집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형태로서 내부바닥 현재 온돌방이 없이 강회다짐으로 처리되어 있고 전퇴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이 건물은 1고주 4량가의 가구구조로서 잡도리가 사용되었다. 포부재가 없는 모포집이고 개방된 전퇴를 두었으며 홑처마 맞배지붕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전면쪽 지붕 종단길이가 후면쪽보다 긴 비대칭 맞배지붕이다. 풍판은 달지 않았고 박공만 설치하였는데 목기연은 생략되어 없다. 정면 3칸, 모두 2분합문이나 궁판이 없는 세 살문 형식이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세장한 각기둥을 세웠으며 양측면과 후면에는 역시 막돌화방벽을 설치하였다. 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의 형식으로 양퇴간에 온돌방을 배치하고 중앙 3칸에는 마루를 깔은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부 삼문과의 거리는 그리 넓지 않으나 건물간의 고저차는 많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