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는 고려시대에 존재가 확인되는 소수의 고려백자(연질백자)와는 달리, 경질의 백자로서 조선초기에는 주로 왕실에서 사용되었다. 조선백자도 분청사기 등의 다른 도자기와 함께 초기에는 각지의 지방 가마에서 제작하여 관청에 공납하는 공납자기였으나 15세기 후반에 관요인 분원이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분원에서 제작되던 백자 중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 다수 제작되었는데, 특히 청화백자는 백자를 장식하는 문양에 수입안료인 코발트를 사용하고 그림 담당 관청인 도화서 소속 화가들이 당시의 사대부적인 그림을 그려 넣는 경우가 많아 더욱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본체인 항아리의 기형은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지고 어깨가 가장 넓으며 밑으로 갈수록 점차 좁아지는 모양이며 뚜껑은 연꽃 봉오리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뚜껑은 편평한 윗부분에 단차를 두어 손잡이로 갈수록 높아지게 하였다. 유약은 굽과 그 안쪽을 제외하면 뚜껑 안쪽을 포함하여 모두 칠해져 있다. 태토는 우윳빛 백색이며 유약은 약간 푸른 빛이 돌며 맑고 투명하다. 굽의 흔적으로 보아 가는 모래를 받쳐 구웠음을 알 수 있다. 바닥에는 구울 때 생긴 균열이 있다.
문양은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그렸는데, 안료는 약간 탁하고 옅은 파란 색을 띠고 있다. 뚜껑의 손잡이에는 연꽃을 그려 넣어 손잡이가 마치 연꽃봉오리처럼 보이게 하고 그 주변에는 연꽃무늬 띠를 둘렀고, 그 바깥쪽으로는 총 7개의 큰 점을 그려 넣었다. 또한 뚜껑의 옆쪽에도 아래 위로 평생선을 긋고 그 사이에 14개의 점을 그려 넣었다.
몸체에도 윗부분(어깨부분)과 아랫부분에 연꽃무늬 띠를 둘러 화면을 구획하고 그 중간에 청화 안료를 사용하여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그렸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세밀한 붓질로 안료의 농담을 사용하여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주문양이 위치할 부분에 단 한 폭의 그림만을 그려넣어 여백을 살려낸 것이 특징적이다. 정갈한 기형과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회화적 표현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솜씨로 미루어 분원에서 제작한 청화백자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의 청화백자 중에서도 무게중심이 치우치지 않아 기형이 안정감있으며, 뚜껑까지 포함하여 문양이 적절히 배분되어 있으면서도 주문양에는 회화적인 표현과 여백이 잘 드러나 있어 단연 뛰어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문양의 섬세한 표현과 그에 대비되는 문양대의 단촐한 표현의 대조, 그리고 문양의 소재 등에서 조선 초기 사대부 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