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신성을 쌓을 때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비석으로 6세기 대 신라의 지방통치체제와 지방민의 신분구성, 촌락민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남산신성은 경주시 남산의 북쪽 산허리, 해목령蟹目嶺을 중심으로 한 여러 골짜기를 둘러싼 산성山城으로 그 둘레가 3.7㎞에 이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평왕 13년(591)에 경주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남산신성을 쌓았으며, 그 뒤 문무왕 19년(679)에 다시 크게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남산신성비는 2000년도까지 모두 10기가 발견되었는데, 성을 쌓을 때의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34년에 발견된 제1비의 비문에는 591년 성의 축조 당시 공사에 참가한 사람의 관직과 이름, 출신지, 맡은 구역과 함께 3년 안에 성이 무너지면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으며 다시 와서 쌓겠다는 맹세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에는「辛亥年 二月 二十六日」이라는 간지干支가 있어『삼국사기』에 기록된 성의 축조연대가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기록대로 한 집단의 평균 담당거리가 13보 2자였다면, 현재의 성벽길이 3.5㎞의 축성築城에 200여 집단이 참여한 셈이 된다. 그리고 한 집단이 저마다 남산신성비를 세웠을 것이므로 원래는 200여기의 비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산신성 안에는 문무왕 3년(663)에 지었다는 커다란 창고터인 장창지長倉址가 세 군데 남아있다. 이 가운데 북문터 가까이에 있는 중창지中倉址는 군량미軍糧米를 보관했던 창고로 불에 탄 쌀이 발견되었고, 좌^우 창고에는 무기를 보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