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성조 영락제는 명 왕조의 제3대 황제이다. 그의 휘는 체이고, 명 태조 홍무제의 4남이며 어머니는 효자고황후 마씨이다. 영락제는 대외 정벌과 해외 무역로 확장 등의 대외 확장 정책을 펼쳐 주변국을 굴복시켜 조공질서를 명확히 하였다. 이에 베트남이 명에 정복당하여 한때 중국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홍무제 시기에는 연왕에 봉해졌다. 홍무제 사후 조카 건문제의 제위계승 및 제후 숙청 정책에 반발하여 '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난징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후 베이징으로의 수도 천도를 추진하였다. 그는 운하인 회통하를 완공시켜 남북 물자 교류의 교두보를 확보한 후 1421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영락제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건문제가 영락제의 정변에 의해 축출됐을 때 건문제의 스승 방효유는 끝까지 항거하여 그의 가족, 친구, 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847명이 몰살당했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친족, 외족, 처족을 비롯한 십족과 문인, 동지, 그의 서적을 탐독하는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나 첩, 기녀로 보냈다. 이는 '십족을 멸한다' 또는 '영락연간의 오이넝쿨 당기기'라는 유행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영락제는 중국 황제로는 역사상 최초로 다섯 번에 걸친 막북 친정을 통해 몽골 족 등과의 전투를 지휘했다. 이로인해 명은 헤이룽 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요동도사를 설치하고, 여진족은 위소에 편입시켰으며 누르칸도사까지 설치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일본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패권 확립, 베트남의 정벌, 티베트의 회유와 티무르 제국과의 전쟁 준비, 정화의 남해 대원정과 문물 교류 등의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내정에서는 홍무제의 방침을 거의 대부분 계승하면서 황권을 강화하였다. 그의 치세로 명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