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영화 시기에 일본인 감독 하야카와 마쓰지로(早川孤舟)가 만든 최초의 <춘향전>(1923)을 시작으로, 토키영화의 시대를 연 것이 이명우 감독의 <춘향전>(1935)이었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은 한국전쟁 이후 영화제작 붐의 발동을 건 작품이었으며, 최초의 컬러시네마스코프 영화 역시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이었다. 1970년대 한국 최초의 70mm 영화도 <춘향전>(1971, 이성구)이었다.
제작될 때마다 대중을 열광시키고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켰던 춘향전은 영화산업의 부진과 함께 잊혀졌다가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으로 부활했고,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최초의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 되었다.
1923년 제작된 영화 <춘향전>은 당시 인기변사였던 김조성과 개성 기생 한명옥이 이몽룡과 춘향 역으로 출연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완전한 형태의 영화(이전에는 ‘연쇄극’이라 하여, 연극 공연 중에 짧은 필름을 상영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배우를 캐스팅하고 이야기의 실제 배경인 남원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했을 뿐, 영화 제작, 감독 및 각본, 촬영 등 주요 역할은 일본인 스태프들이 담당했다.
《춘향전》은 본래 정확한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는 구전문학으로, 조선 숙종 말 혹은 영조 초에 판소리로 불리다가 소설로 정착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소설의 이본(異本)만도 120여 종이나 되고 제목이나 내용이 이본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근대 들어 소설뿐 아니라 연극, 영화 등으로도 개작되어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기생 딸이라는 미천한 신분의 춘향과 양반 자제 몽룡의 계급을 초월한 사랑은 유교적 신분질서가 엄격하던 시대에 서민들의 신분상승 욕망을 대리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남원부사로 새로 부임하여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고 온갖 만행을 일삼는 변학도의 모습은 부패한 사회를 조롱하는 것이었으며, 한양에서 과거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돌아온 이몽룡은 당시 민중들이 갈구하던 새로운 위정자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조선 최초 토키영화 <춘향전>(1935, 이명우). 춘향 역은 문예봉이, 이몽룡 역은 한일송이 맡았다. 이 작품의 필름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35년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이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1927년 최초의 토키영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가 나왔고, 이 무렵 이후 1930년대가 되면 조선의 극장들도 외국 토키영화 상영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등 토키영화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영화 제작만은 여전히 무성 시대에 머물러있었다.
따라서 <춘향전>의 등장은 조선영화인들의 오랜 숙원을 해결해준 것이었다. 더구나 <춘향전>의 발성 기술은 조선인이 자체 개발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이규환)에서 데뷔한 문예봉은 <춘향전>의 성공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필우는 일본에서 촬영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후 1923년 <장화홍련전>(김영환)으로 조선인 최초의 촬영기사가 되었고 1935년 <춘향전>의 녹음을 맡으며 최초의 녹음기사로 기록되었다.
<춘향전>을 보기 위해 극장 앞에 줄을 선 사람들(《동아일보》 1935년 10월 9일자 광고에 실린 사진)
<반도의 봄>(1941, 이병일)의 영화 속 영화 <춘향전>의 한 장면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로 1935년 <춘향전>이 제작, 상영되었지만 사실 <춘향전>은 조선영화인들의 못다 이룬 꿈과도 같았다.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은 기술적인 여러 결함과 배우들의 어색한 발성 연기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41년 이병일 감독의 <반도의 봄>은 친일 프로파간다 영화로 분류되고 있지만 한편으로 영화 <춘향전>을 제작하는 조선영화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화 속의 영화로 보여지고 있는 <춘향전>은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조선영화에 대한 영화인들의 희망과 열정을 드러낸다.
1955년 <춘향전>은 이규환 감독이 전쟁 중에 시나리오를 썼고 1955년 1월에 개봉하여 서울 관객 18만 명(당시 서울인구 72만 명)이라는 흥행 신기록을 수립했다. “훌륭한 것, 볼만한 것만 만들어내면 국산영화계도 함부로 대한민국 사람들로부터 괄시를 받지 않으리라”(《한국일보》 1955년 12월 22일 기사)는 기대와 흥분을 낳았다.
<춘향전>의 대성공은 이후 사극영화를 필두로 한국영화 제작 열풍을 불러왔고, <춘향전>은 명실상부 한국영화 중흥의 교두보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의 필름은 아쉽게도 유실되었다.
홍성기 감독∙김지미 주연의 <춘향전>. 1961년 1월 18일 서울 국도극장 개봉 (포스터 제공: 양해남 컬렉션)
1961년 《춘향전》 을 영화화한 두 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홍성기 감독 ∙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 ∙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이 그것.
동일한 이야기를 비슷한 시기에 제작, 개봉했다는 점 외에도 한국 최초의 컬러시네마스코프를 겨냥한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두 영화 모두, 감독과 주연 여배우가 부부 커플이었다는 점 역시 영화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공개된 영화를 본 관객들은 <성춘향>에 손을 들어주었다.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홍성기 감독의 작품에 비해 보다 화려한 색감과 입체감을 살려내는 데 성공하였다는 평을 받았으며, 서울에서만 74일간 39만 명을 동원하는 흥행 신기록을 세웠고 일본으로도 배급되는 등 큰 화제를 낳았다.
신상옥의 <성춘향>은 일명 ‘신춘향’으로, 홍성기의 <춘향전>은 ‘홍춘향’으로 불리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당대 최고의 흥행감독이었던 신상옥과 홍성기의 대결은 이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제협) 내부의 갈등으로 옮겨갔다. 당시 한국영화 제작을 위해서는 제협을 거쳐 문교부에 제작 신고서를 접수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제협은 두 영화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양분되었던 것.
<성춘향>과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은 최은희와 김지미의 당시 나이는 각각 36세와 22세였다. 16세 춘향 역을 소화하는 데에는 20대의 젊은 춘향이 보다 적합했을 수도 있겠으나, 당대 최고 스타 최은희와 김지미를 앞세운 <성춘향> vs. <춘향전> 라이벌전의 결과는 <성춘향>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성춘향>에서 이몽룡과 방자 역을 맡은 김진규(좌)와 허장강(우), <성춘향>에서 포졸 역으로 카메오 출연한 김희갑(좌)과 구봉서(우)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은 조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로 빛을 더하였다. 방자 역을 연기한 허장강은 이 영화를 통해 “방자 역을 위하여 태어난 사나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허장강의 방자 연기는 1968년 김수용 감독에 의해 또 다시 제작된 <춘향>으로 이어졌다. 이 밖에도 당대 최고 인기 희극배우였던 구봉서와 김희갑이 포졸 역할로 깜짝 출연하여 극의 재미를 더했다.
<춘향전>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것은 배우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최고의 스타만이 춘향과 이몽룡 역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 1971년 이성구 감독의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은 이는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누렸던 문희였다. 이몽룡 역은 최고의 청춘 스타였던 신성일에게 돌아갔다.
1971년 <춘향전>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제작된 70mm 영화로 기록된다. 《춘향전》을 한국 최초의 70mm 영화로 제작하려는 시도는 이미 1968년 김수용 감독의 <춘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 해 2월에 개봉한 <춘향>은 정작 35mm 필름이었다.
“한국 최초 70mm 영화”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1971년 <춘향전>은 포스터를 비롯하여 신문 광고를 통해 “70mm 대형영화” “입체음향”라는 점을 크게 강조하고 있었다.
2000년 대중에 공개된 <춘향뎐>은 임권택 감독의 97번째 작품으로, 이전의 《춘향전》 소재 영화들과 달리 판소리 완창 공연과 뮤지컬을 혼합하는 색다른 시도를 하였다. 1995년 정동극장에서 열린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 《춘향전》 공연을 담은 기록 필름을 바탕으로, 그가 37세(1976년)에 녹음한 판본을 영화의 음악이자 내레이션으로 활용했다.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칸국제영화제(53회)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춘향뎐>은 극 중 춘향의 나이(16세) 또래의 신인 여배우를 캐스팅하여 제작 당시 큰 화제를 낳았다. 그만큼 임권택 감독이 <춘향뎐>을 연출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춘향과 몽룡의 나이 또래에 있을 법한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었다.
“언젠가는 해야지 하는 생각은 <서편제> 때 했지요. 사실 <태백산맥>과 <축제>를 만들고 난 다음에 내게 정말 와 닿는 이야기를 찍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 나이에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말고 뭘 찍나, 싶은 생각에 소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를 다녔어요. 그런데 자꾸만 ‘춘향전’ 이야기가 가슴에 차오는 거요.”
-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현실문화, 2003) 감독 인터뷰 중에서
“<춘향뎐>의 마지막 장면은 어사또 출두이다. 이 장면에서 임권택은 그의 스펙터클의 진수를 보여준다. ... 이제까지 한국영화에서 소리는 언제나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리를 재현하고, 재현된 화면에 다시 소리를 어우러지게 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현실문화, 2003) 평론가 정성일의 해설 중에서
제작되고 개봉될 때마다 수많은 화제를 낳고 온갖 ‘최초’라는 수식어를 보유한 ‘춘향전’ 영화들.
≪춘향전≫은 지금까지 영화만도 20편 가량 제작되었고, 최근에는 원작의 내용을 살짝 비튼 영화 <방자전>(2010, 김대우)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어쩌면 앞으로도 또 다른 <춘향전>들이 제작되어 관객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만큼 ≪춘향전≫은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하고 사랑 받는 이야기이자 창작자에게 창의의 무한한 원천이 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Curator—Lee Ji-youn, Korean Film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