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음식은 한국 식문화의 정수"
황혜성(1920-2006) 은 한평생 궁중음식문화를 연구, 보존, 계승한 조선왕조 궁중음식 무형문화재 입니다. 그는 사라질 뻔한 궁중음식을 기록하여 한국 최초의 궁중 음식 요리책을 편찬했고, 궁중 음식이 최고로 이상화된 문화의 정수라는 것을 처음 밝혀 내었으며, 궁중 음식을 한국의 소중한 무형문화재로 등재하고 한국 음식 문화를 전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 섰습니다. 음식을 연구하고 만들고 가르치는 것이 삶 그 자체이자 가장 큰 즐거움이 었던 황혜성. 그녀의 생애와 업적을 들여다 봅니다.
황혜성의 쌈 싸는 손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음식은 정성이고 손맛이고 배려예요.”
“궁중음식은 사치스러운 음식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음식입니다. 가장 좋은 제철 재료를 가지고 섬세한 손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 황혜성
어린시절의 황혜성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혜성은 충남 천안에서 손 귀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열 살에 남동생을 볼 때까지 외할머니와 어머니, 젖어미,업분 엄마와 ‘까까엄마’ 라고 부른 스님까지 수많은 어머니들의 기도와 보살핌 속에 자랐습니다.
천안보통학교 입학 직전의 혜성 아기(앞줄 왼쪽), 외할머니 (앞줄 오른쪽), 어머니(뒷줄 왼쪽), 친척언니(뒷줄 오른쪽).
유학시절의 황혜성(1937)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어머니와 외할머니 손에 금이야 옥이야 자라던 황혜성은 머슴 등에 업혀 학교에 다니느라 흙 밟을 일이 없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사촌 오빠의 권유로 여고 시절 일본에서 유학하게 되었고 이 시기 혜성은 독립적인 여성으로 새로운 삶의 원칙을 배우게 됩니다.
교토여자전문학교 가사과에 다니던 혜성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활달한 여성으로 성장했습니다.
첫 교사 부임 기념 촬영한 황혜성(1940)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교토여전을 졸업하고 귀국하자마자 황혜성은 대전에 새로 생긴 대동고등여학교에 부임하게 됩니다. 스무 살의 어린 가사 선생은 사이클, 체조도 가르치고 기숙사 사감까지 맡는 등 열성적인 교사였습니다. 1943년 숙명여전 교수로 초빙된 그는 오다(小田) 교장의 제안으로 조선요리를 가르치게 되는데, 이때 창덕궁 낙선재에서 궁중요리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창덕궁에서 궁중음식을 배우다
황혜성이 창덕궁 낙선재를 처음 찾았을 때, 그곳에는 순종황제의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궁인들과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황혜성은 매일 저녁 낙선재를 드나들며 궁중음식을 배웠습니다. 이때 평생의 스승인 한희순(1889-1972) 상궁을 만났습니다. 사진은 1970년 황혜성(왼쪽 첫번째)과 한희순(왼쪽 두번째) 등 윤황후를 마지막까지 모신 궁인들
순정효황후 윤씨(윤황후)와 궁인들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만년의 순종효황후 윤씨가 친잠식을 앞두고 내빈들, 궁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윤황후는 1926년 순종 승하 후 낙선재에 기거하며 조선왕실의 문화를 이어갔습니다. 황혜성이 낙선재를 처음 찾은 1943년 무렵에는 윤황후를 모시는 궁인들이 궁중음식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희순 상궁(1978)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대례복차림의 한희순 상궁. 한희순은 고종에 이어 순종, 순종비 윤황후를 모신 조선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상궁입니다. 임금이 평소에 드시던 수라상부터 잔치음식, 제사음식까지 모든 궁중음식 조리법을 섭렵한 분이었습니다.
한희순 상궁의 제자, 황혜성에 관한 신문기사(1968년 3월 5일)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혜성은 1943년 낙선재에서 한희순 상궁을 처음 만난 뒤 1972년 한상궁이 돌아가시기까지, 꼭 30년 간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전수받았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 질문도 할 수 없고 “저도 좀 해보겠다”고 끼어들 수도 없는 깍듯한 분위기 속에서 황혜성은 한상궁을 ‘상궁마마님’이라 부르며, 그림자처럼 한 발짝 물러서서 전 과정을 공책에 적어 기록했습니다. 궁중음식의 재료부터 꾸밈새, 간맞춤, 관련 용어 등은 모두 그렇게 해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궁중음식 요리책, 이조궁정요리통고
전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7년 황혜성은 그 동안의 기록을 정리해 '이조궁정요리통고'를 펴냈습니다.
이조궁정요리통고 내지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혜성은 6.25 전쟁때 피난을 가면서 그 동안의 연구기록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낙담하지도 주저앉지도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황혜성은 궁중음식을 우리 문화로 보존하고 이어 가기 위한 체계화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조리법을 복원하고 수라상부터 잔치(進宴) 음식까지 200가지가 넘는 음식을 일일이 현대식 계량법과 조리용어를 사용해 복원하는 역사적 작업의 결실로 '이조궁정요리통고'를 펴냈습니다. 궁중음식을 배운지 14년만의 첫 열매였습니다.
이조궁정요리통고를 바탕으로 재현한 조선왕조 궁중음식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이조궁정요리통고'는 구중궁궐 깊숙이 숨겨져 있던 궁중음식을 세상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한국의 음식 문화와 역사에 대단히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온 때는 전후 미국의 구호물자 유입 등 급격한 사회변화로 인해 한국의 음식 문화도 차츰 간편화, 현대화 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 황혜성은 전통 음식의 최고 정수인 궁중음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우리의 것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의도를 담았습니다. 또 이때는 요리가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이조궁정요리통고'는 이러한 사회 변화 속에서 요리를 어엿한 문화이자 학문의 한 분야로 정착하게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궁중 음식, 한국의 무형문화재가 되다
윤황후가 거처했던 창덕궁 낙선재에 복원된 조선왕조 수라상(2014년). 황혜성이 1943년 처음 기록하기 시작한 조선왕조 궁중음식은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 38호으로 지정받았습니다. 2014년에 열린 전시회는 황혜성이 궁중음식을 처음 시작한지 70년만에 제 집을 찾아 온 셈이었습니다.
마지막 상궁들에게 인터뷰하고 있는 황혜성(1968)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1962년 한국 정부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기존의 건축물, 예술품 같은 유형 유산 뿐 아니라 춤, 음악 등 무형 유산도 문화재로 국가가 보존하기로 한 것입니다. 황혜성은 조선왕조 궁중음식이 궁중문화의 정수이자 한국의 식문화를 오롯이 담고 있는 문화재라고 믿고 무형문화재 지정을 추진합니다.
궁중음식 1대 기능보유자 한희순 상궁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생활문화를 업신여기는 권위적인 인식 때문이었지요.“음식이 무슨 문화재냐”, “밥은 누구나 하는 거 아니냐”고 궁중음식 문화재 지정에 반대하는 문화재 위원들이 많았습니다. 황혜성은 한희순과 함께 큰 상을 차려 이들이 직접 시식케 하는 등 열정적으로 설득했습니다. 1971년 1월 마침내 한희순이 초대 궁중음식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습니다.
한국음식문화의 정수를 이어갈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창립
몰락한 왕조의 유물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다시 태어난 궁중음식! 황혜성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궁중음식의 전승과 보존, 그리고 전수를 위해 1971년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했습니다.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지닌 일이기에 사단법인으로 출범했습니다. 설립 사반세기만인 1996년, 궁중음식연구원은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덕궁 옆 소담한 한옥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낙선재 가까이, 본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궁중음식연구원 개원식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궁중음식연구원 개원식은 궁중음식 무형문화재 초대 기능보유자 한희순에게나, 30년 동안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한국 식문화의 최고 정수인 궁중음식을 되살려낸 황혜성에게나 기쁨과 감격의 자리였습니다. 연구원 첫 보금자리는 동대문 근처 처음 세워진 상가 빌딩의 작은 자리였습니다.
제 1회 궁중음식발표회 리플릿(1971년 5월)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궁중음식연구원 개원 첫해 12월 제1회 궁중음식발표회가 열렸습니다. 황혜성은 “조선왕조 궁중음식은 고유한 한국의 예술”이라고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음식문화는 모든 문화의 첫머리요, 우리민족의 정신이 깃든 고유한 음식예술이라고 늘 말해왔습니다.
첫 발표회 주제는 주찬, 즉 낮것상이라고 하는 임금님의 점심상 차림을 재현했습니다. 흰수라와 팥수라, 잣죽, 생복찜을 비롯해 3가지 김치까지 16가지 음식이 오르는 주찬과 두텁떡, 각색단자, 유자화채와 약주를 곁들이는 후식 상이 단아하고 기품있는 궁중 상차림에 관람객들은 찬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문헌 기록과 전승으로 남은 궁중음식을 실제로 복원 재현하는 궁중음식발표회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서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1972년 한희순이 별세하고 1년 뒤 황혜성이 제2대 기능보유자로 궁중음식을 이어갑니다. 스물세살 아가씨가 숙명여전 교수로 한국 음식의 원형을 배우러 낙선재를 찾은지 꼭 30년 만이었습니다.
대학교수시절의 황혜성(1960년대)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혜성은 궁중음식연구원에서 궁중음식 전수 교육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기 발표회, 조리서 출간, 궁중음식 관련 문헌 연구 등의 활동을 쉼 없이 지속했습니다. 문헌연구를 바탕으로 찬품단자(메뉴) 작성법부터 실제로 음식을 만드는 일까지, 궁중음식과 한국의 식문화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수라상 실습을 지도하는 황혜성(1971)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혜성은 하루를 서너개로 나누어 썼습니다. 낮에는 대학 강단에 서고, 저녁에는 궁중음식연구원에서 무형문화재 기능을 전수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주말은 고문서를 뒤지고 옛 어른들을 찾아 궁중음식, 반가음식의 실제를 찾아내는 일로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교수시절의 황혜성(1960년대)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실습복을 입고 현대식 계량법 등을 적용해 궁중음식을 복원하고 있는 황혜성. 그는 현장조사, 행사기획과 운영까지 도맡아 해내며 궁중음식을 알리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궁중음식을 강의하는 황혜성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혜성은 한국 음식 문화의 최고봉이자 예술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외국에 알리는 데도 열심이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아픈 시절을 살았던 그는 일본 유학 때 익힌 능숙한 일본어로 한국의 식문화를 일본 사회에 알리는데 앞장섰습니다. 또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한국의 음식 문화를 전파했고, 한국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궁중음식 시연을 통해 한국 문화의 고아함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한국요리백과사전 표지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궁중음식을 전수하고 알리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황혜성은 수십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1976년, 그는 한국의 음식 역사를 비롯하여 궁중음식, 향토음식, 고조리서의 조리법과 식품영양학을 다룬 '한국요리대백과사전'을 펴냈습니다.
황혜성 친필노트, 궁중 상차림 연구(1985)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혜성의 보물창고는 조선 왕실 도서관이었던 규장각, 장서각이었습니다. 성균관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장서각을 제 집보다 더 많이 드나들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먼지 낀 두루마리들 가운데서 궁중 행사 때 차렸던 찬품단자와 궁중잔치 전모를 기록한 진찬의궤를 발견했을 때 그는 조선 궁중음식의 신세계가 어마어마한데 희열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 묘인 수원 현륭원을 다녀온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들 고문서 내용을 우리 말로 정리하여 사라질 뻔한 문화를 기록합니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 황혜성은 이들 내용을 일일이 손으로 적은 이 공책이 문화재 감입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에 기록된혜경궁 홍씨의 회갑상차림 재현모습(2017)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혜성은 장서각 고문서 연구를 통해 궁중음식에 사용된 기명(그릇), 상 같은 일상 문화 뿐 아니라 상차림과 배치 등을 모두 재현하였습니다. 이는 전반적인 궁중 문화를 복원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궁중음식연구원 앞에서의 황혜성(1980년대 초반)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궁중음식연구원은 창립 25년을 맞는 1996년 창덕궁 옆 종로구 원서동 한옥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처음 궁중음식을 접했던 낙선재와, 또 한희순의 사저가 안동 별궁과 가까운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황혜성은 이곳에서 궁중음식 전수 교육과 전시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며 교육자, 연구자, 집필가로서 만년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황혜성 그 이후...
숙명여전에서 시작해 한양대, 성균관대 교수를 지낸 황혜성은 대학 강단과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수많은 제자를 키웠습니다. 자신에게 궁중음식을 가르친 한희순이 그랬던 것처럼, 간장 맛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함께 익혔습니다. 궁중음식연구원에서 그가 가르친 제자들은 궁중음식연구회(궁연회)를 비롯해 지미재, 수강재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황혜성과 세 딸(2001)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음식을 만들고 가르치는 일을 큰 즐거움으로 여긴 황혜성은, 200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한희순 상궁에서 황혜성으로 이어진 무형문화재 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은 황혜성의 딸들로 맥을 잇고 있습니다. 맏딸 한복려(1947- )가 무형문화재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로 대를 이었고 둘째 복선, 셋째 복진이 전수자로 언제나 함께 하고 있습니다.
황혜성(2002)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혜성은 평생 공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공책을 펴고 글을 썼습니다. 1943년부터 낙선재를 드나들며 꼼꼼하게 기록한 궁중요리법 공책을 6.25전쟁 중 돈암동 집에 남겨두고 피란 갔다 모두 잃어버렸던 그는 이후로는 평생 연구 노트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지식을 만들어내는 학자였습니다. 1968년부터 10년 간 전기도 안 들어오는 강원도 산골부터 오래된 종가, 배타고 6시간을 가야하는 남해의 섬마을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향토음식을 조사했습니다. 70년간의 연구로 나온 책이 '한국의 전통음식', '조선왕조 궁중음식', '다시보고배우는 음식디미방' 등 50여종에 이릅니다.
신선로를 꾸미는 황혜성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집념을 가지고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을 꾸준히 기록해 두어라”
“음식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황혜성. 그의 손길에서 사라진 왕조의 궁중문화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궁중음식은 미래를 향한 한국의 위대한 살아있는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기획: 한복려
글: 박선이
진행: 이소영
사진: 민희기, 서헌강, 임준빈, 최동혁, 최민호, 최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