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 1923년

활동사진의 시대

한국영상자료원

寫眞活動勝於生人活動 “사진의 활동이 산 사람의 활동보다 낫다.”
황성신문 논설/1901년 9월 14일

1. 들어가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조선 사회는 서구 열강에 의한 문호 개방과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 등 격변의 개화기를 맞는다. 활동사진의 정확한 도래 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이 시기 수입된 활동사진은 전근대와 근대가 교차하는 격랑 속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매혹이자 조선 사람들을 계몽하는 빛의 도구로 자리 잡아 갔다. ‘활동사진’이라는 용어는 영어의 모션 픽처(motion picture)를 그대로 직역한 말로 1897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다 조선에 들어왔다. 임화에 따르면 한국에서 활동사진 시대는 영화의 전사 시대일 뿐 아니라 영화 제작이 이뤄지기 이전 구경만 하던 시기, 곧 ‘감상만의 시대’를 지칭한다. 한국영화사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서구로부터 수입된 근대 문물인 활동사진에 대한 수입 및 감상으로부터 시작된다.

 1910년대를 경계로 전기에는 짧은 실사 필름이 주로 수입 상영되었다면 후기에는 다수의 연속영화(the serial film)를 포함한 극영화가 소개돼 초기 ‘애활가’들의 관심을 끈다. 1919년 한국의 첫 영화 잡지 <녹성>이 창간될 정도로 서구 영화와 배우들에 대한 인기는 높았으며, 같은 해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가 제작되며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한국영화가 제작되기에 이른다. 1920년대 초반 연쇄극과 더불어 관 주도 계몽 선전 영화 제작을 거쳐 1923년 극영화 <춘향전>, <장화홍련전> 등을 선보이며 본격적인 한국의 무성영화 시대가 열린다. 이영일은 활동사진의 시대, 곧 ‘수입영화의 시대’는 한국에서 활동사진 사업이 정착하고 영화인 및 영화자본이 형성되는 자양분을 마련한 시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황성신문> 1901년 9월 14일자 논설 '사진활동승어생인활동(寫眞活動勝於生人活動)’은 북청사변에 관한 활동사진을 보고 난 후 쓴 글로 ‘활동사진’이라는 용어가 발견되는 최초의 문헌 자료이다. 이 글의 논조로 미루어보건대 이 시기에 활동사진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않는다. 사진이란 곧 촬영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것이 배열되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움직이는 그림(活畵)이라 할 만하다. … 사람들이 영화에서 활동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진실로 바라는 것은 백성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 화인(畵人)의 활동은 오히려 생동감이 있는데 생민(生民)으로서 능히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대한의 선비와 같아서 하는 말이다. … 이렇기 때문에 화인의 활동을 원하지 않고 다만 오늘날 생민의 활동을 원한다 하는 것이다.”

2. 입체경(stereoscope)과 입체사진

입체경(stereoscope)은 1850년경부터 발전하여 20세기 초반까지 크게 유행한 대표적인 광학놀이기구이다.

특수하게 제작된 보기 장치로, 하나의 물체를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좌우 60~70mm 간격을 띄우고 동시에 들여다보면 상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문물과 볼거리, 유럽의 여러 나라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을 찍은 사진들을 망라한 이 장치는 서양인들의 이국취미를 만족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3차원의 환영을 주는 입체경은 조선인들에게도 진기한 구경거리였으며 조선 황실에서도 즐겨 사용하였다. 현재 원구단, 독립문, 경성 전경, 민중들의 일상생활 등 조선을 피사체로 한 입체사진이 상당수 남아 있다. 

입체경(stereoscope)
입체 사진(stereoscopic photography)

3. 환등기(幻燈機)의 등장

활동사진처럼 움직이는 사진은 아니었으나 활동사진 도래 이전 신기한 영상매체로 환영받은 대상은 환등기였다. 환등기는 일종의 환등 슬라이드로 정지영상에 불과하였으나 영화의 보조수단으로 스크린에 슬라이드를 비춰주는 일이 허다하였다. 초기 환등기는 주로 계몽활동이나 강연, 선전과 교육의 도구로 자주 활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 말에 환등기가 처음 등장하였다.

▶ ⊙(일요환등)

“영국인 뱃콕 씨가 지난 날 저녁에 흥화학교 주야학원을 낙동본제(駱洞本第)에 초청하야 다과를 접대하고 환등방(幻燈房)을 개설하였는데 차후에는 매일요일 저녁에 동씨(同氏)가 해교제학원을 초청하야 환등방을 제시한다더라.”

<황성신문> 1899년 12월 22일자 기사

4. 황실어람(皇室御覽)과 버튼 홈즈의 트래블로그(travelogue)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새로운 세기의 문명의 총아인 활동사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황실어람(皇室御覽)이라 일컬어졌던 황실 영화관람의 시작은 버튼 홈즈의 활동사진 영사기 및 트래블로그에서 비롯된다. 일본 거류민들을 대상으로 한 활동사진 상영설 등이 거론된 바 있지만 현재 기록으로는 버튼 홈즈가 한국에서 최초로 활동사진을 소개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버튼 홈즈 강연(The Burton Holmes Lectures)>(1901) 1901년 출판본 버튼 홈즈의 서울 여행기는 1901년에 10권짜리 <버튼 홈즈 강연> 전집 마지막 권 제10권에 수록돼 있다. 초기 1,000셋트 한정판으로 제작돼 같은 판본으로 같은 해 뉴욕에서 다시 출간한 것이다. 이 여행기는 수십 년 간 여행 강연 형식으로 소개되었다. 

버튼 홈즈의 여행 기록을 보면 버튼 홈즈의 서울 방문은 대략 1901년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0년 개통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서부터 극동 지역을 여행하는 아시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에 잠시 방문한다. 1901년 <버튼 홈즈 강연(the burton holmes lectures)> 제10권에 수록된 <서울, 한국의 수도(seoul, the capital of korea)>에 버튼 홈즈의 서울 여행기가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궁내부 대신을 지낸 이재순이 자신의 별장에서 버튼 홈즈의 기록영상물을 처음 접한 후 버튼 홈즈에게 부탁하여 소형 영사기를 궁궐에 가져갔다고 한다. 이것이 최초로 한국에서 영화가 상영된 사건이 된다. 이때 사용된 1인용 영사기는 휴대용 ‘뮤토스코프(mutoscope)’ 혹은 ‘키노라(Kinora)’인 것으로 보인다. 뮤토스코프와 키노라는 얇은 카드에 프린트된 이미지들이 카드가 회전하면서 연속적으로 보여지도록 만든 시각 기구의 일종으로 영화 발명 이후 다양한 시각 기구들이 공존했던 시기에 1인용 영화 감상 기구 중 휴대가 간편한 장치로 인기를 끌었다.

<서울, 한국의 수도>(1901) 수록 사진. 버튼 홈즈 일행의 경성 촬영 장면 속 군중들
<서울, 한국의 수도>(1901) 수록 사진. 근대와 초창기 활동사진의 관계가 잘 드러난, 철도 부설을 위해 측량 작업 중인 미국인 기사 사진. 철도와 지리학, 활동사진의 만남. 
이 사진은 간혹 한국 최초의 대물 교통사고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남대문 밖 촬영에 나선 홈즈 일행의 촬영용 임시 궤도차와 달구지가 선로에서 충돌할 뻔한 사건이다.

버튼 홈즈의 서울 여행기를 담은 기록영상물(트래블로그)은 1901년 버튼 홈즈가 서울을 처음 방문한 해에 촬영된 것인지 1913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촬영분과 혼합되어 있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트래블로그는 강연과 결합해 세계 체험이 일상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대리체험의 장이자 교육과 계몽의 장이 되었다. 

버튼 홈즈의 ‘서울’ 트래블로그(travelogue) 영상

버튼 홈즈가 서울을 찍은 트래블로그는 그의 책에 실린 사진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사진과 영상물 간에 다소 차이를 보인 것인지 서로 다른 시기에 촬영된 영상을 편집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버튼 홈즈는 제물포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대문에 도착한다. 영상물 초반 서대문을 통과하는 전차 위에서 주변 풍경을 담은 부분은 인상적인데, 버튼 홈즈는 한국의 민족지적 풍경뿐 아니라 이동하는 전차 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 등을 담아낸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24일, 25일, 26일자 광고

“금번에 시작한 활동사진은 법국 파리경에서 유명한거시오 또한 황실에서 먼저 간품(看品)하였고 시작한지 수일(數日)에 유상(遊賞)하시는 첨군자(君子)가 다수 왕림(枉臨)하시와 좌처(坐處)가 넘쳐서 만도(晩到)하시면 불편하오니 속속 왕림함.”

이 광고에 따르면 황실에서 서대문 밖에 위치한 프랑스인 마전(마르텡)이 운영하는 활동사진소에서 상영된 활동사진을 일반 상영에 앞서 먼저 보았음을 알 수 있다. 

5. 활동사진, 대중과 만나다

활동사진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시초는 1903년 전후한 무렵으로 볼 수 있다. 1903년에 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과 협률사(원각사)에서 활동사진이 유료공개 상영되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 “동대문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계속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 (大韓及歐美各國)의 생명도시(生命都市) 각종극장(各種劇場)의 절승(絶勝)한 광경(光景)이 준비되었습니다. 입장요금은 동전 10전"

<황성신문> 1903년 6월 23일자 광고

<황성신문> 1903년 6월 23일자 광고를 보면, ‘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구미(歐美) 각국의 절승(絶勝)한 광경을 일반 유료 공개한다’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전차 이용객을 늘리기 위한 홍보 활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기한 발명품'을 보기 위해 수천 명의 관객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성전기회사는 원래 한국 황실과 미국인 콜브란 및 보스트웤과의 사이에 합자하여 창설된 후 1898년 서대문과 홍릉(청량리)에 전차를 설치하였으며 전차 이용 승객을 늘리기 위해 활동사진을 활용하였다.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한미전기회사로 변경하고 1907년 같은 자리에 활동사진관람소(광무대)를 만들어 초기 미국영화를 주로 상영하였다.

1899년 국내 최초 전차 개통식

초기 한성전기회사는 서울시내 전기사업에 관심이 높았던 고종에 의해 자본금 전액을 단독 출자해 설립한 황실기업이었다. 하지만 전차 설치에 필요한 경험과 기술이 부족해 경인철도 부설 시공을 맡은 미국인 콜브란(Henry Collbran)과 보스트윅(H.R. Bostwick)에게 전차 설비를 맡겨 동대문 내 전차 차고 설비를 완료한 후 서대문과 홍릉을 잇는 전차를 1899년 5월 개통하게 된다. 하지만 전차 개통 후 전차 사고가 빈번하고 전차시설 확장과정에서 발생한 황실과 콜브란 측과의 채무분규 등으로 ‘전차 안타기 운동’이 벌어지는 등 전차를 둘러싼 여론이 악화되었다. 이에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이용객을 늘리고 여론을 반등시키기 위해 동대문 내 전기 창고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활동사진을 적극 상영한다.

1899년 동대문 앞 전차
전차역. 전차 노선과 사람들 무리 속에 한성전기회사 전차 매표소가 보임. 버튼 홈즈의 여행기 사진. 

1903년 6월부터 활동사진 일반 유료 상영을 개시한 한성전기회사의 발전소 겸 기계창 모습. 동대문 바로 안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차 차고의 역할도 겸했다. 

<대한매일신보> 1904년 8월 4일자에 수록된 한성전기회사 광고문안. 이 광고에 따르면 한성전기회사는 ‘희락부(Amusement Department)’를 두어 활동사진 전람소와 함께 회전목마 시설을 운영하였다

1902년 정동(현 새문안교회 부근) 봉상사(奉常司) 자리에 세워진 협률사 극장.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식을 위하여 설립된 궁내부 소속의 500석 규모의 실내 원형극장. 최남선은 이 건물이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뜬 것이라 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전통 연희를 무대에 올렸으며 대중의 기호와 재정적 이유로 춤과 노래뿐 아니라 영화도 상영하였다. 1908년 원각사(圓覺社) 극장으로 변경되었다.

<황성신문> 1903년 7월 10일자 ‘유람조위’ 기사. 협률사(원각사)에서의 활동사진 상영 기록. 동대문 내 전차 차고의 활동사진 관람객이 쇄도하자 협률사에서도 영사기를 설치하여 활동사진을 상영하였으나 화재가 나 상영이 중단되었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4월 29일자 광고.

초기 활동사진은 영화제작자나 배급업자의 노력보다 상품 판매 촉진을 위한 홍보 수단으로 활용되며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영미연초회사는 골드피쉬, 히로 등 자사의 담배를 선전하기 위해 빈 담배 갑을 가져오는 사람에겐 무료로 영화를 관람하게 하였다. 

6. 손탁 호텔과 스테이션 호텔(애스터하우스)

정동에 위치한 손탁 호텔에서도 외교 사절단을 대상으로 활동사진 상영이 이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손탁 호텔
<버튼 홈즈의 여행강의>(1901)에 수록된 스테이션 호텔(애스터 하우스) 초기 모습

새문 밖(충정로 1가 75-2번지, 현 농협중앙회 후면)에 있었던 '스테이션 호텔'은 한강철교의 준공과 더불어 경인선이 완전 개통되면서 1901년 4월 영국인 엠벌리가 서대문역 바로 앞에서 개업하였다 이 호텔은 1905년에 원래 '팔레 호텔'을 운영했던 프랑스인 마르텡에게 인수되면서 그 이름도 '애스터 하우스(Astor House)'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은 마르텡의 한자이름을 따서 마전여관(馬田旅館)'으로도 알려졌다. 1907년 이후에는 단순한 숙박시설에만 그치질 않고 활동사진연극장으로도 널리 이름이 높았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2일자. 프랑스인 마르텡이 새문 밖 새다리목 동쪽 벽돌집에서 프랑스 필름을 상영한다는 기사.
스테이션 호텔(애스터 하우스) 전경(로제티, 『꼬레아 에 꼬레아니』 제2편, 1905)

7. 우미관과 단성사

1910년부터 1920년 경까지 상설영화관이 설립되며 활동사진 흥행사업의 정착기를 맞는다. 1912년 최초의 조선인 활동사진 상설관 우미관이 설립된다. 단성사는 1907년 설립되었으나 초창기에는 공연 활동이 주를 이루었으며 1918년에 이르러 박승필이 운영하며 활동사진전용관으로 재탄생한다. 조선인 상설영화관으로 유명한 조선극장은 이보다 늦은 1922년 개관한다.

우미관의 영화광고. “대모험극의 대왕 <명금>” <매일신보> 1916년 6월 24일 광고
우미관의 영화광고. “희극 쟈푸린(채플린)의 <백작>” <매일신보> 1918년 4월 7일 광고

단성사는 1907년 상설 민간 극장으로 설립되어 전통연희 등을 공연하게 된다. 그 후 상설영화관으로 개축된 것은 광무대 경영자인 박승필이 인수한 1918년부터이다. 이후 조선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북촌을 대표하는 극장으로 자리잡는다. 

박승필은 최초의 한국영화 흥행사로 광무대와 단성사 경영권을 매수하여 활동사진 흥행을 시작하였다.

신축 단성사 기사 사진 <매일신보> 1914년 1월 17일자
단성사 재개관에 대한 보도 <매일신보> , 1918년 12월 21일자 “본관 신축 낙성 후 대갈망 중의 모범적 활동사진은 금일부터 대대적 영사”

8. 초기 외화 관람의 시대

<명금 (The Broken Coin)>(프란시스 포드, 1915) 미국의 유니버셜사에서 제작한 총 13편 50권짜리 연속 활극 시리즈. 미국에서는 1915년, 한국에서는 1916년 개봉하였다. <명금>은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1920년대에 들어서자 소설로 번역 출간되기도 하였다. 

<독류 (shoes)>(로이스 베버, 1916)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센티멘탈한 블루버드(Blue Bird)류의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동도 (way down east)>(D. W. 그리피스, 1920) 

이필우가 수입해 1924년 단성사에서 개봉해 흥행에 성공하였다. 당시 그리피스 영화가 보여주는 고난을 헤쳐가는 모험 서사는 조선인들에게 인기 있는 단골 소재였다. 

9. 최초의 영화잡지 <녹성>

1919년 12월 5일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잡지. 이일해가 편집 겸 발행자였으며 일본 유학파들이 만들어 국내 배포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간호를 낸 뒤 더 이상 발간되지 않았다. 프랑스 출신의 할리우드 여배우 리타 졸리베(Rita Jolivet)가 표지에 등장하고, <명금>으로 국내 인지도를 높인 그레이스 커나드(Grace Cunard)가 내지 화보로 등장한다. 단성사와 광무대 영화소개 광고와 함께 당시 국내 개봉한 <독류>, <곡마단의 와(囮)> 등에 관한 정보, 찰리 채플린과 에디 폴로(Eddie Polo) 등 스타들에 관한 가십기사 등을 다뤘다. 이 잡지는 당시 인기 있는 할리우드 스타들에 대한 정보와 외화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10. 변사(辯士)의 시대

무성영화 시대에 변사(辯士)라 불리는 활동사진 해설가는 활동사진 흥행이 뿌리를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필름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며 스토리를 관객에게 알려주고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를 설명해줄 변사의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들은 1910년 경부터 발성영화가 등장하기까지 ‘애활가’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성기를 맞았다. 각 극장에는 보통 3, 4명의 변사들이 변사실에 배석하고 있었으며 영화가 상연될 즈음 악대의 전주와 함께 무대에 올라 먼저 전술(前述)에서 인사말을 하고 다음 영화의 예고편을 알린 후 본편을 해설하였다. 변사들마다 서로 다른 내용 전개와 입담으로 관객들의 웃음과 눈물을 끌어냈다. 

원각사와 고등연예관에서 활동했던 최초의 변사 우정식

성동호

서상호는 필름을 갈아 끼우는 사이에 뿡뿡 소리에 맞춰 하와이안 댄스, 탭 댄스 등 각종 춤을 추는 것 ‘뿡뿡이춤’으로 유명했다.

조선극장의 전속변사와 경영진. 왼쪽 맨 위가 성동호 변사(사진은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154쪽에서)

11. 연쇄극의 성행

연쇄극은 필름으로 찍은 장면들을 연극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보여주는 공연양식이다. 연쇄극 이전에 극장에서 일부 전기응용극이 선보이다 연극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담은 영상을 삽입한 연쇄극이 인기를 끈다. 최초의 연쇄극은 1919년작 <의리적 구토>. 단성사가 일본인 촬영기사를 초빙해 김도산의 신극좌와 함께 제작한 작품으로 계모의 간계와 의리 있는 응보라는 극적모티브를 지닌 신파극이다. 한강철교, 장충단, 남대문정거장 등을 찍은 기록영화 <경성전시의 경>과 함께 동시상영했다. 이후 문예단의 <지기>(1920), 혁신단의 <학생절의>(1920) 등이 연이어 연쇄극으로 제작됐다. 연쇄극 시기는 초기 영화의 틀을 형성한 동시에 한국영화 제작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감독과 배우를 배출하는 통로가 되었다.

<매일신보> 1919년 10월 28일자 <의리적 구토> 개봉 광고.

대활극 <의리적 구토> 전 8권을 실사 <경성전시의 경>과 함께 상영한다는 광고.

연쇄극은 배우들이 공연을 하다 무대 밖으로 사라지면 무대 위에 스크린이 내려와 무대 밖으로 사라진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영사되는 식이다. <의리적 구토>에서는 자동차 추격장면, 격투장면 등이 활동사진으로 촬영돼 영사됐다.

신극좌를 이끌며 최초의 연쇄극을 제작한 김도산
혁신단의 임성구
이기세는 문예단을 이끌며 <지기>(1920), <장한몽>(1920) 등의 연쇄극을 만들었다.
이필우. 1920년 <지기>로 한국영화 최초의 촬영기사가 되었다. 한국영화기술의 개척자.

12. 영화제작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첫 극영화는 <월하의 맹서>(조선총독부 제작, 1923)라는 주장과 <국경>(송죽키네마주식회사 제작, 1923)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월하의 맹서>는 조선인들의 영화제작 자본이 충분하지 않아 조선총독부의 재정으로 제작된 우체국 후원 저축장려 계몽영화라는 한계가 있다. <국경>의 경우에는 한국인이 출연하기는 하지만 제작, 감독, 촬영을 일본인이 맡은 영화라는 점에서 최초의 조선영화라고 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선인 자본에 조선인 스태프만으로 제작된 최초의 영화는 1924년의 <장화홍련전>이라 할 수 있다.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나오기 전까지는 주로 일본 신파극을 번안하거나 우리 고전소설을 각색한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월하의 맹서>의 여배우 이월화. 민중극단 소속으로 무대에 섰던 이월화는 윤백남에 의해 발탁되어 <월하의 맹서>에 출연함으로써 최초의 여배우가 되었다. 이월화 이전에 연쇄극 <장한몽>에 출연한 마호정이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사진에 출연한 여 배우는 이월화가 최초다. 

한국영화의 개척자 윤백남. 1923년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연출하였다. 이후 <운영전>, <심청전> 등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윤백남프로덕션은 이경손, 나운규 등 초창기 영화인들을 배출한 산실이었다.

1923년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가 연출한 <춘향전>에는 당시 인기 변사였던 김조성이 이도령 역을 맡고, 기생 한룡이 춘향으로 출연했다. 하야카와 고슈는 하야카와 연예부를 만들어 일본으로부터 영화수입을 하다 황금관과 조선극장을 개관 운영하였다. 동아문화협회라는 이름으로 영화 제작을 시작하면서 그 첫 작품으로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춘향전>을 선택하였다.

13. 최초의 우리영화 <장화홍련전>

조선극장의 <춘향전>의 흥행은 당시 라이벌이었던 단성사 경영에 자극을 주었다. 단성사 지배인이었던 박정현이 이필우와 함께 단성사 사장 박승필을 찾아가 활동사진 제작을 제의한다. 박승필은 조선영화인들의 촬영기술을 확인하기 위해 동아일보 주최 제1회 전선여자당구대회(全鮮女子庭球大會)의 실사영화를 촬영하게 하고 시사회 결과 크게 안심하고 단성사 촬영부를 두어 <장화홍련전>을 제작하게 한다. 시나리오는 이구영과 김영환이 맡고 변사였던 우정식과 최병룡이 출연한다. <장화홍련전>은 제작자본, 작품, 연출, 출연, 기술 등에 이르기까지 전부 한국인의 손으로 된 최초의 작품이다. 

<장화홍련전>의 각본을 쓴 김영환. 당시 단성사 전속 변사였던 김영환은 <장화홍련전>을 상영할 때 변사를 맡기도 했다.

<매일신보> 1924년 8월 31일, 9월 2일 시사평 기사에 게재된 영화 스틸들 “젼편을 통하야 조금도 무리한 점이 업고 우수한 수완에 누구든지 감탄”
제공: 스토리

Curator — Park Hye-Young, Korean Film Archive
Publisher — Yoo Sungkwan, Korean Film Archive
English translation — Free Film Commun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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