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는 훌륭한 게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다… 그의 영화는 손끝에서 빚어낼 수 있는 경지를 훌쩍 뛰어넘는다.”
-영화평론가 허문영
이만희(1931~1975)
이만희는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5년간 군대에서 복무했고, 1961년 <주마등>이라는 영화로 데뷔했다. 1975년 작고하기 전까지 51편의 영화를 남겼다. 약 15년의 기간 동안 51편의 영화를 남겼으니 매년 3-4편의 영화를 연출한 셈이다.
그는 기존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만추> <삼포가는 길> 등 몇몇 대표작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2006년 한국영상자료원의 회고전을 거치면서 재발견되어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영화100선에 무려 6편의 작품을 올렸다. 이는 7편의 임권택 감독의 뒤를 잇는 기록적인 수치이다.
그는 주로 운명이 주는 가혹한 시련과 자신만의 결단과 의지로 그 운명에 맞서는 인물상들을 그려낸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특유의 영화적 공기를 만들어내며 특히 전쟁영화와 여성 멜로드라마라는, 그가 주로 만든 장르의 외피 속에 투영되어 있다.
"60년대 영화 중 가장 씨네필적인, 빛나는 순간을 스크린에 가장 많이 창조한 감독"
-영화평론가 김소영
"이만희 감독이 다른 감독과 차별되는 점 중의 하나는 이 분이 끊임없이 실험을 시도해요. 그것이 크든 작든, 형식상의 실험이든, 내용상의 실험이든. 예술은 독창성이 생명 아닙니까? 달라야 한다는 거죠. 그것이 미국 영화와 달라야 하고, 다른 감독들의 영화와도 달라야 하고, 심지어 자신이 앞에 만들었던 영화나 뒤에 만들 영화와도 달라야 한다는 거죠. 그런 생각을 가진 분이에요."
- 시나리오 작가 백결
"한 감독의 작품 연보에 이처럼 다양한 형식과 장르의 영화가 공존한다는 것도 이채롭거니와 그의 영화가 내뿜는 어둡고 우울한 세계와 그 이미지들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영화평론가 조혜정
이만희는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세근과 모친 안원덕 사이의 8남매 중 막내였다고 하며, 실제로 두 명은 일찍 세상을 떠나 6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나이 차이 나는 두 형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으로부터 철강 기계 기술을 배워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고, 이만희는 비교적 유복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타고난 자유분방함과 낙천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비가 오면 '비와서 학교 안 가', 눈이 오면 '눈와서 학교 안 가' 그러셨대요.”
- 이만희의 딸, 영화배우 이혜영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만희는 1955년 제대하여 안종화, 박구, 김명제 등의 조감독으로 영화 경험을 쌓았다.
이만희는 1961년 을 통해 데뷔했다. 당대의 대배우 김승호가 주연을 맡았는데, 증언에 의하면 극단과 조감독 시절부터 이만희 감독을 눈여겨본 김승호가 데뷔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당시 자료에 의하면 당대 유행했던 김승호 주연의 가족드라마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감독 시절 이만희(1950년대 말) 가장 오른쪽 여배우 뒤편이 이만희, 가장 왼편이 배우 김승호
<다이알 112를 돌려라> (1962)
그의 세 번째 작품 <다이알 112를 돌려라>는 한국영화계에 신인 감독 이만희의 이름을 알린 영화였다.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은 여성에게 접근하는 세 명의 남성 간의 쫓고 쫓기는 관계를 그린 이 영화는 한국 스릴러 영화 장르의 새로운 장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았고,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여섯개의 그림자>(1969), <삼각의 함정>(1975) 등으로 두 번에 걸쳐 이만희 감독 본인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마치 외국영화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빠른 템포감이 살아있고 커트마다의 앵글이 신선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오싹하는 대목의 스릴도 제법이려니와 디테일을 다룬 기교와 솜씨가 상당하다.
- 『조선일보』, 1962년 8월 9일.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1963년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해였다. 해병대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 촬영한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로서는 믿기 어려운 대규모 스펙터클을 보여준 영화였다. 이 영화는 그 해 흥행 랭킹 1위에 올랐다. 이 영화는 단순히 반공적인 영화가 아니었다. 반공이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제일 윤리가 된 한국사회에서도 전쟁 일반에 대한 반성과 희생자에 대한 추모,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촉발된 한국전쟁의 본성에 대해 묻는 이 영화는 이만희가 가진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을 드러낸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시작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이만희의 모든 전쟁영화가 반공에의 태생적 강박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과 분단을 다룬 최근 젊은 감독들의 자유주의적 영화에 비할 수 없이 깊은 인간적 통찰과 미학적 성취에 이르렀다고 여전히 믿는다.”
- 영화평론가 허문영
<검은머리>(1964)
도시의 뒷거리와 아지트를 배경으로 갱들의 세계를 매혹적으로 재현해낸 <검은 머리>(1964)는 지금까지 한국영화들 중 가장 누아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의 규칙에 묶여 스스로를 처벌하는 외디푸스적 운명의 보스 동일(장동휘)의 캐릭터는 이만희 영화의 원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이 영화의 공동 시나리오 작가로 올라있는 추남은 이만희의 필명이기도 하다.
“형식적으로 세련되게 세팅된 <검은 머리> 속의 어두운 도시 뒷골목은 60년대 장르적으로 상상된 도시의 위험함을 재현하고 있다. 그 거리를 배회하는, 한쪽으로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우수 어린 표정을 드러내 보이는 배우 문정숙의 연기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 영화평론가 권은선
<마의 계단>(1964)
<검은 머리>와 <마의 계단>은 한국 누아르와 호러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전쟁영화를 뺀 초기 이만희 영화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이 두 영화를 통해서 이만희식 미장센, 나아가 이만희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선을 보였다. 독자적인 생명력을 획득한 채 좁은 병원을 따라 움직이는 <마의 계단>의 카메라는 어딘지 히치콕을 연상케 하지만, 당시 한국영화의 촬영으로서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장르영화 감독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1964년 말 이만희에게 시련이 닥쳤다. 그가 만든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그는 1965년 2월 구속되었고, 3월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이는 한국영화와 관련된 최초의 반공법 위반 사건이었다. 몇 가지 혐의가 거론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1965년 이 영화는 검열로 만신창이가 된 채 개봉되었다.
이만희 감독 반공법 위반 혐의 구속 기사(1965년 2월 5일, 경향신문)
<7인의 여포로>(1965)
<7인의 여포로>의 시나리오를 쓴 한우정은 무려 4,000피트(약 40분 분량)가 잘려나갔다고 증언하며, 서정민 촬영감독은 심지어 마지막 장면이 이만희 감독의 촬영분이 아니라고 한다. 당연히 흥행은 참패였으며, 비평계의 평가 역시 그다지 좋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검열로 삭제되기 전 원작 영화를 본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 당시에 이만희 감독은 뭘 계산했냐 그러면은. 지금 태어날 감독이다 이겁니다 40년 후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이미 남북은 하나의 민족이다 그런 반면에 외국 세력으로 들어와서 보호하는 건 잠시밖에 안 되고 민족은 하나다 이걸 얘기하면서.”
- 영화배우 이해룡
<7인의 여포로> 사건을 겪은 후 이만희의 영화 세계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개성이 넘치기는 하지만 장르영화의 범주 내에 있던 그의 영화 세계는 1966년부터 예술적이고 실험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젊고 재능이 넘치며 패기만만한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 있었다. 그는 1970년까지 이만희의 새로운 영화 세계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와 함께 이석기가 새로운 촬영감독으로 합류했다.
<물레방아>(1966)
<물레방아>는 공식적인 백결의 ‘입봉작’이었다. 나도향의 「물레방아」를 원작으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원작으로부터 거의 아무것도 차용하지 않은 특이한 문예영화였다. 허구와 실재가 교차하는 형식과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의 수위가 눈에 띄는 문제작이었다.
<만추>(1966)
1966년 <만추>가 개봉했다. 김지헌의 시나리오에 백결의 윤색이 더해진 이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다른 영화에 비해 시나리오 분량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 영화는, 에피소드 중심의 느슨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문정숙과 신성일의 은밀하지만 급박한 욕망의 교환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의외의 흥행 성적을 거두어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이만희 감독에게 영예를 안겨준 작품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있지 않다.
“<아리랑>과 <만추>를 되찾는 것은 열망을 넘어 집착이 되어왔고 영화 프린트의 행방에 관련된 온갖 소문들이 무성했으며, 그 수많은 소문을 일일이 확인할 만큼 열렬한 수집 노력이 이뤄졌다.”
- 조영정
<기적>(1967)
1967년 작 <기적>은 ‘노뮤직 노세트’라는 새로운 실험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지만, 폴란드 영화 <야행열차>의 표절 시비로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특히 표절의 대상이라는 것이 하필 적성 국가였다는 점에서 이만희와 시나리오 작가 백결은 상당한 마음고생을 해야했다. 거의 1년이 지나서 표절 혐의가 풀리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관객과 평단의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를 잃어버리고만 비운의 걸작이었다.
<귀로>(1967)
<귀로>는 여성 멜로드라마의 외관을 가졌지만, 모더니즘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실험적인 문제작이었다. 문정숙이 연기한 여주인공의 내면이 인천의 답답한 부르주아적 이층집,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을 통해 탁월하게 외화되었다. 한계적인 상황과 그 상황을 돌파하는 인물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감수하는 자기충족적 윤리는 그 인물이 여성이건 남성이건, 장르가 전쟁영화건 범죄영화건, 멜로드라마건 이만희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모더니즘 영화의 공식인 허구를 모방하는 삶, 삶을 모방하는 예술, 삶을 모방하는 픽션 등이 격자형으로 짜여있고 그것이 일종의 액자구조, 거울구조를 이루고 있다.”
- 영화평론가 김소영
37년 만에 돌아온 영화, <휴일>(1968)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이만희 회고전을 지원하기 위해 자료를 정리하던 한국영상자료원은 수장고에 보존되어 있던 정체 모를 필름 하나를 발굴했다. 바로 이만희 감독의 1968년 작 <휴일>이었다. 이 영화는 지나치게 어두운 분위기로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고, 공식적인 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 수장고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이만희 회고전, <휴일>의 발굴, 2006년 한국영상자료원 이만희 전작전을 거치며 이만희는 한국영화계에 일종의 신드롬이 되었다. 몇몇 대표작들로만 알려졌던 이만희는, 그의 영화 <휴일>처럼 불현듯 우리에게 새롭게 나타났다.
“그러다 갑자기 기적처럼 37년 만에 <휴일>이 나타났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래 손꼽힐 만큼 떨리는 시간을 맞았다. 회고전에서 많이 나온 말들이지만 <휴일>을 보고 나면 이만희 영화가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 영화평론가 허문영
<생명>(1969)
갱도에 매몰되었으나 전화선을 통해 그 생존 여부가 바깥으로 타전되어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광부 양창선 씨의 일화를 영화로 그린 1969년 작 <생명>은 영화제작사의 의무제작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영화였다. 양창선의 고독한 생존투쟁기를 거의 아무런 서사적 내용 없이 끌고 가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암살자>(1969)
<암살자>는 이만희의 전체 영화 중 가장 실험성이 높은 영화이다. 암살자의 여정, 집에 남은 수양딸과 인질범의 의미 없는 문답, 암살대상인 장군과 여대생의 맥락을 알 수 없는 대화를 끝없는 평행편집으로 끌어간 이 작품은 형식적 실험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당황스러울 정도로 서사가 축소된 무의미의 영화이다.
<고보이강의 다리>(1970)
1970년 <고보이강의 다리>를 연출했다.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오랜 연인이자 그의 영화적 페르소나인 문정숙과 결별하였고, 이 영화에서 이만희는 본인의 출연(공동 주연급)을 고집하여 이를 반대하는 이석기 백결과 결별했다. 총체적인 위기와 혼란의 시기였다. 한국영화산업은 급속도로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고집했던 이만희에게는 기회가 별로 오지 않았다.
<고보이 강의 다리> 이후 이만희는 거의 1년간의 휴지기를 가졌다. 이는 그의 감독 이력에서 가장 긴 휴지기였다. <휴일><생명><암살자> 등 지나치게 실험적인 작품들로 영화 개봉이 아예 안 되거나, 흥행에서 실패했고, 투자자와 제작자 사이에서 그는 기피인물이 되었다. 이 기간 그는 극심한 경제난에 빠지기도 했다. 1971년 <쇠사슬을 끊어라>로 돌아온 이후 그는 보다 서사성이 강한 장르영화로 회귀한다.
<쇠사슬을 끊어라>(1971)
<쇠사슬을 끊어라>는 1960년대 말 이후 한국에서 잠시 유행했던 만주를 배경으로, 서부극의 관습을 모방한 소위 만주 웨스턴 장르의 대표작이다. 이전 이만희의 예술성을 담고 있지 않지만, 인상적인 오락영화였다.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9)에 영감을 준 작품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0시>(1972)
1972년 작 <0시>는 형사물을 표방하고 있지만, 결국 네 쌍의 서로 다른 상황과 처지의 가족 혹은 연인들이 (재)결합 혹은 화해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형사일 뿐 거의 아무런 미스터리도, 스릴러도 없으며 전체적으로 따뜻한 톤을 유지하고 있다. 이만희가 소외된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깊고 따뜻해졌다.
<04:00-1950>(1972)
1972년 개봉한 <04:00-1950>는 특이한 전쟁영화다. 북한군이 지나가 버린 38선 인근에 고립된, 폭격으로 다 무너져 버린 참호 속의 1개분대를 다룬 이 영화는 영화의 절반 가까이가 무너진 참호 안을 비추고 있다. 전후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좁은 공간에서 병사들은 그대로 머물러야 할지, 어떤 식으로든 포위망을 뚫고 나가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이만희가 정보장교로 직접 출연하여 나름대로 괜찮은 연기를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가리킨다.
“그는 직업인으로서의 감독으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업적 스펙터클을 추구하다, 불현듯 멈춰서 깊은 신음과도 같은 전쟁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 <04:00-1950>은 장르의 도식 위에 고도의 내면적 세계를 투영해온 이만희의 걸작 중 한 편일 뿐 아니라, 한국 영화사의 빼놓을 수 없는 보석으로 재평가될 것으로 믿는다.”
- 영화평론가 허문영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1973년에 제작에 들어가 1974년에 개봉한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영화진흥공사가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직접 제작한 초대형 관제 반공영화였다. 그러나 이 이상한 국책영화는 수많은 물량을 투입하고서도 반공의 메시지는 별로 없는, 당시 정권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영화였다. 이만희는 영화진흥공사, 문화공보부를 상대로 싸워야 했고, 결국 편집권을 포기해야 했다. 결국 공개된 영화는 타협된 부분과 타협되지 않은 부분이 섞인 기묘하고 불균질적인 영화가 되었다. 주인공은 너무 많았고, 서사는 분산되어 붕괴 직전이었으며, 전쟁의 피해자들만이 도처에 넘실거렸다. 그러나 이야말로 전쟁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만약 이만희가 끝까지 자신의 편집권을 지킬 수 있었다면 한국전쟁영화의 걸작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그 영화는 제가 직접 참여하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당시 문공부 장관이던 윤주영 씨와 많이 싸웠어요. 장관에게 “난 못하겠다”하고 시나리오를 던지고,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지막 단계에서는 “에이 나는 모르겠다”하고 손을 놓았던 것으로 들었어요. 본인의 의식과 국가가 제작하는 목적이 다르니까...”
- 촬영감독 이석기
“만약 누군가 묻는다면요? 이만희에게 있어서 전쟁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냐?
그건 이런 겁니다. 크든 작든 이 세상에는 폭력이 있습니다. 깡패가 지나가는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것이 폭력 아닙니까? 국가 정권이 독재로 국민을 억압하는 것도 폭력이죠. 폭력의 가장 극대화된 형태가 전쟁 아닙니까? 그 이상의 폭력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명분이 있는 전쟁이든, 없는 전쟁이든 모든 전쟁은 폭력이다, 이렇게 본 겁니다.”
- 시나리오 작가 백결
<삼포가는 길>(1975)
1975년 1월에 <태양을 닮은 소녀>, 2월에 <다이알 112를 돌려라>를 두 번째로 다시 만든 <삼각의 함정>을 개봉했고, 4월 13일에 <삼포가는 길> 편집 중 쓰러졌다. 이 세 편의 여주인공은 모두 문숙이었다. <삼포가는 길>은 감독 사후인 5월 23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했다. 실험성과 신파성, 진부함과 새로움이 섞여 있었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이만희의 깊고 따스한 시선이 주는 감동만큼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제 생각으로는 이만희 감독 본인이 그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마 알고 있었을 겁니다. 자기 건강을 자신만큼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영화를 보면요, 특유의 이만희 감독의 실험성 같은 것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기력이 다한 왕년의 마라톤 선수가 사력을 다해 억지로 달려가려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보여지잖아요.”
- 시나리오 작가 백결
“당신은 포탄 속을 묵묵히 포복하는 병사들 편이었고 좌절을 알면서도 인간의 길을 가는 연인들 편이었고 그리고 폭력이 미워 강한 힘을 길러야 했던 젊은이의 편이었다”
- 이만희의 묘비명
이만희 감독 필모그래피(51편)
<주마등>(1961)
<불효자>(1961)
<살아있는 그날까지>(1962)
<다이알 112를 돌려라>(1962)
<한석봉>(1963)
<YMS 504의 수병>(1963)
<열두냥짜리 인생>(1963)
<돌아보지 마라>(1963)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검은 머리>(1964)
<마의 계단>(1964)
<내가 설땅은 어디냐>(1964)
<묘향비곡>(1964)
<추격자>(1964)
<협박자>(1964)
<7인의 여포로>(1965)
<시장>(1965)
<흑맥>(1965)
<흑룡강>(1965)
<군번없는 용사>(1966)
<만추>(1966)
<물레방아>(1966)
<잊을 수 없는 연인>(1966)
<얼룩무늬의 사나이>(1967)
<귀로>(1967)
<원점>(1967)
<삼각의 공포>(1967)
<냉과 열>(1967)
<사기한 미스터 허>(1967)
<방콕의 하리마오>(1967)
<기적>(1967)
<싸리골의 신화>(1967)
<망각>(1967)
<외출>(1968)
<여로>(1968)
<창공에 산다>(1968)
<휴일>(1968)
<여자가 고백할 때>(1969)
<암살자>(1969)
<여섯개의 그림자>(1969)
<생명>(1969)
<고보이 강의 다리>(1970)
<쇠사슬을 끊어라>(1971)
<04:00 -1950->(1972)
<0시(영시)>(1972)
<일본해적>(1972)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삼각의 함정>(1974)
<청녀>(1974)
<태양닮은 소녀>(1974)
<삼포가는 길>(1975)
Curator—Cho Jun-Hyoung, Korean Film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