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녀>와 김기영의 유령
“하나의 유령이 한국영화 위를 떠돌고 있다. 김기영이라는 유령이. 이것은 한국영화계에서 드물게 만나는 영화 유산의 자의식이자 특정한 시대정신의 발현이다.”
- 이연호
2010년, 두 <하녀>가 극장에서 개봉했다. 하나는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의 디지털 복원본이고, 다른 하나는 임상수 감독의 리메이크작 <하녀>다. 김기영 감독이 한국영화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유효하다. 임상수뿐만 아니라, 봉준호(<설국열차>), 박찬욱(<스토커>) 감독은 평소 김기영에게 깊은 애정과 존경을 바치는데 주저하지 않으며, 그들의 영화 속에서 김기영의 기운이 서려있는 순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비평가들은 김기영을 꼭지점으로 하는 ‘상상의 계보’가 ‘그의 유령’과 함께 한국영화계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경이적이다. 김기영이라는 진정한 영상작가를 발견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을 통해 완전히 예측불가능한 예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장 미셀 프루동, 카이에 뒤 시네마 전 편집장
김기영에 대한 관심은 국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국내외 회고전에서 활발하게 재조명되던 <하녀>는 2008년 마틴 스콜세지의 세계영화재단(WCF)에서 디지털 복원 지원을 받게 된다. 이것은 제3세계 영화에 국한해 지원한다는 기존 방침과 어긋나는 것이었지만, 스콜세지는 “<하녀>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으로 이 영화의 지원을 결정했다.” 그 도움에 힘입어 한국영상자료원은 2010년 <하녀>를 디지털 복원했다.
2. 김기영 감독에 대한 기억
“김기영 감독님은 괴물이다. 우선 용모부터가 그렇다. 그는 큰 6척의 키와 거구의 몸체, 평생 감지 않은 부수수한 머리..(중략).., 부릅 뜬 가재 눈, 그리고 늘 경계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타인과 사물을 본다.”
- 유지형
“형식을 싫어하고, 비타협적이었다. 매 순간이 영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평소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의 90%는 다 시나리오에 대한 거였다. 조감독도 거의 두지 않으셨고, 시나리오부터 포스터 제작, 주제곡, 소품, 미술까지 혼자 다하셨다.”
- 김동호, 김기영의 아들
5일 타계한 김기영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는 보기 드문 스타일리스트로 평가받아왔다. 치과의사 출신의 괴짜로 불렸던 그는 신상옥, 유현목 감독과 함께 해방 이후 한국영화계의 3대주자로 손꼽힌다. 특히 자신의 일관된 주제인 “성의 정체성”을 표현주의 화법으로 그려낸 “마성의 미학자”로 주목받았다.
김기영은 60년대 최고 흥행감독이었지만 70년대, 악독한 검열과 통제의 시대 <금병매>의 상영금지와 연이은 흥행실패로 힘든 시기를 겪는다. 그로인해 김기영은 80년대까지 어려운 제작환경 속에서 개인적인 작품 활동을 해나가다, <육식동물>(1984)의 흥행 참패를 끝으로 10년 넘게 한국영화사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90년대 초, 그는 숨겨진 한국 컬트영화의 거장으로 추앙받으며 매니아들 사이 다시 이름이 알려졌고, 97년 부산국제영화제의 회고전을 기점으로 국내·외 큰 관심을 얻게 된다. 하지만 2008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회고전을 앞두고, 새 영화를 준비하던 김기영 감독은 원인불명의 자택 화재로 아내와 함께 사망한다. 향년 79세.
3. 김기영 감독 초기 약사
“선생님이 날 불러서 그렇게 다방면(문학, 연극, 음악, 미술 등)에 재주가 있으니 소학교 선생밖에 못하겠다 그랬다. (웃음) 그런데 영화를 하면서 다 써먹게 된 셈이다. 난 영화를 하면서 예술작품을 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내 영화는 내가 가진 어느 수준의 취미라고 볼 수 있다.”
- 김기영
일본 교토대학 의학부에 유학하며 연극과 영화에 심취했던 김기영은 1945년, 해방 후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대학 연극반을 만든다. 입센, 셰익스피어, 체홉의 희곡을 골라 무대장치도 만들고 연출도 했다. 연극이 전무하던 시절, 김기영의 연극은 높은 호평을 받았으며, 조감독 생활을 거치지 않은 그에게 영화적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피난 가서 부산대학병원에 있을 때 <시집가는 날>로 유명한 극작가 오영진 선배의 권유로 문화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그때 대학병원에서 3천5백 원 받았는데, 미국 공보원의 리버티 뉴스에서는 5만 원을 주었다. 첫 월급 가지고 결혼식도 치르고, 피난 때 모두 굶주리는데 나 혼자 호화판이라 미안하기도 했다”
- 김기영
이 시기 만든 <나는 트럭이다>는 트럭을 의인화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종일 고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전쟁 극복과 경제 복구를 위해 국민들이 앞장설 것을 독려하는 내용이지만, 그 도처에는 김기영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이후 김기영은 몇 편의 문화영화를 만들고, 미 공보원의 후원 아래 첫 장편 <죽엄의 상자>로 데뷔한다.
4. 영화감독 김기영의 작품세계
1) 전쟁 경험을 바탕한 사실주의
“전쟁이 끝난 후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는 인간 군상들이 어떻게 하루 세끼를 먹기 위해 실존하는가?”
- 김기영
그로테스크한 컬트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진 김기영 작품 세계의 한축은 전쟁을 통과하며 목격한, 인간의 생존과 욕망을 집요하게 그려내려는 사실주의에 있다. 이승만의 독재정권 막바지, 김기영은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리얼리티 3부작 ‘<초설> <십대의 반항> <슬픈 목가>’를 만든다. 폐허의 거리에서 부모를 찾는 전쟁고아와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상이군인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전후(戰後) 인간군상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이미지 중심의 다큐멘터리로 묘사한 거리의 장면들이 내가 생각하기에도 압권이었어. (<십대의 반항> 촬영 당시) 실제로 남대문 시장에서 거지소년들에게 “뒤돌아보지 마라”라고 호통을 친 다음에 카메라를 돌려 대었으니까 아주 사실적인 장면이 많았지.”
- 김기영
이후에도 전쟁을 바탕한 사실주의적 문제 제기는 그의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대표작이 <현해탄은 알고 있다>, <여>, <파계>, <수녀> 등이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일본 군인이 조선인 학도병에게 똥 묻은 신발을 핥게 만드는 등 전쟁과 일본 군국주의의 잔혹성을 고발한 작품이다.
<현해탄은 알고있다>(1961)
옴니버스인 <여> 역시 전쟁통에 자식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김기영의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파계>는 “빈 그릇을 비워라”는 화두를 통해, 당시 전쟁으로 인한 개인의 굶주림을 보편적인 문제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2) 인간 욕망의 해부
비에 젖은 반나신의 하녀가 창밖에서 피아노를 치는 안온한 중산층 가정을 들여다본다. <하녀>의 이 섬뜩한 장면은 인간의 본능과 신분상승이라는 욕망 사이 날카로운 불협화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그 공포는 김기영 영화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어진다.
김기영다움. 그것은 초식성과 육식성의 남녀, 성적 욕망의 그로테스크한 파국을 선언적인 문어체 대사와 과장된 미술 안에서 엇박자 리듬으로 그려내는 어떤 기이함을 지칭한다. 김기영의 영화에는 삼각관계에 빠진 남녀의 치정극이 통속적으로 등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동물에 가까운 인간의 본능과 급속히 번성한 부르주아적 욕망의 치졸함이 뒤엉켜 있다.
<양산도>(1955)
“김기영의 영화에는 인습적인 줄거리 틀이 없고 인간의 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황만이 있다. 그는 다분히 실험적이고 편집광적인 태도로 인간의 의식 구조에 집착한다. 김기영은 항상 한국 사회의 한 측면을 과장된 수법으로 그렸지만 이야기가 황당무계하냐 아니냐는 건 따질 필요가 없다. 이야기가 황당하다면 당대의 한국 사회를 황당무계하게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하길종 감독
3) <하녀>의 등장, 반복 그리고 변주
1960년 김기영의 <하녀>가 등장했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기이하고 모던하며, 표현주의적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작품에서 김기영이 강조하는 지점은 의외로 현실성이다.
“좋은 영화에는 항상 플러스 알파로 시대상항이 들어가 있다. <하녀>도 그 시대의 상황이 반영된 영화다. 당시는 전라도, 경상도에서 처녀들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올 때다. 그들의 직업은 창녀, 식모, 버스 차장 세 가지밖에 없었다. 공장이 아직 많지 않을 때였다. 그런 시대를 알지 못하면 이 영화의 현실감을 이해하지 못한다..(중략).. 영화를 보러온 부인들이 가정부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아팠던지 영화를 보며 마구 일어나서 '저년 죽어라'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 김기영
<화녀>(1970) 예고편
<하녀> 역시 신문에 났던 '금촌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다. ‘경제권을 쥔 부인, 무력한 남편, 시골출신의 식모’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캐릭터들이며, 김기영은 이후 시시각각 달라지는 한국 사회와 부르주아 가정의 위기를 <화녀> <화녀82>에서 10년의 시차를 두고 그려낸다.
“<화녀>는 <하녀>이야기를 1970년대에 맞게 다시 만든 영화인데 1980년대에도 <화녀82>를 또 만들었다. 지방업자들의 요구로 만들기도 했지만 난 이 세 편의 영화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영화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인물의 캐릭터이고 시대상황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는 정말 너무나도 급격하게 변화했다. 나중으로 갈수록 문명 비판의 요소가 강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이 시대별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2층 양옥집도 도시 변두리의 양계장으로 바꾼 것이다”
- 김기영
<육식동물>(1984) 예고편
<화녀>가 흥행하자 김기영은 <하녀>를 또 다시 변주한 <충녀>(1972)를 만든다.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하녀>의 기본 구도에, 암컷이 교미 후 수컷을 잡아먹는 자연세계의 질서를 남녀관계에 투영시켰다. 성공한 부인과 첩이 성적,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자를 함께 반씩 나누어 가진다는 충격적인 설정은 <육식동물>(1984)에서 더욱 극단화되어, 남자는 기저귀를 하고 젖병을 물며 유아기로 퇴화된다.
4) 독재정권과 영화법 개정, 불운한 말기
70년대 유신정권시절 영화사는 통폐합되고, 외화 수입 쿼터제는 악용되어 의무편수를 채우기위해 졸속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험난한 시절 속에서 김기영은 <파계>, <육체의 약속>, <이어도>, <금병매>(후에 <반금련>으로 개봉) 등을 만들었다. 폭압적인 검열과 통제 가운데 이청준 원작을 영화화한 <이어도>는 무당이 건져낸 시체와 이화시가 섹스하는 마지막 장면 등이 난도질되었다. 뿐만아니라 중국 에로티시즘의 고전을 김기영식으로 재창조한 <금병매>의 검열 시나리오는 전체에 빨간 엑스 표시가 그어졌고, 제작 후에도 10년간 개봉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김기영의 주제 의식은 진일보한다. 50-60년대 사실주의와 70년대 성적 욕망에 대한 심리, 표현주의적 탐구에서 더 나아가 70년대 후반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환경오염과 같은 생태계의 문제를 영화 속에 가져온다. <이어도>와 <바보사냥>에서 이상향인 낙원으로 가는 것을 가로막고 현실을 위협하는 것은 바로 생태계의 파괴다. 어려운 제작 환경 속에서도 김기영의 질문은 그치지 않는다.
<이어도>(1977) 예고편
5. 김기영 감독만의 스타일과 인장
1) 콘티
김기영 감독은 '콘티 없이는 한 장면도 찍지 못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외화수입 쿼터제로 인한 시한부로 영화를 찍어야했던 시기를 제외하고 그는 즉흥적으로 현장에서 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 그의 독특한 영화세계는 이미 콘티에서 시작된다.
“난 촬영을 하기 4~5일 전쯤에 콘티가 나와야 해. 그걸 내 식으로 수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업을 다시 하곤 하지. 그러나 지금도 그렇듯 내 콘티는 나만 아는 부호의 암호로 기록되어 있어. 거기다 난 지독히 악필이라 사람들은 내 필체를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필체라고 해. 다른 사람들이 결코 못 알아보지. 단지 커트마다 삽화를 그리고 있는데 그것도 철저하게 날 위해하는 작업이야. 난 내 콘티를 다른 사람이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 특히 배우들의 경우인데 그들에게 콘티를 보여주면 콘티대로 연기하지 않고 제 딴에 계산을 해 딴 짓을 하거든. ”
- 김기영
김기영의 콘티에는 감독이 직접 그린 영화 소품들과 집의 구조, 그리고 장면 속 인물들의 감정표현까지 아주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장면 옆에는 그것을 시각화하거나 방점을 설명하는 감독의 해설까지 덧붙여진다. 이 치밀하고 세부적인 콘티는 오직 김기영 본인만을 위한 영화의 설계도였으며 이 안에는 김기영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2) 음영과 색채의 설계
김기영은 1955년작 <주검의 상자>를 만들면서 아무리 해도 원하는 '무드'가 나오지 않자, 고민 끝에 일본에서 수학한 사진사를 찾아가 조명을 배웠다.
“그때부터 조명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직접 설계하고 고민해왔다. <하녀>를 보면 알겠지만 사람과 배경의 조명 비례가 특수하게 처리되어 있다. 전체가 세트 촬영이었기 때문에 조명으로 맘껏 통제한 것이다. 그 당시 이렇게 아름다운 화면은 처음 보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조명의 비결은 반사광선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 김기영
이후 그는 흑백영화의 짙은 음영뿐만 아니라 컬러영화에서도 조명과 촬영을 연구하며 김기영식의 독특한 색채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화녀>, <파계>, <이어도> 등을 함께한 정일성 촬영감독은 김기영 영화에서 심리적인 색채와 빛을 만들어낸 그의 가장 긴밀한 조력자였다. 마땅한 필터가 없어, 수십 병의 맥주병을 깨뜨리며 카메라 앞에 대고 찍어보기도 하고, 몇 번이나 세트의 배경색을 지우고 칠하며 밤을 세우기도 했다.
“조명은 그저 빛이 아니라 시대상황을 만들 수 있고, 그 시대의 분위기와 영화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는 분야이다..(중략)..실제 배경은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조명으로 개성을 발휘할 수 있다”
- 김기영
조명과 색채를 통해 시대에 대한 발언을 하고자 했던 김기영의 소신은 다음의 정일성 촬영감독의 증언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파계>나 <이어도>는 묵화처럼 색깔을 빼달라고 해서 분리작업을 했는데 그것은 유신말기의 분위기와 관련이 깊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살아오면서 그는 자주 '언제고 세월이 좋으면 진짜 총천연색으로 하자. 우리가 1970년대에 쓴 선명한 색깔은 저항의 색채였다'고 말하곤 했다.”
- 정일성
3) 김기영의 쥐
김기영은 세트와 소도구를 직접 제작하고 배치하는 등 영화미술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에서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중요한 소품은 바로 '쥐'다. 하녀의 등장 이전 쥐는 가족을 악몽에 빠뜨리는 중요한 복선이며, 김기영은 <하녀>를 변주해나가며 연이어 쥐를 영화 속 주요한 소도구로 등장시킨다. 처음에는 단지 한 두 마리의 불청객이었지만, <충녀>에는 애완쥐가 등장하고, 천장에서 쥐떼가 여주인공 위로 쏟아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가 죽기 직전 준비하던 <악녀>에는 쥐만두가 등장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쥐는 생식본능이 대단한 짐승이야. 쥐들에게는 강한 섹스 본능이 감춰져있지. 닭도 마찬가지야. 닭은 매일 알을 낳잖아 알이 뭐야? 바로 생식본능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쥐와 닭은 언제나 사람들 근처에 있어. .. (왜 쥐를 혐오대상으로 특히 강조했냐는 질문에) 이 집에 쥐 같은 혐오 대상이 또 하나 있지 바로 하녀야.”
- 김기영
“쥐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아버님 영화에는 쥐가 많이 등장하는데, 사실 <화녀>에 나오는 쥐는 영화에 출연시키기 위해 집에서 사육하고 훈련까지 시켰다. (웃음) 처음에는 하얀 쥐를 열댓 마리 갖고 왔는데, 촬영 때는 흰 쥐를 까맣게 칠해서 썼다. 문제는 촬영이 끝나고 나서였다. 쥐들이 번식을 해서 수백 마리가 됐고, 잘 때 이불 속에 들어와 있기도 했다. 쥐를 잡으려고 고양이도 몇 마리 키우고, 하여튼 몇 년을 고생했다."
- 김동원, 김기영의 아들
4) 김기영의 여배우들
김기영은 신인을 발굴하는 안목이 대단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문희와 김지미 역시 그의 영화에서 데뷔했다. 그리고 김기영 영화의 페르소나가 되는 <하녀>의 이은심, <화녀>와 <충녀>의 윤여정, <이어도>와 <반금련>의 이화시역시 김기영이 발굴한 여배우들이다. 거의 김기영의 작품에만 출연한 그녀들의 개성강한 면모는 특유의 김기영스러움을 만들어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당시 관능적인 퇴폐미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이화시는 오직 김기영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얼굴이다.
“<이어도>를 봐서 알겠지만, 감독님은 어여쁘게 나오는 걸 싫어해서 나는 영화에서 항상 이상하게 칼을 갈아야 하거나 기괴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도 기회가 되면 그보다 더 강한 역할을 하고 싶다.”
- 이화시
“나는 지금도 얼굴이 예쁘거나 잘생긴 배우를 선호하지 않는 감독이야. 촬영장에서 예쁜 얼굴에도 어둡게 조명을 하여 배우의 잘생긴 모습을 망쳐놓지. 그것은 겉의 연기보다 내면의 연기에 치중하려는 나의 연출의도 때문이야.”
- 김기영
6. 영화광의 유작, <악녀>
김기영은 죽기 직전까지 <악녀>의 시나리오를 탈고 하며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녀>의 새로운 연작인 이 작품은 1970년대 서울로 올라온 시골 처녀가 빈민가의 산부인과에 취업하면서 병원장 부부와 욕망의 삼각관계를 벌이는 내용이다. 김기영 식의 괴기스러움과 기이함이 가장 극대화된 <악녀>의 결말은 의외로 해피엔딩이다. 이것은 김기영 스스로 “반전을 통해 김기영 식의 새로운 컬트영화”가 될 것이라고 자부한 작품이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김기영 감독은 세상을 떠나고, <악녀>는 끝내 영화화되지 못한 채 미완의 유작으로 남겨졌다.
“난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데만 돈을 들였지 술 마시거나 노는 데 관심이 없었다. 먹는 것도 아껴가면서 영화에만 신경 써왔다. 우리 집사람도 그런 삶을 좋아했다. 시사회에서 자막이 올라가면 눈물이 쏟아진다고 한다. 제작비 조달에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다. 난 돈에 대해 하나도 모르니까..(중략)..그렇지만 내 타율이 3할 정도는 된다. 세 편 중 하나는 성공했으니까 성공률이 높은 편이었다. 그걸로 버텨온 셈이다..(중략).. 신한영화사를 운영할 때는 25억 정도가 부도나서 큰 고생을 했다. 그때 빚을 안 갚았으면 지금도 부자일 텐데 말년에 영화제작을 못하는 것이 그때 돈을 다 날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산 것에 후회는 없다.”
- 김기영
참고문헌
・ <감독들, 김기영을 말하다> 포럼 지상중계, 씨네21, 2007,01,22 일자
・ <‘김기영 유령’을 보다>, 이연호, 씨네21, 2010.6.8일자
・ “성-표현주의 영상의 거목”, 경향신문, 1998.02.06일자
・ 김기영 감독 인터뷰집 「24년간의 대화」, 대담 유지형, 선, 2006
・ 하녀들 봉기하다, 이효인 저, 하늘아래, 2002
・ 전설의 낙인, 이연호 저, 한국영상자료원, 2007
Curator—Lee Jiyoung, Korean Film Archive